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읽지 못한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성실한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독일 병사와 유대인 소녀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어느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을 하지 못한 독서의 경험을, 어떤 기록으로 남겨야 할지 내내 난감하다. 북방의 추운 지방에서 절대적인 고독을 누리고 살았던 남자가 무감각한 살인병기가 되어 독일군 최정예 병사로 살아가게 된 이유는 좀처럼 납득되지 않고, 마티아스와 르네를 묶어주는 "동물적인 떨림"이나 "야성적 에너지"를 독자인 나는 충분히 느낄 수 없어서, 이 고독한 독일군 병사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에너지로 삶을 "선택해내는" 르네의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했다.

아우슈비츠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혹은 그 참혹한 비극에 간접적인 지원을 했으면서도, 유대인 아이 하나를 살려냈다는 이유로, 자신의 고독하고 추운 삶을 이유로, 간단한 변명조차 하지 않는 마티아스 때문인가. 반성하지 않는 개인이 만들어낸 거대한 역사적 비극의 무게에 갇혀, 역사적 비극에 짓눌린 개인의 아픔을 인지하지 못하는 나의 편협한 태도 때문인가. 생존에 대한 열망 하나로 "자신의 병사"를 붙잡고 있는 일곱 살 아이에게, 나는 왜 하필 독일병사에게 삶을 의지하려고 하느냐고 비난하고 싶은 것인가. 

 

마티아스는 파이크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피곤함을 느꼈다. 지칠 대로 지친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위장 침투했을 때 그는 세 명의 청소년들을 죽여야만 했다. 마을 광장에서 열일곱 살짜리 소년 두 명과 열여덟 살짜리 소녀 한 명을 죽였다. 그 뒤로 그는 전쟁에 모든 흥미를 잃었다. 그는 소년들의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도망가는 그들 등에 총을 쏘았다. 그들의 어머니는 그를 집에 재워주고 몇 주 동안 먹을 것을 대준 대단한 용기를 지닌 여성이었다. 그날 그는 죽든 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처럼 과도한 전쟁 기계로 길러졌을 때는 그리 쉽게 죽지 않는 법이다. 그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르네가 나타난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또다시 살고 싶어졌다. 그녀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 그녀와 함께. 그는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전쟁 기계로서 마티아스의 삶은 삶이 아니었고, 르네를 만나기 전 마티아스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설은 전개되는 내내 고독하고 차가운 그의 삶이 죽음과 마찬가지였다고, 르네를 만나고 나서야 마티아스는 삶을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절절한 고독의 순간이 꽤나 인상적으로 그려지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생사를 넘나드는 마티아스의 도주극을 응원하지 못했고,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그의 "살아 있음"을 기꺼워하지 못했다. 그가 르네를 통해 넘었다는 죽어 있는 삶과 살아 있는 삶의 경계를 확인하지 못한 까닭이다.

 

르네를 만나 비로소 살고 싶었던 그는, 르네와의 삶을 위해, 그녀를 만나기 전과 다름 없이 누군가를 죽인다. 질투에 눈 먼 미국 병사이기도 하고, 전쟁에 지친 독일군 병사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장교이기도 한 그들. 마티아스와 마찬가지로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전쟁의 복판으로 끌려왔고, 마티아스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과정에서 삶을 잃어버렸을 그들. 그들은 마티아스와 무엇이 다른가. 마티아스는 자신을 "자신의 병사"라 명명해줄 르네를 만났을 뿐. 

 

그렇다. 내가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 아무런 감흥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죽음을 시간을 벗어나, 간절히 살고 싶어했던 마티아스가, 끝까지 삶에 대한 다른 이의 의지를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정확하게 사람을 죽이는 마티아스의 모습 때문에,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변화를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르네와 마티아스의 오늘을 응원하지 못하는 대신,  나는 파케 농장의 모든 이들이 "오늘"을 맞이할 수 있음에 안도한다. 마티아스의 삶을 보장해준 쥘의 단단하고 상식적인 선택이 좋았고, 독일군 병사에게 품은 깊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알고 나서 그와 단절하는 잔의 모습이 오래 남았다. 어떤 생명이든 품어내는 지네트의 너른 품에서라면, 전쟁의 고통이나 상처는 조금씩 회복될 것이라고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오늘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유대인 소녀와 함께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만들어냈던 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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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말 외할머니께서 입원해 계신 병원에 다녀왔다. 1921년 생. 지난 봄 손주들이 마련한 생일상을 받으시고, 우리 식구가 이렇게나 많구나, 다 모이니 참 좋다, 말씀하시던 할머니께서는 여름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놓으셨다. 폐에는 암으로 의심되는 어떤 것이 발견되었다 했고, 뇌출혈로 인해 오른쪽 몸은 마비되었다. 할머니를 자극하는, 그래서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은 왼쪽 몸으로만 감지하는 통증인 듯 했다. 나는 사람의 눈꺼풀이 그토록이나 무겁다는 것을, 생을 오래 지속할수록 눈꺼풀의 길이가 그렇게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간호사가 가족들 얼굴이나 보라며 눈꺼풀을 들어올려도, 당신의 생을 담은 눈꺼풀은 끝내 올라가지 않았다.

 

우리 엄마, 저렇게 두면 안 되는데... 코에 저런 거 꽂아두는 것 무섭다고 싫다 했는데... 나락 익으면 한 평생을 보냈던 집으로 돌아가자고 할머니와 약속했던 엄마는 할머니의 고통이 얼마나 지속되어야 하는지 걱정했다. 편안하게 집으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다는 엄마가 나는 순간 야속했다. 그러니까 내 몸을 내가 통제할 수 있을 때,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 스스로 할 수 있을 때, 죽음의 순간까지도 내가 선택해야 한다는 그 동안의 내 믿음과는 전혀 상반된 감정 때문에 나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저렇게 아무 의식이 없더라도, 먼 곳에 계셔 일 년에 한 두번 얼굴을 볼 수밖에 없어도, 당신이 살아계시면 좋겠다. 내가 생각해 왔던 삶과 죽음의 방식과는 너무나 모순된 바램이, 그러나 너무나 강하게 들었다.

 

할머니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배워야 할 것들 중 가장 많은 것을 알려주신 분이었고, 할머니의 집은 그 존재만으로도 도시에서의 지친 삶을 위로하는 공간이었다. 5년 남짓 기억도 하지 못할 유년기를 당신과 당신의 집에서 보냈던 것이 다이면서도, 나는 태생이 남도 땅 촌년임을 잊지 않고 살았다. 도시에서의 삶을 견딜 수 없을 때가 되면, 당신의 집 툇마루에 누워 햇빛과 바람에 몸과 마음을 말렸다. 그럴 때마다 당신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 손을 조물거리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예의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모난 내 마음을 만지작거렸는데.

 

이 따뜻한 기억 때문에 할머니의 마지막 시간이 고통으로 가득 차게 할 수 있다는 두려움, 그러니까 책장에 꽃혀 있던 이 책을 찾아읽게 된 이유였다. 할머니의 100세 생신을 간절하게 바래왔던 나는 어느 날 찾아올지 모르는 이별을 준비해야 했고, 조금 더 나은 죽음을 통해 내 삶의 부족했던 부분들을 채울 수 있을 거라는 그 동안의 내 믿음이 무너지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막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 책은 가장 큰 위로였고 가장 무거운 각성이었다.

 

나는 자연사가 가장 바람직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자연사는 사고사나 자살의 반대말이 아니라, 인간이 제게 주어진 수명을 다하면 자연스럽게 죽는 것, 의학의 도움으로 생을 연정하려는 노력 없이 제게 주어진 시간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때로 그 시간이 너무 이르게 찾아온다고 해도, 잠깐 동안 작별의 인사를 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로 인해 만족할 수 있는 것. 누군가는 오만한 생각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아직 경험해 보지 않아서 저런다고 했지만, 너무 많은 욕심으로 인해 내 삶이 황폐해지고 있다고 느낄 때면 죽음의 순간에는 그 욕심들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랬다. 고통을 연장시키고, 숨이 끊어지는 것을 막아내는 현대 의학이 인간과 자본의 욕망이 극단적으로 결합된 괴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다. 

 

아툴 가완디가 겪은 무수한 죽음들은 나의 오만을 확인시켜 주었다. 삶에 대한 성찰 없이 죽음을 생각했던 것, 그리고 사람에 대한  애정 없이 삶에 대한 의지를 욕심이라 치부했던 것. 내가 생각해 왔던 존엄한 죽음은 존엄한 삶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 타인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았다. 내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묻지 않았고, 때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고 어설프게 확신했고, 그러나 한 번도 그것을 실행해 옮기지 못했던 내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앞에서, 어느 것도 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은 아프지만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툴 가완디가 겪은 무수한 죽음들은 나를 위로해 주었다. 불신했던 현대 의학이 생명이 아니라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큰 용기를 낼 수 있을지를 확인했고, 그 용기가 어떻게 사람을 위로하는지를 경험했다. 갠지스 강에서 아버지의 유해를 뿌리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간과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그 거대한 연결고리를 깨닫게 되는 아툴 가완디의 경험이, 혼자서 죽어야 하는 순간을 상상해 왔던 나의 오늘을 편안하게 했다.

 

의식을 잃었던 가완디의 아버지는 죽음 직전 의식을 차린다. 잘 지냈니? 자신의 몸을 씻기려는 가족들에게 인사하고, 손자들의 사진을 보며 웃음 짓고, 맛있는 음식들을 먹는다. 그 평온하고 따뜻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바램은 더 이상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의 바램을 인정하고 수긍해준 가족들의 결정이 고마워서, 끝내 눈물이 났다. 그리고 한 세기를 살아오신 할머니가 한 번은 눈을 떠서, 잘 지냈니? 인사를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조금 더 울어야 했다. 끝내 당신에게 어떤 인사를 들을 수 없어도, 그래서 내가 고마웠다는 마음을 전할 수 없어도, 할머니의 고통이 오래 지속되지 않기를. 내가 당신의 전 생애에 대해 감사를 전할 방법은 당신의 고통 밖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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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어떻게 살지 결정해야 하는 것처럼 어떻게 죽을지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죽음의 순간이나, 죽음의 방식이나, 죽음 이후에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생전에 내게 속했던 것들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지, 그러니까 사는 내내 고민해야 한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비가, 아직은 충분하지 않아서 아쉬운 주말 저녁, 그래도 이런 죽음은, 내게 위안이 된다.

 

 

죽음이 며칠이 아닌 몇 시간 앞으로 다가와 있음을 깨달은 메이는 마그누스에게 방에서 나가달라고, 그리고 테런스를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테런스에게 문을 닫고 침대로 와 자기 곁에 누우라고 말한다. 바로 그의 품안에서, 그녀는 죽기를 원한다. 그녀가 한번도 벌거벗진 적이 없는 몸, 한 번도 껴안거나 어루만진 적이 없는 그 몸에 기대어, 그녀의 욕망이 다가설 수 없었던 남자, 남편인 동시에 오라비요 정신적인 동지였던 남자의 그 부드럽고 고요한 몸만이 그녀가 순순히 항복하고 공포나 분노 없이 미지의 죽음으로 건너가도록 도울 수 있다. 애인의 몸에 기대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저항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녀는 이 불가피한 현실을 인정하며 죽음과 맞대결하고 싶다. 자신의 죽음을 존중하고 싶다.

 

 

 

죽음을 앞둔 그녀의 이름은 메이. 마그누스는 그녀의 애인이고, 테런스는 그녀의 남편이다. 테런스와 그의 동성애인, 그리고 메이와 마그누스.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근거로 해가 갈수록 암목의 깊은 동조로 견고해지는" 관계, 그 관계 속에서 메이는 죽음을 맞는다.  

 

테런스는 그녀 곁에 몸을 누이고 천천히 그녀를 감싸안는다. 두 사람의 얼굴이 맞닿는다. 서로의 눈이 너무 가까워 속눈썹이 스치고 시선이 뒤썩인다.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덤불 한 가운데서 작은 빛의 웅덩이처럼 떨리는 섬광 하나를 알아볼 뿐이다. 그들은 이것이 재미있다. 그러나 매이는 웃을 힘이 없어 미소만 짓는다. 그들의 미소도 뒤섞인다. 숨결 역시.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더이상 할 말이 없거나 할 말이 너무 많은 것이지만, 이 순간 그 둘은 마찬가지다. 시간 밖에서, 욕망 밖에서, 헐벗은 사랑으로 그렇게 서로 몸을 바싹 붙이고 있으니 편안하다. 두 사람의 암묵적인 동조가 그렇게까지 치밀하고 광범위하며 환하게 빛을 발했던 적이 없다. 그들은 절대적인 신뢰로 서로에게 자신을 내맡긴 채 자아를 망각하는 경이감에 젖는다. 서로를 향해, 세상 속에서, 그렇게까지 뚜렷이 존재해 있음을 느낀 적이 없다. 이제는 세상 한복판이 아닌 그 문턱에서.

테런스는 자신의 속눈썹 끝에서 떨리는 작은 빛의 웅덩이가 흐려지는 것을 본다. 자신의 숨결과 하나가 되어 속삭이던 숨결이 잠잠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도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메이의 얼굴을 양손을 꼭 감쌀 뿐이다. 한참 동안 그 자세로 머무른다. 무한한 사랑이 되어버린 침묵 속에서 한참 동안.

메이는 자신의 죽음을 존중했다.

 

 

 

래 알고 지냈던 한 사람은 늘 자신은 사랑을 하게 되지 않는 순간이 올까 두려워했다. 나는 늘 그가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평생 사랑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그에게 사랑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고,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가슴 떨리는 고백을 하기도 하고, 보고 싶은 마음에 잠 못 이루기도 하고, 잠깐의 헤어짐이 애달파 오래 밤거리를 걸었어도, 나는 늘 사랑이라는 말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리고 이 존엄한 메이의 죽음 앞에서, 벌거벗은 몸 한 번 본 적 없어도 생명의 빛이 꺼지는 순간을 온전히 함께 하는 테런스의 침묵 앞에서, 가슴이 뛴다. 누군가를 온전하게 존중할 수 있다면, 그때에야 누군가를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주일이 넘게 소설 <마그누스>를 읽는다.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마그누스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아주 천천히 이 소설을 읽어내고 있다. 마그누스가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잠시 만나는, 메이와 테런스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오랜 시간 책 읽기를 멈추게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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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라는데, 긴 비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러나 문득문득 쏟아지는 강한 빗줄기에 먼저 귀가 놀라고, 번쩍이는 번개에 눈이 깨고, 머리 위에서 울리는 천둥에 몸이 일어난다. 다시금 시작된 불면, 무엇이 걱정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제 다 컸다고, 그러니까 좀처럼 어찌할 수 없는 일들에 조바심을 내지는 않아도 된다도 다독거려도 마음 한 구석에 박힌 불안이 가시질 않는다. 그렇게 여름을 지나고 있다.

 

 

 

 

잘못을 저지른 자의 불안은 그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의 불안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 비록 그 잘못으로 인해 자신의 욕망이 해소되고, 순간의 열락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생에 다시 없는 경험을 하게 될지라도, 그래서 자신에게 엄습해올 모든 불안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같은 상황이 오면 같은 잘못을 저지를 것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가 느끼는 불안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선천적으로 불안이라는 감정 자체를 지독하게 두려워하는 나는, 그래서 나의 욕망이 해소되는 순간의 열락을 경험할 확률이 아주 적다고, 이따금 스스로 자조한다. 

 

이 소설은 1909년에 태어난 작가가, 1931년에 쓴 작품이다. 그의 나이 22살. 그러니까 이 작가는 불과 22살의 나이에 욕망이 가득한 사랑을, 그 사랑의 하릴없음을, 전쟁의 비애를, 어머니와 아들의 마음 바닥에 깔린 은밀한 비밀을, 인간이 하는 말의 가벼움을, 그 가벼운 말의 날카로움을 모두 알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예민하고 단단하게 엮어 한 편의 소설로 만들어냈다는 말이다. 22살에 말이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공간은, 본심을 알 수 없는 사람만큼 두려운 존재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숲, 들어가는 길도 나오는 길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깊은 숲의 공간.

편혜영의 소설에 숲은 여러 형태로 펼쳐진다. 그 곳은 부엉이가 울고 비밀 벌목이 이루어지는 비밀의 공간이고, 그 비밀을 공유한 사람들이 삶을 지속하는 서쪽의 작은 도시이고, 환상과 실제를 구별할 수 없는 술 관리자의 내면이다. 그러니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헤맬 수밖에 없다. 모두들 실체를 알 수 없는 공간 속에 살고 있거나, 그 공간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천둥과 번개 속에서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도, 해결되지 않는 궁금증 때문에 나 역시도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혹은 이 숲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는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마지막 장을 넘기고도 나는 그들이 왜 숲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진의 부엉이도. 나의 불안이 나의 이해를 방해하니, 나도 어쩌면 숲에서 길을 잃은 건지도 모르겠다.

 

 

 

 

원래부터 가족은 모든 불안의 근원이다. 이 소설은 지극히 극단적인 한 가정을 묘사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비극들은 이 작품 속 인물들이 던져주는 충격을 능가한다. 패륜이라 일컬어지는 문제적 상황들은 이제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라, 사회면 기사를 통해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문제적 가족들을 말하는 것이 상투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감옥이 되어버린, 누군가에게는 악마가 되어버린, 누군가에게는 곪은 상처를 헤집는 덫이 되어버린 이 가족들을 상투적이라고 말해 버리면 그만인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과오를 온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동정하는 것만으로 그만인가. 다시,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장마라면서 긴 비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고 방심하고 있을 때

또 불쑥 폭우가 내릴 것이다.

천둥과 번개가 내리칠 것이다. 

그러니, 착하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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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그림자 2012-07-24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나요?

선인장 2012-07-25 10:02   좋아요 0 | URL
아... 너무 오랫만이에요.
저는 그저, 오래 전과 같은 일상을 그 때와 비슷하게 살고 있어요.
잘 지내고 있어요? 여전히, 이 곳에 계셨던 거군요...

빛 그림자 2012-07-25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네요. 알라딘에 간만에 왔어요. 언니 글 보니 무척 반가워요! 반갑고 기쁜데 무슨 말을 남길까 하는 망설임과 주저함은 생기더라고요.
제게 몇 해 동안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그래도 일상은 여전해요. 상황이나 조건이 달라져도 저라는 사람 자체가 극적으로 변하지는 않아서 그런가 봐요. 예전에 제가 교직 수업 들었던 거 기억하세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네요. 저는 학교 생활이 즐거운데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미안하고 쓸쓸해질 때가 있어요. ^^
전처럼 가끔 안부도 전하고 할게요. 아, 더울 때일수록 잘 드셔야 해요!

선인장 2012-07-26 11:1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약간의 변화와 그리고 여전함... 선생님이 되었군요...
저도 이따금 학생들을 보면서, 그들은 누구를 만나도 즐겁지 않겠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도 누군가가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쓸쓸한 마음을 갖는다면, 조금은 덜 팍팍한 생활을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도 자주 들여다 보지 않은 곳이지만, 가끔 들러서 안부 전해주세요. 언제든 반가울 꺼에요....
 

 

 

 

 

<백의 그림자>을 읽고 난 후, 무재 씨, 라는 글자가 누군가의 음성으로 내 머리 속에 박혔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황정은에 대해 말할 때, <백의 그림자>에 대해 말할 때, 혹은 어떤 기사에서 이 작가의 이름을 접할 때면, 누군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늘 함께 들려왔다. 무재 씨, 무재 씨, 무재 씨... 설명하긴 어렵지만 무재 씨를 호명하는 그 목소리는 보통의 연인을 부르는 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아주 귀하다는 듯, 최대한의 선의와 최대한의 배려를 담고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그래서 부르는 사람도, 부름을 받는 사람도, 그 부름을 듣고 있는 사람도 귀해지는 그 소리.  

 

 

황정은의 두 번째 소설집 <파씨의 입문>을 읽고 나서 확인한다. 그토록 마음에 남는 목소리로 무재 씨,를 부른 건 바로 작가 황정은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파씨의 입문>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많이 쓸쓸했다. 그리고 나의 쓸쓸함은 <파씨의 입문>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따뜻하게 위로 받았다. 이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이 작은 존재들로 인해 쓸쓸했고, 최대한의 선의를 담아 그 존재들을 호명하는 작가 황정은의 목소리로 인해 위로 받았다.  

 

 

완고한 얼굴로 떨어진다. 

아마도 이런 얼굴일 것이다. 입을 꼭 다문 얼굴, 말이 졸아붙은 듯한 얼굴, 더는 꿈꾸지 않는 듯하고 실제로 꿈꾸는 데 익숙하지 않은 얼굴, 더는 꿈꾸지 않아 나도 보지 않고, 남도 보지 않는 얼굴. 

- 황정은, 낙하하다 

 

이런 구절을 읽게 되면, 건조해진 얼굴을 한참이나 문지른다. 눈이 뻑뻑해질 때까지 손바닥으로 눈을 누르면, 감긴 눈 속으로 여러 색깔의 네모, 세모, 동그라미 들이 나타난다. 그것들은 아무리 집중해서 보아도 금세 모양이 달라지고 색깔이 변한다. 이런 시시한 놀이 따위에 집중해 있다가도 나도 보지 않고, 남도 보지 않는 내 얼굴이 생각나 문득 쓸쓸해졌다. 

 

 

어쨌든 죽으면, 나는 틀림없이 유도 씨한테 붙을 거다. 난 죽어서도 쓸쓸한 테니까, 유도 씨가 반드시 붙여줘야 돼.

응. 

일부는 진심이었지만, 총체적으론 농담이었고, 농담으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며 한 말이었는데, 뜻밖에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붙어,하고 유도 씨가 말했다. 

얼마든지 붙어. 

- 황정은, 대니 드비토 

 

죽어서도 쓸쓸할 것 같았는데, 몇 장은 넘기다 얼마든지 붙어, 라는 유도 씨의 한 마디에 내내 차가웠던 발에 온기가 도는 듯 했다. 발가락 하나하나가 따뜻해졌다. 얼마든지 붙어, 얼마든지 붙어, 얼마든지 붙어. 누군가에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누군가에게 꼭 들었으면 하는 말이다.  

 

오래 전 한 소설집의 후기에서 이승우는 의식하는 자만이 아프고, 그 아픔이 소설을 존재하게 한다고 했다. 황정은은 모두가 망각하고 묻어버리는 어떤 존재들을 인식하고, 아파하고, 그 아픔으로 소설을 쓴다. 그 어떤 존재들로 인해 황정은의 소설은 미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의미를 갖는다. 예술가에게는 무엇을 보느냐의 문제가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와 다르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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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2-06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대니 드비토의 저 부분, '얼마든지 붙어' 하는 저 부분이요, 저도 저 부분에 포스트잇을 붙여놨어요.

선인장 2012-02-07 09:25   좋아요 0 | URL
입춘도 지났는데, 북쪽에서는 연일 찬 공기가 밀려오고, 아마도 늦게까지 겨울을 앓겠지만, 저런 말을 듣는다면 겨울에도 사랑에 빠지고 말겠지요.^^

비로그인 2012-02-06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제 곁에 황정은의 글이 있는데... 읽기도 전에 온기가 후루룩 치미네요.
잠들기 전에 이불맡에서 읽으면 더 없이 좋겠어요 :)

선인장 2012-02-07 09:27   좋아요 0 | URL
예전 누군가의 말처럼, 아직 황정은을 읽지 않은 사람이 부러워요, 전요...

책읽는나무 2012-02-07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이미지속에 남아있는 님의 모습에 황정은이라는 작가가 제법 잘 어울리네요.
그리고 다락방님과 선인장님도 잘 어울리는 쌍둥이자매같다라는 느낌을 줄곧 받아왔었는데
아직도 건재하시네요.
반가워요.
잘 계시죠?^^

저 아직 황정은 안 읽었는데 부러워해주세요.흠흠~

선인장 2012-02-07 13:44   좋아요 0 | URL
부러워요.. 흠, 많이 부러워요.

건재,한지는 모르겠지만, 잘 지내고 있어요. 이월에 왠 추위람, 투덜거리면서, 봄이 오기나 할까, 염려도 하면서 잘 지내고 있어요.


2012-02-07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7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nicare 2012-02-17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정은이라..기억하겠습니다.
오늘 또 추워졌지만 한겨울만큼은 아니네요.
봄은 늘 기다리고 기다리게 되는 계절이에요.
알라딘 서재도 8년이 넘어섰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분들 있는데
다시 뵈니 반갑고 ...그동안 그리웠다고.


선인장 2012-02-17 20:31   좋아요 0 | URL
한겨울의 추위는 그래도 버틸만해요. 아마도 미리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 덕분에 단단히 여밀 수도 있구요. 저는 이상하게도 2월, 3월의 추위가 더 견디기 어려운 거 같아요. 그래서 오늘도, 왜 이리 춥나, 소리를 입에 달고 보냈어요.
8년이라, 정말 긴 시간이군요. 여전히 이 곳에 있는 분들도, 이제는 볼 수 없는 분들도, 모두들 다른 삶을 살기에 충분할 만큼의 긴 시간... 저도 반갑습니다. 그리고 그리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