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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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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공동체 -신형철 평론에 관하여-

평론가 신형철은 섬세하고 다감하고 친절하다. 그는 해부용 메스로 시들을 분석하지 않는다. 그가 시를 진단하는 도구는 공감의 청진기다. 그는 귀에 청진기를 꽂고 고개를 숙이고 자기의 숨을 멈추고 가만 시에 귀 기울인다. 평론가 신형철에게 시는 삶을 앓고 있는 이들(시인들)이 힘없이 나직이 얕게 내뱉는 신음 소리이다. 그래서 이 소리들은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들어야만 하는 소리이다. 그는 시어 하나하나를 아픈 이의 호흡처럼 읽는다. 그렇게 이 훌륭한 내과 의사는 시인의 느낌에 진입하게 되고 시인의 세계에 공감하게 되고 시인과 같이 아파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시인 허연이 10년 동안 시를 접었다가 다시 쓰게 된 상황을 진단하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시인의 마음에도 슬픈 신경질이 차곡차곡 쌓였던가 보다.” 또한 조용미의 <검은 담즙>에 대해 “얼마나 깊은 비애가 이런 이미지를 만드는가.”라 말한다. 제 숨을 멈추고 시인의 숨과 결을 같이 하며 시인의 아픔에 참여할 줄 아는 다정한 평론가, 내게 그는 그런 평론가이다. 이런 평론가와 만난다는 것이 시인들에게 더없는 행운일 것이다. 그래서 이 따뜻한 의사 선생님 주변에는 앓는 이들이 많이 찾아온다. 시인들의 친구, 평론가 신형철.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해심 많은 마음씨 고운 평론가의 모습이 권성우가 비판하고 있는 지점은 아닐까? 평론가 권성우는 “진정한 의미의 정신과 정신의 만남은 일방적인 동화의 과정이 아니라”고 말하며 “제대로 된 비평은 텍스트와의 황홀한 연애 그 이후에 있는 것이”라 밝힌다. 권성우는 비평은 “가치 비평”과 “해설(해석)”이라는 두 날개로 이루어지는 작업이라 말하며 현재 한국에서의 비평은 후자에 치우친 “해석과 설명 위주로 전개되는, 즉 지나치게 작품에 종속되면서 냉철한 가치판단을 상실한” 비평이라 말한다. 지금의 비평에는 비판은 없고 친절한 작품 해설만 있다는 문제제기이다. 실제로 신형철의 글은 가치판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두드러지지 않는다. 신형철의 글을 읽으면 최대한 작품에 몸을 밀착시켜 작가의 호흡을 느끼고 자신이 느낀 바를 독자에게 설명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 역력하게 보인다. 이런 작품에의 강한 애정이야 말로 신형철이 가진 장점임에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평론에는 안타깝게 그 작품이 문학사의 맥락 안에서 어떤 지점에서 훌륭한 작품인지, 이전의 작품들과 비교할 때 어떠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나아가 그 작품이 가진 한계는 무엇이며 작가의 향후 지향점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분석과 평이 분명 부족하다. 즉, 작품과 보다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 신형철의 한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여기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 시들 앞에서 그 무슨 심리학적 방법론 따위들을 동원할 수가 없다. 나는 그를 시인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지금은 그러지 못하고 있지만, 2000년 이후 몇 년간 나는 그와 거의 매일 만났다. (......) 그런데 어떻게 이 시들의 깊은 곳에 서글픈 이론들을 들이댈 수 있겠는가.” 그와의 대학원 동학인 이수정의 시들을 이야기하며 남긴 신형철의 말이다. 물론 이 책(느낌의 공동체)이 본격적 평론집은 아니나, 분명 평론적 성격을 담고 있는 글들이 상당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토록 가까운 사적관계에 있는 이의 작품을 이만큼 주관적, 정서적 방식으로 다루는 것은 “평론가”가 보여주기에는 너무 순진한 태도 아닌가? (필자의 생각에는 이수정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침묵했어야 옳았다)

또한 앞서 말한 대로 이 다정한 평론가가 직간접적으로 여러 경로를 통해 밝혀왔듯 많은 시인과 작가들의 (사적)친구임이 분명하다면 신형철이 그동안 보여주었던 방식의 평론(가치평가가 결여된 평론)으로는 권성우의 말처럼 주류 출판언론에서 작가들과 소위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문화 권력의 중심에서 제 식구 감싸기식 평론을 쓴다는 불명예스런 혐의에서 자유롭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평론가 신형철에게는 작품(작가)와의 밀착을 통한 깊은 이해와 공감 이후의 가치평가가 병행된 냉정한 비평(날선 비판을 포함하는)이 필요한 것이다.

공감의 청진기를 사용한 진료 이후 필요하다면 냉철한 눈빛을 품고 날카로운 메스로 환부를 도려내는 외과의사의 전문성을 보여주는 평론가 신형철의 글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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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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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는 인간>, 오에 겐자부로

얼마 전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불쑥 현대예술에 대한 친구 나름의 정의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늘 그렇듯 친구는 명료한 방식으로 현대 예술의 범주와 특징들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서는 "그러나 그런 제도화된 공식에 맞춰서 예술을 하는 것은 일류가 아니다. 결국 최고의 예술은 작가 고유의 문제에 대한 치열한 천착에서 나온다"는 말도 잊지 않고 해주었다.

<읽는 인간>은 오에 겐자부로 자신의 글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은 내가 그의 문학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 짧은 강연록을 통해 그가 왜 글을 읽고 쓰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자세로 읽기와 쓰기를 해왔는지에 대한 어렴풋한 윤곽을 그려보는 시도는 가능했다.

“괴로울 때는 주로 책을 읽습니다. 우선은 생활을 해나가야 하기에 소설을 씁니다. 어떻게 쓸 것인가? 읽고 있는 책을 실마리 삼아 내 생활을 쓴다, 아이를 중심으로 쓴다, 라는 식으로 써왔어요. p95”

오에 겐자부로에게는 뇌에 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다. 눈물샘에 이상이 있어 눈물도 흘리지 못하며 한밤중에 소리 내어 우는 아이 옆에서 그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어 가운데 슬픔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읊조리며 그 고통을 견뎌낸다.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시인의 시를 쭉 읽어오면서, 제 인생의 문제, 그것도 몇 년 동안이나 이어져 온 중요한 문제를 소설로 쓰고 마무리 지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소설을 쓰면서 문제점을 해결해왔습니다. p110”

또한 그가 고교시절 만난 이후 자신의 반쪽이었다 추억하며 생애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이었다 고백했던 친구, 동시에 아내의 오빠였던 영화감독 이타미 주조의 자살로 인한 상실과 아픔 역시 그는 글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통해 버티고 삼키어낸다.

그는 문학과 시를 진통제 삼아 삶의 고통을 견뎌냈고, 그렇게 삶 속으로 겹겹이 접혀진 아픔과 견딤은 작품이라는 방식으로 다시 펼쳐졌다.

그렇게 오에 겐자부로에게는 읽기와 쓰기는 구원이었을 것이다.

로맹가리의 역시 자신의 삶과 문학의 의미는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에서 찾은 여성성의 구현이라 밝힌 바 있다.

자기 문제를 향한 정직한 대면과 치열한 투쟁, 그리고 이를 통한 자아와 세계 이해의 확장. 이것이 좋은 작업의 전부라 할 수는 없겠느나 본질적 조건 중에 하나임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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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의미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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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여성입니다. 주의하세요, 여자들이 아니라 여성, 여성성 말입니다. 여성들, 여성을 향한 사랑이야말로 내 삶의 큰 동기이자 큰 기쁨이었습니다.” …… 


“나의 모든 책, 내가 어머니의 이미지에서 출발해 쓴 그 모든 것에 영감을 준 것은 여성성, 여성성에 대한 나의 열정입니다. 그래서 간혹 페미니스트들과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내가 세상 최초의 여성적 목소리, 여성의 목소리로 말한 최초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다정함, 연민, 사랑 등은 여성적 가치들이지요. 이런 가치들을 최초로 얘기한 사람은 예수라는 남성입니다.” …… 


“사실 사람들은 나 같은 불가지론자가 예수라는 인물에 그토록 집착한다는 사실에 항상 놀라곤 했지요. 내가 예수에게서, 그리스도에게서, 기독교에서 보는 것은 여성의 목소리입니다.” …… 


“만약 내 책들이 무엇보다 사랑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 거의 언제나 여성성을 향한 사랑을 얘기하는 책이라는 이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 작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 

 

살면서 내가 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나의 모든 책 속에, 내가 쓴 모든 글 속에 이 여성성을 향한 열정을 끌어들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언제나 나는-예술적인 목적이 아니고는 교회에 발을 들여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치고는 참으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것은 예수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이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말이 여성성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내게는 여성성의 구현 그 자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


“나는 그저 훗날 사람들이 로맹 가리에 대해 말할 때 여성성의 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를 말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로맹 가리가 죽기 몇 달 전 남긴 유언과 같은 고백이다. 그의 삶 전반의 궤적을 회고하며 마지막 장에서는 자신이 한 평생 문학을 통해 이루려 했던 것,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밝힌다. 그가 말하는 여성성의 문학적 구현에의 열정은 젊은 나이에 홀로 된 채로 아들을 위해 한 평생 헌신했던, 심지어 전장에 있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죽음마저 숨기고 200여 통의 편지를 지인에게 부탁해 죽음 이후에도 3년이 넘도록 아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어 “탯줄이 계속 작동하게 해두었던” 그의 어머니가 보여준 사랑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로자 아줌마의 곁을 끝내 떠날 수 없었는지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로맹 가리는 어린 모모를 통해라도 자신의 못다 했던 몫을 끝내 이루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신선한 형식과 내용으로 이목을 끄는 문학이나 예술 작품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들은 언제나 그 속에 인간에 대한 뜨거운 그 무엇을 담고 있다. 그것이 결여된 작품은 울림이 없다. 
 
모모의 마지막 말이다.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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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
권영민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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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철학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물을 때, 질문이 빈정거리며 쏘아붙이길 원하기 때문에, 대답은 공격적이어야만 한다. (중략) 그것은 모든 형태 하의 사유의 저속함을 고발하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용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의 원천과 목적이 무엇이든, 철학 이외에 모든 신비화에 대한 비판을 의도하는 어떤 학과가 존재하는가? "  -질 들뢰즈-

 

이상의 들뢰즈의 말처럼 철학이 모든 신비화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 그것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이라면 권영민의 책 "철학자 아빠의 인문육아"는 육아서라기보다는 철학서이다.

유아, 그리고 이 유아를 기르는 육아는 이미 신비이자 신화이다.

특히나 첫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는 유아, 육아는 아마 일종의 신비 사건일 것이다.

(조금 부정적으로 보자면 한달에 수십만원하는 영어 유치원를 비롯한 일련의 증상(?)들을 볼 때 지금의 한국 사회는 심지어 일종의 육아병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든다)

 

저자는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를 불가피 몇 해에 걸쳐 혼자 양육하게 되는 초보 철학자이다.

아이라는 "절대적 대상"(절대적 약자이자 절대적 돌봄의 대상)과 만나는 철학자 아빠는 본인의 도구이자 무기인 철학으로 "육아-사태"를 헤쳐나가고 성찰해간다.

물론 이러한 육아에 대한 철학적 모색이 학위 논문을 위해서라든지, 지적 욕심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완전한 미지의 세계에 뛰어든 불안에 휩싸인 어느 한 인간의 몸부림에 가까운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자식)을 홀로 지키고 양육해야 한다는 아버지로서의 불안과 절박함이 "육아-사태"의 실체를 밝히는 철학적 여정으로 저자를 인도한다.

 

아이의 폭력성, 말 배우기, 층간 소음,  스트레스로 인한 틱장애 등등...  저자는 말 그대로 육아를 온몸으로 경험한다. 이 뜨겁고 압도적인 사건들을 헤쳐나가며 저자는 반성한다 그리고 철학한다.

 

예를 들어 아이의 장난감에 대한 생각이 그러하다.

레디메이드(ready-made) 장난감 이전에 레디메이드 규칙이 있다. 레디메이드 규칙에 따라 아이들은 자본주의 기업의 키즈(kids)로 자라게 되며, 자본가라는 꿈을 갖게된다.(중략)

예를 들어 '이 장남감을 갖는다면, 나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처럼 멋있게 될 거야!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기업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인과 규칙이다.(중략)

내가 어떤 것을 소유해야 하는 까닭(규칙)이 사회나 타인의 요구에 의한 것인가, 혹은 자기 자신의 진정한 필요와 독자적 리듬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에 대해서 아이가 판단할 수 있도록 성장해야 자본주의 사회와 기업의 노예가 아닌 자유민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 비로소 자유로운 사람이다.(중략)

아이야. 누군가가 정해 놓은 규칙의 노예가 되지 말고 창제자가 되어라.

규범을 깨고 권위를 비웃어라. 아빠가 아직은 좁지만 기꺼이 그 공간이 되어 주마.

 p58-61

또한 아이의 시간 의식의 확장을 목격하며 느낀 점도 흥미롭다.

나는 내 아이가 보다 넓은 지금을 살아가는 아이로 자라났으면 한다. 이것은 "마시멜로 이야기"처럼 순간의 유혹을 참고 이겨 더 큰 보상을 받으라는 식의 바람이 아니다. 매우 잘 준비된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처음과 끝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며 모든 순간의 음들이 시작과 끝을 향하고 의식한 것이듯, 아이가 자기 삶의 시작과 끝을 두고 자신을 검토하고 반성할 중 알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p209-210

 

이처럼 육아를 통해 저자는 언어, 놀이, 시간, 상처 등등 인간 일반의 문제를 그 "근본"부터 되짚어본다. 

(아이란 백지의 존재이므로 말 그대로 근본부터 고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점 아마 향후 저자의 다음 철학 작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아이를 가진 부모에게 최우선의 관심사는 아이일 것이고, 그들에게 가장 절박한 사태는 육아일 것이다.

이 절박하고 절대적 사태 앞에서의 고민은 어떤 고민보다 깊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좋은 철학 작품의 기본 전제는 고민의 절박성과 깊이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철학자 아빠의 육아-철학은 결코 어느 프로 철학자의 고민과 사색의 결과물들과 비교해도 아쉽지가 않다.

 

p.s. 나는 개인적으로 이번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을 다시 "육아"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봤다. 나의 언어, 나의 시간, 나의 놀이, 나의 상처, 나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점검해보며, 나를 잘 키워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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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4-03-25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한 미지의 세계에 뛰어든 불안에 휩싸인 어느 한 인간의 몸부림"이라니... 절박하게 와닿는다 권선생님이 고생이 참 많으셨구나 하하

숭군 2014-03-25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고생이 많았더랬지 ^^
 
사진에 나타난 몸 아트 라이브러리 2
존 퓰츠 지음, 박주석 옮김 / 예경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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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은 욕망을 의미한다. 이 점 포르노 그래피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이해가 되는 사실이다. 사진은 봄(seeing)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사진은 욕망의 기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결국 사진은 촬영자의 욕망의 시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진이 중립적, 객관적 기록이 아닌 촬영자 개인의 욕망의 투사물이라는 것은 이미 많이 거론된 사실이다. 그런데 개인의 욕망은 과연 순수한 개인의 욕망인가? 그렇지 않다. 라깡의 유명한 명제처럼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촬영자의 욕망은 사회-구조적 힘에 의해 구성된 욕망, 즉 촬영자를 둘러싸고 있는 그 시대와 그 세계의 욕망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존 퓰츠의 "사진에 나타난 몸"을 읽어보면 사진의 150여년 역사 동안 반영된 인간의 몸에 대한 시대와 세계의 욕망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 성별과 나이, 인종을 포함한 다양한 인간 양태에 대해 세계는 어떠한 욕망을 투사해 왔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탐색임에 틀림없다. 그런데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70년대 이후 기록매체로서의 사진의 역할이 축소된 후-이는 물론 tv라는 새로운 매체 때문이겠지만- 사진에 나타난 몸의 대상이 타인의 그것이 아닌 자신의 몸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특히 기존의 셀프 포트레이트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보다 과감한 형식으로 연출된 셀프 포트레이트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나의 몸을 일종의 표현도구로서 인식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게 된다.-예를 들면 신디셔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21C의 현대 사진까지 그 맥락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듯 자신의 몸을 마치 캔버스처럼 다루며 이를 통해 자신의 메세지를 담아내는 사진적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타인의 몸이 아닌 나의 연출된 몸을 사진으로 담는 행위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이는 일차적으로 타자의 욕망이 아닌 나의 욕망을 욕망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라깡의 명제를 끝까지 밀고 간다면 오히려 이러한 작업들을 "나의 욕망을 욕망하라는 타자의 욕망"의 반영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즉, 순수한 나의 욕망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욕망을 욕망하라"라는 것 역시 이 시대정신이 이 요구하는 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사진의 역사에서 20C 후반 이후 타인의 몸에 대한 욕망의 시선은 촬영자 자신의 몸으로 향한다. 표면상, 욕망의 방향성이 자신을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역시 "나를 욕망하라는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라 본다면 너무 회의적인 해석일까?...



p.s. 오늘 친구와의 통화가 기억난다. 정말 어쩌면 철저한 회의만이 나를 구원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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