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과 회화
이토우 도시하루 / 시각과언어 / 1994년 4월
평점 :
품절
멋진 경치를 접할 때면 사람들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한다. 인간 외부의 실제 모습을 그림에 비유할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그림은 미술 교육 과정에서 보아온 특정한 그림 유형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한 폭의 그림’이란 전통적인 산수화나 이발관에 걸리던 키치풍경화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실제를 지각하는 과정에서도 사람들은 특정한 매체에 의해 매개된 기억과 관련시키는 경우가 많다. 현대 사회처럼 이미지의 폭주로 감각에 심각한 부하가 걸리는 사회에 있어서 만약 이처럼 특정한 매체나 코드에 의해 유형화된 기억이 없다면 우리의 정신은 엄청난 혼돈에 싸여 눈을 뜬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벤야민 등 수많은 현대 사상가들이 밝혀놓은 것처럼 대도시의 개조로 인한 교통량의 폭증과 소비 공간 주도의 구조 변경은 현대도시인의 일상적 지각에 변화를 초래한 한 요인이며, 이와 더불어 기계복제 기술로 인한 이미지의 폭증은 또 하나의 심각한 변화의 요인이었다. 19세기에 발명되어 곧바로 산업화된 사진 기술은 비단 일상생활의 지각 변화와 리얼리티 감각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제 전통적으로 회화가 맡고 있는 참조의 틀이 사진으로 변했다. 그리하여 리얼리티 감각의 원천으로 여겨지던 회화는 심각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고, 지금까지와는 색다른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토우 도시하루의 이 책은 사진의 등장으로 인해 발생한 예술과 리얼리즘 개념의 혼돈, 그리고 인간의 눈과는 다른 기계의 눈의 등장으로 인하 지각과 스키마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르네상스 원근법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 탐사는 19세기의 격변과 혼란을 거쳐, 사진과 회화가 고유의 영역을 확보해 독자적인 예술 영역으로 정립된 20세기 후반까지의 변화를 개관하고 있다.
사진과 회화, 사진과 예술과 같은 테마는 해당 전공자 측에서는 보편적인 테마이지만 예술 일반이나 현대성 일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무척 흥미로운 테마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특권화된 감각으로서 ‘시각’의 전일한 힘이 행사되는 현재 상황 속에서 인간과 대상의 관계를 형성하는 특정한 체제인 리얼리즘 개념의 변화는 현대성의 전개 속에서 무척 소중한 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의 가치는 빛난다. 간명한 서술과 적절한 도판을 사용하고, 책 말미의 ‘연표/어록’은 이 책이 포괄하지 못하는 풍부하고 세밀한 개관 역할을 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기계의 눈’과 리얼리티 감각의 새로운 변화에 해당하는 영화가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저자의 애초 관심사와 목표와는 무관한 독자 개인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20세기를 전후한 가장 위대한 과학 발명인 사진과 영화는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100여 년 전 사람들이 겪었던 감각과 정체성의 혼란 이상의 변화를 겪고 있다. 컴퓨터 스크린을 매개로 한 가상 세계에서의 특정한 변화 말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이제 더 이상 인문학이나 예술이 무시할 수 없는 삶과 예술의 직접적인 환경이 되어버렸다. 보들레르가 사진에 대해 극도의 불신과 조롱을 보내면서도 예술가로서 위대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시대는 이미 그와 함께 지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