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나타난 몸 아트 라이브러리 2
존 퓰츠 지음, 박주석 옮김 / 예경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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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은 욕망을 의미한다. 이 점 포르노 그래피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이해가 되는 사실이다. 사진은 봄(seeing)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사진은 욕망의 기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결국 사진은 촬영자의 욕망의 시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진이 중립적, 객관적 기록이 아닌 촬영자 개인의 욕망의 투사물이라는 것은 이미 많이 거론된 사실이다. 그런데 개인의 욕망은 과연 순수한 개인의 욕망인가? 그렇지 않다. 라깡의 유명한 명제처럼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촬영자의 욕망은 사회-구조적 힘에 의해 구성된 욕망, 즉 촬영자를 둘러싸고 있는 그 시대와 그 세계의 욕망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존 퓰츠의 "사진에 나타난 몸"을 읽어보면 사진의 150여년 역사 동안 반영된 인간의 몸에 대한 시대와 세계의 욕망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 성별과 나이, 인종을 포함한 다양한 인간 양태에 대해 세계는 어떠한 욕망을 투사해 왔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탐색임에 틀림없다. 그런데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70년대 이후 기록매체로서의 사진의 역할이 축소된 후-이는 물론 tv라는 새로운 매체 때문이겠지만- 사진에 나타난 몸의 대상이 타인의 그것이 아닌 자신의 몸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특히 기존의 셀프 포트레이트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보다 과감한 형식으로 연출된 셀프 포트레이트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나의 몸을 일종의 표현도구로서 인식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게 된다.-예를 들면 신디셔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21C의 현대 사진까지 그 맥락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듯 자신의 몸을 마치 캔버스처럼 다루며 이를 통해 자신의 메세지를 담아내는 사진적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타인의 몸이 아닌 나의 연출된 몸을 사진으로 담는 행위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이는 일차적으로 타자의 욕망이 아닌 나의 욕망을 욕망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라깡의 명제를 끝까지 밀고 간다면 오히려 이러한 작업들을 "나의 욕망을 욕망하라는 타자의 욕망"의 반영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즉, 순수한 나의 욕망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욕망을 욕망하라"라는 것 역시 이 시대정신이 이 요구하는 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사진의 역사에서 20C 후반 이후 타인의 몸에 대한 욕망의 시선은 촬영자 자신의 몸으로 향한다. 표면상, 욕망의 방향성이 자신을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역시 "나를 욕망하라는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라 본다면 너무 회의적인 해석일까?...



p.s. 오늘 친구와의 통화가 기억난다. 정말 어쩌면 철저한 회의만이 나를 구원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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