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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읽지 못한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성실한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독일 병사와 유대인 소녀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어느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을 하지 못한 독서의 경험을, 어떤 기록으로 남겨야 할지 내내 난감하다. 북방의 추운 지방에서 절대적인 고독을 누리고 살았던 남자가 무감각한 살인병기가 되어 독일군 최정예 병사로 살아가게 된 이유는 좀처럼 납득되지 않고, 마티아스와 르네를 묶어주는 "동물적인 떨림"이나 "야성적 에너지"를 독자인 나는 충분히 느낄 수 없어서, 이 고독한 독일군 병사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에너지로 삶을 "선택해내는" 르네의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했다.

아우슈비츠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혹은 그 참혹한 비극에 간접적인 지원을 했으면서도, 유대인 아이 하나를 살려냈다는 이유로, 자신의 고독하고 추운 삶을 이유로, 간단한 변명조차 하지 않는 마티아스 때문인가. 반성하지 않는 개인이 만들어낸 거대한 역사적 비극의 무게에 갇혀, 역사적 비극에 짓눌린 개인의 아픔을 인지하지 못하는 나의 편협한 태도 때문인가. 생존에 대한 열망 하나로 "자신의 병사"를 붙잡고 있는 일곱 살 아이에게, 나는 왜 하필 독일병사에게 삶을 의지하려고 하느냐고 비난하고 싶은 것인가. 

 

마티아스는 파이크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피곤함을 느꼈다. 지칠 대로 지친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위장 침투했을 때 그는 세 명의 청소년들을 죽여야만 했다. 마을 광장에서 열일곱 살짜리 소년 두 명과 열여덟 살짜리 소녀 한 명을 죽였다. 그 뒤로 그는 전쟁에 모든 흥미를 잃었다. 그는 소년들의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도망가는 그들 등에 총을 쏘았다. 그들의 어머니는 그를 집에 재워주고 몇 주 동안 먹을 것을 대준 대단한 용기를 지닌 여성이었다. 그날 그는 죽든 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처럼 과도한 전쟁 기계로 길러졌을 때는 그리 쉽게 죽지 않는 법이다. 그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르네가 나타난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또다시 살고 싶어졌다. 그녀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 그녀와 함께. 그는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전쟁 기계로서 마티아스의 삶은 삶이 아니었고, 르네를 만나기 전 마티아스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설은 전개되는 내내 고독하고 차가운 그의 삶이 죽음과 마찬가지였다고, 르네를 만나고 나서야 마티아스는 삶을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절절한 고독의 순간이 꽤나 인상적으로 그려지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생사를 넘나드는 마티아스의 도주극을 응원하지 못했고,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그의 "살아 있음"을 기꺼워하지 못했다. 그가 르네를 통해 넘었다는 죽어 있는 삶과 살아 있는 삶의 경계를 확인하지 못한 까닭이다.

 

르네를 만나 비로소 살고 싶었던 그는, 르네와의 삶을 위해, 그녀를 만나기 전과 다름 없이 누군가를 죽인다. 질투에 눈 먼 미국 병사이기도 하고, 전쟁에 지친 독일군 병사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장교이기도 한 그들. 마티아스와 마찬가지로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전쟁의 복판으로 끌려왔고, 마티아스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과정에서 삶을 잃어버렸을 그들. 그들은 마티아스와 무엇이 다른가. 마티아스는 자신을 "자신의 병사"라 명명해줄 르네를 만났을 뿐. 

 

그렇다. 내가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 아무런 감흥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죽음을 시간을 벗어나, 간절히 살고 싶어했던 마티아스가, 끝까지 삶에 대한 다른 이의 의지를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정확하게 사람을 죽이는 마티아스의 모습 때문에,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변화를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르네와 마티아스의 오늘을 응원하지 못하는 대신,  나는 파케 농장의 모든 이들이 "오늘"을 맞이할 수 있음에 안도한다. 마티아스의 삶을 보장해준 쥘의 단단하고 상식적인 선택이 좋았고, 독일군 병사에게 품은 깊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알고 나서 그와 단절하는 잔의 모습이 오래 남았다. 어떤 생명이든 품어내는 지네트의 너른 품에서라면, 전쟁의 고통이나 상처는 조금씩 회복될 것이라고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오늘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유대인 소녀와 함께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만들어냈던 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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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말 외할머니께서 입원해 계신 병원에 다녀왔다. 1921년 생. 지난 봄 손주들이 마련한 생일상을 받으시고, 우리 식구가 이렇게나 많구나, 다 모이니 참 좋다, 말씀하시던 할머니께서는 여름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놓으셨다. 폐에는 암으로 의심되는 어떤 것이 발견되었다 했고, 뇌출혈로 인해 오른쪽 몸은 마비되었다. 할머니를 자극하는, 그래서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은 왼쪽 몸으로만 감지하는 통증인 듯 했다. 나는 사람의 눈꺼풀이 그토록이나 무겁다는 것을, 생을 오래 지속할수록 눈꺼풀의 길이가 그렇게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간호사가 가족들 얼굴이나 보라며 눈꺼풀을 들어올려도, 당신의 생을 담은 눈꺼풀은 끝내 올라가지 않았다.

 

우리 엄마, 저렇게 두면 안 되는데... 코에 저런 거 꽂아두는 것 무섭다고 싫다 했는데... 나락 익으면 한 평생을 보냈던 집으로 돌아가자고 할머니와 약속했던 엄마는 할머니의 고통이 얼마나 지속되어야 하는지 걱정했다. 편안하게 집으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다는 엄마가 나는 순간 야속했다. 그러니까 내 몸을 내가 통제할 수 있을 때,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 스스로 할 수 있을 때, 죽음의 순간까지도 내가 선택해야 한다는 그 동안의 내 믿음과는 전혀 상반된 감정 때문에 나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저렇게 아무 의식이 없더라도, 먼 곳에 계셔 일 년에 한 두번 얼굴을 볼 수밖에 없어도, 당신이 살아계시면 좋겠다. 내가 생각해 왔던 삶과 죽음의 방식과는 너무나 모순된 바램이, 그러나 너무나 강하게 들었다.

 

할머니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배워야 할 것들 중 가장 많은 것을 알려주신 분이었고, 할머니의 집은 그 존재만으로도 도시에서의 지친 삶을 위로하는 공간이었다. 5년 남짓 기억도 하지 못할 유년기를 당신과 당신의 집에서 보냈던 것이 다이면서도, 나는 태생이 남도 땅 촌년임을 잊지 않고 살았다. 도시에서의 삶을 견딜 수 없을 때가 되면, 당신의 집 툇마루에 누워 햇빛과 바람에 몸과 마음을 말렸다. 그럴 때마다 당신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 손을 조물거리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예의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모난 내 마음을 만지작거렸는데.

 

이 따뜻한 기억 때문에 할머니의 마지막 시간이 고통으로 가득 차게 할 수 있다는 두려움, 그러니까 책장에 꽃혀 있던 이 책을 찾아읽게 된 이유였다. 할머니의 100세 생신을 간절하게 바래왔던 나는 어느 날 찾아올지 모르는 이별을 준비해야 했고, 조금 더 나은 죽음을 통해 내 삶의 부족했던 부분들을 채울 수 있을 거라는 그 동안의 내 믿음이 무너지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막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 책은 가장 큰 위로였고 가장 무거운 각성이었다.

 

나는 자연사가 가장 바람직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자연사는 사고사나 자살의 반대말이 아니라, 인간이 제게 주어진 수명을 다하면 자연스럽게 죽는 것, 의학의 도움으로 생을 연정하려는 노력 없이 제게 주어진 시간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때로 그 시간이 너무 이르게 찾아온다고 해도, 잠깐 동안 작별의 인사를 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로 인해 만족할 수 있는 것. 누군가는 오만한 생각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아직 경험해 보지 않아서 저런다고 했지만, 너무 많은 욕심으로 인해 내 삶이 황폐해지고 있다고 느낄 때면 죽음의 순간에는 그 욕심들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랬다. 고통을 연장시키고, 숨이 끊어지는 것을 막아내는 현대 의학이 인간과 자본의 욕망이 극단적으로 결합된 괴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다. 

 

아툴 가완디가 겪은 무수한 죽음들은 나의 오만을 확인시켜 주었다. 삶에 대한 성찰 없이 죽음을 생각했던 것, 그리고 사람에 대한  애정 없이 삶에 대한 의지를 욕심이라 치부했던 것. 내가 생각해 왔던 존엄한 죽음은 존엄한 삶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 타인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았다. 내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묻지 않았고, 때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고 어설프게 확신했고, 그러나 한 번도 그것을 실행해 옮기지 못했던 내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앞에서, 어느 것도 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은 아프지만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툴 가완디가 겪은 무수한 죽음들은 나를 위로해 주었다. 불신했던 현대 의학이 생명이 아니라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큰 용기를 낼 수 있을지를 확인했고, 그 용기가 어떻게 사람을 위로하는지를 경험했다. 갠지스 강에서 아버지의 유해를 뿌리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간과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그 거대한 연결고리를 깨닫게 되는 아툴 가완디의 경험이, 혼자서 죽어야 하는 순간을 상상해 왔던 나의 오늘을 편안하게 했다.

 

의식을 잃었던 가완디의 아버지는 죽음 직전 의식을 차린다. 잘 지냈니? 자신의 몸을 씻기려는 가족들에게 인사하고, 손자들의 사진을 보며 웃음 짓고, 맛있는 음식들을 먹는다. 그 평온하고 따뜻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바램은 더 이상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의 바램을 인정하고 수긍해준 가족들의 결정이 고마워서, 끝내 눈물이 났다. 그리고 한 세기를 살아오신 할머니가 한 번은 눈을 떠서, 잘 지냈니? 인사를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조금 더 울어야 했다. 끝내 당신에게 어떤 인사를 들을 수 없어도, 그래서 내가 고마웠다는 마음을 전할 수 없어도, 할머니의 고통이 오래 지속되지 않기를. 내가 당신의 전 생애에 대해 감사를 전할 방법은 당신의 고통 밖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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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어떻게 살지 결정해야 하는 것처럼 어떻게 죽을지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죽음의 순간이나, 죽음의 방식이나, 죽음 이후에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생전에 내게 속했던 것들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지, 그러니까 사는 내내 고민해야 한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비가, 아직은 충분하지 않아서 아쉬운 주말 저녁, 그래도 이런 죽음은, 내게 위안이 된다.

 

 

죽음이 며칠이 아닌 몇 시간 앞으로 다가와 있음을 깨달은 메이는 마그누스에게 방에서 나가달라고, 그리고 테런스를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테런스에게 문을 닫고 침대로 와 자기 곁에 누우라고 말한다. 바로 그의 품안에서, 그녀는 죽기를 원한다. 그녀가 한번도 벌거벗진 적이 없는 몸, 한 번도 껴안거나 어루만진 적이 없는 그 몸에 기대어, 그녀의 욕망이 다가설 수 없었던 남자, 남편인 동시에 오라비요 정신적인 동지였던 남자의 그 부드럽고 고요한 몸만이 그녀가 순순히 항복하고 공포나 분노 없이 미지의 죽음으로 건너가도록 도울 수 있다. 애인의 몸에 기대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저항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녀는 이 불가피한 현실을 인정하며 죽음과 맞대결하고 싶다. 자신의 죽음을 존중하고 싶다.

 

 

 

죽음을 앞둔 그녀의 이름은 메이. 마그누스는 그녀의 애인이고, 테런스는 그녀의 남편이다. 테런스와 그의 동성애인, 그리고 메이와 마그누스.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근거로 해가 갈수록 암목의 깊은 동조로 견고해지는" 관계, 그 관계 속에서 메이는 죽음을 맞는다.  

 

테런스는 그녀 곁에 몸을 누이고 천천히 그녀를 감싸안는다. 두 사람의 얼굴이 맞닿는다. 서로의 눈이 너무 가까워 속눈썹이 스치고 시선이 뒤썩인다.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덤불 한 가운데서 작은 빛의 웅덩이처럼 떨리는 섬광 하나를 알아볼 뿐이다. 그들은 이것이 재미있다. 그러나 매이는 웃을 힘이 없어 미소만 짓는다. 그들의 미소도 뒤섞인다. 숨결 역시.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더이상 할 말이 없거나 할 말이 너무 많은 것이지만, 이 순간 그 둘은 마찬가지다. 시간 밖에서, 욕망 밖에서, 헐벗은 사랑으로 그렇게 서로 몸을 바싹 붙이고 있으니 편안하다. 두 사람의 암묵적인 동조가 그렇게까지 치밀하고 광범위하며 환하게 빛을 발했던 적이 없다. 그들은 절대적인 신뢰로 서로에게 자신을 내맡긴 채 자아를 망각하는 경이감에 젖는다. 서로를 향해, 세상 속에서, 그렇게까지 뚜렷이 존재해 있음을 느낀 적이 없다. 이제는 세상 한복판이 아닌 그 문턱에서.

테런스는 자신의 속눈썹 끝에서 떨리는 작은 빛의 웅덩이가 흐려지는 것을 본다. 자신의 숨결과 하나가 되어 속삭이던 숨결이 잠잠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도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메이의 얼굴을 양손을 꼭 감쌀 뿐이다. 한참 동안 그 자세로 머무른다. 무한한 사랑이 되어버린 침묵 속에서 한참 동안.

메이는 자신의 죽음을 존중했다.

 

 

 

래 알고 지냈던 한 사람은 늘 자신은 사랑을 하게 되지 않는 순간이 올까 두려워했다. 나는 늘 그가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평생 사랑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그에게 사랑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고,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가슴 떨리는 고백을 하기도 하고, 보고 싶은 마음에 잠 못 이루기도 하고, 잠깐의 헤어짐이 애달파 오래 밤거리를 걸었어도, 나는 늘 사랑이라는 말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리고 이 존엄한 메이의 죽음 앞에서, 벌거벗은 몸 한 번 본 적 없어도 생명의 빛이 꺼지는 순간을 온전히 함께 하는 테런스의 침묵 앞에서, 가슴이 뛴다. 누군가를 온전하게 존중할 수 있다면, 그때에야 누군가를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주일이 넘게 소설 <마그누스>를 읽는다.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마그누스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아주 천천히 이 소설을 읽어내고 있다. 마그누스가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잠시 만나는, 메이와 테런스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오랜 시간 책 읽기를 멈추게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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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창고

 

 

이문재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최승자 시인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고 말했다. 아직 서른이 되기 전 우리들은 청승맞지만 낭창한 목소리로 이 시를 외우고 다녔을 것이다. 어쩌면 서른이란, 서른이 되기 전에만 그 무게를 잔뜩 느끼는 그런 나이. 소금자루를 등에 진 당나귀처럼 나는 스물 여덟에, 혹은 스물 아홉에 개울물에 빠져, 그 나이의 무게에서 벗어나 삼십대를 가뿐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듯 싶다. 살 수도 없노라, 죽을 수도 없노라, 이십 대의 마지막에 온갖 청승을 다 떤 덕분에.

 

 

 

그러나 마흔은, 지레 겁 먹는 것도 부족해 보일까 두려워서, 애써 덤덤하게 맞이해야 하는 또 다른 한 시절. 앞으로 나아가지도, 다가오는 옛것들을 뿌리치지도 못해, 그저 붙들린 시절. 내 어깨에 짊어진 것들이 솜덩이인 줄 모르고 개울물에서 다시 넘어졌다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르는 시절. 내 속에서 나온 말들에 혼자서 상처 받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도, 누구에게 그 상처를 보여주지도 못하는, 이제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도 부끄러운 나이. 하루 종일 눈가가 마르지 않아,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이상 고온의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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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13-06-1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은 가버린 게 아니고 지층처럼 속에 깔려있다가
지진이나 화산분출 때처럼 한번씩 울컥 치솟든지
속에 고여 있다가 잊으려하면 슬며시 올라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흐린 날에 옛날 품고다녔던 시인의 이름과 또 올리신 시를 읽노라니 마음이 하염없이 쓸쓸합니다.
이성복의 오래된 시들도 문득 맴돌구요.

별고 없으신지요.

선인장 2013-06-13 12:26   좋아요 0 | URL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오히려 무슨 일이든 생겨야 할 것 같은 그런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곳은... 올 때마다 달라지는 옛동네를 보는 기분인데, 님의 댓글을 보니,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익숙한 풍경 하나 남아 있구나, 와락 반가웠습니다.

저는 늘 그렇게, 별고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님은 어떤 여름을 보내고 있는지...

[그장소] 2015-01-01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5년 1월 1 일 입니다.
어쩌다 들러 두분의 지지난 여름을 살포시
엿보고 갑니다. 모든 시간이 혼재하는 곳.
그런 곳이기도 합니다..얼마나 먼 과거의 이야기 부터...당신들의 지난한 이야기까지, 이 곳을 떠 돌 고 있을것 인가요....또 한 해. 맞이 이렇다 할것없이
무난 하네..그리 여미시고요..시간들 나시면 소소한 얘기나 들려주러 와 주십시오. 그저 웃지요 ^-^
 

새해 첫 날 지난 한 해 거의 쓰지 않았던 노트북의 전원을 넣었다. 작년 일 월, 책을 읽고 적어놓았던 메모들에서 나는 한치도 달라져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작년 1월의 어느 날처럼, 일 년이 지나고 또 어느 날, 같은 결심을 주절대고 있었던 것이다. 민망했고, 안쓰러웠지만, 아직은 지치지 않았으니, 그렇게 주저 앉고도 다시 일어났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고 보니, 또 괜찮은 것도 같다. 혹시, 괜찮을 것도 같다.

 

 

 

  일 월의 첫 날, 지난 가을이 끝날 때부터 읽기 시작했던 이혜경의 소설을 마저 읽었다. 갑자기 몰려든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두어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늘 어깨가 아팠다. 대학을 졸업하고 비정규직 일자리에 만족해 하던 그 시절, 나는 이 작가의 소설 때문에 백 몇 십만원의 생계비를 포기하고, 빚을 내어 다시 학교에 갔다.

그리고 너무나 오랫만에 출간된 소설을 새해의 첫 날 천천히 읽어냈다. 내게 있는 그 어떤 무엇도 나를 풍요롭게 할 수 없어 궁핍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그 궁핍을 보여주는 작은 무늬일 뿐 어떤 희망도 될 수 없다는. 내 사랑이 서글픈 내 생에 대한 위안이 되기는커녕, 너를 향한 연민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빈약한 감정이라는. 그래서 우리는 몸을 포개도 여전히 춥고, 한 침대에 누워도 여전히 다른 공간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더 이상 아프지도 않은 깨달음.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 몰래 숨기고 싶었던 끄덕임과 동의.

 

그러나 다행하게도 나는 이혜경의 소설을 읽고 난 후 이 책을 읽었다. 지난 여름 사 두었다가 오랫동안 책장 한 구석에 밀려 있던 책. 이 책 소개에는 "사랑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과 같은 수사들이 붙여 있었다.

 

 그리고 작가 김연수는 "별 다섯 개짜리 도입부"라는 제목을 붙여 이 책에 담긴 한 단편의 도입부를 소개했었다.

 

아내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 한번은 눈이 내릴 때 소리가 들리냐고 묻기에 나는 그렇다고 거짓말을 했다. 오늘은 우리가 결혼한 지 12년째 되는 날. 그리고 나는 그녀를 두고 떠나기로 한다.

                                - 사이먼 밴 부이, ‘눈이 내리고, 사라지네’

 

아마도 이 문장에 홀려 나는 지난 여름 이 책을 사 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는 저 문장만큼이나 여운을 주는, 오래도록 그 상황과 그 마음과 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문장들이 퍽이나 많다. 짧은 소설들을 오래오래 마음에 품고, 관계에 대한 나의 냉정함을, 타인에 대한 나의 무관심을, 사랑에 대한 나의 무정함을, 이겨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혜경의 소설과 사이먼 밴 부이의 소설은 아무런 연관성도 없지만, 이 두 소설을 연달아 읽게 되어서 참 다행이다. 이 나이에 나는 또 그저 소설을 읽고 몇 년 전에도 한 번은 깨달았을 평범한 진실들을 다시 한번 각인하게 된다.

 

 

다음엔 한강과 이스마엘 카다레.

 

 

 

 

 

 

 

 

 

 

 

 

 

 

 

언제나 새해에는 그렇듯이 지난 겨울 밀려 있었던 책들을 겨울방학 과제를 해내듯 읽어가면서, 나는 몇 가지를 새로운 사실처럼 깨닫고, 몇 가지를 처음 하는 다짐처럼 되뇌일 것이다.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에 이 모든 일들이 지난 시절 내내 해왔던, 지치지도 않는 습관임을 깨달으며 다시 민망해 할 터이다. 다만 부디 이 시간이 조금쯤은 길어지기를. 잊혀지지 않을 만큼만 오래 가기를. 그리고 그 어느 날의 깨달음과 지금의 깨달음이 아직 조금쯤은 다를 수 있기를. 일월이 가기 전에 내가 바랄 수 있는 일들이란 고작 이런 것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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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1-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 없는 그자리]를 지금 이 글 읽고서야, 아 이 책 읽어본다고 생각하고 여태 사지도 않았네 싶어 부랴부랴 서둘러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이스마엘 카다레'의 책을 읽고 난 후의 선인장님 글이 궁금해요. 전 사두었는데 아직 읽지 못하고 있거든요. 자꾸만 다른 책들에게 우선권을 빼앗겨요.

오랜만의 글, 좋으네요, 선인장님.

선인장 2013-01-16 16:18   좋아요 0 | URL
이스마엘 카다레는 출근 길 전철에서 시작했습니다. 발칸 반도의 역사에 대해 너무 무지한지라, 책장 넘어가는 속도가 더딥니다. 그래도 그의 소설을 읽는 시간은 늘 근사한 경험입니다. 2000년 한국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도, 친히 받은 사인도, 근사했더랬습니다. 영원히 살 줄 알았던 좁은 내 방에 딱풀로 카다레의 사인을 붙여버렸던 만행만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의 소설을 읽는 시간은 언제나 좋은 시간입니다.

저는 늘 너무 게으른 서재인입니다.
올해는 더 종종 뵙겠습니다.

hanicare 2013-01-16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원년(?)멤버의 글을 대하니 '살아있으셨군요.'라는 말이 절로 흘러나오네요.피난가서 옛마을 사람을 만난 듯한.

이 우여곡절을 견디며 아직 우리는 살고 있군요.사막에서요.

선인장 2013-01-16 21:50   좋아요 0 | URL
지난 해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죠? 연말에는 누구나 그렇했겠지만 정신적 허탈감을 극복하느라 좀 애를 먹었지만, 여전히 살아서 또 새해를 맞았어요. ㅋㅋ 알라딘 어느 구석에서 다들 그렇게 살고 있겠지요? 이렇게 드문드문이라고 글을 올리니, 님의 안부도 들을 수 있네요...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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