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눈이 내렸다고 하는데 대구는 어제 오늘 참 따뜻했다. 어떤 참 괜찮은 책을 쓴 ㄷ작가님께서, 눈이 오는 도시에서 어젯밤 즐거웁게 시전한 폭풍음주의 결과, 그렇게 참석하길 원하였으나 결국 그럴 수 없었던 어떤 강연자리에 syo를 파견하였다. 



사명감에 불타는 syo는 친구 '三'(3명이 아니라 이름입니다)과 함께 강연자리에 잠입, 구석에 조용히 찌그러져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왔다. 


최초에 이 잠입작전을 기획하였을 때, 우리는 과연 이 자리에 몇 명의 남성이 참여할 것인가를 놓고 내기를 벌였다. ㄷ작가님이 재빨리 syo와 三을 포함해서 2명이 참여할 거라고 배팅하였다. 한발 늦은 syo는 syo와 三을 제외하고 0명이 참여할 거라고 배팅하였다. 뭔 내기가 이래. 의미 없는 승패공동체가 탄생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우리의 패배였다. 총 5명의 남성이 그 자리에 있었다. 보수의 심장 대구에서, 최근 핫하게 부상한 '그' 감별사님의 고향인 대구에서. 그리고 올해 하반기가 그 감별사님의 시간이었다면, 상반기 이 땅을 점령한 최고 힙한 남자 서석구 변호사님께서 오늘도 동대구역 앞에서 "박근혜대통령 인권유린 규탄 및 무죄석방 촉구 천만인 서명운동"이라는 행사판을 벌이고 있다가 syo의 여자친구에게 촬영되어 카톡방의 우스개로 소비되고 마는 여기, 바로 이 대구에서 열린 페미니즘 강연에, 심지어 『헬페미니스트 선언』의 저자가 여는 강연에 남자 5명이 참여하다니! 그간 syo가 이 땅을 너무 척박하게만 여겼던 것일까. syo와 三을 제외한 다른 세 명의 남성 중 둘은 각자의 여자친구와 동석했고, 범상치 않은 포스를 풍기는 한 분은 혼자 자리를 빛낸 듯했다. 멋있엉.


한 시간 삼십 분의 폭풍같은 강연이 이어지는 동안, syo는 입을 떡 벌리고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그러다 입이 마르면 커피를 쪽 빨거나, 옆자리에 앉은 대학생 분들의 아광속 필기에 감탄하여 또 입을 떡 벌리거나, 그러다 입이 말라서 다시 커피를 쪼옥 빨거나 하다가, 아, 맞다, 숨, 숨 쉬어야지, 후하후하, 이러고 있었다. 三은 주로 작게, 가끔은 크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여긴 그럴 대목이 아닌데 싶어 자꾸 쳐다보았지만, 안경 다리에 가린 이놈의 눈이 떠져 있는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강연장을 나와 커피를 마시며, 너 아까 졸았지, 추궁해 보았는데 뻔뻔하게도 자긴 강의를 다 들었다고, 내용을 다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윤김지영 선생님은 지가 다 안다고 주장하는 남자를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장내는 시종일관 열기로 가득했다. 특히 질문 시간에는 syo는 생각도 한 번 못 해봤을 정도로 다양한 질문, 그러나 그것은 syo가 남자라 그럴 뿐, 여성 입장에서는 너무도 생활세계밀착형인 질문, 그러니까 상처나 흉터를 보여주는 질문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최초로 질문한 분은 늦은 나이에 제도권 교육기관에서 이론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말잔치 용어잔치의 홍수 잠겨 지내다 보니 전투성이 상실되고 있음을 토로했다. 아닌데. 그 눈빛, 아무것도 상실하지 않으셨던데요. 잘 하고 계시던데요. 어느 젊은이는 남자 친구들의 "난 아닌데, 나한테 왜 이래." 화법에 질려 있었다. 선생님은 '무지의 특권'을 지적하셨고, 모두 빵 터졌다. 三은 그 와중에도 한 타이밍 늦게 웃고 말았다. 어휴. 이런 사랑스런 모질이를 봤나. 심각하고 심오한 질문들도 많았다. 어떤 참석자는 여성운동과 성소수자 운동 양쪽에 조금씩 끈이 있는데, 그 사이에서 방향성을 정확하게 설정하는 데 어려움을 토로했다. 어떤 참석자는 성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조금씩 페미니즘에 눈을 뜨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자신의 경제적 입장이 가부장제의 부속품처럼 느껴지는 바, 과연 스스로 페미니즘 담론에 목소리를 내도 괜찮을까를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남자인 syo가 할 수 있는 질문이 얼마나 있겠으며 그 질문의 무게가 되면 얼마나 되겠는가 싶어 망설이고 있는 사이, 혼자 온 남자 참석자에게 질문을 스틸당하고 말았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아, 저거 내 건데. 할 게 저거 말고는 없는데. 까비. 의외로 선생님께서는 남성 페미니스트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대답하셨다. 중요한 것은 경청의 자세. 그리고 내부 고발자의 스탠스라고 조언하셨다. 그렇구나. 그렇긴 한데, 이제 난 뭘 물어보지? 머리를 싸맨 끝에 나온 syo의 질문은 쓸데없이 구구절절했으나 요약하자면 뭐 이딴 것이었다.


"유모와 박모는 운동에 얼마나 큰 똥을 싼 건가요. 제 친구놈이『82년생 김지영』을 권해 온 여자친구와 대판하고 돌아와서 툴툴 거리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건 뭐 전형적이고 고전적이며 상투적인 남자들의 반응에서 1도 벗어나지 않았는데, 아무리 말을 해도 이건 내 가치관이니까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대답만 하는데, 그렇다면 얘는 버리고 가야 하나요, 버리고 갈 밖에 답이 없는 자가 있다면 그 기준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syo가 입을 떼니까, 순간 시선이 이쪽으로 와르르 꽂히는데, 그게 뭐라고 또 와르르 쫄렸다. 선생님이랑 눈 맞추는 척 했지만, 곁눈으로 다 보이잖아. syo의 시야는 왜 이렇게 쓸데없이 광활한가. syo의 배짱은 또 뭐 이렇게 협소한가. 아 쫄깃쫄깃. 말 절고 난리. 그러나 선생님은 syo의 개똥 같은 질문에도 아주 침착하게, 그들은 빅똥을 싸놨으며, 버리고 가야 할 사람을 지정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판별이 되는 셈이라 대답이 적합하지 않지만, 도대체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페미니즘에 대해 더 많이 말하는 데만 혈안이 된 자들은 같이 가기 힘들 거라고 대답해주셨다. 선생님은 참 말씀을 잘 하셨다. syo는 꼴랑 저 질문 하는데도 말이 꼬이고, 생각했던 것에서 한 문단 빼먹고, 질문하다 제 풀에 빡쳐서 평소 일기에나 쓰던 "똥", "양아치" 같은 혐오의 단어를 입에 올리고 말았으니, 아이쿠, 갈 길이 멀다 하겠다. 




헬페미니스트 선언,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

윤김지영 지음 / 일곱번째숲 / 2017


그리고 강연이 끝나고 저서에 사인을 받았다. 선생님, 이 볼펜이 겉은 검은색으로 보이나 실은 속이 빨강색입니다. 혹시 불편하시면 선생님 성함은 안 쓰셔도..... 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빨강색으로 부탁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이 근방에서 알아주는 빨갱이거든요. 아, 네......



덧.

강연 시작 전에 대구 지역에서 페미니즘 독서 모임을 하신다는 분들이 모임 명함을 돌리셨는데, 거기에는 지금까지 그 분들이 읽어온 책 2종과, 앞으로 읽을 예정인 책 10종이 기록되어 있었다. syo는 그걸 보고 오금이 저려왔다. 이 12종 가운데 하나인『제2의 성』1권을 지금 한 달이 훨씬 넘도록 제끼지를 못하고 있는데, 나머지 11종의 책 중에『제2의 성』보다 만만해 보이는 거라곤 딱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급히 고개를 쳐들어 명함을 주신 분을 보았으나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명함을 돌리고 있는 등판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 뒷모습이, 막 세상 거룩해 보였다. 와, 재야의 고수들. 


나대지 말자.




그리고 그분들 공포의 그 목록을 공개합니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성의 변증법』

마거릭 애트우드,『시녀 이야기』

실비아 페데리치,『혁명의 영점』

실비아 페데리치,『캘리번과 마녀』



케이트 본스타인,『젠더 무법자』

주디스 버틀러,『젠더 트러블』

마리아 미즈,『가부장제와 자본주의』

퍼트리샤 힐 콜린스,『흑인 페미니즘 사상』



주디스 핼버스탬,『여성의 남성성』

바바라 크리드,『여성괴물, 억압과 위반사이』

뤼스 이리가라이,『하나이지 않은 성』




시몬 드 보부아르,『제2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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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7-12-11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ㄷ 작가님이라 하면...

syo 2017-12-11 00:07   좋아요 1 | URL
짐작하시는 그 분이 맞습니다, 비연님. 두 권의 좋은 책을 상재하신 ㄷ 작가님ㅎㅎㅎㅎ

비연 2017-12-11 14:31   좋아요 0 | URL
ㅋㅋㅋ 맞군요 ㅎㅎㅎ

다다 2017-12-11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모와 박모라 하심은 ㅇㅁㅅ씨와 ㅂㄱㅂ씨 말씀이신가요? 그들은 어떤 ‘큰 똥‘을 쌌나요?

syo 2017-12-11 00:16   좋아요 0 | URL
그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선생님께서 말씀을 정말 상세하게 해 주셨거든요? 근데 질문을 마치고 나서 제가 울렁증을 진정시키느라 방심한 사이에 설명은 훅훅 넘어가고, 큰 똥을 쌌다는 결론의 말씀부터 겨우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유 모가 싼 똥은 그야말로 이 강연 자체의 주제와 완전 일치하므로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다다 2017-12-11 00:29   좋아요 0 | URL
syo님,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유 모가 그 분들이 아니었는데, 유 모가 싼 똥은 그야말로 이 강연 자체의 주제와 완전 일치한다고 하셔서요....유 모가 싼 똥이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syo 2017-12-11 00:40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소금꽃님이 제시하신 이니셜의 그 두 사람이 제 질문 속의 유 모와 박 모랑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초성이 다르네요.

그리고 제 질문 속의 유 모가 싼 똥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강연의 제목인 ˝페미니즘 감별사의 탄생˝인 것 같습니다.

다다 2017-12-11 01:00   좋아요 0 | URL
답변 감사합니다. 제가 잘못 읽었군요. 페미니즘 내부에도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존재하는데, 특히, 지정성별 남성이 다른 정치적 지향과 입장일 때, ˝페미니즘 감별사˝ 딱지를 마구 붙이는 못난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정작 섞으면 안되는 지점에서 도매금으로 난도질하는 경우 말이죠.

syo 2017-12-11 01:05   좋아요 0 | URL
제가 오해의 여지가 있게 글을 쓴 탓이지요. 한참 멀었네요. 늦은 밤이라 하루를 잘 마무리하시라고 해야 할지 잘 시작하시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소금꽃님 좋은 밤 되세요.ㅎㅎ

다다 2017-12-11 01:16   좋아요 0 | URL
아, 네, 저는 야간근무중입니다. 리뷰 잘 보고 있습니다. 소개하신 책들 참 좋은 책들이네요. 두루두루 살피시길요. 저도 꾸준히 공부하겠습니다. syo님도 굿밤이요!

다락방 2017-12-11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 쌤은 쌤이군요. 버릴 걸 결정하는 게 판별이 되는 셈이라니. 역시나 한 수 배웁니다. 전 그냥 ‘버리고 가야한다’고 내뱉었는데, 그 전에 판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야하는거네요. 이래서 더 공부하고 생각하고 들어야 하는가봐요. 강연 후기 잘 읽었어요. 트윗에서 다른 분의 후기도 봤는데 정말 제가 갔다면 좋았을 강연이네요 ㅜㅜ 놓친 거 너무 아쉬워요 ㅜㅜㅜ

syo 2017-12-11 00:42   좋아요 0 | URL
재밌었어요.
저야 뭐 개인적인 견해를 가질만한 역량이 없어서 그저 듣고만 온 셈이지만요. ㅎㅎ

다락방 2017-12-11 00:50   좋아요 0 | URL
안자고 여기서 뭐해요! 물론 여긴 쇼님 서재지만 ㅋㅋㅋㅋㅋ

다락방 2017-12-11 00:50   좋아요 0 | URL
아 맞다. 저 내일부터 다시 제2의성 읽어야겠다고 이 페이퍼 읽으며 생각했어요. 불끈!! 💪

syo 2017-12-11 01:07   좋아요 0 | URL
저도 ㅋㅋㅋㅋㅋ 아아 전 정말 먼지더라구요. 입 닫고 열공이나 해야겠어요.

evergreen-0907 2017-12-11 0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도가 다 인 것 같습니다

hellas 2017-12-11 0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무겁기도 가볍기도 하네요:):):)

syo 2017-12-11 08:07   좋아요 0 | URL
흥미진진한 강연이었습니다. 제 마음도 무겁다 가볍다 헀구요^^

cyrus 2017-12-11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생한 강연 후기, 잘 읽었습니다. 남성 페미니스트가 갖춰야 할 자세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반성해야겠어요. 페미니즘 독서모임에 syo님이 참석하신다면, 제가 syo님께 배워야 할 내용이 많아지겠어요. ^^

syo 2017-12-11 12:15   좋아요 0 | URL
ㅎㅎ 아쉽게도 전 참석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시일에 대구를 떠날 예정이라서요^^
사이러스님이야말로 얼른 철학서를 폭풍 독서하셔서 제게 배움을 주세요~

단발머리 2017-12-11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근데 대구 페미니즘 독서모임 어쩜~~ 완전 멋지네요. 저도 읽은 것 1권과 대출이력 2권이네요.
알라딘 서울 페미니즘 독서모임의 회장님은 누구시죠~~
우리도 이렇게 읽어요~~~ 확 읽어버려요!!!! (라고 <제2의 성>을 다섯달째 들고 있는 단발머리가 말합니다.)

강연 후기는 너무 생생하고 훌륭한데요,
syo님 뒷모습이라도 살짝쿵 나와야 되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도 syo님 사진이 없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7-12-11 12:41   좋아요 0 | URL
저는 앞모습 뒷모습보다 조감도로 찍은 모습이 잘생겼지요.

스카이뷰 방식으로는 촬영하지 않으시더라구요.

참 아쉽게 됐죠 뭐.



독서괭 2017-12-15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요즘 북플에 자주 못 들어와서 최근 글 위주로 보다보니 이런 좋은 글을 놓쳤었군요.. syo님 글 중에 내가 놓친 게 없나 스토킹하다가 발견했다는 건 비밀로 했어야 하나..
유모씨는 초성이 모두 같은 그분인 것 같은데 박모씨는 누군지 궁금하네요 ㅎ

syo 2017-12-15 06:34   좋아요 0 | URL
앗 스토커다. 자꾸 이러시면 고맙습니다ㅎㅎㅎㅎ

다락방 2021-02-05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내가 어떤 책을 찾다가 이 페이퍼를 다시 읽어보게 됐거든요? 아아 이런 시절이 있었지, 이런 시절이 있었다..하고 재미있게 읽었단 말야? 그러다 공포의 리스트를 똭 만났는데, 와, 맙소사. 그 후로 시간이 흐른건 자명한 사실인지라, 열두권 중에 8권을 읽었네요!! 우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멋지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럼 이만.

syo 2021-02-05 14:48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맨날 어렵다고 머리를 쥐어뜯긴 해도 알게 모르게 대단한 사람들이 되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