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렉>은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중 하나다. 험악한 표정을 지어보이지만 동화의 주인공들에게 집을 빼앗기고 마는, 어수룩한 슈렉과, 멋진 왕자님의 키스에 잠에서 깨어나는 공주 역할을 하고 싶어 실눈을 뜨고 슬쩍 입술을 내미는 왕 내숭 피오나 공주. 이들의 만남부터 엽기적인 애정 쌓기의 과정, 그리고 마침내 사랑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는 빈틈없이 촘촘하고, 에피소드는 참신한데다 위트 넘치며, 각 캐릭터의 개성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게다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결말에 이르면, 그간 디즈니의 천편일률적인 애니메이션이 주지 못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당연히 <슈렉 2>는 올 여름 내가 가장 기다리던 작품이다. 월드 프리미어 시사회의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이었고, 국내 언론들도 열광적인 칭찬과 환호를 나타냈다. 디즈니를 넘어, 이번에는 헐리우드 자체를 풍자한다고 했고, 30여 편의 영화 장면이 패러디되어 보는 재미도 있다고 했다. 특히 새로운 캐릭터 장화신은 고양이를 언급할 때면, 기자들이 몽땅 쓰러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호들갑을 부렸다.

영화를 보면서, 제법 웃었다. 그러나 그건 1편을 보았을 때의 웃음과는 종류가 다르다. 전편이 풍자와 위트에서 비롯되는 통쾌한 웃음을 선사했다면, <슈렉 2>는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즉각적인 웃음만을 안겨준다. 그래, 영화를 보면서 웃는다. 그런데 그 다음은?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모든 것이 잊혀진다. 문득 생각나서 혼자 키득거릴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

헐리우드를 풍자했다고? 헐리우드의 거리와 유명 브랜드, 팝 가수의 이미지를 보여준다고 그게 풍자인가? 피오나의 아버지를 포함한, 겁나 먼 왕국의 모든 사람들이 슈렉과 피오나의 못난 모습에 실망한다고 풍자가 될 수 있나? 뭐, 물질 만능과 외모 지상 주의에 기반한 행복론을 펼치는 요정 대모가 이 자본주의 시대의 총아인 헐리우드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수많은 영화를 흉내낸 장면들을 보다 보면, 당신들, 그렇게 말하면서 헐리우드를 너무 잘 이용하는 거 아니야? 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 많은 장면들이, <무서운 영화>와 뭐가 다른지 알 수 없다.

물론 영화는 전편과 마찬가지로 외모로 사랑과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진리를 설파한다. 그런데, 꼭 이런 느낌이란 말이지. 누군가 어떤 얘기를 진지하게 하고 있는데, 그걸 듣고 있는 나는, 그래, 그거 지난 번에 말했잖아. 그래서 다음은, 다음은 뭔데? 하고 채근하고, 상대방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게 다야 라고 대답하는 상황. 너무 많은 걸 기대한 걸까.

누군가 그렇게 썼다. 커다랗고 촉촉한 눈망울로 관객을 올려다보는 고양이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싶어진다고. <슈렉 2>의 제작자들이 원한 게 바로 그거였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깜찍하고 발랄한데, 좋아해 주지 않을거야? 몰라. 나는 살짝 삐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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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이 영화를 온전한 인간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신들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파리스가 헬레네의 사랑을 얻게 되었는지, 헬레네가 어떻게 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었는지 부터 일일이 설명해야 할 테고, 10년간 계속된 전쟁을 길어야 3시간인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영화에서 신들은 사라졌다. 아킬레스의 어머니 테티스가 잠깐 등장하지만, 그것도 신으로서 라기 보다는 그저 현명한 여인 정도로 보인다. 신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트로이 전쟁의 두 영웅, 아킬레스와 헥토르이다.

영화는 아킬레스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가장 뛰어난 무장이지만 싸우는 것을 귀찮아하고, 사람들이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전쟁에 나갈 뿐, 권력욕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없다. 오히려 무정부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그러나 사상 최대의 전쟁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려는 욕망으로 트로이 전쟁에 참가한다. 이는 헐리웃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감독이 상당히 편애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는 헥토르는 지나치게 완벽한 캐릭터이다. 백성과 나라를 사랑하는 트로이의 왕자이고, 전쟁터에서는 명장이며, 아버지에게 훌륭한 아들에, 아내와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가장이자, 동생의 허물까지 감싸안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헥토르가, 죽을 줄 알면서도 아킬레스와 싸우러 나가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그를 동정하고 그의 편에 설 수 밖에 없다.

두 영웅에게 너무 집중한 나머지, 다른 인물들은 평면적이고 도식적이다. 헬레네의 남편인 메넬라오스나 아가멤논은 그저 탐욕스러운 평범한 모습이고, 오디세우스의 역할은 상당히 축소되었다. 트로이의 군주 프리아모스는, 어째서 두 번이나 아들들의 말을 듣지 않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채, 우유부단함만을 보여준다. (다만 헥토르의 시체를 찾기 위해 아킬레스의 발 아래 무릎 꿇는 장면은 상당히 훌륭했다.)

163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상당 부분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브리세이스에 대한 아킬레스의 사랑이나, 결투에서 도망친 겁많은 파리스가 갑자기 용감한 명사수가 되는 것은 생뚱맞다. 탄탄한 스토리 대신 거대한 스케일의 전투 장면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은데, 바다 위에 떠 있는 천 여 척의 배가 장관이긴 하지만, 해변 전투나 성 앞의 전투 모두, 이미 <반지의 제왕>으로 눈이 높아진 관객들에게, 뭐 그럭저럭, 정도의 평가밖에 얻어내지 못할 듯 하다. 오히려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결투씬이나 '목마' 자체가 훨씬 멋지다.

내게는 그닥 만족스럽지 않았으나, 어쨌든 이 영화는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저 거대한 <일리아드>에서 인간이 중심이 된 이야기를 뽑아냈으며, 두 영웅-특히 헥토르-을 멋지게 살려냈다. 게다가 브래드 피트와 에릭 바나라는, 잘 생긴 배우를 둘씩이나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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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나 배우 입장에서 이 영화를 '영화'라고 부르기에는 좀 쑥스러운 감이 있지 않을까 싶다. 스토리도, 캐릭터도, 연기도 필요하지 않으니 말이다. 오로지 주연 배우의 액션 뿐, 다른 건 액션을 보여주기 위한 소품일 따름이다.  오죽하면 주인공이 보여주는 액션 장면을, 앵글을 달리해 세 번씩 보여주겠는가. 무슨 컴퓨터 게임도 아니고. 그런데 이 영화의 평은 상당히 좋다. 처음부터 내용을 기대한 사람은 없으니까, 제대로 된 액션만 있다면 좋아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일단 토니 쟈의 액션은, 기존의 배우들이 보여준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연걸이나 성룡, 심지어 이소룡의 액션도 그것이 연출된 것이라는 게 보인다. 무술 동작은, 각각 특징이 있긴 하지만, 상당히 유연하고 매끄럽게 이어진다. 이들과 싸우는 적들이 이들에게 맞고 쓰러져도, 그 유연함 혹은 과장된 움직임 때문에 별 생각없이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토니 쟈는, 이 사람의 액션은, 나로서는 무섭다.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동작이 아니라, 실제로 그럴 것이라는, 그토록 무참하게 사람을 때리고 상처입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가, 하는 감탄과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교차한다. 그러니 '리얼 액션'이 맞긴 하다. 액션에도 나름의 철학과 미학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도 액션에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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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4-05-27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그 이유때문에 '옹박'이 나름대로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속임없이 진지하게 액션을 표현한 영화가 최근에 있었던가요? ^_^

urblue 2004-05-27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가 좋다 나쁘다, 혹은 잘 만들었다 아니다,를 떠나서, 전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진짜 무서웠거든요. ^^;
 


언젠가 TV에서 사람의 피부를 확대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해도, 그 피부를 확대해 보면 보이는 거라고는 털과 모공에 쩍쩍 갈라진 듯 보이는 표피뿐이고, 심지어 섬모충인지 뭔지 하는 벌레까지 기생하고 있다.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것을, 굳이 커다랗게 확대해놓고는, 봐라 이게 진실이다, 라고 말하는 악취미. 딱 홍상수식 영화다. 그의 영화는 보는 사람을 내내 불편하게 만든다. 친구는 그가 잘난 척 해서 기분 나쁘다고 말한다. 나는 그가, 잘난 척 한다기 보다 지독히도 잔인하다고 느낀다. '니들은 사랑이라고 말하지, 근데 봐, 니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게 저런 거야. 저 모습이 아름답니?' 홍상수에게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생활의 발견>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영화를, 나는 내내 인상을 쓰고 봐야만 했다. 그가 들이대는 현실이 너무나 선명해서, 외면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던 거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전작들과 비교해 보여주는 내용 자체는 다르지 않다. 욕망을 좇으면서 그럴싸하게 포장하려 하고, 뻔히 보이는 잔머리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암투까지. 그런데 어쩐지 난 킬킬거리며 영화를 봤다. 경쾌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현미경을 바짝 들이대며 사실을 확인할 것을 종용하는 게 아니라,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웃기지 웃기잖아, 하는 것 같다. 잔인함이 덜해 졌다고나 할까.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뀐건지, 내가 나이를 먹은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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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사기' 혹은 '도둑질'에 관한 장르 영화가 몇 편 나왔던 걸로 기억하지만, 극장에서 본 건 하나도 없다. (비디오나 케이블 TV에서 본 것도 거의 없다.) 이러한 영화의 기본은 '관객의 뒤통수 치기'인데, 그걸 성공적으로 해낸 영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영화의 평은 '뻔하다', '범인이 보인다', '엉성하다' 등이었다. <유주얼 서스펙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오션스 일레븐> 정도는 되어야 볼 맛이 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리얼 사기극을 표방하는 <범죄의 재구성>을 볼까 말까 잠깐 고민했다. 일단 시사회의 반응은 좋았다는데, 과연 2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을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친구가, 배우들의 면면을 봐서라도 보자고 잡아끌지 않았으면, 아마 비디오로도 보지 않았을 거다.

결과? 재밌다. 시나리오 쓰는데 공을 들였다더니, 과연 탄탄하다. 잘 짜여진 구성은,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한다,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느슨하지 않게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독특한 설정이나 치밀한 전략 같은 것으로 관객들과 두뇌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너무 티나지 않게, 요모조모 보여주고 설명하면서 쉽게 따라갈 수 있는 재미를 선사한다. 사기꾼들에게서 직접 배웠다는 전문용어조차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사용되고, 그래서 유머러스하다. 어쨌거나 한국 영화에서 익숙치않은 장르 영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고 평할 수 있다. (특성 상 영화 내용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멋진 배우들인 것 같다. <지구를 지켜라>로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한 백윤식의 연기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나이들고 망가진 사기꾼을 그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있을까. <장화, 홍련> 이후 연기에 물이 올랐다는 염정아 역시 꽤나 멋지다. 영화에서는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약간 옆으로 비껴있긴 하지만, 요염하면서 어리숙한 삼류 사기꾼을 보는 것도 즐겁다. 박신양의 1인 2역은, 썩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보였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박신양을 보면서 생각하는 건데, 배우에게는 중요한 덕목이 두 가지인 것 같다. 첫째는 물론 연기력이요, 둘째는 시나리오를 읽는 눈이다. 자신에게 들어오는, 혹은 충무로에 나오는 여러 시나리오 중 자신에게 맞는 걸 골라내고, 그 배역을 통해 커리어를 넓혀가는 능력이 배우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거다. 한석규 같은 배우를 보면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한석규라는 배우는 과대 포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썩 훌륭한 배우라기 보다는, 적절한 시나리오를 골라 적절하게 스텝을 밟은 배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매니저이자 시나리오를 고르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작은 형에게 모든 공을 돌릴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박신양의 행보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좀 더 연기력이 요구되는 좋은 작품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편지>에 이어 계속 시시한 멜로 영화에만 출연하다보니 그의 이미지는 그냥 평범하고 부드러운 남자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선택한 게 <달마야 놀자>라니.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번 <범죄의 재구성>은 그에게 다른 영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가 좀 더 나은 배우가 되기를 바란다. (사실은 예전에 이 배우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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