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읽지 못한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성실한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독일 병사와 유대인 소녀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어느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을 하지 못한 독서의 경험을, 어떤 기록으로 남겨야 할지 내내 난감하다. 북방의 추운 지방에서 절대적인 고독을 누리고 살았던 남자가 무감각한 살인병기가 되어 독일군 최정예 병사로 살아가게 된 이유는 좀처럼 납득되지 않고, 마티아스와 르네를 묶어주는 "동물적인 떨림"이나 "야성적 에너지"를 독자인 나는 충분히 느낄 수 없어서, 이 고독한 독일군 병사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에너지로 삶을 "선택해내는" 르네의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했다.

아우슈비츠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혹은 그 참혹한 비극에 간접적인 지원을 했으면서도, 유대인 아이 하나를 살려냈다는 이유로, 자신의 고독하고 추운 삶을 이유로, 간단한 변명조차 하지 않는 마티아스 때문인가. 반성하지 않는 개인이 만들어낸 거대한 역사적 비극의 무게에 갇혀, 역사적 비극에 짓눌린 개인의 아픔을 인지하지 못하는 나의 편협한 태도 때문인가. 생존에 대한 열망 하나로 "자신의 병사"를 붙잡고 있는 일곱 살 아이에게, 나는 왜 하필 독일병사에게 삶을 의지하려고 하느냐고 비난하고 싶은 것인가. 

 

마티아스는 파이크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피곤함을 느꼈다. 지칠 대로 지친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위장 침투했을 때 그는 세 명의 청소년들을 죽여야만 했다. 마을 광장에서 열일곱 살짜리 소년 두 명과 열여덟 살짜리 소녀 한 명을 죽였다. 그 뒤로 그는 전쟁에 모든 흥미를 잃었다. 그는 소년들의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도망가는 그들 등에 총을 쏘았다. 그들의 어머니는 그를 집에 재워주고 몇 주 동안 먹을 것을 대준 대단한 용기를 지닌 여성이었다. 그날 그는 죽든 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처럼 과도한 전쟁 기계로 길러졌을 때는 그리 쉽게 죽지 않는 법이다. 그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르네가 나타난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또다시 살고 싶어졌다. 그녀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 그녀와 함께. 그는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전쟁 기계로서 마티아스의 삶은 삶이 아니었고, 르네를 만나기 전 마티아스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설은 전개되는 내내 고독하고 차가운 그의 삶이 죽음과 마찬가지였다고, 르네를 만나고 나서야 마티아스는 삶을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절절한 고독의 순간이 꽤나 인상적으로 그려지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생사를 넘나드는 마티아스의 도주극을 응원하지 못했고,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그의 "살아 있음"을 기꺼워하지 못했다. 그가 르네를 통해 넘었다는 죽어 있는 삶과 살아 있는 삶의 경계를 확인하지 못한 까닭이다.

 

르네를 만나 비로소 살고 싶었던 그는, 르네와의 삶을 위해, 그녀를 만나기 전과 다름 없이 누군가를 죽인다. 질투에 눈 먼 미국 병사이기도 하고, 전쟁에 지친 독일군 병사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장교이기도 한 그들. 마티아스와 마찬가지로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전쟁의 복판으로 끌려왔고, 마티아스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과정에서 삶을 잃어버렸을 그들. 그들은 마티아스와 무엇이 다른가. 마티아스는 자신을 "자신의 병사"라 명명해줄 르네를 만났을 뿐. 

 

그렇다. 내가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 아무런 감흥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죽음을 시간을 벗어나, 간절히 살고 싶어했던 마티아스가, 끝까지 삶에 대한 다른 이의 의지를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정확하게 사람을 죽이는 마티아스의 모습 때문에,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변화를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르네와 마티아스의 오늘을 응원하지 못하는 대신,  나는 파케 농장의 모든 이들이 "오늘"을 맞이할 수 있음에 안도한다. 마티아스의 삶을 보장해준 쥘의 단단하고 상식적인 선택이 좋았고, 독일군 병사에게 품은 깊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알고 나서 그와 단절하는 잔의 모습이 오래 남았다. 어떤 생명이든 품어내는 지네트의 너른 품에서라면, 전쟁의 고통이나 상처는 조금씩 회복될 것이라고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오늘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유대인 소녀와 함께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만들어냈던 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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