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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ㅣ 창비시선 204
장석남 지음 / 창비 / 2001년 2월
평점 :
억세고 파편적인 이미지들과 대립적이고 분열적인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격렬한 사회학적 상상력의 산물로서 시를 대하던 시대는 이제 멀찍한 곳 너머로 사라졌다. 이제 그 자리에는 역사와 전망이 거세된 시들이 들어앉아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에 대해 비통해하거나 고뇌하는 사람은 없다. 한때 격류처럼 흘러가던 물이 이제는 드넓은 하류에 도달해 더 이상 굽이칠 일도, 몸을 거침없이 뒤섞으며 아파할 일도 없어졌다. 그것은 돌이켜보면 참 기이한 일이다. 용량이 정해진 하드디스크를 주기적으로 비우듯이 우리의 하드디스크는 몇 번이나 지워져 이제 데이터복구 프로그램을 돌리지 않으면 그 희미한 기억마저도 가물가물해질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런 사태 앞에 놓인 우리는 이제 거친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좀 더 부드럽고 속으로 가져가며 안으로 깊어지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듯하다.
장석남의 시를 읽는다. 정석남의 시를 읽든 그 누구의 시를 읽든 이제 시인의 이름 석자는 해당 시인들의 시적 경향을 변별하는 기호로 그다지 큰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정석남이 아닌 그 누구의 시라 할지라도 큰 의미는 없다. 다만 시라는 것을 읽는 행위 그 자체만이 그 외의 행위가 변별성을 가지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 그것은 기나긴 역사를 뒤적거려볼 때 가장 최근 들어 빚어진 특이한 일이다. 다 합쳐봐야 단편소설 한 편 분량밖에 되질 않는 말들을 가지고 세상의 심오한 비의를 드러낼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 지극히 사사로운 경험틀 내에서 시적 주관으로 걸러진 단편화된 세계와의 교섭 상황을 언어로 담아내는데 시의 자리가 할당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시는 시로서 받아들여지고, 시인은 관행처럼 가장 사사로운 감각에 언어를 던져버리고, 묻고, 그것들이 하나의 묶음으로, 시인의 하드디스크를 채워버릴 때 한 권의 시집으로 청소해버린다. 시인의 분비물은 역설적으로 시인의 양식이 되고, 그 분비물은 그 아닌 타자에게 건네질 때 가장 찬란한 생성의 질료가 된다. 그것이 시인의 시인된 영광이자, 시가 살아가며 또 새로운 시를 잉태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원형적 시의 웅덩이가 깊고 넓을수록 그곳에서는 진액을 고이 간직한 시들이 탄생하며, 때로 다른 웅덩이에서 탄생한 시들과 교접하여 돌연변이 형질을 획득한다.
그러나 시가 근친상간적 금기를 버릴 때 시는 자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것은 원형질의 웅덩이에서 태어난 시들의 근친교배에 다름 아니다. 장석남의 시든 누구의 시든 그런 욕망을 발견하게 될 때 시는 자멸하는 언어, 죽음을 그 안에 품고 있는 언어가 되고 만다. 이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을 읽으며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도 이것이다. 그의 시는 부드럽고 여리고 가늘다. 그의 시는 원형의 공간 주변을 맴돈다. 그의 시는 타자와의 교섭을 벗어난 세계에 존재한다. 물론 그의 시에 미덕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정석남의 세계는 정적이고 식물적이다. 속도와 감각의 시대에 그의 시는 영혼의 치유제 역할을 할 수 있고, 그것의 그의 몫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대 감각과의 적절한 접점을 찾지 못할 때 시는 오히려 현실 위에 올려진 한 겹의 또 다른 부담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