공중 속의 내 정원 문학과지성 시인선 247
박라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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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전을 벌이는 듯한 현대소설의 세계와는 달리 현대시의 세계는 어떤 원형적 공간을 계속 맴도는 듯한 인상을 준다. 시 특유의 그 기동성으로 말미암아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가장 먼저 포착할 수 있는 장르였던 기억이 선명한데, 이제 시는 현대성과의 본격적인 접점을 형성해가며 시대적 실존의 문제를 포착하기에는 너무나 지쳐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시는 그 나름의 방식을 통해 현대성의 문제를 맥락화하지만, 소설과는 달리 현대성의 지표들을 예시하는 시대적 사물보다는 바람, 별, 꽃같은 원형적 사물들을 주로 다룬다. 그래서 흔히 소재라고 지칭되는 것만을 놓고 해당 시의 시대성을 가늠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처럼 하루가 멀게 급격히 인식론적 지도를 변화하는 광폭한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더 이상 시는 그것과의 고투에 애를 쓰기보다는 시 고유의 영역에서 시적 후광 뿜어내기에 애쓰고 있는 듯하다.

박라연의 시는 그 연륜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작 경력이 그와 맞먹는 시인들에 비해 한층 깊고 절실한 울림을 가져다주는 게 특징이다. 현대를 시인으로 살면서 갖가지 삶의 경험을 거치게 마련인데, 시인은 그것에 경험적 차원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그의 삶은 시적인 구성의 의지로 표백되고 걸러져 깊은 맥락을 제공한다. <공중 속의 내 정원>에 담긴 시들도 시적 세계 그 자체로만 놓고볼 때 여타의 시들이 보여주는 세계가 그닥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비슷한 삶의 인식에 다가가면서도 그 과정은 사뭇 다르다. 삶의 욕망과 죽음의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길항작용을 느끼며 사는 현대인의 의식을 부조하면서 박라연은 단순히 자연의 사물들과의 감정 이입을 통하는 일차원적 방식을 벗어나 사물들을 주체로 세우거나 그 사물들이 마련한 세계에 화자의 의식을 하나의 개체로 끌어들임으로써 전도된 구성틀을 가지고 작업한다. 따라서 시에 대한 전통적 형태가 시적 화자를 강한 주체로 설정하고 외부 대상을 그 주체의 의식이나 욕망을 표백하는 하나의 스크린화한다면, 박라연은 그 자신을 객체를 위한 스크린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박라연의 시는 범상한 시들을 대할 때와는 달리 어딘지 모르는 부자연스러움의 세계를 펼쳐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은 현대인의 영혼의 병이 근본적으로 주체로서 겪는 장애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영혼의 병을 치유하는 색다른 방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시에 있어 현대성이나 동시대성은 결코 그 소재적 차원에서 확보될 수 없다. 시는 분명 하나의 원형적 공간이자 무시간적 정지 상태를 창조하는 매개자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공간을 창조하는 시적 방법의 새로움, 적절성만이 시의 현대성을 담보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박라연의 시는 천편일률적인 시세계에 작은 틈을 내면 한 편의 시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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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 한길컬처북스 23
바트 무어-길버트 지음, 이경원 옮김 / 한길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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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주의 비평과 이론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로부터 정치적 해방을 달성한 국가의 지식인이나 미국의 학계 내 이민 지식인들에 의해 형성되어왔다. 서구에 의해 타자로 규정되어 정체성의 혼란을 막심하게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아프리카나 카리브해 흑인들의 자기 정체성 찾기의 일환으로 서구의 지배적 담론 규칙을 부정하며 서구의 지배 서사의 권력성을 비판하는 탈식민주의 담론은 어느새 우리에게도 그다지 낯설지 않은 하나의 담론 현상으로 정착되었다. 90년대 초부터 학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담론이라는 틀로 제기되어온 탈식민주의 담론은 그 지향이나 의도, 그리고 여타 담론과의 관계에 있어 새로운 측면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계급 편향으로 설정되어 온 기존의 담론 구역내에 다양한 규정 인자들이 순식간에 틀입함으로써 새로운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거 식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민족주의 편향으로 해석해온 근현대사를 재해석하고자 하는 광범위한 학적 관심을 유발했다는 점, 그리고 비단 역사나 문학이라는 제한된 영역이 아니라 학제적 연구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다. 이는 물론 90년대 들어 불기 시작한 근대성 담론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맥락과 연계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식민주의의 문제의식을 대중들이 선명하게 포착하기에는 우리의 지식 구조는 매우 지체적이어서 탈식민주의의 정점에 놓인 사이드의 저서를 제외하고는 그 이전의 탈식민주의 비평 담론이나 이후의 스피박이나 바바의 저서들은 원서가 아니면 구할 수 없는 실정이다. 물론 이런 사정의 전후에는 흑인의 글쓰기에 대한 편견이나 해체주의 이후 서구 담론에 대한 경계심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나, 탈식민주의를 유행을 타는 인기있는 고급담론쯤으로 치부하고 무시해도 좋은 것으로 이해하려는 현 시점의 풍토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같다. 물론 하나의 유행상품처럼 취급되는 것은 극도로 경계해야 하겠지만,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면 담론의 국적을 따지면서 배척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개론의 이점이라면 무엇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물망을 풀어줄 실마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이며, 갈피를 잡지 못한 등산객에게 숲의 지형도를 마련해준다는 점이다. 탈식민주의에 대한 개론서인 이 책은 이런 개론의 가치를 충분히 보증한다는 느낌을 준다. 탈식민주의는 단일한 지향과 방법론을 가진 단일 이론이 아니라 입장에 따라 다양한 방법론과 지향을 가진 복합적 산물임을 알 수 있게 해주며, 읽는 이의 관심사에 따라 향후 더 궁구해볼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번역서답지 않게 우리 말의 어법을 비교적 훌륭히 살려낸 번역이야말로 이 책이 무난히 읽힐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물론 원저자의 균형감 있고, 때로는 신랄한 비평적 언급도 읽는 이의 감식안을 계발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물론 개론에는 개론 나름의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 개론을 읽고 만족하는 일은 우습다. 차후 다양한 탈식민주의 관련 서적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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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시선 204
장석남 지음 / 창비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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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세고 파편적인 이미지들과 대립적이고 분열적인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격렬한 사회학적 상상력의 산물로서 시를 대하던 시대는 이제 멀찍한 곳 너머로 사라졌다. 이제 그 자리에는 역사와 전망이 거세된 시들이 들어앉아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에 대해 비통해하거나 고뇌하는 사람은 없다. 한때 격류처럼 흘러가던 물이 이제는 드넓은 하류에 도달해 더 이상 굽이칠 일도, 몸을 거침없이 뒤섞으며 아파할 일도 없어졌다. 그것은 돌이켜보면 참 기이한 일이다. 용량이 정해진 하드디스크를 주기적으로 비우듯이 우리의 하드디스크는 몇 번이나 지워져 이제 데이터복구 프로그램을 돌리지 않으면 그 희미한 기억마저도 가물가물해질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런 사태 앞에 놓인 우리는 이제 거친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좀 더 부드럽고 속으로 가져가며 안으로 깊어지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듯하다.

장석남의 시를 읽는다. 정석남의 시를 읽든 그 누구의 시를 읽든 이제 시인의 이름 석자는 해당 시인들의 시적 경향을 변별하는 기호로 그다지 큰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정석남이 아닌 그 누구의 시라 할지라도 큰 의미는 없다. 다만 시라는 것을 읽는 행위 그 자체만이 그 외의 행위가 변별성을 가지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 그것은 기나긴 역사를 뒤적거려볼 때 가장 최근 들어 빚어진 특이한 일이다. 다 합쳐봐야 단편소설 한 편 분량밖에 되질 않는 말들을 가지고 세상의 심오한 비의를 드러낼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 지극히 사사로운 경험틀 내에서 시적 주관으로 걸러진 단편화된 세계와의 교섭 상황을 언어로 담아내는데 시의 자리가 할당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시는 시로서 받아들여지고, 시인은 관행처럼 가장 사사로운 감각에 언어를 던져버리고, 묻고, 그것들이 하나의 묶음으로, 시인의 하드디스크를 채워버릴 때 한 권의 시집으로 청소해버린다. 시인의 분비물은 역설적으로 시인의 양식이 되고, 그 분비물은 그 아닌 타자에게 건네질 때 가장 찬란한 생성의 질료가 된다. 그것이 시인의 시인된 영광이자, 시가 살아가며 또 새로운 시를 잉태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원형적 시의 웅덩이가 깊고 넓을수록 그곳에서는 진액을 고이 간직한 시들이 탄생하며, 때로 다른 웅덩이에서 탄생한 시들과 교접하여 돌연변이 형질을 획득한다.

그러나 시가 근친상간적 금기를 버릴 때 시는 자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것은 원형질의 웅덩이에서 태어난 시들의 근친교배에 다름 아니다. 장석남의 시든 누구의 시든 그런 욕망을 발견하게 될 때 시는 자멸하는 언어, 죽음을 그 안에 품고 있는 언어가 되고 만다. 이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을 읽으며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도 이것이다. 그의 시는 부드럽고 여리고 가늘다. 그의 시는 원형의 공간 주변을 맴돈다. 그의 시는 타자와의 교섭을 벗어난 세계에 존재한다. 물론 그의 시에 미덕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정석남의 세계는 정적이고 식물적이다. 속도와 감각의 시대에 그의 시는 영혼의 치유제 역할을 할 수 있고, 그것의 그의 몫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대 감각과의 적절한 접점을 찾지 못할 때 시는 오히려 현실 위에 올려진 한 겹의 또 다른 부담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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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매춘과 페미니즘, 새로운 담론을 위하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1
이성숙 지음 / 책세상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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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가 매매춘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기존의 매매춘 관련 페미니즘 담론은 매춘 여성의 현실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매매춘 추방 운동은 매춘 여성의 인권을 사각지대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와 아울러 서구 역사를 훑으면서 매매춘의 근절 불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런 지적은 적어도 생소한 것은 아니다. 그 대안으로 매매춘과 매춘 여성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것을 제안한다. 이것만이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라는 것이다. 이런 대안을 내놓는다고 해서 저자가 궁극적으로 매매춘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는 기존의 페미니즘 담론이 육체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기독교주의적 억압, 가부장주의적 억압의 틀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육체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자고 하는 것이다. 그런 시각을 만인이 공유하게 될 때 매춘은 인간 본성의 필연적 욕구 배출의 통로로서 인정되고, 그 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보통 임금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노동을 파는 건전한 임금 노동자로서 지위가 부상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기존의 매춘 관련 페미니즘 담론의 다양한 조류를 비판하고, 서구 역사의 경험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비판적 의욕과 패러다임 변화에 대한 과도한 욕망은 다소 도식화된 시각적 틀의 제시만으로 그치기 십상이다. 매춘 문제와 관련해 저자는 우리에게 시각을 바꾸라고만 한다. 그러나 매춘 문제는 우리의 일상적 생활 경험과 동떨어진 추상 수준의 문제가 절대로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해결이 쉽지 않은 것이다. 저자의 논의처럼 매매춘과 매춘 여성을 긍정하는 시각을 가지기 위해 무엇이 요구되는가. 물론 이것은 저자나 개인적으로 마음을 먹은 몇 사람의 변화가 아닌 전사회적인 분위기의 변화를 요구하는 문제이다. 또 이 문제는 특정한 대상을 대하는 시각이나 가치관의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일반적 수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이 저자의 주장처럼 토대의 변화나 제도상의 변화를 매개하지 않은 추상적 선언 차원의 담론으로 가능한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추상적 담론 수준에서 제기하는 시각의 전환이란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도덕주의적 호소가 아닐까? 정신과 지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가 이제 그 대칭항으로 변하는 것, 그런 변화를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저저가 추상적으로나마 공상하는 미래 사회의 어느 가정의 모습을 한번 그려보자. 남편은 아내와의 관계가 만족스럽지 않아 아내의 욕망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 관계를 맺지 않으며, 바로 옆 건물의 매춘 타운 208호실의 A라는 젊은 아가씨를 매일 찾는다. 아내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곧 관계를 청산할 생각이다. 또 아들이 불의의 교통 사고로 성불구자가 되자 며느리는 남편의 성불구를 이유로 떠나가고 아들은 매춘 여성과의 관계도 불가능해진 자신의 처지에 깊은 좌절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수능시험을 마친 딸은 정부의 고급 관리나 전문 경영인을 주로 상대하는 고급 매춘 여성이 되기 위해 모대학 성산업대학 고급매춘여성학과에 지원한 상태이다.

이것은 가상에 불과하지만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불가능한 세상도 아니다. 그러나 저자의 논의는 가능성 있는 우려와 불안, 의혹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 되지 않고 있고, 추상적 담론을 지지해줄 토대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현재 객관적으로 존재할 매춘 여성의 고통과는 무관한 지적 담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저자의 주장은 기존의 지배적인 페미니즘 주장과는 달라 숙고해볼 점이 없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그 주장 역시 이 책의 독자에게는 무력감만 심어줄 뿐이다. 매춘이 가부장제적 권력관계와 섹슈얼리티와 육체에 대한 기독교주의적 억압 그 양자와 연관된 고리라고 할 때, 매춘 여성에 대한 시각의 전환을 주장하는 저자의 시각은 매춘 여성을 자신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담론적 시헤자의 모습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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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다는 것 창비시선 205
나희덕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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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는 어려워서 못 읽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시 읽기의 어려움이란 딴 데 있지 않다. 시쓰기란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주조하고 그 이미지들이 병치됨으로써 하나의 문학적 공간을 탄생시키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그 이미지들을 주조하는 언어나 화법은 대개 소설이나 일반적인 글에서 보게 되는 명료한 구문을 벗어난 분절적이며 파편화된 어구들이 병첩되거나 때로는 기괴한 약호나 기호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 기호들의 해독에 시 읽기의 참 묘미가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독자들은 시를 통해서 자신이 처한 외적 현실을 한발짝 떨어진 견지에서 바라보며 삶의 위안을 찾고자 한다. 따라서 시인의 주관성이 지나치게 강조된 화법은 오히려 독자들의 시 읽기의 즐거움을 해치게 된다. 물론 흔히 난해시라고 분류될 수 있는 시들의 존재 의의를 평범한 독자라 하더라도 깡그리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갈수록 고립화된 담안으로의 행보를 계속하며 상호 소외의 길을 걷는 작금의 시의 실상은 적어도 대중의 감각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 자기를 놓을 줄 모르는 유미적 유폐자의 모습이 아닐지 반성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시인도 시를 떠나서는 그네들의 독서 대중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고, 그 역시 시를 통해 삶의 구원을 찾는 또다른 생활인이 아니던가.

그런 측면에서 나희덕의 시는 적어도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요소를 갖춘 대중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그녀의 화법은 분절적이지 않으며 우리 말의 화법을 따르면서도 깔끔한 맛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읽기에 편하다. 읽히지 않는 시란 달리 말하자면 읽을 수 없도록 쓰여진 시인 셈이다. 시인 스스로 자기만의 성을 쌓는다는 건 그 나름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빚어지는 오만의 산물이라면 눈치 있는 독서 대중은 그의 전략에 비웃음을 던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나희덕의 시는 애초 그런 전략 자체에서 거리가 멀다. 그리고 나희덕 시의 또 다른 미덕은 자신의 바라보며 귀기울이는 대상에 자기 자신을 던져놓고 멀찍이서 그 자신의 대상화해서 바라볼 줄 아는 반성적 사유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시의 핵심에는 그 자신의 삶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형태는 격렬하지 않고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날픈 듯하지만 그 만큼의 무게로 역설적 울림을 가지고 있다. 이 시집 곳곳에 등장하는 시들에는 그 힘겨운 날갯짓의 편린들이 엿보이는데, 이것은 우리가 삶을 대하는 가장 보편적인 시선이기 때문에 그 정서적 공감대는 폭넓은 편이다. 우리는 삶에 대해 그다지 격렬해질 수는 없다. 때때로 그런 순간들이 있기는 하지만 보통은 나희덕의 시적 화자처럼 삶의 미세한 결을 따라가면서 그 곳에서 언뜻 내비치는 의미를 잡으려고 몸부림치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반성적 사유는 시에 있어 필수 요소라 하겠지만, 이것이 반복된다면 그것 또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반성적 사유 그 자체가 견고한 핵심에 존재하면서도 그 반성적 사유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관습이나 형식적 한계로 자신을 얽어맨다고 느낄 때 그 틀을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적어도 독자의 주목과 인정을 받는 시인이라면 앞으로의 한 걸음에 대해서 항시 고민하게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나희덕에게 있어 이 시집은 그가 넘고 있는 산의 정상 바로 아래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정상은 코앞이고 그는 이제 다른 목표를 정해 하산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의 하산이란 등산의 대칭적 운동이 아니라 새로운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어떤 길을 향해 어떤 행로를 밟을지 지켜보는 건 시 읽기의 큰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시적 언어는 미지의 세계로의 열림 바로 그 자체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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