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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ㅣ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1
레나타 살레클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프로이트와 라깡의 정신분석학 이론은 우리에게는 낯설다. 역사와 정치의 심급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데 익숙한 시각에서 정신분석학 특유의 무역사성과 병리적인 인상은 정신분석학의 최근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채 정신분석학 이론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고 있다.
지젝의 라깡 읽기와 라깡적 독해가 폭발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지젝이 라깡의 이론을 바탕으로 맑스주의의 단골 메뉴인 이데올로기를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 영상 문화와 사이버문화 일반의 현상을 읽어내는 데 정신분석학 이론이 유용한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 등을 강하게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체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는 점은 지젝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슬로베니아 라깡 학파라고 일컬어지는 일군 중에서도 유독 지젝이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니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이론가들이 있다는 점은 종종 간과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살레클 역시 그 중 한 명이다. 지젝 책은 출간될 때마다 오역의 불명예를 안고 개역판을 내야하는 시련을 겪어왔다. 그것은 비단 역자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의 지식 문화 전반의 취약성의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깡의 책도 제대로 번역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젝의 책이라고 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지젝과 관련된 불명예는 남아 있다. 최근 번역된 <믿음에 관하여>라는 책이 얼마나 오역 투성이인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한 두려움 속에서도 라깡과 관련된 관심은 더욱 왕성해지고 있다.
페미니즘 쪽에서 적극적으로 발굴한 라깡은 지젝을 비롯한 슬로베니아 학파에 이르러서 폭발적인 성과를 보여주는 듯하다. 살레클의 이 책 역시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총 7장으로 구성된 책 중 전반부는 지젝의 책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보면 된다. 소설과 영화, 유대주의에 대한 분석은 지젝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복사판이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힘은 신체예술과 음핵절제를 다룬 마지막 장이다. 이 마지막 장 하나로도 이 책은 충분히 그 값어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여성 저자가 아니라면 결코 다룰 수 없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지젝에게 있어서 기존의 페미니즘 담론은 중지되는 데 반해, 살레클에게 있어서 페미니즘과 라깡은 새롭게 통합된다. 그리고 육체와 신체의 문제는 최근의 사례를 중심으로 재구성된다. 살레클처럼 지젝 역시 생태론의 문제점을 다르고 있지만 살레클은 올렉 쿨릭의 예를 통해서 참신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지젝과 살레클, 같은 슬로베니아 학파이면서도 성이 다른 라깡주의자들 사이의 섬세한 차이를 읽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