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푸코 섹슈얼리티의 정치와 페미니즘
미셸푸코 / 새물결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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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언어적 전회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현대의 인문학적 사유는 언어의 문제로 집중되고 있다. 흔히 담론이라고 일컫는 언어 구성체로 모든 논의가 귀결되는 것은 탈현대 사회적 사유의 특징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물리적인 실천과 외면적 효과보다는 언어적 수행을 통해서 구성되는 진리 효과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요즘 가장 각광받는 이론가 중 한 사람이 미셸 푸코인 것같다.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같은 탈식민주의 권력 분석가들이 이론적 자원으로 삼고 있는 것도 푸코이며, 최근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 가장 큰 이론적 자원으로 삼고 있는 것도 푸코이다.

대부분의 탈현대적 논의, 해체주의적 논의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푸코의 담론-권력-지식 이론은 일견 허무주의적이고 비관적인 함의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권력과 저항이 동근원적이고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거나, 권력은 본질적으로 생체권력으로서 신체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를 통해서 수행된다는 주장은 페미니즘이 요구하는 저항과 분석의 도구로서 상당히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함께 저항의 주체성과 전망을 어떤 각도에서 뽑아낼 것인가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문제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푸코는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뚜렷하게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의 논의가 특정한 측면으로 고정화되는 것을 막으려는 하나의 전략일 수도 있지만, 막상 그의 논의를 주목하는 쪽에서는 맥빠지게 만드는 요소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소개된 지 10여년 가까이 되었다. 급변하는 이론서 시장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은 상당히 오래 전이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지식 문화가 달궈진 양은 냄비 식듯 하는 나라에서는 이 책은 구닥다리 책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더니티 논쟁/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과정 속에서 불거져 나온 근대/탈근대 문제의 함의가 소진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도 이 책이 포괄하는 논의들은 현재 페미니즘이 안고 있는 기반, 분석, 전망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미완의 숙제로 남겨진 것들을 숙고하는 데 필수적인 것들이다.

논문 모음집의 성격을 띠고 있는 이 책은 단일 저자의 저서가 가질 수 없는 모종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일단 논의의 폭이 대단히 넓고, 그 관점도 다양하다. 따라서 어떤 단일하고 체계적인 논점을 상세하게 탐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부족한 책이겠지만, 페미니즘의 곤경을 적당히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다각도의 탐구를 가능케 할 지점들이 수두룩하다. 특히 이 책이 푸코와 페미니즘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왜 유독 푸코에서 가장 큰 이론적 자원을 확보할 수밖에 없는가?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현재 페미니즘이 안고 있는 문제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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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 로고스
짱 롱시 / 강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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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문화와 예술은 다양한 측면의 문제를 함유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언어의 문제로 수렴된다.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이 말과 글자라는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언어의 문제는 인간 문화의 시작과 끝에 가로놓여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도와 로고스라는 동서양 철학의 중심 화두를 각각 대표하는 개념을 표제로 내세움으로써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는 말은 언어의 지시 기능이 지닌 궁극적인 한계와 더불어 이러한 진리의 언명조차 말을 통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함유한 개념이다. 그리고 로고스는 이성 혹은 말을 뜻하는 그리스어로서 데리다식의 해체주의가 서양의 지적 전통을 로고스중심주의로 규정하면서 인구에 회자된 개념이다.

중국과 서양은 판이한 지적 전통을 가진 문화권으로 가정하는 것이 우리 주변의 미숙한 견해거나 선입견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와 로고스의 대립이 압축적으로 표상하듯이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언어의 한계성에 대한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서양은 적어도 근대 사회 이후로 많은 것들을 언어적 표상으로 포섭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문학의 장에서만 보면 현대의 서구 시인들은 적어도 동양의 도 개념이 함축하는 언어의 함축성, 암시, 신비주의적 현현에 대해서 강한 열망을 드러내 보인다. 말라르메의 순수시나 발레리의 상징시학은 그들이 토해 내는 몇 마디의 언어가 아니라 그 언어가 깔고 있는 여백으로부터 말로는 현현되지 않을 신비주의적 암시를 지향했다.

저자는 양의 동서와 시간의 고금을 종횡으로 옮겨가면서 언어에 대한 서양적 관념과 현상을 중국적 관념과 현상과 비교하면서, 궁극적으로 적어도 언어 문제에 있어서 양의 동서 사이에 선입견으로 놓여 있는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것같다.

저자의 이런 작업은 별다른 반성 없이 서양의 지적 전통에 기대어, 동양적 현상에 대한 접근을 피하는 지적 안일함에 대해서 반성하게 한다. 조선적인 것은 서양 근대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비교 접근 대상으로서 미달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암묵적으로 전제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이런 문제는 현대 문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특히 더 염두에 둬야 할 것같다.

안일한 재생산이 아닌 생기와 활력으로 가득 찬 도전적인 재생산을 충동질하는 이런 책은 새로운 작업을 위한 영감을 제공해 준다.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 학자이다. 경계선에 가로놓인 위치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닌가 싶다. 이상의 시를 번역하고 연구한 월터 류의 위치와 가능성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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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 인간 이상은 이렇게 말했다
김민수 지음 / 생각의나무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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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문학만큼 다방면의 학자들이 들러붙어서 분석과 해석의 칼날을 곧추세운 한국 작가도 드물 것이다. 이는 그만큼 이상 문학의 세계가 열린 체계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김민수 교수는 디자인 전공자로서 이상의 초기 시를 화두로 삼아 한 권의 책을 써냈다. 기실 전체 여섯 장 중에서 두 장만이 이상 문학에 할당된 것이지만, 나머지 장들도 그 두 장에서 펼치는 논의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 역할을 하느니 만큼 연결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민수 교수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이상에 대한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김민수 교수의 이상 연구는 하등 문제가 될 거리가 없다. 오히려 제한된 경계를 넘어 학제적 연구의 시각에서 이상을 연구했다는 것은 이상 문학을 문학의 관점에서만 연구하던 이들에게는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었고, 새로운 방면에서 연구의 틀을 마련할 수 있는 상상력의 자극제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김민수 교수의 논의 내용 중에는 다소 과하다 싶은 부분도 없지는 않다. 디지털 가상 공간과 멀티미디어라는 90년대적 분위기를 투영해 이상 문학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우선 그렇고, 치밀한 논증을 넘어서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상 신화를 또 다른 견지에서 구축한다는 우려를 주기도 한다. 이러한 무리수는 방외인적인 시각이 가질 수 있는 자유로움의 일종으로 보고 넘겨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디자인 전공 학자라고 섣불리 예단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그의 인문학적, 예술론적, 과학적 지식은 엄격한 학제적 틀 속에 갇혀버린 대학의 지식 구조 속에서는 신선한 기운임에 틀림없다. 그가 미대 내에서 배척받은 것은 정실과 학연에 얽매이지 않는 정직성과 그가 보여준 새로운 학풍에 대한 기존 학자들의 모종의 기득권 심리가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인문학의 위기, 문자 매체의 위기를 화두로 삼고 있는 우리 시대에 진정한 반성은 어디에서 비롯되어야 하는가를 암시해 주는 책이다. 급격한 위기감과 상실감을 깔린 '위기'에 대한 불안 심리는 넓은 맥락에서 보면 결코 어떤 것이 급격히 사라지고 그 자리를 완전히 새것이 대체하는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김민수 교수는 주장한다. 단지 익숙한 것이 쇠퇴하면서 새로운 것을 바라볼 틀을 갖지 못한 시각의 불안이 위기의 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무학점 강의를 몇 년 간 계속하면서도 역사속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처럼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신념처럼 되뇌고 있을 그의 건승을 비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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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텍스트의 정치학
TORIL MOI / H.S MEDIA(한신문화사)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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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문학 비평이나 연구가 주로 하는 일은 남성 작가들의 연대기로 구성된 문학사에서 지워진 여성 작가들의 계보를 복원하는 일이 그 하나이고, 남성 작가들이 그려낸 여성 이미지에 대한 비판적 해석이 또 다른 하나이다. 편차와 성향이 다양한 작업들을 이 두 가지로 요약하는 건 실제 당사자들에게는 크나큰 폭력이 되겠지만, 기존의 페미니즘 문학 비평이나 연구는 크게 이 두 줄기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문학 연구에 남/녀라는 성차 개념을 도입하는 작업은 우선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작업이다. 그것은 기존의 문학사를 남성의 주된 작업으로 규정함으로써, 주변화되고 배제된 문학 행위들의 위상을 복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과연 한국문학에서 배제된 여성 작가치고 제대로 된 작품을 쓴 작가가 있느냐, 문학 연구에 주관적이고 정치적 색채가 강한 의심스러운 작업을 하는 것이 문학 연구의 정도인가 하는 질문에서부터 문학에 과연 성차 개념이 적절하게 위치지어질 수 있느냐 하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들까지 다양한 문제들이 미해결의 상태로 놓여 있다.

이러한 작업들을 주로 여성 비평가나 연구자들이 수행해왔고, 남성 비평가나 연구자들마저도 그런 작업을 여성들의 몫으로 돌려버림으로써, 페미니즘 문학은 여성의 정체성 찾기, 권력 관계에서 주변화된 세력의 권력 찾기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그 과정은 엄격한 이론과 남성적 권력 질서 하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성 연구자들의 불안을 가져온다. '과연 이런 작업이 학문의 객관성이라는 규율에서 벗어나는 건 아닐까, 학문 연구 집단에서 배척되지는 않을까.'

페미니즘 문학 연구는 겉으로는 평화롭지만 속으로는 전쟁 같은 격렬한 전장을 형성하고 있다. 여타 분야에 비해 다소 조용한 방식으로 수행되는 이 전쟁은 적과 우군이 구별되지 않은 안개 속의 싸움터이다. 페미니즘을 여권 신장, 여성 해방 등 남성의 권력 질서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여성 권력의 동의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우리의 지적 현실 속에서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각종 의혹과 질시의 대상이다. 수많은 경향이나 흐름들이 페미니즘이라는 동일한 개념 하에서 비판당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그에 대항할 적절한 언어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개념화는 또 다른 권력화라는 명제가 자기 검열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토릴 모이의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은 페미니즘 문학 이론으로 통칭할 수 있는 다양한 문학 연구 흐름들을 효율적이고 명료하게 개괄한 책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되는 문학 연구나 비평의 흐름을 한눈에 짚어 내는 데 이만큼 적당한 책도 없을 듯하다. 번역된 지 10년이나 지나도록 그 명성이 지나지 않는 걸 보면 이 책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달리 보면 그만큼 번역이 활발하게 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모이가 소개하는 책들 중 과연 몇 권이나 번역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자. 영미 페미니즘 문학 이론 파트에서 소개한 책 중 유일하게 번역된 것은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 한 권뿐이다. 일레인 쇼월터, 아드리안 리치, 메어리 엘만은 없다. 그리고 프랑스 페미니즘 파트에서는 보봐르의 <제2의 성>, 이리가라이의 <하나가 아닌 성>, 크리스테바(페미니스트 여부가 논란이 되는)의 <시적 언어의 혁명>, <공포의 권력>이 번역되어 있다. 식수의 책은 한 권도 번역되지 않았고, 이리가라이의 그 유명한 <반사경>도 번역되지 않았다.

일본이 메이지 이후 가장 역점을 들인 근대화 사업의 하나가 국가 번역 기관을 통한 번역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수용의 태도를 차치한다면 번역은 중요한 사업이다. 그런데도 해당 분야를 좀 더 심도 있게 들어가 보려 할 때마다 부딪치는 건 번역의 문제이다. 번역이 안 되어 있거나 엉망이라고 느껴지는 경우. 고작 몇 백만원 받고 오랜 시간을 들여가며 정성스럽게 번역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도서관도 필요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그 도서관을 채울 책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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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돌림병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종주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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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돌림병>은 지젝의 주저로 꼽히는 책들 중에서 가장 최근의 책이다. 그런 탓에 사이버 세계에서의 주체의 문제 등 요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토픽이 등장한다. 이전의 저서들에서 그가 독특하게 사용하는 여러 개념들의 정체와 외연적 확장 가능성에 대해 품었던 의문이 조금 더 명료해지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좀 더 자유롭다고 할까, 지젝은 가능한 자유롭게 개념의 확장을 시도하는 듯하다. 그건 그만큼의 성과 못지 않게 독자로 하여금 곤혹스럽게 만든다. 과연 어떤 개념이 어느 정도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하는... 이는 지젝이 즐겨 사용하는 '아는 것으로 가정된 주체'로서의 지젝 앞에 놓인 피분석자의 의혹과 마찬가지는 아닐지...

지젝의 다른 책에서도 그렇지만 본장의 뒤에 붙어 있는 보론은 본장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지젝은 철학적인 구심을 보여줄 수 있는 글들을 보론으로 빼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의 글을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독자와 출판계를 위한, 말하자면 '타협 형성물'인 셈이다. 하나 아렌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깊이있게 심문한 칸트 윤리학과 나치의 상관성 부분을 읽으면서, 그리고 '근본적인 악'과 '악마적인 악'의 대비 부분을 읽으면서, 아니 반유대주의를 비롯한 지젝의 이데올로기론 전체를 읽으면서 나는 내내 이런 담론들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환상의 돌림병>의 보론 부분을 읽으면서 이것이 80년대를 살아낸 우리의 기억에 대한 재심문을 위한 좋은 기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며칠 전 모 케이블방송의 80년대 관련 프로를 보면서 마치 그 악몽같은 공기가 내 주변을 꽉 채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직 국가와 각하를 위한 행동을 지고의 선으로 생각하며 노동자를 무차별 탄압했던 '그들'의 완연하고 선연한 태도...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의 오역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책의 오역 중 핵심은 각 영역의 전문 용어들(영화 제목도 그럴 수 있다면)을 특별한 참조 과정 없이 자의적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제목의 경우, 지젝의 담론 상당수가 영화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의 영화에 대한 참조를 방해한다. 데이빗 린치의 '광란의 사랑wild at heart'를 모르는 사람은 이 책을 통해서 그 영화에 도달하기 쉽지 않다.

번역은 지난한 과정이다. 그리고 특히 지젝의 책이 그 대상인 경우, 기진맥진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적절한 참조 과정 없는 번역은 역자에게는 의도하지 않은 비난과 원 저자를 비롯한 출판 시스템이라는 초자아로부터의 죄의식을 면할 수 없게 한다. (이 중 한 가지를 지적하자면 역자가 '긍정적'이라고 번역한 용어의 관행적 역어는 '실정적'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물론 원서 대조를 거치지 않은 의문이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비단 오역뿐만 아니다. 이 책의 이해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은 통사 구조의 불명확함이다. 용어의 오역은 참조를 통해서 적절히 해결할 수 있지만, 통사 구조상의 혼란은 개념상의 오해와 더불어 이 책을 파국으로 밀어넣는다. 문장이 길어질수록 역자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하나의 문장이 문장으로서 모호한 지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이다.(이것이 라깡의 말이냐 지젝의 말이냐 아니면 지젝이 언급한 xx의 말이냐...)

그러나 몇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독파했다. 최근 지젝의 이름을 걸고 두 권의 저서와 편집서가 번역되었지만, 그것은 지젝 번역사에 있어서는 별 다른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번역되어야 할 책은 출판계에서 상업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부정태와 체재하기>, <불가분의 잔여>, <이데올로기 지도 그리기>, <불안정한 주체> 같은 책이 아닐까 한다. 이런 책들에 대한 참조가 빠진 지젝은 허황될 가능성이 높으며, 그와 더불어 라깡이 빠진 지젝도 문제가 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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