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워진다는 것 창비시선 205
나희덕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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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는 어려워서 못 읽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시 읽기의 어려움이란 딴 데 있지 않다. 시쓰기란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주조하고 그 이미지들이 병치됨으로써 하나의 문학적 공간을 탄생시키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그 이미지들을 주조하는 언어나 화법은 대개 소설이나 일반적인 글에서 보게 되는 명료한 구문을 벗어난 분절적이며 파편화된 어구들이 병첩되거나 때로는 기괴한 약호나 기호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 기호들의 해독에 시 읽기의 참 묘미가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독자들은 시를 통해서 자신이 처한 외적 현실을 한발짝 떨어진 견지에서 바라보며 삶의 위안을 찾고자 한다. 따라서 시인의 주관성이 지나치게 강조된 화법은 오히려 독자들의 시 읽기의 즐거움을 해치게 된다. 물론 흔히 난해시라고 분류될 수 있는 시들의 존재 의의를 평범한 독자라 하더라도 깡그리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갈수록 고립화된 담안으로의 행보를 계속하며 상호 소외의 길을 걷는 작금의 시의 실상은 적어도 대중의 감각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 자기를 놓을 줄 모르는 유미적 유폐자의 모습이 아닐지 반성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시인도 시를 떠나서는 그네들의 독서 대중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고, 그 역시 시를 통해 삶의 구원을 찾는 또다른 생활인이 아니던가.

그런 측면에서 나희덕의 시는 적어도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요소를 갖춘 대중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그녀의 화법은 분절적이지 않으며 우리 말의 화법을 따르면서도 깔끔한 맛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읽기에 편하다. 읽히지 않는 시란 달리 말하자면 읽을 수 없도록 쓰여진 시인 셈이다. 시인 스스로 자기만의 성을 쌓는다는 건 그 나름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빚어지는 오만의 산물이라면 눈치 있는 독서 대중은 그의 전략에 비웃음을 던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나희덕의 시는 애초 그런 전략 자체에서 거리가 멀다. 그리고 나희덕 시의 또 다른 미덕은 자신의 바라보며 귀기울이는 대상에 자기 자신을 던져놓고 멀찍이서 그 자신의 대상화해서 바라볼 줄 아는 반성적 사유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시의 핵심에는 그 자신의 삶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형태는 격렬하지 않고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날픈 듯하지만 그 만큼의 무게로 역설적 울림을 가지고 있다. 이 시집 곳곳에 등장하는 시들에는 그 힘겨운 날갯짓의 편린들이 엿보이는데, 이것은 우리가 삶을 대하는 가장 보편적인 시선이기 때문에 그 정서적 공감대는 폭넓은 편이다. 우리는 삶에 대해 그다지 격렬해질 수는 없다. 때때로 그런 순간들이 있기는 하지만 보통은 나희덕의 시적 화자처럼 삶의 미세한 결을 따라가면서 그 곳에서 언뜻 내비치는 의미를 잡으려고 몸부림치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반성적 사유는 시에 있어 필수 요소라 하겠지만, 이것이 반복된다면 그것 또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반성적 사유 그 자체가 견고한 핵심에 존재하면서도 그 반성적 사유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관습이나 형식적 한계로 자신을 얽어맨다고 느낄 때 그 틀을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적어도 독자의 주목과 인정을 받는 시인이라면 앞으로의 한 걸음에 대해서 항시 고민하게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나희덕에게 있어 이 시집은 그가 넘고 있는 산의 정상 바로 아래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정상은 코앞이고 그는 이제 다른 목표를 정해 하산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의 하산이란 등산의 대칭적 운동이 아니라 새로운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어떤 길을 향해 어떤 행로를 밟을지 지켜보는 건 시 읽기의 큰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시적 언어는 미지의 세계로의 열림 바로 그 자체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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