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은 이 영화를 온전한 인간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신들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파리스가 헬레네의 사랑을 얻게 되었는지, 헬레네가 어떻게 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었는지 부터 일일이 설명해야 할 테고, 10년간 계속된 전쟁을 길어야 3시간인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영화에서 신들은 사라졌다. 아킬레스의 어머니 테티스가 잠깐 등장하지만, 그것도 신으로서 라기 보다는 그저 현명한 여인 정도로 보인다. 신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트로이 전쟁의 두 영웅, 아킬레스와 헥토르이다.
영화는 아킬레스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가장 뛰어난 무장이지만 싸우는 것을 귀찮아하고, 사람들이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전쟁에 나갈 뿐, 권력욕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없다. 오히려 무정부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그러나 사상 최대의 전쟁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려는 욕망으로 트로이 전쟁에 참가한다. 이는 헐리웃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감독이 상당히 편애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는 헥토르는 지나치게 완벽한 캐릭터이다. 백성과 나라를 사랑하는 트로이의 왕자이고, 전쟁터에서는 명장이며, 아버지에게 훌륭한 아들에, 아내와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가장이자, 동생의 허물까지 감싸안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헥토르가, 죽을 줄 알면서도 아킬레스와 싸우러 나가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그를 동정하고 그의 편에 설 수 밖에 없다.
두 영웅에게 너무 집중한 나머지, 다른 인물들은 평면적이고 도식적이다. 헬레네의 남편인 메넬라오스나 아가멤논은 그저 탐욕스러운 평범한 모습이고, 오디세우스의 역할은 상당히 축소되었다. 트로이의 군주 프리아모스는, 어째서 두 번이나 아들들의 말을 듣지 않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채, 우유부단함만을 보여준다. (다만 헥토르의 시체를 찾기 위해 아킬레스의 발 아래 무릎 꿇는 장면은 상당히 훌륭했다.)
163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상당 부분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브리세이스에 대한 아킬레스의 사랑이나, 결투에서 도망친 겁많은 파리스가 갑자기 용감한 명사수가 되는 것은 생뚱맞다. 탄탄한 스토리 대신 거대한 스케일의 전투 장면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은데, 바다 위에 떠 있는 천 여 척의 배가 장관이긴 하지만, 해변 전투나 성 앞의 전투 모두, 이미 <반지의 제왕>으로 눈이 높아진 관객들에게, 뭐 그럭저럭, 정도의 평가밖에 얻어내지 못할 듯 하다. 오히려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결투씬이나 '목마' 자체가 훨씬 멋지다.
내게는 그닥 만족스럽지 않았으나, 어쨌든 이 영화는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저 거대한 <일리아드>에서 인간이 중심이 된 이야기를 뽑아냈으며, 두 영웅-특히 헥토르-을 멋지게 살려냈다. 게다가 브래드 피트와 에릭 바나라는, 잘 생긴 배우를 둘씩이나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