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거울의 눈 - 문학이란 무엇인가
신범순, 조영복 지음 / 현암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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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제에는 거울이 등장한다. 거울이긴 한데 깨어진 거울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깨어진 거울이란 표현에서 우리는 영화에서 자주 보게 되는 어떤 거울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다. '엔젤 하트'에서 미키 루크가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는 그런 거울말이다. 그런 거울이라면 그 거울을 깨졌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치 못할 것이다. 금이 간 거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틀 속에서 전반적인 외형을 보존한 거울이 아니라 산산이 깨어진 거울을 의도한 표현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거울이라 불리기에 적절치 않다. 그것은 한때 거울이었으나 지금은 더 이상 거울로서 작용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지칭하는 것일 게다.

표현상의 모호함을 일단 차치하면 아마 이 책이 말하는 거울은 금이 간 거울 정도가 아닐까 싶다. 자신과 대접한 물체를 역상으로 재현해 내는 것이 거울의 특성이라면, 거울은 항상 물체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기구는 아닌 셈이다. 물체를 반영하되 항상 좌우가 뒤바뀐 상을 비추게 될 뿐이다.

문학을 무언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할 때, 문학은 무언가를 항상 왜곡된 방식으로 반영한다. 따라서 문학에서의 리얼리즘 신봉자는 역상 자체를 현실과 곧바로 등치시키거나 적어도 맹목적으로 등치시키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거울로서의 문학은 항상 속임수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에 곧바로 다가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실마리를 얻고 문학의 기괴함에 다가가는 길을 찾기 위해 문학 연구가 마련해 놓은 장치들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이미지, 은유, 상징, 서사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루에도 한 두 번씩 되뇌게 마련인 이 말들을 가지고 우리는 예술과 대중문화의 비밀에 접근하고자 시도한다.

문학의 위기라는 일견 시대적 변화 속의 모색처럼 느껴지는 담론 속에서 우리가 지나치는 것은 문학의 위기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과 관련된 특정한 문학 생산의 위기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대중문화 텍스트를 해독할 때, 이미지, 은유, 상징, 서사라는 개념을 얼마나 즐겨 사용하고 있는가. 물론 그런 용어들에 대해서 얼마나 풍부한 지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적어도 그런 비평 개념들이 지금껏 문학 연구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수정, 보완, 발전되어왔다는 사실이다. 우리 주변에서 문학 작품을 통해서 시대의 변화를 가늠하고, 삶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현상을 두고 문학의 위기를 운위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문학 비평이 마련해 놓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다.

문학 비평 속에서 발전된 비평 개념 속에서 토대를 닦지 않은 사람들은 기껏해야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영역 속에서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뻗어나가기는 힘들다. 그만큼 그가 바라보는 창 하나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편협한 시각은 하나의 독해에 대한 강한 아집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 비평 속에서 개념을 갈고 그 개념들을 가지고 여타 영역에 대한 비평을 시도해볼 수도 있다. 물론 그럴 경우 해당 영역의 역사적 발전이나 그 영역만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은 부족할 수도 있지만, 하나의 독특한 비평으로서 빛을 발할 수만 있다면, 그런 비평은 전문 영역에 갇힌 전문 비평에 못지않은 권위와 품격과 맛을 가질 수 있는 법이다.

<깨어진 거울의 눈>은 더 이상 문학의 존재가 자명한 것으로 인정받지 않는 시대에 문학이 예술작품과 대중문화에 대한 비평적 가능성을 얼마나 확장할 수 있는가를 시도한 기획으로 보인다. 물론 문학개론서로 기획된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기존의 문학개론서가 요구하는 공식화된 컨텐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문학의 존재론에 대한 필자의 주관적인 서술에서부터 특정한 테마를 중심으로 시와 소설, 회화와 음악, 예술영화까지 종횡으로 엮어낸 구성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 책은 문학의 가능성을 꿈꾸는 자의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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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위의 삶 - 21세기 문화 총서 10
셰리 터클 지음, 최유식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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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대 도시 생활인의 상당수는 컴퓨터와 지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다. 수치로 환산하면 컴퓨터는 디지털 시대의 부모이자 연인이자 친구로서 우리 삶에 절대적으로 군림하고 있다. 컴퓨터가 오작동을 일으키거나 네트워크 접속 불량을 일으키면 마치 가까운 누군가가 큰 사고를 당한 것처럼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이고, 컴퓨터를 회생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이런 현상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이제 실제보다는 가상을 통해서 인간은 사유하고 욕망하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으로 거듭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조명하고 반성하게 해주는 책들은 많지 않은 듯하다.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디지털 관련 서적들 중에서도 인터넷 시대의 자아 정체성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책들은 보기 드문 형편이다. 대개의 책들은 디지털 시대로의 변화를 이끈 과학기술의 내적 메커니즘을 추적하거나 디지털 위주의 미래 사회에 대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전망으로 현상 분석을 단숨에 뛰어넘는 책들이다.

디지털 시대의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아 정체성에 컴퓨터와 인터넷이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그 속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욕망을 해소하고 자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문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하고 어떤 전망을 얻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국내 저자들의 책들은 우리 일상의 문제들을 조망하기보다는 거시적인 문제틀들에 집착하여 현상 분석과 해석, 전망을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의 지식 문화 속에서 학자들이 실제적인 문제들을 제대로 집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셰리 터클의 <스크린 위의 삶>은 이런 상황 속에서 번역된, 매우 의미 있는 책일 듯하다. 디지털과 심리학이라는 다소 상반되는 영역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저자는 프로이트류의 정신분석학이 현대 사회의 디지털 라이프에서 빚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효한 방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과 일일이 대화를 나누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인공지능과 인공생명의 문제, 사이버문화생활의 윤리성 등 전통적인 자아 정체감에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구성된 새로운 가상공간이 어떤 효과를 초래하는지 검토하고 있다.

조사 대상자를 일일이 인터뷰하면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검토하는 이와 같은 민족지적 연구 방법은 미국 서적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구 방식이다. 인용된 개인들로부터 생생한 음성을 전해 듣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이와 같은 연구 방법은 저자뿐만 아니라 독자들마저 책 속으로 끌어들이는 강한 흡입력을 가진 방식이다.

여하튼 터클의 이 책은 기존의 사이버문화론과는 달리 우리의 컴퓨터 유저에게도 낯설지 않은 환경을 연구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네트워크 초창기 시절의 머드가 주 논의 대상이기는 하나, 우리는 여기서 pc통신의 경험을 그대로 대입하여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가상공간에서 펼쳐지는 유저들의 다양한 움직임이 기존의 실제 공간 속에서의 윤리로 규제되고 이해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가상공간의 자아는 실제 공간의 자아와는 전혀 다른 존재인지 등의 문제도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문제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에 부합되기에는 이 책도 오래된 듯한 느낌을 준다는 사실이다. 1995년에 나온 이 책은 불과 10년 사이의 변화를 따라잡기에는 조금 부족한 듯하다. 8년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터클의 문제의식을 한층 정교화 하는 일이 남아 있는 셈이다. 이것은 터클의 과제일 수도 있겠지만, 국내의 뜻있는 학자의 과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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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 - [초특가판]
월터 살레스 감독, 페르난다 몬테네그로 외 출연 / SRE (새롬 엔터테인먼트)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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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은 일종의 로드 무비이다. 길과 함께 얘기가 시작되고 그 길이 막바지에 다달을 때 영 화는 끝난다. 여기서 말하는 길은 실제적인 물리 적 공간 'road'이기도 하지만 인생과 연관되는 추 상적인 공간 'way'를 가리키기도 한다. 보통 영 화 속 주인공들은 우연찮게 '길'에 나서게 된다. 그 길은 예정된 목적지가 있는 길일 수도, 무작정 떠나는 길일 수도 있다. 아마 영화 속의 길들 은 어떤 예정된 목적지가 있는 경우가 더 많을지 도 모른다. 그러나 주인공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가정된 목적지가 없는 영화에 나는 한층 흥미를 느낀다.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델마와 루이스'에서의 두 여성들의 만남과 헤어짐만큼 내 예측을 넘어선 경우는 별로 없었다.

어찌 보면 세상의 많은 영화들은 2시간 남짓의 길을 함께 하다가 헤어지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로드 무비가 아닌가 싶기도 하 다. '길이 끝나자 여행은 시작된다'라는 모호한 말 은 대학 1년부터 나를 괴롭히고, 그만큼 나를 사로잡은 말이다. 여행은 길이 시작되면서부터 시 작되는 게 아니던가. 그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 하기란 너무 어려웠다. 그렇다고 지금 그 말 뜻을 온전히 이해한 것도 아니다. 이 말은 소설의 내적 형식을 설명한답시고 어떤 사람이 한 말이 다. 소설 속 주인공은 뭔가를 찾아 길을 떠나지 만, 그 길이 끝나도 실질적으로 뭔가를 찾아낼 수는 없다. 다만 그때 그 주인공의 의식은 여행을 떠나기 전과는 달리 새로운 의식으로 감싸이게 된다. 그때 시작되는 의식 속의 여행을 통해 주인공은 한 차원 높은 의식으로 옮아간다.

이런 식의 설명법은 헤겔식의 논리를 성장소설이나 교양소설을 밑바탕으로 구성한 논리에 불과하지만, 로드 무비를 볼 때도 나는 이런 식의 평가 기준을 적용하게 된다. 그 영화 속 주인공들과 그 영화를 보는 내게 길이 끝나는 그 순간 의식 속에 여행의 여지를 마련해 주느냐 않느냐. 물론 영화는 소설같지 않아서 액션 위주의 로드 무비도 많다. 그런 경우엔 그 액션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 이상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영화가 그 이상을 보여줄 때 나는 좀 더 진지하게 그 영화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중앙역'의 두 주인공 꼬마 죠슈아와 중년 아줌마 도라. 어찌 보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만 남이지만, 그들의 만남과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대화을 엿듣고 있노라면 그리 과장된 포즈를 느낄 수 없다. 그건 연출한 감독의 의도나 태도상의 문제이리라. 뭔가를 찾아 우연히 길을 떠나게 된 두 사람. 죠슈아는 아빠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자기가 그리던 아빠의 상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반쯤은 성공한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흥미로운 점은 이젠 어느 정도 인생에 대해 여유롭고 겸손한 태도를 지니고 있어야 할 중년 아줌마 도라의 변화를 목격하는 일이다. 그의 이웃과 함께 하지 못한 채 기괴하게(?)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예전에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던 걸까?

조슈아와의 여행을 통해서 그녀는 자신이 묻어뒀던 지뢰를 스스로 터뜨리고선 울고, 뉘우치고, 그리워한다. 그 나이의 인간에게도 어쩔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건 섬뜩한 일이다. 마냥 나이만 먹는다고 삶이 순조로워질 거라거나 자신이 현명해 지거나 단단해질 거라는 생각은 막연한 낙관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진실과 그 진실이 던져주는 감동, 이건 비단 문학에만 고리타분하게 적용시켜야 할 기준은 아닐 것이다. 삶이 지겨워서 신나는 영화가 그리워질 때도 있지만, 조금만 지나면 다시 삶이란 게 그리워진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서는 안 되는지 이 런 것들에 대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뭔가가 그리워진다. 영화 속 주인공이 내가 되고 내가 영 화 속 주인공이 되어 일종의 호접지몽, 이심전심의 경지로 나를 이끄는 그런 경험. 그런 경험을 선사할 영화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굳이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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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 히로스에 료코 외 출연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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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을 보고 있자니 일본영화의 노장 그룹들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발랄한 상상과 기괴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일본의 젊은 영화 그룹과는 달리 지극히 전통적인 관념을 지극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 영화에도 무리없이 적용될 듯하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노장 그룹으로서 가질 수 밖에 없는 세계관과 형식개념상의 한계이리라.

'철도원'은 외고집의 한 직업인의 순수한 결말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의 모습에는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가득하다. 그리고 거기엔 평생직업이라는 일본 고유의 직업관에서 빚어지는 생과의 갈등이 포함되어 있다. 오토가 아내가 죽은 날도 작업일지에 '이상무'라고 적고 있는 것은 그 가장 극명한 예일 터이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경우 그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태도임이 분명하다.

만약 주인공의 직업이 우편배달부라면 모를 일이되, 철도원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주지하다시피 철도는 한 국가의 기간 동력으로서 국가발전의 가장 기초가 되는 시설이기 때문이다. 철도에 대한 주인공의 충직한 헌신은 그것이 인간적 갈등과 번민을 하찮은 것쯤으로 무화했을 때 다분히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띠게 된다.

'철도원'은 철도로 상징되는 무반성적 헌신과 죽은 딸로 상징되는 인간적 회한이 절제되고 때로는 감정적인 톤으로 자연스레 변주됨으로 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마음을 아련한 슬픔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뭔가 부담스런 점이 있다면 그건 이 영화를 통해 가리워진 것들을 정말 없는 것으로 만드는 영화의 힘때문이다. 군국주의 시절 일본 내 수많은 우직한 오토들에 의해 고통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이 영화만큼 공감하며 슬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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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온다
Wen Jiang 감독, 지앙 홍보 외 출연 / 엔터원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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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내외적으로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 역사에 대한 반성의 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국가간의 협상은 이미 예전 협정을 통해 끝난 문제처럼 얘기되지만, 그로써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결은 태도의 문제를 제기한다. 일본의 군국주의 역사는 마치 유럽에 있어 나치즘이 그러하듯 '기억의 정치'를 통해 끊임없이 반추해야 하는 역사의 미궁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지난 10여 년 간 일본의 행보가 보여주듯 일본 군국주의는 그 싹이 완전히 거세되지 않은 채 적당한 환경의 도래만을 기다리는 모습이다.(우려?) 우리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중국, 필리핀의 움직임은 조용한 듯하다.(과연 그럴까?)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중국에서 이런 문제들이 크게 거론되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일본과 곧바로 맞닿아 있지 않다는 지정학적 조건이나 일본 정도는 충분히 대적할 수 있다는 중화의 자존심, 그런 것? 여하튼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본 군국주의 시절 중국의 경우는 여하튼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을뿐더러 애써 알려는 사람도 드물다.

중국의 대표적 영화 배우이자 감독이기도 한 강문이 주연하고, 감독한 '귀신이 온다'는 일본 군국주의 말기 중국 한 촌락민들의 경험을 중국적인 해학과 능청의 어법으로, 그렇다고 이 영화의 톤마저 가볍지만은 않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해안가 마을에 사는 농부 다산에게 어느 날 밤 다시 찾으러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누군가가 일본군 포로를 담은 자루 두 개를 던진다. 그날부터 다산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은 일본군 병영 마을이라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해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동거를 시작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일본군 포로와 어렵사리 교신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해프닝은 중국인들 특유의 수다러움, 능청과 버물어져 짙은 순박미를 느끼게 하고, 그런 에피소드들만으로도 흥미롭다.

일본의 반식민지 '2류 신민'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일본군 포로들은 꽤 골치 아픈 존재다. 결국 중국인과 포로 사이에는 모종의 계약이 성립되고, 그 계약이 원만한 성사되어 마지막에는 한바탕 축제까지 벌어지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중국 촌락은 불바다가 되고, 다산과 그의 처만 다행히 참화를 면하지만, 다산의 그 복수심만큼은 지독해서 포로가 되어버린 일본군들을 도륙하고, 그 대가로 일본 포로의 칼날 앞에서 목을 떨군다.

목에서 떨어진 다산의 얼굴은 다소 생뚱맞게 눈을 껌뻑거리면서 영화가 끝나는데, 그 껌뻑거림은 마치 '역사의 황당함이여!'라고 외치는 듯하다.

플롯만 추리고 보면 이 영화의 스토리들은 비극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톤은 중국인들의 유머, 능청, 순박의 정경들로 인해 겹 톤으로 중화되고, 전체적으로는 유쾌와 비탄, 가벼움과 무거움이 주기적으로 교차하는 묘한 느낌을 준다. 결국 이 영화는 역사와 영화의 스테레오타입적인 만남을 거부하는 색다른 영화가 되어버린 셈인데, 난 이런 게 맞다고 생각한다. 'right'이라기보다는 'fit' 정도의 감각.

'귀신이 온다'는 흥미로운 중국 영화다. 그 흥미로움은 단지 한일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기억의 정치'가 좀 더 폭넓은 시야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결국 '기억'이 문제가 되는 셈인데, 생각해보니 20세기는 이미 단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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