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줌의 도덕 - 상처입은 삶에서 나온 성찰 입장총서 18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최문규 옮김 / 솔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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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문화집적체 양식을 영혼의 양식처럼 생각해서 시시때때로 섭취하는 것을 중요한 일처럼 생각하는 나에게도 마치 이국의 특이한 요리처럼 쉽게 소화해낼 수 없는 종류의 책들이 있는데, 아도르노의 책들은 다른 책들과의 비교를 애시당초 불허할 정도로 이런 종류로서는 독보적이다.

미국 체류 시절 절친한 동료 막스 호르크하이머와의 공동 저작인 <계몽의 변증법>은 그 논지의 명료성으로 인해 대체로 상당수의 지적 대중들이 접했지만, <미학 이론>같이 특수 전공서처럼 인식되는 책들은 그 누구도 끝까지 읽어냈다는 얘기를 쉽게 접할 수 없고, 그 ‘끝장내기’ 자체가 대단한 지적 싸움 그 자체로까지 여겨지고, 그 싸움에서의 승패여부에 상관없이 그 싸움에 끝까지 함께 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한 마디로 아도르노의 저작은 우리에게 몇되지 않는 가장 치열한 정신적 모험의 대상이다. 누구나 짐작하듯이 그런 사태는 아도르노 저작의 스타일상의 난해함에서 비롯된다. 경구나 잠언처럼 단편 형식을 취하면서 그 전과의 맥락을 쉽게 발견하기 힘들고, 문장 하나하나가 변증법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어, 직선적이고 일면적인 읽기, 총체화된 읽기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아도르노 읽기는 니체 읽기에 버금가는 어려움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도르노 읽기가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물론 이런 물음은 이런 물음 자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의미있는 것으로 다가올 것이다.) 모든 사유와 현상들이 무반성적인 화해, 타협으로 거침없이 질주해가는 듯한 현대 사회에서 아도르노는 쉽사리 현대 사회가 부여하는 거짓 총체적 연관에 투합하기를 거부한 채 그 연관이 내포하고 있는 허위성을 들추어내며 고집스레 거부의 자세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자세는 지나친 외곬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의 사유의 밑바닥에는 유태인으로서 목격한 파시즘의 잔혹한 실체에 대한 응시가 가로놓여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떤 면에서는 댄디즘 취향의 속류 문화비평가가 쏟아내는 문화비평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실함이 배어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한줌의 도덕>을 끝까지 읽는 데는 수년간의 시간과 그보다 더한 인내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만큼의 지식을 얻는다는 것을 불가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줌의 도덕>은 지식을 위한 책이 아니라 상처받은 자신을 드러내려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상처는 히틀러의 파시즘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 예술가이자 미학자로서 그가 체험한 미국식 자본주의 문화산업으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히틀러식 파시즘을 지금은 한때의 망령처럼 떠올리지만 파시즘은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넘어서 문화산업 형식으로 우리 삶에 가로놓여 있다.

한때 비판사회이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정통 맑스주의 이상의 관심이 쏠린 바 있지만 정확하게 검토되기도 전에 또 다시 관심은 다른 곳으로 이동해간 듯한 인상이다. 사람들은 맑스를 접고 아도르노를 펼치자 얼마 안돼서 이제 들뢰즈나 푸코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앗!참으로 주전자같은 세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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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여행의 역사 - 철도는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볼프강 쉬벨부쉬 지음, 박진희 옮김 / 궁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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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여행의 역사'라고 하면 왠지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모종의 해방감이 연상된다. 그러나 여행은 사업이나 특정한 목적을 위한 공간 이동이 주가 되는 현대의 기차 이용 경험과는 적잖이 거리가 있다. 기차는 더 이상 여행을 위한 매개가 아니게 되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를 기차로 이동하는 경우 그 시간은 따분하고 지루한 고역의 시간이 되기가 일수다.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여행이 끝난 아쉬움보다는 기계장치로부터의 시달림에서 해방된 기쁨을 느끼기조차 한다.

서구에서 기차 여행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던 무렵인 19세기 중반 기차를 통한 철도 여행이 사람들에게 불러일으켰던 지각과 인지의 변화를, 그리고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담론들을 문화사적인 감각으로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은 그동안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추 역할을 담당해 온 철도를 기술적, 경제적 시각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시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책으로 언급되고 있다.

철도 여행이 일상화되어 애초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감각이 지금은 많이 무디어졌지만, 이 책은 우리의 근대화 초기 선조들이 느꼈을 법한 감각을 재구성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현대성의 경험이 일상생활의 감각과 지각의 변화를 핵심으로 한다고 할 때, 그 감각이 일상화되는 과정을 반추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문화사적 감각이 많이 가미되었다고는 하지만,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서술 시각도 들어 있는 만큼 평범한 일반 독자가 책 전체를 집중력을 가지고 읽기는 힘들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책의 인쇄 상태가 그다지 선명하지 않아서 독서의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좀 더 뚜렷한 인쇄 방식을 썼더라면 좋았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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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월터 J. 옹 지음, 이기우 외 옮김 / 문예출판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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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마다 필독서처럼 권위를 가진 저자나 책들이 있기 마련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마샬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을 필두로 수많은 책들이 버만의 책의 후광을 입고서 출판되었는데, 옹의 이 책 역시 그 중의 한 권이다. 그런데 특별히 이 책은 대중교양서로서보다는 대학 내 필독서로서 더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테마가 인류학이나 문학, 사회과학의 관심사 중에서도 다소 특화된 분야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말과 문자는 인간 생활의 기본을 이루면서도 항상 투명하게 의식되지 않는 영역에 놓여 있다. 따라서 언어 그 자체를 논한다는 것은 적어도 의식의 차원에서는 항상 명료하지 못한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언어 그 자체를 논한다는 것이 비대중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언어가 다소간 무의식과 연계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고 할 것이다.

여하튼 문자를 통한 쓰기나 인쇄를 경험한 인간이나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가정으로부터 비롯되는 이 책의 논의는 변방의 구술 문화 속의 사람들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 자료로부터 관련 학자들의 논의에 대한 검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펼쳐진다.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의 차이를 대비 방식으로 설명해 놓은 부분과 쓰기와 인쇄가 인간의 의식이나 사고에 끼친 영향을 설명해 놓은 부분은 특별히 흥미롭다.

문자 문화 속에서 형성된 의식으로 구술 문화를 보지 말라. 이것이 저자의 핵심 전언이다. 물론 그 정도의 가르침은 현대의 현명한 다문화주의자라면 감수할 수 있는 가르침이긴 하나, 저자가 논거로 삼고 있는 수많은 자료 역시 구술 문화 그 자체가 아니라 문자와 책이라는 형태로 고정된, 말하자면 문자 문화의 더미로부터의 추측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이것은 제3세계 원주민에 대한 조사 결과를 인류의 보편적인 과거로 재구성하려는 음험한 제국주의 연구자들의 가정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연구에는 항상 차이를 논증하기 위해서 같음을 가지고 차이를 추론해 내야 한다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런 어려움은 비단 이 책만이 아니라 여러 책들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어려움이다. 한번쯤 읽어볼 책이긴 하나, 이 책과 더불어 맥루한의 <구텐베르크 은하계>를 같이 읽어본다면 좀더 유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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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회화
이토우 도시하루 / 시각과언어 / 199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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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경치를 접할 때면 사람들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한다. 인간 외부의 실제 모습을 그림에 비유할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그림은 미술 교육 과정에서 보아온 특정한 그림 유형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한 폭의 그림’이란 전통적인 산수화나 이발관에 걸리던 키치풍경화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실제를 지각하는 과정에서도 사람들은 특정한 매체에 의해 매개된 기억과 관련시키는 경우가 많다. 현대 사회처럼 이미지의 폭주로 감각에 심각한 부하가 걸리는 사회에 있어서 만약 이처럼 특정한 매체나 코드에 의해 유형화된 기억이 없다면 우리의 정신은 엄청난 혼돈에 싸여 눈을 뜬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벤야민 등 수많은 현대 사상가들이 밝혀놓은 것처럼 대도시의 개조로 인한 교통량의 폭증과 소비 공간 주도의 구조 변경은 현대도시인의 일상적 지각에 변화를 초래한 한 요인이며, 이와 더불어 기계복제 기술로 인한 이미지의 폭증은 또 하나의 심각한 변화의 요인이었다. 19세기에 발명되어 곧바로 산업화된 사진 기술은 비단 일상생활의 지각 변화와 리얼리티 감각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제 전통적으로 회화가 맡고 있는 참조의 틀이 사진으로 변했다. 그리하여 리얼리티 감각의 원천으로 여겨지던 회화는 심각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고, 지금까지와는 색다른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토우 도시하루의 이 책은 사진의 등장으로 인해 발생한 예술과 리얼리즘 개념의 혼돈, 그리고 인간의 눈과는 다른 기계의 눈의 등장으로 인하 지각과 스키마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르네상스 원근법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 탐사는 19세기의 격변과 혼란을 거쳐, 사진과 회화가 고유의 영역을 확보해 독자적인 예술 영역으로 정립된 20세기 후반까지의 변화를 개관하고 있다.

사진과 회화, 사진과 예술과 같은 테마는 해당 전공자 측에서는 보편적인 테마이지만 예술 일반이나 현대성 일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무척 흥미로운 테마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특권화된 감각으로서 ‘시각’의 전일한 힘이 행사되는 현재 상황 속에서 인간과 대상의 관계를 형성하는 특정한 체제인 리얼리즘 개념의 변화는 현대성의 전개 속에서 무척 소중한 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의 가치는 빛난다. 간명한 서술과 적절한 도판을 사용하고, 책 말미의 ‘연표/어록’은 이 책이 포괄하지 못하는 풍부하고 세밀한 개관 역할을 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기계의 눈’과 리얼리티 감각의 새로운 변화에 해당하는 영화가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저자의 애초 관심사와 목표와는 무관한 독자 개인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20세기를 전후한 가장 위대한 과학 발명인 사진과 영화는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100여 년 전 사람들이 겪었던 감각과 정체성의 혼란 이상의 변화를 겪고 있다. 컴퓨터 스크린을 매개로 한 가상 세계에서의 특정한 변화 말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이제 더 이상 인문학이나 예술이 무시할 수 없는 삶과 예술의 직접적인 환경이 되어버렸다. 보들레르가 사진에 대해 극도의 불신과 조롱을 보내면서도 예술가로서 위대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시대는 이미 그와 함께 지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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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1
레나타 살레클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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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라깡의 정신분석학 이론은 우리에게는 낯설다. 역사와 정치의 심급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데 익숙한 시각에서 정신분석학 특유의 무역사성과 병리적인 인상은 정신분석학의 최근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채 정신분석학 이론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고 있다.

지젝의 라깡 읽기와 라깡적 독해가 폭발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지젝이 라깡의 이론을 바탕으로 맑스주의의 단골 메뉴인 이데올로기를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 영상 문화와 사이버문화 일반의 현상을 읽어내는 데 정신분석학 이론이 유용한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 등을 강하게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체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는 점은 지젝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슬로베니아 라깡 학파라고 일컬어지는 일군 중에서도 유독 지젝이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니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이론가들이 있다는 점은 종종 간과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살레클 역시 그 중 한 명이다. 지젝 책은 출간될 때마다 오역의 불명예를 안고 개역판을 내야하는 시련을 겪어왔다. 그것은 비단 역자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의 지식 문화 전반의 취약성의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깡의 책도 제대로 번역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젝의 책이라고 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지젝과 관련된 불명예는 남아 있다. 최근 번역된 <믿음에 관하여>라는 책이 얼마나 오역 투성이인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한 두려움 속에서도 라깡과 관련된 관심은 더욱 왕성해지고 있다.

페미니즘 쪽에서 적극적으로 발굴한 라깡은 지젝을 비롯한 슬로베니아 학파에 이르러서 폭발적인 성과를 보여주는 듯하다. 살레클의 이 책 역시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총 7장으로 구성된 책 중 전반부는 지젝의 책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보면 된다. 소설과 영화, 유대주의에 대한 분석은 지젝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복사판이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힘은 신체예술과 음핵절제를 다룬 마지막 장이다. 이 마지막 장 하나로도 이 책은 충분히 그 값어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여성 저자가 아니라면 결코 다룰 수 없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지젝에게 있어서 기존의 페미니즘 담론은 중지되는 데 반해, 살레클에게 있어서 페미니즘과 라깡은 새롭게 통합된다. 그리고 육체와 신체의 문제는 최근의 사례를 중심으로 재구성된다. 살레클처럼 지젝 역시 생태론의 문제점을 다르고 있지만 살레클은 올렉 쿨릭의 예를 통해서 참신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지젝과 살레클, 같은 슬로베니아 학파이면서도 성이 다른 라깡주의자들 사이의 섬세한 차이를 읽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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