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문화 읽기 청년에세이
최혜실 지음 / 소명출판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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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간 우리 일상을 가장 큰 폭으로 변화시켜간 동인은 무엇일까? 최혜실 선생의 이 책을 조금씩 읽어나가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지속적으로 생각해왔다. 사회주의나 맑스주의같은 이념의 쇠퇴가 가장 큰 변화였다고 말이다. 내 앞에 놓인 시간들은 마치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시한폭탄처럼 항상 급박하고 초조했다. 섣부른 희망과 조급한 좌절이 질서없이 요동치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을 만들어냈고, 그 시각 속에서 한치라도 벗어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프루크루스테스의 도둑처럼 사정없이 잘라내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를 옭죄고 있던 거대한 이야기 체계는 마치 환상적인 동화 속에 빠졌다가 책장을 덮었을 때처럼 한순간의 거대한 꿈처럼 홀연히 사라지고, 세상과 나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그런 과정과 더불어 그 공허한 구석을 또 다른 환상적인 체계가 비집고 들어왔다. 온라인, 디지털, 인터넷, 초고속, 전자같은 단어들은 이제 일시적 가상의 한 조각이 아니라 내가 기반해서 뭔가를 해야하고,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항구적인 실재로 다가왔다. 이처럼 인터넷과 연결된 컴퓨터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 부재가 그 어떤 것보다 더 한 불안, 심지어 공포까지 유발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디지털 세상은 질적인 차이에 무심하다. 독특한 개성을 천편일률적으로 비트라는 단위로 처리하고 용량으로 계량화한다. 이 세상에서 고급과 저급 같은 이분법은 통하지 않는다. 고급한 것들은 저급한 것들과 같이 처리되고, 일탈적이고 반규범적인 것들에 씌어졌던 불명예와 규탄은 새로운 명예와 찬양의 대상이 된다. 억압적이고 규범적인 틀거리 속에 갇혀 있던 것들이 그 틀을 넘어 마치 뻥튀기 기계 속의 밥알처럼 세상을 향해 폭발한다. 그 과정에서 세상은 조금씩 정형화된 틀을 깨고 유동하며 그 흐름들은 어느 순간 세상과 우리를 뒤바꿔놓는다.

부지불식간에 이뤄진 세상의 변화를 돌이켜보면 과연 우리는 지난 몇 년간 놀라운 변화를 겪어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와 같은 변화를 쉽게 감지하지 못한다. 마치 예전부터 그래왔던 듯 사람들은 태연자약하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에게 세상은 여전히 낯설기만 하고 끊임없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이런 변화가 인간의 자유와 행복에 봉사하는 것일까 하는 원론적인 질문에서 시작되는 인문주의자의 관심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그 변화의 양상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그 변화의 의미과 방향에 대해 진단하는 쪽으로 흐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대체로 변화의 양상 그 자체마저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근심하고 안다고 가정하면서 섣불리 앞서나가는 제스춰를 취하거나 구태의연하게 거부의 몸짓을 보이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인문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동시대 대중의 꿈과 욕망, 환상의 세상에 침잠해보는 경험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고서 내뱉는 말들은 기존의 자신을 되비추는 헛된 반사경이 될 수밖에 없다. 그와 더불어 때때로 대중과 함께 하는 자신의 욕망과 근심, 불안을 반성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 지난한 혼돈 속에서만이 우리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은 그 가치를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문학 전공자답게 주로 문학 영역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풍경들을 논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곁다리로 광고와 건축도 다루고 있다. 디지털 서사라는 새로운 개념에 기반한 하이퍼텍스트 소설을 논의하고 저자 자신이 직접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존에 저급하고 통속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되어 온 SF, 추리, 무협 소설에 드러나는 대중의 욕망에 진지하게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것들이 모두 고급문화의 상아탑처럼 군림해온 '소설'의 틀을 벗어나 대중의 욕망과 환영이 깃들인 일상을 긍정적 시선으로 포착하려는 모색의 결과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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