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군 :

 

숭군, 나 K군이오.
이번에는 내 생각을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서 질문을 해볼까 하네. 용서하게나.

먼저, 어떤 작품에 대해서 개인적인 판단과 보편적 판단이 나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문도 없네. 작품의 미적 가치를 개인의 취미 판단에 맡길 때는 어떤 작품도 걸작의 조건과 가능성을 갖게 되겠지.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는 ‘보편적 판단’에 대한 것 아니겠나? 내가 하려는 질문은 어떤 작품이 지닌 사태개방성을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한 보편적 계기를 찾으려는 거야. 그것이 직관에만 의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논의나 사태개방성은 개인의 내면으로 떨어지고 말겠지.

자네의 답에 대해 좀 더 추가해서 질문하고 싶네.
그러니까 자네도 사진으로 표현된 ‘정치’가 정치적인 이야기와는 다른 사태에 대한 개방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수긍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자체가 갖는 의미 생성에 사진예술이 만족해서는 곤란하다, 그러면 진부하다, 그래서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는 거지?

1) 자네는 앞선 글에서 사진 예술이 기표의 지위에만 머물면 안된다고 하며, 새로운 사태 개방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사진으로 표현된 ‘정치’는 정치적인 이야기로 환원되지 않는 의미의 잉여가 있다는 점에서, 설령 어떤 사진이 정치를 최소화된 예술적 표현만을 갖춘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진 예술인 한 다른 매체가 지니지 못하는 ‘사태개방성’이 있지 않나 생각했어. 요컨대 현장적인 생생함이나 우연성 같은 것이겠지. 그래서 나는 자네가 ‘새로움의 전개 가능성이 사진 예술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한 말과 지금 이 답변에서 하는 말에는 어떤 충돌이 있어 보인다네. 정식화하자면, <좌파예술가>에서는 사진이 지시체에 대한 기표 이상이어야만 사진다운 사진이라 했고, 이 글에서는 사진사적 맥락 속에서 새로운 형식과 감성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네. 내가 보기에는 ‘사진 다운 사진’의 조건이 이번 글에서 더 높아졌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단순히 사진의 매체적 독특성이 예술적 가치를 생산해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자네는 그러면 사진의 예술적 가치는 형식과 감성에 있어서의 ‘미적 혁신성’을 갖출 때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것은 지나치게 높은 기준이 아닐까? 사진예술의 조건이라기보다 차라리 ‘걸작의 조건’ 아닌가? 나는 사진의 매체적 독특성, 즉 사진이라는 매체의 가능성을 나름대로 실현하고 있다면 예술로서의 사진으로 볼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실패한 사진 예술로 ‘진부하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사태에 부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네. 자네의 주장대로라면 소위 미술사적 의미에서의 ‘전회’를 가져오지 못하는 작품이라면 ‘진부한 것’ 내지 ‘예술로서의 회화’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대화에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좋음’의 참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단적으로 나와 자네의 ‘좋음’에 대한 판단 기준의 핵은 ‘사태개방성’이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내가 ‘좋음’에 대해 다소 느슨한 조건을 걸어두는 반면에 자네의 ‘좋음’을 만족 시킬 수 있는 사진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이네.

내가 정연두의 작품을 자네와 다르게 평가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 때문이야. 나는 <보라매댄스홀>, <내사랑지니>와 같은 작업은 사진 예술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의미의 잉여가 발생하는 지점이 있고, 해석에 대한 개방성도 높다고 생각하네. 네이버캐스트의 정연두에 대한 소개만 보더라도 그런 소개글이 정연두 작품에 대한 적절한 2차 담론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그의 작품이 ‘시적 지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지 않냐 하는 거지. 정연두가 소박하게 사람들의 꿈이나 사진으로 실현시켜주는 정도의 작가가 아니지? 오히려 한편으로 은근히 정치적이고, 은근히 냉소적이라네. 정연두 작품에 이런 면이 있다면 그의 작품을 좋은 사진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나? 그것이 비록 내 직관과 감성에 온전하게 부합하지 못하더라도 보다 보편적인 관점에서라도 말이야.

나도 역사성을 포함한 다양한 요소들이 ‘좋음’의 조건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이 질문은 꼭 답을 듣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둘 사이에 가로 놓인 철학적 차이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네. 만일 자네가 나처럼 자네가 제시한 조건을 사진 예술의 조건이 아니라 걸작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사실상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


2) 또 다른 질문은 이미 자네가 글에서 묻고 있는 주제네. “새로움”이 왜 그토록 사진 예술에서 중요하냐 하는 거지. 고은이 미학적 보수성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시를 썼다고 해서 고은의 시에 예술적 가치를 폄하할 수 없지? 다른 한편으로 레니 리펜슈탈이 놀라운 수준의 미학적 혁신성을 바탕으로 나치에 부역하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레니 리펜슈탈의 예술적 가치를 폄하하기는 어렵지? 만일 그렇다면 작품이 지니는 ‘미적 가치’는 미학적, 정치적 혁신과는 -무관하지는 않더라도-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지점에 있는 것이라 해야 하지 않나? 사진, 회화 할 것 없이 이 새로움에 대한 강박에 가까운 집중이 작품을 어떤 소통불가능한 영역으로 데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가 후설과 같은 현상학 전통에 있다고 해서 하이데거가 후설의 ‘아류’가 되는 것은 아니네. 즉 후설 이후 현상학파라 할 수 있는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등은 동일한 방법론적 태도와 현상학적 공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각자가 지니는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떤 작가 일군이 지금 유형학 사진의 전통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그들을 진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네. 비록 레비나스가 새로운 철학적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전의 철학이 다루지 못했던 어떤 ‘사태’를 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적 가치는 있지 않은가? 물론, 후설 현상학의 방법이 하이데거에게 가서는 해석학의 형태로 방법론적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네. 자네가 형식이 내용을 따라가게 된다고 한 부분과 일치하는 부분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내 졸저가 아무 것도 새로울 것이 없는 아이키우기에 대한 정보를 담고철학적 답습이라고 하더라도 ‘육아’라는 기존의 철학이 다루지 않았던 사태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다고, 혹은 가치가 없지는 않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ㅋㅋㅋ (웃지 말게) 이 점, 자네도 첫번째 내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히로시 스기모토의 예로.. 그런데 이 글에서 '새로움'이나 '좋음'에 대한 기준이 왜 이토록 강화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네.

사진 다운 사진은 ‘사태 개방성’을 지닌 사진이라기 보다 ‘봄’에 기초하여 고유한 사태를 제대로 드러내고 있는 사진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방법론에 의존하여 나타나는 새로움과 작가가 본 ‘독자적인 사태’를 표현함으로 얻게 되는 새로움은 다르다고 보는 것이네. 방법론적 고민은 기존에 사진계가 공유해오고 있는 작업에 대한 ‘판단중지’에서 오는 것이고 그 자체로 가치 있으며, 걸작의 조건이 되지만, 비단 새로울 것이 없는 어떤 방법론 내에서의 사진 작업이 작가의 독자적인 봄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이 -걸작에는 못미칠 수 있더라도- 가치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현상학에 비유하자면 전자는 초월론적 현상학적 판단 중지, 후자는 현상학적 심리학적 판단 중지에 해당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네)

두 번째 질문을 정리하겠네.
새로움이 미적 판단에 있어서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
그리고 그 새로움은 어떤 새로움을 말하는 것인가?

숭군 :

 

우선 권군이 제기한 

 

첫번째 문제는

"사진예술의 조건이 반드시 미적 혁신성을 전제해야 하는가?,

사진매체의 독특성이 발생시키는 "의미의 잉여"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 맥락에서 정치적 메세지를 사진이란 매체로 담은 사진도 예술사진이 될 수 있지 않은가?"의 문제로 이해하면 되려나? (내가 혹시 오독했다면 다시 이야기해주게나 ^^;;)

 

그리고 두번째 문제는 권군이 정리해 주었듯이

"새로움이 미적 판단에 있어서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 그리고 그 새로움은 어떤 새로움을 말하는 것인가?"이겠지.

 

우선 권군이 제기한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 일단은 사진에서의 장르 구별이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네. 

이 경우에는 소위 "다큐멘터리 사진"과 "예술사진의 구분"이 필요한 것 같네.

 

권군이 말한

 

"나는 사진의 매체적 독특성, 즉 사진이라는 매체의 가능성을 나름대로 실현하고 있다면 예술로서의 사진으로 볼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실패한 사진 예술로 ‘진부하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사태에 부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네."

 

라는 말에서 "예술로서의 사진"을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 "실패한 사진 예술"을 "실패한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말을 바꾼다면 권군의 생각에 완전히 동의 한다네.

 

앞서 내가 "좌파 예술가"에서 밝힌 바처럼 사진 예술이 초-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다큐멘터리 사진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순수 예술로서의 사진"(fine art)의 범주에서 이야기 한 것이네.

 

나는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의 조건으로 사태개방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네.

 

하지만 예술의 사명이 "새로운 감각, 새로운 감성을 환기시키는 것"이라 한다면(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예술의 조건이네)

나는 여전히 "예술 사진"에게 있어서 미적 혁신성을 기반으로 한 사태개방성은 필수적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다만 내가 앞서 말한 "미적 혁신성"이란 것의 정확한 정의가 필요한 것 같네. 

즉, 미적 혁신성이 단순히 진보, 혹은 진화와 동일시 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일쎄.

(사실 이 부분은 권군과의 대화를 통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 부분이고 이번 기회에 나름 정리하게 된 것이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혁신성이란 오히려 어떤 독창성(originality)을 말하는 것이라네.

 

또한 이전에 말했다시피 그 독창성이라는 것이 물론 반드시 방법론적 차원에만 한정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네.

사진 이미지가 드러내는 감성적, 혹은 감각적 차원의 독창성까지 포함하는 것이지.

 

즉, 기존의 전통적 방법론으로 새로운 사태개방성(독특한 감수성)을 호출한다면,

이는 좋은 예술사진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네. 

예를 들어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이 전통적인 흑백 사진의 방법론을 이용해

독창적(혁신적) 감수성을 호출한 좋은 사례라 생각하네.

 

그런 차원에서 자네의 책이 기존의 철학적 방법론을 활용해

"‘육아’라는 기존의 철학이 다루지 않았던 사태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는 점에서 나는 자네 책을 탁월한 철학서라고 인정한다네! (자네 책에 대한 서평에서 썼듯이 ^^)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

 

 

 

 

 

 

 

 

덧붙여 새로운 형식 추구의 문제에 있어서도 나름대로 다시 검토해봤네.

 

나 역시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의 추구"에 대해서는 심지어 부정적인 생각마저 가지고 있다네. 

나는 기존의 형식이 담을 수 없는 어떤 내용(감성 혹은 문제의식)이 발생할 때

그 내용이 불가피하게 요청하는 형식이야말로 "진정한 새로운 형식"이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여기서 "진정한"이란 말은 단순히 작가의 의도에 있어서의 순수성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 결합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네.

새로움만을 위한 새로움은 내용과 형식이 분리된 공허한 껍데기뿐인,

기껏해야 "아이디어의 조악한 물질화"에 불과하기 때문이지.

(이 점 예전 "개념미술에게 묻는다"에서 말한 것과 궤를 같이하네)

 

그리고 권군이 지적했다시피 "새로운 의식(감수성), 새로운 형식"이라는 두 가지 잣대를

모두 충족하는 사진만이 예술이 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사진 예술의 기준이라는 점 인정하네. 

자네 말대로 이는 정말 "걸작의 조건"이라 할 수도 있겠지.

나 역시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무명의 작가가 아닌가^^;

 

그러나 어떠한 작품이 이미 정형화되고 도식화 된 감각만을 재생산한다면 이를 예술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네.

또한 이런 "사태개방성의 포기"는 필연적으로 (진정한) 형식적 차원의 혁신마저도 이룰 수 없을 것이라 나는 생각하네.   

 

비유를 들자면 잘 만든 헐리웃 블락버스터 영화를 재미있는 영화할 수는 있겠지만,

예술이라고 칭하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네.

 

헐리웃 영화의 정교한 만듬새와 스케일은 어떤 예술 영화보다 탁월할 수 있겠지.

하지만 헐리웃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이미 익숙해진 감각의 재반복, 재영토화에 불과하기에

이를 예술 영화라 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단순히 잘 찍은 광고사진이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

단순히 잘 찍은 다큐사진이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이와 같다고 생각하네.

이 점, "형식적 새로움의 시도"에서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내용적(감각적) 새로움"에 있어서 실패했기 때문이지.

 

즉, "탈영토화의 모색"이 없는 작업은 예술로서의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네.

물론 이전 글에서 밝혔듯 역으로 이야기해서 탈영토화의 모색과 추구가 드러난다면 

광고사진이나 다큐사진이 예술이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열려있다고 생각하네, 헬무트 뉴튼이 그런 사례가 되겠지.

 

헬무트 뉴튼의 사진

 

 

 

 

 

 

 

 

또한 형식적 새로움에 대해서

 

"사진, 회화 할 것 없이 이 새로움에 대한 강박에 가까운 집중이

작품을 어떤 소통불가능한 영역으로 데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자네의 지적에 나 역시 일정부분 동의한다네. 

나도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 형식적 새로움에만 천착하는 그저 "어설픈 수수께끼를 같은 작품"들이

예술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형식적 새로움이 반드시 사태개방성을 보증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렇기에 권군이 말하는 소통불가의 작품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그러한 소통불가의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가 소위 "사이비 예술"일 수 있다고 생각하네.(사실 확신하네 ^^;;) 

 

러나 감각이 이성보다 먼저 작용한다는 명제를 우리가 수용한다면

시간의 축을 놓고 볼 때 소통불가의 문제는 현재적 차원에 국한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열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네. 예를 들어 최초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그러했던 것으로 알고 있네. 

 

 

이렇듯 내 생각에 예술이 "인간 인식의 확장"에 기여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한다면 새로움의 추구야말로 예술의 기본 조건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내가 여기서 말하는 새로움이란 독창성, 독자성(originality)을 의미하는 것이지

반드시 형식적 차원의 혁신성까지 담보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밝히고 싶네.

 

권군 말대로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작품, 사진사에 한 획을 긋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론까지

제시할 수 있는 작품은 명작, 걸작이 되겠고, 최고 수준의 예술의 조건이 되겠지. 

 

물론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만이 예술은 아니겠지

그러나 나는 적어도 예술이라면 앞서 계속 이야기 해왔던

나름의 감각적 독창성, 독자성은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나아가 작가라면 이러한 감각의 새로움을 전제로

형식적 새로움, 즉 방법론적 새로움을 향한 지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비록 이는 충분한 역사적 시간의 축적이 필요하겠고, 당대에 이를 이룰 수 있는 작가는 많이 않겠지만

사조의 차원에서는 힘들더라도 최소한 스타일의 차원에서는 자기 혁신성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겠지.

 

나는 정연두의 사진도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네.

 

사실 나 역시 보라매 댄스홀과 같은 작품은 나름의 독특한 감성,

언어화 될 수 없는 감성을 호출한다고 인정하네.

 

그리고 10년전 작품임을 고려해볼 때 당시의 정연두는 

나름의 미학적 혁신을 획득했다고 인정하네.

(적어도 한국 미술판에서는 그렇다는 것이지) 

 

그런데 그 이후의 "Wonderland"를 비롯한 다른 작품의 경우는

너무 쉽게 개념화, 언어화되는 작품이란 생각을 해보네.

(자네가 말한) "사진 매체 자체가 발생시키는 의미의 잉여분"이란 것이 

너무 손쉽게 언어에 포섭되어 빤하게 읽힌다는 이야기지.

 

이 점, 의미의 잉여가 없어서가 아니라 의미의 잉여가

너무 손쉽게 파악된다는 차원에서 나는 시적 지시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네.

 

또한 정연두 본인이 스스로를

사진작가라 생각하지 않고 미디어 아티스트라 인정하듯

그를 사진기를 기록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혹은 개념미술가라고 정의하더라도,

자네가 예전에 말한 좋은 개념미술의 조건(충격, 사태개방성)을 획득하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하네.

 

예를 들어 Evergreen Tower와 같은 작품이 실패의 대표적 사례라 생각하네. 

(요셉 보이스나 데미안 허스트가 만들어 내는 언어, 개념을 뛰어넘는 시적 확장성과 비교해보면 자명할 것 같네.) 

 

하긴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평론에 기생해 살아가는 요즘 미술판에서

이런 언어화가 용이한 작품들이 상품성을 확보할 수 있기에 

오히려 사태개방성이 부족한,

그래서 쉽게 언어로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 주목받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네.

 

그러한 맥락에서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

반드시 높은 수준의 시적 지시성을 확보한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오히려 언어에 포섭되지 않는 작품, 언어로 담을 수 없는 지점을 지시하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네.

 

사실 건방진 이야기지만 보라매 댄스홀을 제외하고는 정연두 작품은 너무 노골적으로 기획의도가 보이고

나 같은 전문적 훈련받지 않은 사람도 어느정도 근사하게 포장된 평론을 쓸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

품의 의미가 "머리"에 잡히더군.

 

정리하자면 작품이 소통불가한 외계어 독백이 되어서도 안되지만,

그 작품의 의미의 잉여가 손쉽게 포획되어서는 시적 지시성을 획득하기 힘들다는 것이지.

그때는 기껏해야 잘 쓴 유행가 가사정도가 되는 것이지 시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네.

(물론 잘 나가는 유행가 작사가가 진짜 시인보다 돈을 잘 버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상황이 이럴진데 10년전에나 그나마의  참신성을 가지고 있었던 정년두의 지난 작업의

방법론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는 젊은 작가들은 어떠하겠는가?

 

놀랍게도 여전히 그런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많다네.

(예를 들어 현대사회의 익명성을 다룬다면서 썬글라스를 씌우고 검은 정장을 입히고 도시 한가운데 사람들을 세워

사진을 찍는 식이지.)

이들은 그나마 정연두가 10년전 맥락에서의 확보했던 그 참신성마저 확보하지 못한 셈이지.

지난번 성형사진에 대해 나의 비판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네.

 

1. 사진의 장르적 구분이 필요하다. 예술사진과 타큐멘터리 사진을 비롯한 타장르의 사진은 구분되어야 하며

    좋은 사진이 반드시 예술사진은 아니다.

 

2. 예술사진의 목적은 새로운 인식(감각) 영역의 확장이다.

  

3. 예술사진의 조건이 반드시 형식적 혁신성이 될 필요는 없으나 

   감각의 층위에서 탈영토화를 전제로 한 독창성의 성취는 필수적이다.

 

4. 예술사진은 3에서 밝힌 예술사진의 기본 조건을 토대로 형식적 혁신성을 지향해야 한다.

 

5. 예술사진이 생성하는 사태 개방성의 수준, 예술사진의 수준은 개념화(언어화)될 수 없는 의미 잉여분과 비례한다.

   단, 독해불가능한 자폐적 지시성과 시적 지시성은 구별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긴 글 읽어주어 고맙네!

덕분에 나도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을 좀 더 명백하게 검토해 볼 수 있어서 좋았네!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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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군의 친구 K 2014-04-02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http://spermata.egloos.com/2137648
친구, 나의 블로그에 질문을 담아 두었네. 확인해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