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치가 달라졌다.

 

<쿵푸 허슬>은 기존 주성치 영화의 맥락을 이어가지만 전혀 다른 영화다.

 

주성치의 영화들을 좋아하는건 그가 아니면 절대 보여줄 수 없는 뻔뻔한 허풍과 유머 때문이다. 대놓고 실컷 웃으라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쿵푸 허슬>은 그 점에서는 전작을 잇는다. 아니, 오히려 능가한다. 그런데 쿵푸라는 액션이 추가되면서 그 성격이 좀 바뀌었다.

 

<쿵푸 허슬>에서 보이는 액션은 상당히 사실적이다. 성룡의 코믹함이나 이연걸의 부드러움보다는 이소룡 식의 정직한 액션과 비슷하다. 물론 이소룡의 흉내를 내는데서 그친다면 주성치 영화라고 할 수 없다. 액션씬의 마무리는 주성치 특유의 과장과 허풍과 유머이다. 역시 뻥이야, 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거슬리지는 않는다. 주성치가 아니면 누가 이런 상상을 하랴, 라는 생각으로 제법 유쾌하다.

 

나로서는 여기까지였으면 딱 좋았을텐데, 주성치는 좀 더 나아간다. 꽤나 센데다 잔인한 장면들이 군데군데 삽입되어 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사람을 난도질하고 (직접 보여주지 않아도 충분히 끔찍하다), 예상보다 자주 피가 튀긴다. 언제 주성치 영화에서 이처럼 사람이 죽어나가고 검붉은 피가 흥건히 고였던 적이 있었던가. 영화에서 사람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거나 피가 튀는 장면 보기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유머러스함이 없었더라면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영화관을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하나의 달라진 점은 이 영화가, 액션과 코미디 아래에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를 깔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상 스토리나 설정 자체는 유치하기 짝이 없다. 전부 어디서 본 듯한 내용 뿐이다. 어린 시절 만났던 여자아이나 크게 한탕해서 폼나게 살아보겠다는 어리숙한 건달 캐릭터도 그렇고, 심지어 강호를 떠나 숨어사는 고수들도 그렇다. 특히 주성치가 절대 고수로 거듭나는 장면은 뻔한데다 어이없을 정도다. 이건 뭐 연습이고 나발이고 필요도 없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제가 상대할게요. 라며 문을 열고 등장하는 순간, 나, 감동하고 말았다. 그가 정말로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지구를 구할 운명인 것처럼.

 

주성치가 조직을 배신하고 돌아설 때부터 이미 감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행위는 배신이라기보다는 그저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몸이 따라간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는,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잖아. 이건 아니야.라는 단순한 마음, 정의니 뭐니 들먹일 필요조차 없는.

아무튼, 이번에는 그의 영화에 감.동.했.다. 전에 없던 일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hika 2005-01-19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감동이라 하시니... ^^;

비로그인 2005-01-20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성치의 팬인데, 이번 영화는 못보겠군요, 흑흑.

sudan 2005-01-20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사람들이 유치하다하고, (나를 포함한)몇몇은 환장하던, 대략 십오년전쯤의 주성치가 좋아요.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주성치를 보게될까봐 망설였는데, 이 리뷰를 읽고 이 영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urblue 2005-01-20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님, 그러다 실망하시면, 음... 옛날의 주성치도 좋아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좋네요. 주성치에게 실망하게 될 날이 올까, 싶어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주성치라면.

처음과끝님, 저런, 시간이 안되시나요? 극장에서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안타깝네요.

시아일합운빈현님, 그쵸? 얼굴은 전혀 늙지 않은 것 같은데 흰 수염 보고 저도 좀 놀랐습니다.

치카님, 솔직히, 이런 거에 감동받는구나, 하고 혼자 좀 놀랐다니까요. ^^;
 




극장에서 보면서도 그랬지만, <왕의 귀환>의 진정한 주인공은 프로도도 아라곤도 아닌, 저 샘 와이즈 갠지라는 생각이다.

충복(忠僕)이라는 느낌이 너무 강한 게 불만이긴 하지만, 샘은 평범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신의와 사랑이 어떤건지를 가장 강렬하게 보여준다. 일개 정원사에 불과한 샘이 없었더라면 프로도의 여정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는 고향에 돌아가 사랑하는 로지와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샘은, 마음의 안식을 얻지 못해 또다른 모험을 찾아 떠나는 프로도와도 다르다.

빌보가 시작한 책은 프로도를 거쳐 샘에게 건네진다. 샘은 아마 마지막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내지 않을까. 그리고 그건, 샘을 비롯한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하고 소중한 꿈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얀마녀 2005-01-15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샘의 귀환이었죠. ^^

urblue 2005-01-1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맞네요, 샘의 귀환! ^^

2005-01-17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화평론가 김봉석이 <쿵푸 허슬>로 귀환한 ‘주성치월드’를 사랑하는 이유

주성치가 쿵후영화를 들고 한국을 찾아왔다. 2002년 <소림축구>로 처음, 폭이 넓은 한국 관객과 만났던 주성치는, 다시 한번 쿵후의 부흥을 꿈꾸는 그만의 소망을 스크린 위에 비급처럼 펼쳐 보이고 있다. 주성치가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쿵푸 허슬>은 갱이 되고 싶은 청년 싱이 희생과 정의와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전설로만 전해지던 무공 여래신장을 터득하는 영화. 중국 상하이에서 극비리에 촬영된 <쿵푸 허슬>은 이소룡을 숭배해서 무도인이 되고자 했던, 그리고 결국엔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던, 주성치의 오랜 꿈이 결정으로 맺힌 영화다. “진지한 쿵후액션영화” <쿵푸 허슬>에 홍콩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부어넣은 그는 지금 또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소림축구>의 사형사제들과 칠소복의 일원이었던 원추를 거느리고 한국에 도착한 주성치를 만났다. 편집자

나는 주성치 마니아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주성치를 좋아한다, 믿는다. 그의 영화가 나온다면, 장르가 무엇이건 본다. 어떤 이야기이건 무조건 본다. 주성치가 출연한다면, 일정 정도의 즐거움은 확보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건 성룡이나 이연걸의 영화도 마찬가지이지만, 조금 차이가 있다. 성룡이나 이연걸에게 기대하는 것은 액션이다. 지나친 특수효과만 쓰지 않는다면, 영화가 엉망이어도 그들의 액션만 많이 볼 수 있다면 대체로 만족한다. 주성치는 액션배우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쿵푸 허슬> 이전까지는 아니었다. 주성치는 말장난과 슬랩스틱으로 관객을 즐겁게 한다. 광둥어로 구사되는 고유한 개그도 희한하게 즐겁지만, 짐 캐리 이상의 표정연기와 패럴리 형제 이상의 엽기적인 상황으로 연속되는 주성치의 영화는 끊임없이 웃음을 안겨준다. 액션이 아니라 언제나 코미디로 타국의 관객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성치는 그 어려운 일을, 10년이 넘도록 꾸준히 해왔다. 주성치가 홍콩 최고의 스타를 넘어서, 전세계에 열광적인 마니아를 거느리는 배우가 된 것은 충분히 타당한 일이다.

<쿵푸 허슬>은 누구나 반기는 오락영화

하지만 주성치가 세계적인 스타가 될 수 있을까? 성룡과 주윤발, 이연걸처럼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전 세계인을 사로잡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만국공통의 액션이 아니라 각 나라, 민족에 고유한 웃음으로 승부하는 주성치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많을 때는 1년에 1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던 시절의 주성치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룡이 <프로젝트 A>로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처럼, 주성치 역시 착실하게 자신의 왕국을 건설해왔다. 아니 이미 이루어졌다. <도성> <도학위룡> <무장원소걸아> 등 히트작을 양산하던 주성치는, 마침내 1994년 <007 북경특급>에서 이력지와 공동연출을 하게 된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직접 만들게 된 주성치는, 언제나 꿈꾸어왔던 ‘쿵후’를 <소림 축구>와 <쿵푸 허슬>에서 주요한 소재로 사용하게 된다. 아니 쿵후의 정신을 그대로 영화에 담게 된다.

주성치 특유의 웃음에, 고난도의 액션이 더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쿵푸 허슬>에서 어린 싱이 거리에서 비급책을 사서 연습하는 장면은, 주성치의 어린 시절 그대로다. 주성치의 꿈은, 이소룡 같은 액션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어린이 쇼의 사회자를 맡으면서 천부적인 유머감각을 선보이고 최고의 코미디 배우가 되었지만, 결코 꿈은 버리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쿵후 영화’를 만들 날을 기다렸다. 주성치는 이미 최고였지만, 너무나도 신중하고 철저했다. <쿵푸 허슬> 전까지는, 단지 ‘자신감이 없어서’ 쿵후 영화에 도전하지 않았다니까. 그 먼 길을 돌아올 정도로 주성치는, 섬세한 완벽주의자다.

주성치를 만나면, 그가 얼마나 유머가 넘치는 한편 철저한 인간인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한때 은인이었던 이수현을 비롯하여 이력지, 오맹달과도 헤어진 주성치는 ‘인간관계가 서툴다’라는 말을 듣는다. ‘고독노인’이란 별명처럼, 그는 모든 것을 생각한다. 인터뷰에서도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 신중하게 자신이 할말을 고르고, 어떤 선까지만 이야기를 한다. 타인을 웃기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다. 생각이 없거나, 너무 많거나. 주성치는 명백한 후자이고, 지나칠 정도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배우이며 감독이다. 자신만의 성을 소유하고, 그 성에서 만들어낸 무엇으로 세계를 정복해가는 대중 예술가다.

컬럼비아의 자본으로, 세계시장을 목표로 만들어진 <쿵푸 허슬>은 오락영화의 걸작이다. 이소룡과 찰리 채플린을 존경한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다. <쿵푸 허슬>은 웃음과 액션, 그리고 감동까지 모든 즐거움을 안겨준다. 엽기적인 웃음의 코드를 약간 줄이고, 액션의 강도를 높인 것은 주성치의 취향만이 아니라, 일반 관객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변화다. 그동안 주성치의 영화에 대한 반응은 극단적이었다. 너무 좋아하거나, 썰렁하거나.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주성치 영화는, 한국에서는 열광적인 마니아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소림축구>가 그런 선입견을 깼고, 마침내 <쿵푸 허슬>은 누구나가 반기는 오락영화가 되었다.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는, 좋은 의미로 할리우드적이 된 것이다. 할리우드영화의 패러디를 넣은 것이 단지 ‘보편적인 커넥션’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쿵푸 허슬>은 누구나가 알고 있고, 누구나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과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다. 무협지의 전통적인 플롯으로, 한때 길을 잘못 들었지만 회개하면서 최고수가 되는 남자의 역경이 그려진다.

우리의 꿈, 아픔을 웃음으로 뒤집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이 승리한다. 혹은 ‘사랑’이 승리한다. 권선징악은 너무나 뻔한 것이지만,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초현대적인 영웅이라면, 일면적인 선과는 약간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악인지, 선인지 구분하기 힘든 주인공들은, 세기말부터 꾸준하게 영역을 넓혀왔다. 그런 복합적인 영웅이 매력적인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도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라는 대사, 단지 사랑을 위하여 대의를 저버리는 <연인>의 인물들에게 끌린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이나 사랑을 위하여 헌신짝처럼 세상을 버릴 수 있는,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저버리는 영웅도 이제는 너무나 흔하다. 그게 옳다고 우길 생각도 없다. 그보다는 <쿵푸 허슬>의 싱처럼, 폼나게 살고 싶었지만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생명, 사랑을 어느 순간 깨닫는 영웅이 더욱 가슴을 울린다는 것을 안다. 결국은 돌아와야만 하고, 결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진리, 혹은 사랑이 있음을 깨닫는 영웅이, 21세기에는 필요하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주성치가 말하는 ‘쿵후’의 정신이다. 선이 악을 물리치고,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것.

주성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이야기를 해왔다. 언뜻 보기에는 너무 특별한 이야기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장 전통적인 이야기들을. 주성치 영화에 나오는 인물은 소시민 혹은 빈민층이거나 정상의 자리에서 순식간에 구렁텅이로 떨어져내린다. 그 바닥에서 절치부심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어가며 다시 시작한다. <쿵푸 허슬>에서 독사에게 입술을 물리거나, 야수에게 두들겨맞는 것 정도는 이전 주성치 영화의 고난과 비교해본다면, 정말 사소한 걸림돌 정도다. ‘나는 코미디를 엄숙한 제재를 사용하여 연기한다’는 말처럼, 주성치는 가장 아프고, 힘든 이야기를 코미디로 바꾸어버린다. 그 깊고도 섬세한 내면으로 들어가도 좋고, 아니어도 그냥 웃을 수 있다. 주성치 영화의 ‘가장 큰 감동은 소인물의 감정과 소시민의 마음의 소리’라는 말처럼, 그의 영화에는 작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한껏 담겨 있다. 그것이 바로 주성치를 최고의 스타로 만들었고, 이국에서도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으며, 지금 <쿵푸 허슬>이란 걸작을 만들어낸 힘이다.

지금 주성치는 또 한 단계를 넘어서,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원하는 것은, 매년 주성치의 영화를 보는 것뿐이다. <소림축구>에서 <쿵푸 허슬>까지, 3년이란 세월은 너무 길었다. 주성치의 진지한, 혹은 진지하지 않은 ‘쿵후 영화’를 다시 만나고 싶다.

 
글: 김봉석 영화평론가 | 사진: 이혜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두 개의 탑 확장판>을 보다. 아라곤 너무 멋지다!!

게다가 이 배우, 비고 모르텐슨도 엄청 매력적인 인물. 대학에서 스페인 문학을 전공했는데, 영어 뿐 아니라 스페인어로도 시집을 냈다고 한다. 시인에 화가에 사진작가에 음악가에 배우라니. 예술적 재능을 한 몸에 타고난걸까.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아라곤,비고 모르텐슨 (씨네21)
“내일 당장 뉴질랜드로 가줄 수 있어?” 1999년의 여름, 에이전트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비고 모르텐슨은 그저 ‘괜찮은 배우’였다. 1985년 <위트니스>에서 아미쉬 농부 역으로 데뷔한 이래, <퍼펙트 머더>에서 기네스 팰트로의 정부 역할이나 < G.I. 제인>에서 드미 무어를 괴롭히는 엄한 교관 역 등을 맡아왔지만 조연인 그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뉴질랜드에서 촬영을 준비하던 <반지의 제왕> 제작진으로부터 급작스런 출연제의를 받았던 것은 행운일지 모른다. 애초 이 영화에서 아라곤 역은 스튜어트 타운젠드라는 아일랜드 배우의 몫이었지만, 프리 프로덕션 도중 피터 잭슨 감독은 아라곤이 이 26살짜리 배우가 맡기에는 너무 큰 역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르텐슨은 비록 교체 멤버였지만 제작진들로 하여금 ‘드디어 임자가 나타났다’는 환호를 지르게 했다. ‘수수께끼 같은, 수심에 잠긴, 잘생긴’. 당초 아라곤 역을 캐스팅할 때 지침으로 삼았던 이 세 가지 형용사가 모르텐슨 안에 절묘하게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텐슨과 아라곤은 이미지에서만 유사한 게 아니었다. 뉴질랜드에 도착한지 이틀 만에 가진 첫 촬영에서 그는 완전한 아라곤의 모습이 돼 있었다. 피터 잭슨은 “촬영이 시작되자 비고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아라곤과 동일화됐다”고 설명한다. 모르텐슨의 아라곤으로의 ‘변신’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어느 날 잭슨은 모르텐슨을 식당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 뒤 그의 머릿속으로 뭔가 스쳐갔다. “30분 동안이나 이야기하면서 나는 계속해서 그를 ‘아라곤’이라고 불렀고, 그 역시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심지어 ‘촬영 기간 내내 모르텐슨이 아라곤의 갑옷을 입고 칼을 옆구리에 낀 채 매일 숲에서 잠을 잤다’는 기사가 일부 신문에 보도됐을 정도. 아라곤이 된 모르텐슨은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스턴트맨이 자신 대신 아라곤이 돼 숲을 누비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 탓인지, 몇 장면을 제외한 대부분의 액션장면에서 그는 직접 칼을 휘둘렀다. 말 타는 것을 좋아하는 그가 특별히 요청해 시나리오도 일부 바뀌었다. 격한 전투신을 찍다가 상대 배우의 실수로 앞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을 때 그가 부러진 이를 들고, “강력접착제로 붙인 뒤 촬영을 계속하면 안 될까”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촬영장의 전설이 됐다. 모르텐슨의 열정은 어둠의 세계로부터 중간대륙을 지켜내겠다는 아라곤의 불굴의 투혼과 견줘도 부끄러울 게 없어 보인다.

이처럼 헌신적인 그의 연기는 44년 동안의 만만치 않은 삶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덴마크 출신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모르텐슨은 부친의 사업 때문에 유년 시절을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 라틴아메리카 일대에서 지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할아버지의 농장이 있는 덴마크에서 사촌들과 함께 살며 웨이터, 돼지운반 트럭운전사, 꽃 판매 등의 일을 했다. 뉴욕으로 돌아와 연기생활을 시작한 85년부터 10년 동안 그의 연기자 인생도 그리 화려하진 않았다. 출연 제의가 많지 않았고, 맡은 역의 비중도 작아 웨이터, 바텐더, 트럭운전사로 돌아가야 했다. 이 와중에 그에겐 악역이 많이 주어졌지만, “아직까지 내가 싫어하는 캐릭터를 연기한 적은 없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팍팍한 삶으로 여러 계층의 타인들을 잘 이해하고 있던 그는 매 작품에서 성실함을 보여줬다. <퍼펙트 머더>에 출연할 때 영화 속 주인공처럼 브루클린의 아파트를 빌려 살았다는 이야기에서처럼, 그를 아라곤으로 만든 진정한 힘은 영화 속 캐릭터가 되기 위해 자신을 과감히 버리는 노력이었다.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은 그를 명실상부한 액션영웅의 자리에 올려놓을지도 모른다. 반지의 저주로 괴로워하는 프로도 대신, 그는 악의 무리에 맞서 온몸을 던져 중간대륙을 수호한다. 개미떼처럼 헬름 협곡으로 밀려오는 오크족에 맞서 영웅스런 전투를 펼치는 그의 모습은 천하를 호령하던 여포나 조자룡을 떠오르게 한다. 강인한 얼굴과 단단한 체격, 뛰어난 승마능력을 갖춘 그는 내년 <반지의 제왕> 3편과 서부극 <알라모>, 사막의 말 경주에 출전한 한 우편배달부의 이야기 <히달고>에서 여전히 용맹스런 기상을 뽐내게 된다. 하지만 그가 다른 액션스타처럼 근육에 비해 뇌가 너무 작은 ‘전투기계’로 전락할 것이라고 짐작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그는 지적이면서 매력적인, 새로운 개념의 액션영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뉴욕에서 전시회를 연 경력을 가진 사진작가이며, 시집을 낸 적 있는 시인인데다, <퍼펙트 머더>에서 실제로 벽화를 그렸을 정도의 화가이고, 여러 장의 음반을 낸 음악가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아들 헨리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는 게 싫어 <반지의 제왕> 출연을 거부하려 했던, 그리고 어딘가 머물기보다는 “희망차게 여행하는 과정을 가장 좋아한다”는 ‘진짜 비고 모르텐슨’의 모습이 그런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IshaGreen 2005-01-09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비고 모르텐슨 넘 멋있네요 저 이 배우 넘 좋아요 >_<

이맘때쯤 반지의 제왕 4탄이 개봉하고 지난 3년간 그래왔듯이

영화관에서 3번씩이나 봤어야 했을 기분이 드는데

넘 허전하네요 잉잉...ㅠㅠ

urblue 2005-01-10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봐도 너무 재밌네요. 게다가 영화에는 없었던 추가된 부분도 좋구요.

아라곤 나이가 87세라고 합니다. 큭..

chika 2005-01-10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반지전쟁 개봉했을 당시 이 배우 인터뷰기사를 본 적 있는데, 꽤 멋있는(?) 말을 많이 했던거 같아요. 의식있게 사는 삶이 보였던거 같아서 정말 '아라곤'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ㅎㅎ

멋있어요~ ^^

mira95 2005-01-10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아라곤이닷 >.< 블루님 저 이거 퍼갈래요^^
 



 

재미있게 보고 딴소리 하기.

 

진정한 남자가 되고 싶다면 내 배로 와라.

그것이 남자다.

그는 그런 사나이다.

 

남자, 남자, 남자. 아우, 지겨워 죽겠다.

아들을 부탁하면서, 진짜 남자가 될 싹수가 보이지 않으면 죽여달라 부탁하는 아버지라니. 그러고도 남자냐?

여자에 관한 말 나오긴 한다. 미메의 대사. '나는 하록에게 목숨을 바친 여자.'   -_-

으악, 제발, 좀 살려달라구~~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반딧불,, 2005-01-09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어쨌든 하록선장...재밌게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참..잘 받았습니다. 도대체 정체를 짐작 못할 물건이 두개가 얹혀있어서

누가 보내셨나 한참 고민했었다지요..고맙습니다. 잘 읽을께요.

urblue 2005-01-09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저도 재밌게 봤습니다. ^^

박스가 너무 크길래 좀 채우려고 넣었어요.

욕심내셨으니까 책도 재미있게 잘 읽으셔야 합니다~

2005-01-11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