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박태원 소설집
박태원 지음 / 깊은샘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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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계급이라는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작가를 얽어매던 30년대, 시대적 분위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던 작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박태원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동경 유학까지 한 지식인으로서 일본적 근대를 넘어설 무기를 발견하기 위해 일본행을 택했던 여타의 지식인들과는 판이한 세계를 가진, 그 시절로 보면 참으로 행복한 처지에 있었던 작가임에 분명하다. 다만 동경 유학 출신임에도 정작 본국에서는 고학력 실업자와 다름없는 처지에 놓였던 것만이 그의 유일한 불행이랄까.

작가라는 레테르를 달고서 초기 근대의 면모를 갖춘 도시 경성을 마냥 정처 없이 헤매 다니면서 창작의 재료를 건져 올리고, 거대한 사상의 자기화보다는 문장과 기교에 끝없는 목마름을 가졌던 박태원의 작품들이 90년대 들어서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대학생들까지도 그의 이름이나 작품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것은 단순한 과거의 재인식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언과 함께 찾아온 공백이 만들어 낸 새로운 욕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개 미혼 실업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주인공의 현실을 자조하거나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고통받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연민을 내보이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나 <천변풍경> 외의 다른 작품들은 넓게 보면 이 두 작품들의 사소한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박태원에게 그 전대의 문학 거장들이 선보인 사상과 개성의 드라마, 작가의 인간적 풍경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점이라 하겠지만, 박태원이 우리에게 값있는 문학으로 다가오는 것 역시 이런 점 때문이라 생각된다. 서울 토박이로서, 그리고 동경 유학 출신 작가로서 당대 일상의 풍경을 박태원처럼 세심한 필치로 묘사한 작품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1930년대를 식민지라는 프리즘으로밖에는 보지 못하는 난시증이 있다. 식민지인은 투사 아니면 친일파밖에 없다는 생각이 고정관념처럼 따라붙는 것은 내셔널리즘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온 우리의 풍토가 준 난시증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박태원의 작품들에서 내셔널리즘적 역사관의 한계와 왜곡을 선명하게 감지하게 된다. 거기에는 식민지가 문제시되지 않는 평범한 서민들의 일상이 포열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도 진실이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 반대도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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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전집 1 - 시
정지용 지음 / 민음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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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지용의 시전집이 오랜만에 새로운 장정으로 나왔다. 하드 커버에다가 지용의 옛시집에서 떠온 듯 사슴 그림이 들어간 깔끔한 장정은 지용의 시세계를 잘 보여준다. 그 누구도 따르기 힘든 한국어의 말 맛을 살리되, 엄격한 절제의 미를 갖춘 지용 시는 근대 한국시인 그 누구도 모방하기 힘든 유니크한 맛을 가지고 있다.

일제 말기 '신체제 건설',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내세운 일제 치하에서 시인으로서 생존마저 엄혹하게 짓눌리던 시절 지용은 전국 각지를 떠돌며 반도의 산을 주유하며 시인으로서 간신히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시들은 지용의 초기작들과는 달리 장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초기의 선명하고 절제된 회화풍의 시나 천주교 신자로서 추구한 신앙시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그 시들에는 일제 치하의 불온한 공기가 느껴지고, 그 속에서 간신히 버텨 내려는 안간힘이 느껴진다. 결국 일제 말기 몇 편의 시들 속에서 시국과의 불안한 타협과 저항을 암시하는 시들을 썼지만, 그것은 아마도 시인으로서의 최대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용의 대표시 <향수>가 20년대 초의 작품임을 감안할 때, 지용의 시적 감수성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발전했다고 생각된다. 이상화를 비롯한 몇몇 낭만주의 시인들, 그리고 김소월만으로 기억되는 그 당시 지용의 시가 가진 선구적인 감수성은 근대 문학사에서 선명한 자취라고 생각된다. 불행히도 6.25를 경과하면서 지용의 시들은 사라졌지만, 그 이전까지의 시들만으로도 지용은 우리에게 잊혀지지 않을 명편을 선사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용의 시를 찾는 것은 거기서 한국어에 대한 선명한 감수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인으로서 엄혹한 현실과의 긴장감 속에서 시를 지어내던 그 정신의 흔적을 따라가고픈 갈증 때문이기도 하리라고 생각된다. 지용 시는 소담하고 정갈하며 단아한 감수성의 보고처럼 느껴진다. 과장하고 자학하고 낭비벽에 절은 정신에 지용 시는 치료제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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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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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상상력을 통해 가상을 만들어 낸다. 이 가상을 우리는 흔히 허구라고 하는데, 그 허구가 핍진성을 띠고 독자에게 실재감으로 전해질 때 소설가는 진정으로 소설적 공간을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핍진한 공간감을 조형할 수 있느냐 여부는 소설가의 역량을 판단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우선 이 소설이 놀라운 소설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밝히자. 고등학교 시절 <오감도>나 <날개>만을 접했던 이들에게 이 소설은 이상 문학만큼이나 난해한 지적 유희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상 문학의 진의를 교육할 수 있는 교사의 부재가 빚어낸 불행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문학 교육이 문화적 감수성의 교육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한, 우리 청소년들이 일궈갈 미래의 모습은 그리 밝다고 할 수 없다.

표준화된 해석조차가 채 소화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소설은 이상이 <오감도> 발표 당시 독자로부터 받았던 항의를 재연한 꼴이다. 사람들은 천재의 비밀에 접근하기 위해 이 소설에 접근했다가 심한 배신감만을 얻는다. 하지만 작가가 이상과 같은 전략을 깔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작가는 기존의 방대한 연구 성과를 지난한 시간을 들여가며 찾아 읽고 정리하여, 그로부터 그의 생애와 작품, 그에 대한 평가를 엄밀히 재구하고 그 속에서 비밀처럼 풀리지 않는 지점들에 착목하여 작품의 얼개를 짜고 있다. 사망시 남겨졌다고 알려진 데스마스크를 추적하는 기자, 그리고 이상 신화의 모방을 꿈꾸는 이상 추적자, 그리고 정체성 찾기의 필사적인 방편으로 이상 문학 연구에 몰두하는 재미교포 등은 이상 신화가 현실에서 가진 의미를 엿보게 하는 구성이다. 진본/위본이라는 얼개는 굳이 이 작품이 아니더라도 많이 보아온 것으로서, 작가의 독서체험과 90년대적 감수성이 결합된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정체성 찾기 모델로서의 문학 연구는 한국 대학에 유학온 교포 학생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것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부분은 이상 신화의 열렬한 탐구자/모방자로 등장하는 서혁민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오감도 제16호>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위본을 제작하고, 이상의 마지막처럼 동경제대 병원을 찾아가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이상 신화에 집착한다. 그의 삶은 이상의 행적을 추적하고 그것을 재현함으로써만 의미를 가지는 삶이다. 일상인의 관점에서는 피폐한 삶이라고 볼 여지가 충분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이상과 그의 문학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 때문이다.

지금 그 누구도 이상을 넘어서 있다고 할 수 없으리만큼 그의 글쓰기는 엄청난 파장을 가지고 있다. 이상은 일상인의 관점에서 보면 병적이고 퇴폐적이고 우울한 인간이었으나 글쓰기와 관념의 세계에서만큼은 일세를 놀라게 할 만큼 앞서간 사람이었다. 따라서 생을 마감한 이후에도 신화적인 인물로 남을 수 있는 사람을 우리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해 가지는 자부심이다.

삶은 나르시시즘에 기반해 있다. 나르시시즘의 거울을 가지지 못한 존재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이상은 찬란한 나르시시즘의 거울처럼 존재한다. 그 거울을 깨지 않고 생을 마감한 서혁민의 삶은 적어도 행복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상 리포트 수준을 몇 단계 넘어선 진지함과 상상력을 가진 작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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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그의 시대
안미영 지음 / 소명출판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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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청소년들에게는 우상처럼 절대시된다. 한국 문학의 최대치가 이상의 문학이요 이상 앞에 천재 없고 그 뒤에 천재 없다는 천재론이 그들에게는 존재한다. 그리고 문학연구자에게 이상은 당대와 그 후대를 아울러 시간의 지평을 미래로까지 확장한 문제적인 문학인이다. 그런 탓에 한국문학을 논하는 마당에 이상을 에둘러서 간다는 것은 뭔가 꺼림칙한 일처럼 연구자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수많은 시간과 정력과 종이와 잉크를 소비하며 이상과 그의 문학을 논해왔지만 탄산음료를 마신 뒤끝처럼 항상 개운치 않아 연구자들은 쓰고 또 쓴다.

<이상과 그의 시대>는 일제 강점기 신체 담론의 근대적 변화에 대한 여성사적 관심사에서 이상 문학에 접근한 책이다. 신체 담론의 변화를 당대의 신문과 잡지에 산견되는 자료들을 통해서 재구하고 이를 이상 문학의 담론 양상에 결부 짓는 연구는 한번쯤 시도되었을 법한 영역이었지만, 저자에 의해 비로소 외화되었다. 전근대적이고 전통적인 신체 담론에 대한 막연한 인상을 중심으로 이상 문학의 담론적 근대성을 논하던 태도에서 한 차원 더 실증적으로 접근한 것이라고 보여지는 바, 논리적이고 정교한 서술 방식은 논의의 명징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런 측면과 함께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이상 문학을 중심에 놓고 당대의 모더니즘 소설가들의 문학적 담론과의 대비를 시도함으로써, 이상 문학의 담론적 특수성을 해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 편 한 편 찾아 읽는 학문적 꼼꼼함과 더불어 저자의 폭넓은 시각이 돋보인다.

하지만 이상 문학에 있어 신체 담론은 굳이 이상이 아니더라도 가질 법한 보편성이 개재되어 있는 이상, 이상 문학에서 현재 요구되는 문제 지점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 아쉬움이 느껴진다. 또한 저자의 전공상의 제한에서 비롯된 듯하기는 하지만, 이상 문학에 있어 신체 담론은 소설이나 수필의 영역으로 한정될 때 다소 제한된 의미만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 이상 문학 중 시에 있어 신체 이미지는 신체 담론의 이상 문학적 특수성이 녹아들어 있는 진원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장르상의 경계를 허물고 시와 산문 사이의 낙차를 고려하면서 포괄적으로 다뤄질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러나 최근의 여성사적 관심의 집적도를 반영한 연구라는 점에서 이상 문학 연구의 의미 있는 하나로 놓여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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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문화 읽기 청년에세이
최혜실 지음 / 소명출판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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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간 우리 일상을 가장 큰 폭으로 변화시켜간 동인은 무엇일까? 최혜실 선생의 이 책을 조금씩 읽어나가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지속적으로 생각해왔다. 사회주의나 맑스주의같은 이념의 쇠퇴가 가장 큰 변화였다고 말이다. 내 앞에 놓인 시간들은 마치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시한폭탄처럼 항상 급박하고 초조했다. 섣부른 희망과 조급한 좌절이 질서없이 요동치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을 만들어냈고, 그 시각 속에서 한치라도 벗어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프루크루스테스의 도둑처럼 사정없이 잘라내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를 옭죄고 있던 거대한 이야기 체계는 마치 환상적인 동화 속에 빠졌다가 책장을 덮었을 때처럼 한순간의 거대한 꿈처럼 홀연히 사라지고, 세상과 나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그런 과정과 더불어 그 공허한 구석을 또 다른 환상적인 체계가 비집고 들어왔다. 온라인, 디지털, 인터넷, 초고속, 전자같은 단어들은 이제 일시적 가상의 한 조각이 아니라 내가 기반해서 뭔가를 해야하고,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항구적인 실재로 다가왔다. 이처럼 인터넷과 연결된 컴퓨터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 부재가 그 어떤 것보다 더 한 불안, 심지어 공포까지 유발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디지털 세상은 질적인 차이에 무심하다. 독특한 개성을 천편일률적으로 비트라는 단위로 처리하고 용량으로 계량화한다. 이 세상에서 고급과 저급 같은 이분법은 통하지 않는다. 고급한 것들은 저급한 것들과 같이 처리되고, 일탈적이고 반규범적인 것들에 씌어졌던 불명예와 규탄은 새로운 명예와 찬양의 대상이 된다. 억압적이고 규범적인 틀거리 속에 갇혀 있던 것들이 그 틀을 넘어 마치 뻥튀기 기계 속의 밥알처럼 세상을 향해 폭발한다. 그 과정에서 세상은 조금씩 정형화된 틀을 깨고 유동하며 그 흐름들은 어느 순간 세상과 우리를 뒤바꿔놓는다.

부지불식간에 이뤄진 세상의 변화를 돌이켜보면 과연 우리는 지난 몇 년간 놀라운 변화를 겪어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와 같은 변화를 쉽게 감지하지 못한다. 마치 예전부터 그래왔던 듯 사람들은 태연자약하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에게 세상은 여전히 낯설기만 하고 끊임없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이런 변화가 인간의 자유와 행복에 봉사하는 것일까 하는 원론적인 질문에서 시작되는 인문주의자의 관심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그 변화의 양상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그 변화의 의미과 방향에 대해 진단하는 쪽으로 흐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대체로 변화의 양상 그 자체마저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근심하고 안다고 가정하면서 섣불리 앞서나가는 제스춰를 취하거나 구태의연하게 거부의 몸짓을 보이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인문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동시대 대중의 꿈과 욕망, 환상의 세상에 침잠해보는 경험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고서 내뱉는 말들은 기존의 자신을 되비추는 헛된 반사경이 될 수밖에 없다. 그와 더불어 때때로 대중과 함께 하는 자신의 욕망과 근심, 불안을 반성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 지난한 혼돈 속에서만이 우리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은 그 가치를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문학 전공자답게 주로 문학 영역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풍경들을 논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곁다리로 광고와 건축도 다루고 있다. 디지털 서사라는 새로운 개념에 기반한 하이퍼텍스트 소설을 논의하고 저자 자신이 직접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존에 저급하고 통속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되어 온 SF, 추리, 무협 소설에 드러나는 대중의 욕망에 진지하게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것들이 모두 고급문화의 상아탑처럼 군림해온 '소설'의 틀을 벗어나 대중의 욕망과 환영이 깃들인 일상을 긍정적 시선으로 포착하려는 모색의 결과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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