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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 오늘의 지성을 찾아서 3, 해체론 시대의 철학과 문화
김상환 / 민음사 / 1999년 9월
평점 :
품절
“예술적 행위는 아직 주어지지 않은 규칙을 사례화 한다는 데 있다.
예술이 창조하는 것은 규칙의 사례가 아니라 사례적 규칙 자체이다.
이런 예술에 대하여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타성, 즉 외재성이다”
김상환,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중
개념미술에게 묻는다.
바야흐로 철학의 시대이다. 김상환의 말을 빌리자면 “이론적 사유”의 시대이다.
모든 문화적 담론이 철학이라는 해석 도구를 통해 수행되어지는 시대이다.
작품에 대한 평론에서 저명한 철학자의 이름 한둘이 등장하지 않으면 뭔가 불안하다.
어쩐지 존재기반이 불안정한 작품인듯한 인상마저 든다. 작품성에 대한 판단 권한을 철학이 쥐고 있다.
철학적으로 해석될 때 가치 있는 작품, 그런 작품들이 평론가들에게 인정받고,
컬렉터들에게 회자되고 값이 올라가고 소위 “뜬다”. 그것이 오늘날 예술판의 현실이다.
누구의 말처럼 예술이 일종의 공모가 되어가고 있다.
좋다, 여기까지는 참아보자. 즉, 철학이 예술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최종 기준이 되는 시대라는 것, 억울하지만 참아보자.
한때는 지금 철학이 누리는 권력을 종교가 차지하고 있었던 때 역시 있었으니 그리 낯선 서러움만은 아니지 않은가?
철학이 문화담론을 주도하는 지금 시대에 예술작품이 철학의 칼날을 피해 홀로 고고히 자기 영역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결국 예술도 소통되어야 하고 그 소통의 주도권, 아니 어쩌면 소통의 언어자체가 철학이기에.
그러나 이제 마침내 참을 수 없는 문제, 참아서는 안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예술이 철학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그리고 그러한 예술의 노예화의 선봉에 개념미술이 있다.
철학이 예술의 “해석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 앞서 말했듯 이것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면 쓰리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그러나 철학이 예술의 “창조권력”을 쥐게 된다는 것은 예술의 자기 부정이자 예술의 절대타락이다.
개념(이론적 사유)을 그 창조 근거로 삼아 예술을 생산한다는 것은 이미 예술이 철학의 하녀 노릇을 하겠다는 선언이다.
개념을 활용하여 창조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철학이 하는 일이다. 또한 철학은 그런 개념들을 통해 새로운 개념을
생산해내지만 소위 개념미술은 그저 (철학적)개념을 차용하여 그 개념의 도판으로 봉사하고 있을 뿐이다.
예술적 경험이란 균열의 경험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인식체계를 벗어나는 전혀 새로운 사태와 직면하는 것,
기존의 인식의 틀에 균열을 주는 그 무엇을 만나는 것이 바로 예술적 경험이다. 그리고 그러한 균열을 창조하는 작업이
바로 예술 활동이다. 그러나 이미 정립된 개념의 물질화에 머무는 예술, “규칙의 사례화”에 머무는 예술,
철학을 그 “외재성”으로 삼고 있는 예술, 소위 개념미술은 결국 새로운 사태,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전개할 수 없다.
예술은 의미의 수렴도 아니며, 수렴된 의미의 물질화는 더욱 아니다. 오히려 예술은 수렴된 의미에 대한 거부이며,
의미의 무한한 생성이다.
개념 미술에게 묻는다. 너는 예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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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리뷰는 아니고, 그동안 개념미술에게 쌓였던 게 많았나보다.
뭐 그냥 그렇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