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돌림병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종주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환상의 돌림병>은 지젝의 주저로 꼽히는 책들 중에서 가장 최근의 책이다. 그런 탓에 사이버 세계에서의 주체의 문제 등 요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토픽이 등장한다. 이전의 저서들에서 그가 독특하게 사용하는 여러 개념들의 정체와 외연적 확장 가능성에 대해 품었던 의문이 조금 더 명료해지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좀 더 자유롭다고 할까, 지젝은 가능한 자유롭게 개념의 확장을 시도하는 듯하다. 그건 그만큼의 성과 못지 않게 독자로 하여금 곤혹스럽게 만든다. 과연 어떤 개념이 어느 정도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하는... 이는 지젝이 즐겨 사용하는 '아는 것으로 가정된 주체'로서의 지젝 앞에 놓인 피분석자의 의혹과 마찬가지는 아닐지...

지젝의 다른 책에서도 그렇지만 본장의 뒤에 붙어 있는 보론은 본장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지젝은 철학적인 구심을 보여줄 수 있는 글들을 보론으로 빼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의 글을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독자와 출판계를 위한, 말하자면 '타협 형성물'인 셈이다. 하나 아렌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깊이있게 심문한 칸트 윤리학과 나치의 상관성 부분을 읽으면서, 그리고 '근본적인 악'과 '악마적인 악'의 대비 부분을 읽으면서, 아니 반유대주의를 비롯한 지젝의 이데올로기론 전체를 읽으면서 나는 내내 이런 담론들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환상의 돌림병>의 보론 부분을 읽으면서 이것이 80년대를 살아낸 우리의 기억에 대한 재심문을 위한 좋은 기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며칠 전 모 케이블방송의 80년대 관련 프로를 보면서 마치 그 악몽같은 공기가 내 주변을 꽉 채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직 국가와 각하를 위한 행동을 지고의 선으로 생각하며 노동자를 무차별 탄압했던 '그들'의 완연하고 선연한 태도...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의 오역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책의 오역 중 핵심은 각 영역의 전문 용어들(영화 제목도 그럴 수 있다면)을 특별한 참조 과정 없이 자의적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제목의 경우, 지젝의 담론 상당수가 영화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의 영화에 대한 참조를 방해한다. 데이빗 린치의 '광란의 사랑wild at heart'를 모르는 사람은 이 책을 통해서 그 영화에 도달하기 쉽지 않다.

번역은 지난한 과정이다. 그리고 특히 지젝의 책이 그 대상인 경우, 기진맥진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적절한 참조 과정 없는 번역은 역자에게는 의도하지 않은 비난과 원 저자를 비롯한 출판 시스템이라는 초자아로부터의 죄의식을 면할 수 없게 한다. (이 중 한 가지를 지적하자면 역자가 '긍정적'이라고 번역한 용어의 관행적 역어는 '실정적'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물론 원서 대조를 거치지 않은 의문이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비단 오역뿐만 아니다. 이 책의 이해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은 통사 구조의 불명확함이다. 용어의 오역은 참조를 통해서 적절히 해결할 수 있지만, 통사 구조상의 혼란은 개념상의 오해와 더불어 이 책을 파국으로 밀어넣는다. 문장이 길어질수록 역자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하나의 문장이 문장으로서 모호한 지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이다.(이것이 라깡의 말이냐 지젝의 말이냐 아니면 지젝이 언급한 xx의 말이냐...)

그러나 몇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독파했다. 최근 지젝의 이름을 걸고 두 권의 저서와 편집서가 번역되었지만, 그것은 지젝 번역사에 있어서는 별 다른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번역되어야 할 책은 출판계에서 상업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부정태와 체재하기>, <불가분의 잔여>, <이데올로기 지도 그리기>, <불안정한 주체> 같은 책이 아닐까 한다. 이런 책들에 대한 참조가 빠진 지젝은 허황될 가능성이 높으며, 그와 더불어 라깡이 빠진 지젝도 문제가 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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