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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mming -사진의 일부를 잘라내는 행위

  내 책상 왼쪽 벽에는 체 게바라의 사진 붙어있다. 사진은 그의 뒷모습을 담고 있는데 저 멀리 파도가 내려다보이는 것으로 보아 장소는 바닷가 어느 건물 테라스인 것 같다. 의자에 앉아 팔꿈치를 팔걸이에 기댄 채 비스듬 몸을 젖히고 왼편을 바라보고 있는 체 게바라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습이다. 상의를 벗고 긴 머리를 어깨까지 드리운 채 그 유명한 베레모를 쓰고 있다. 얼굴의 좌측면을 담고 있는 사진이어서 오똑한 콧날, 쑥 들어간 깊은 눈, 수염으로 덮인 턱 선이 더욱 인상적이다. 어쩌면 그가 좋아했던 네루다의 시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왼쪽 하단에는 “CHE FOTOGRAFISCHES  ALBUM”라는 글자가 검은 사각형 안에 쓰여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사진은 아마도 체 게바라를 담은 사진집의 표지 이미지일 것이다. 2004년인가 인터넷에 내려 받은 사진을 프린트 해두었다가 작년에 이사를 하면서 책상 붙여두게 되었다. 

 

 

(내 책상 벽면에 붙은 체 게바라의 사진)




사진에 관한 글을 한 번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친구의 말을 듣고 마음이 동해서 어떤 사진으로 이야기하면 좋을까하며 두리번거리다 체 게바라의 사진에 눈이 간다. 좋다. 아이콘이 되어버린 이들의 사진에 대해 글을 써보자. 자본에 포섭되어 상품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어쨌든 체 게바라의 이미지는 혁명의 아이콘이 되었다. 나아가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알베르 카뮈, 피카소, 마틴 루터 킹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아니다. 내가 무슨 위인전을 쓰겠다는 게 아니잖아. 그래. 혁명과 사진을 써보자. 사진의 프로파간다적 성격을 이야기 해보자. 이편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저런 생각이 교차한다.

그러던 중 문득 사진 속 체 게바라가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프레이밍으로 볼 때 그다지 중요한 인물은 아니니까 체 게바라만 단독으로 찍었거나 트리밍을 했으리라 추측해본다. 구글에 들어가 Che Guevara를 입력하고 이미지 검색을 시도한다. 내가 가진 사진을 찾을 수가 없다. 다시 벽에 붙은 사진을 유심히 본다. 단서를 찾자. 검은 사각형 안에 쓰인 “CHE FOTOGRAFISCHES  ALBUM”를 검색해본다. 오! 나왔다. 역시나 사진집이 맞았다. 이베이(e-bay)에 사진집이 올라와 있다. 클릭을 해서 들어가 본다. 중고 사진집을 팔기 위해 판매자가 올린 사진들을 넘기다가 마지막 사진에서 반전을 만난다. 내가 가진 사진의 숨겨진 왼쪽 편 진실이다. 아마 사진집의 뒤표지인 것 같다. 숱 많은 곱슬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남자의 오른쪽 아래에는 낚싯대 하나가 놓여있다. 그리고 곱슬머리 남자의 발 아래로 배의 갑판처럼 보이는 마루가 보인다. “이런... 그랬구나”. 다시 구글로 들어가 Che Fishing을 검색한다. 트리밍이 되지 않은 전체 사진이 보인다. 전모가 밝혀진다. 알고 보니 내가 가진 사진은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요트에 나란히 앉아 낚시를 하며 이야기 나누고 있는 사진의 일부분을 잘라낸 것이었다. 원본 사진을 보니 원근감이 회복 되면서 바다와 체 게바라 사이의 거리감이 좁혀진다. 사진을 편집한 이는 영리하게 체 게바라의 왼편에 놓여있던 낚싯대를 “CHE FOTOGRAFISCHES  ALBUM”라 쓰인 검은 사각형 모양의 사진집 제목으로 가려 놓았던 것이다. 긴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과 함께 탁 트인 바다를 멀리서 내려다보며 문학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젊은 혁명가의 모습을 그렸던 나의 상상력은 그렇게 상처 입는다. (검색을 통해 찾아보니 이 사진은 10년 동안 피델 카스트로의 전속 사진사였던 알베르토 코르다(Alberto Korda)가 1960년대에 찍었던 사진이다. 비슷한 시간대에 찍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사진들을 보니 낚시를 도와주는 몇몇 사람들이 더 보이고 낚싯배 갑판 위는 활기찬 분위기이다. 코르다가 직접 서명을 한 오리지널 프린트가 판매되기도 했는데 이 사진에서도 역시 왼쪽 편 피델 카스트로의 모습은 트리밍 되어있다.)


 

  

       
(사진집의 뒤표지 사진)               


 

     
(알베르토 코르다가 찍은 원래 사진)



 

(같은 배에서 찍었으리라 추정되는 알베르토 코르다의 사진)




흑백 사진을 많이 본 사람들 중에 눈썰미가 좋은 사람들은 알고 있겠지만 어떤 흑백사진들은 약간 불규칙적인 형태의 검은 테두리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다. 흑백 사진은 전구에서 나온 빛이 필름에 맺힌 상을 통과해서 인화지를 태우는 원리로 이미지를 만든다. 필름 위에 맺힌 상이 투명할수록 전구의 빛은 더 잘 투과되어 인화지를 많이 태우게 되고 최종 인화물은 더 진한 검은색으로 표현된다. 이런 인화 작업을 위해서는 필름을 고정시키기 위해 금속으로 만든 캐리어에 필름을 거치시켜야 한다. 그리고 거치된 필름 위로 전구의 빛이 통과될 수 있도록 필름 캐리어는 필름 이미지의 규격과 거의 동일한 크기만큼의 사각형 홈을 가지고 있고 이 빈 공간에 걸쳐진 필름을 통과한 빛이 인화지를 태우고 사진 이미지를 만든다. 그래서 필름 이미지와 동일한 크기의 일반적인 홈을 갖춘 캐리어에 필름을 올려놓고 인화를 하면 원본 필름에 맺힌 상은 외부 여백이 거의 없는 상태로 그대로 인화지에 맺히게 된다. 그런데 어떤 사진가들은 이런 필름 캐리어의 테두리 부분을 애써 줄로 갈아 캐리어의 홈을 필름 이미지보다 더 크게 만든다. 이런 상태에서 인화를 하게 되면 상이 맺혀있지 않은 투명한 필름 테두리 부분으로도 빛이 투과되어 인화지를 태우게 되며 이것이 종종 우리가 흑백 사진에서 보게 되는 사진을 둘러싼 검은 테두리를 만드는 것이다. 흑백 사진을 다루는 작가들이 이런 방식으로 애써 필름의 이미지 외부까지 인화하는 이유는 단순히 미적효과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의 사진이 트리밍 되지 않았다는 것, 즉 촬영할 당시 필름에 맺힌 이미지 전체를 인화지 위에 “전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당당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의 사진은 “잘라내지 않은 진실”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 없는 진실한 사진을 강조했던 대표적 작가가 바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다. 피사체가 프레임 구성의 절정에 이르는 순간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사진 미학으로 스트레이트 포토의 신화가 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촬영 이후 이미지를 자르거나 가공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는데 실제로 거의 모든 그의 사진들은 “손대지 않았음”을 역설하고 있는 검은색 테두리를 가지고 있다.


“‘조작’되거나 연출된 사진은 나와 관계가 없다.(...) 잘 된 사진을 조금이라도 잘라내면 이 비례의 역할은 치명적으로 손상된다. 암실에서 확대기를 통해 네거티브 필름을 재단하는 식으로 재구성한다고 해서 처음 찍었을 때 구성이 빈약한 사진이 살아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시각적 통일성이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영혼의 시선, p16, 33, 열화당)

그러나 사진 이미지에 조작(?)을 가하는 것을 이토록 강력하게 거부했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도 그가 말한 “결정적 순간”의 한 장을 위해 때로는 필름 한 롤의 반 이상을 쓸 만큼 같은 피사체를 여러 번 촬영하였다. 즉 피사체가 완벽하게 자신이 원하던 이미지의 모습을 나타내는 순간까지 계속하여 촬영하였고 이렇게 찍힌 수많은 사진 가운데에서도 충분히 흡족한 사진만을 선택하여 공개하였다. 그렇다면 내 책상 옆에 붙어 있는 체 게바라의 사진, 피델 카스트로는 잘려지고, 낚싯대는 책 제목으로 가려진 그 사진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을 담은 사진에 비해 진실하지 못한 사진이라 할 수 있을까? 사진에 담긴 모든 이미지는 결국 특정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 선택적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자세히 보면 검은 테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일전에 소위 말하는 셀렙(celeb)들을 사석에서 몇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가운데 어떤 국회의원은 청년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학벌이 좋은 친구들의 이름만을 별도로 꼼꼼히 기록하고 있었고, 어떤 지식인은 대화를 나누던 중 평소에 가까운 관계에 있는 줄 알았던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지식인을 조소하며 서슴지 않고 비난했으며, 어떤 음악인은 소주를 마시며 몇 시간 동안 민중과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다가 흥이 올라 단골집으로 가자며 수십, 수백만원짜리 술을 파는, 서민들은 가기 힘든 고급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좋은 정치인, 지식인, 음악가로 그들을 알고 있었던 당시 나의 기대는 내 책상 옆 체 게바라 사진의 전체 모습을 알게 되었을 때만큼 상처 받았다. “이런... 그랬구나.”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도덕성이나 인격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회의주의적 태도는 이후 거듭되었던 몇 번의 비슷한 실망과 상처가 만들어낸 굳은살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본다. 그들은 그냥 그들이었을 뿐이다. 내 책상 옆에 붙어있는 체 게바라의 사진이 그랬듯 그들은 그저 그들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을 뿐이다. 미풍을 맞으며 문학을 이야기하고 있는 근사한 혁명가를 상상한 것도 나 자신이었고, 좋은 정치인, 지식인, 음악가를 섣불리 기대한 것도 나 자신이었다. 트리밍을 했든, 전체 이미지를 다 보여주고 있든, 사진은 본질적으로 시공간의 한 단면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언론을 통해서든 지인의 소개를 통해서든, 혹은 심지어 그들이 직접 쓴 책을 통해서든 내가 가졌던 그들에 대한 이미지 역시 그저 그 인물에 대한 한 단면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아니 아마도 내가 느꼈던 실망스런 단면을 모두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큼 다른 특정한 공간과 시간의 단면에서 그들은 내가 애초 기대했던 것 이상의 좋은 정치, 좋은 글, 좋은 음악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사진 이미지에 드러난 피사체에 대한 판단이 그렇듯 사람에 대한 판단 역시 항상 열려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예민함과 상상력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나 한 단면만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받아들이는 겸손함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성급한 예단은 늘 상처를 낳는다. 검은 테두리를 두른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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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티 사말란티




마리 킴





이강욱






펜티 사말라티, 마리 킴, 이강욱

지난주에는 경복궁 근처에서 전시들을 봤다. 
펜티 사말란티(공근혜 갤러리 http://www.gallerykong.com), 
마리 킴(학고재 갤러리 http://www.hakgojae.com/ko/)
이강욱(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http://www.arariogallery.com)

인상을 가볍게 정리하자면 
장인, 연예인, 예술가 순서이다. 너무 단순하게 정리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인상이 그렇다. 

펜티 사말란티의 사진은 완벽한 구도와 아름다운 프린트가 일품이다.
나름의 고요한 서정성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스트레이트 사진의 구성 미학), 안셀 아담스(프린트의 미적 성취), 로버트 프랭크(새로운 감각)에 견줄 수 없는 것은 독자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무엇 하나도 새로운 것은 없다. 비유하자면 학교에서 충실히 공부한 어느 성실한 모범생과 같은 사진이랄까? 그러니까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이 미적인 문제의식이든 사회적 문제의식이든 철학적 문제의식이든 보다 본질적인 것에 대해 고투하고 사투한 흔적이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이 말이 그가 쉽게 사진을 찍고 쉽게 작업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배울 것이 많은 사진을 보여주지만 보는 이에게 새로운 질문과 감각을 던지지 못한다. 물론 모든 사진가가 예술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의 작품들은 훌륭한 사진이지만 훌륭한 예술과는 결이 다르다. 아마 이 노장 사진가는 애초에 예술을 하기보다는 좋은 사진을 찍는 것이 목표였을 것이다. 자신을 장인이라 밝힌 그의 고백대로 사진의 장인, Master of Photography, 이것이 그의 목표였다면 그는 그 목표를 충실히 이루어 내었다. 

마리 킴의 작업은 너무 쉽게 읽히고 가볍다(부정적 의미에서). 즉 정신적, 기술적 차원에서 노력과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대표 이미지라 할 수 있는 아이돌(eyedoll)은 나라 요시토모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고 그녀의 철학은 대학 학부 교양서적에 써 있는 몇 문장을 어설프게 따온 수준이고 그녀의 미적 방법론은 얄팍한 키치적 팝아트 요소들을 조합하고 있다. 이마저도 앤디 워홀처럼 소위 “팩토리"에서 조수들을 통해 작업한다고 한다. 앤디 워홀이란 작가는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미학적 문제의식과 ”팩토리“라는 작품 제작방식이 가지는 비전통성 그 자체가 그의 작품의 내적구성 요소이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워홀의 작품에서 완성도, 수공예성 따위는 그의 작품을 논함에 있어서는 무의미한 것이다. 이미 작품의 핵심이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점 이후의 훌륭한 팝 아티스트들이나 현대 미술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마리 킴은 전혀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기하지도 “못하면서” 손쉬운 방법론을 택하고 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브랜드가 되고 싶어 했고, 또 그리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애석하게도 명품 브랜드는 분명 아니다.(좀 다른 이야기지만 몇 번에 걸쳐 학고재에서 봤던 좋은 작품들을 떠올려 볼 때 왜 이런 작품을 학고재에서 전시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에서 전시되고 있는 이강욱의 작품은 인상적이었다. 물론 거장의 반열에는 아직 이르지 “않은” 갓 불혹에 이른 젊은 작가지만 작품이 매혹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지오메트릭폼 시리즈” 보다는 근래의 작업인 "제스쳐 시리즈"가 더 좋았다. 사실 1층에서 “지오메트릭폼”을 볼 때에는 “진지한" 젊은 작가들이 그러하듯 이미지보다 사상(개념)이 더 앞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만다라, 부분과 전체, 프랙탈의 개념들) 2층에 전시된 “제스쳐 시리즈”를 보고서는 언어로 포획할 수 없는, 이미지 자체에서 발생하는 분명한 감각적 잉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정말 가까이 작품에 다가가서 봤는데 가까이서 볼수록 더욱 매혹적이고 "만지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나야 회화를 전공하지 않았으니 방법론은 잘 모르겠으나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고, 단순히 노동의 투입량을 넘어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새로운 감각의 차원이 분명히 감지되었음을 말할 수 있다. 전시를 보기 전 작가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는데 작품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집에 와 찾아보니 역시나 이미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고 있는 작가여서 내 눈이 아주 동태눈은 아니구나하고 안도하기도 했다. 이강욱 작가는 이번 작업보다 다음 작업이 더 기대되는 작가다.(해서 여유만 된다면 정말 작품을 소장하고 싶다) 작업을 보면 아직 완전히 개화했다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문제를 붙잡고 여전히 고민하고 정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몇 개의 수학의 난제 중 하나를 붙잡고 몇 년에 걸쳐 풀고 있는 어느 수학자의 엄청나게 긴 풀이 과정의 일부를 보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것을 그의 작품을 통해서 느꼈다. 하지만 뭐, 사람일 어찌될지 모르니 더 두고 볼 일이다. 김승옥 같은 이도 그렇게 글을 접었으니 말이다. 어찌되었건 기회가 된다면 꼭 사석에서 한번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일종에 팬이 되었다랄까. 

사실 이상의 주제넘은 이야기는 순전히 내 알량한 지식에 기초해서 떠들고 있는 것이다. 내 구미에 맞는 작품에 대해서는 후한 평을 그렇지 못한 작품에는 박한 평을 함부로 던지고 있는 것이다. 작업으로 밥벌이를 유지하고 있는 그들에게 내가 어찌 배울 것이 없겠나.

펜티 사말란티의 구도자적 장인정신, 마리 킴의 응용력과 마케팅 능력, 이강욱의 고민하는 힘과 예술적 감각. 그럼에도 이 같은 오만방자한 평에 대해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들을 통해 내 지향과 취향을 보다 확고하게 다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니 혹 읽다가 불쾌했다면 이해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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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연구2. 리처드 웬트워스(Richard Wentworth)
“삶은 계란이다.” 라는 문장이 있다. 이 말의 뜻이 당신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1)“삶은 계란이다. 맛있을 것 같다. 같이 먹자.”/ 2)“삶은 계란이다. 그만큼 약한 껍질을 가진 것이 우리 삶이다. 조심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다시 처음의 문장으로 돌아가자. “삶은”이란 말은 이처럼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1)의 의미로써의 “삶은(boiled)"과 2)의 의미로써의 "삶은(life is)" 가운데 어느 하나의 의미만 파악했고 다른 의미를 놓쳤다면 그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일까? 아마도 당신의 언어 인식 방식에 특정한 형태의 구조가 (무의식중)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리처드 웬트워스의 작품은 그를 인터뷰한 벤자민 이스텀의 표현대로 이러한 우리 내부에 내재된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의 자동성”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의 이미지 속에서 반으로 쪼개져 전시장 벽면을 횡단하는 접시들의 행진 속에서 접시는 더 이상 접시가 아니며, 직각으로 구부러진 채 버려진 빨대는 사각형의 맨홀 뚜껑과 만나 새로운 조형적 의미를 만들어 내며, 검은색 자동차 바퀴 뒤에 놓인 빨간 토마토의 모습은 야채 가게 진열대에 놓여있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긴장의 정서를 발생시킨다. 이처럼 그는 우리에게 낯익은 일상의 이미지 해석 코드를 해체하고 새로운 해석의 방식을 제안한다.
“나는 이미지의 유기적 구조에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일종의 텍스트고, 따라서 읽힐 수 있다.”... “이 난간을 보라. 어떤 무기로 여겨질 법도 하지만 주변 맥락으로 인해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상과 같은 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리처드 웬트워스의 작업은 일상의 낯익은 사물을 새로운 맥락들과 접속시킴으로 그 사물을 둘러싼 낡고 단단하고 익숙한 해석의 껍질을 깨뜨려 사물의 의미에 새로운 개방성을 부여하고자한 시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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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연구1.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큐레이터)

인터뷰어이자 큐레이터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가장 큰 관심은 compiling을 통해 균질화된 기존의 시공간 질서에 균열을 가하고 나아가 시공간에 대한 새로운 의미와 해석을 생산하고자 하는 시도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단어 compile은 다른 자원들을 결합하여 의미를 생산하는 행위, 일련의 목록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편집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인터뷰어로서의 그는 도착적일 정도로 집요하게 모든 인터뷰를 기록하고 저장한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기록과 저장에서 그치지 않고 이 정보들을 가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그는 건축가 세드릭 프라이스와의 10시간짜리 인터뷰 영상에 간단한 설명과 키워드가 달린 태그를 결합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영상의 선형적 시간 순서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입력해 검색하여 시청할 수 있도록 함으로 영상이 제공하는 시간성에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1991년 전시 Kitchen Show에서 그는 일반 갤러리가 아닌 자신의 부엌에서 리차드 웬트워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를 비롯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아 전시함으로 부엌과 갤러리라는 공간들의 정형화된 의미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시를 기획한다.(이후에도 그는 수도원 도서관, 비행기, 호텔 객실에서 이루어지는 전시를 기획한다.)

이러한 그의 “시공간의 재해석과 생성”에의 관심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기획중 하나가 Do-It 프로젝트이다. Do-It 프로젝트는 그가 1993년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와 베르티앙 나비에와의 대화가운데 “일련의 교본(instruction)만으로도 전시가 가능할까?”라는 토론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Do-It 프로젝트를 통해 작가들은 특정 작품을 생산하는 지침만 제공하고 작가가 아닌 전 세계의 일반인들이 (여러 언어로 번역된) 동일한 교본을 참고해 각기 다른 작품을 만듦으로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넘어 계속해서 새롭게 생성되는 작품전을 기획한다.(Do-It 프로젝트는 전세계 90개의 장소에서 현재도 진행 중이다.)
살펴본바와 같이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작업은 기존의 planner로서의 큐레이터의 역할을 벗어나 “생성의 틀”을 만드는 것을 큐레이팅의 본질로 하고 이를 통해 정형화된 시공간 의식에 균열을 주고자 함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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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군과의 대화 4

 

권군

 

숭군, 나 K오. 초심자의 거친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해주어 고맙네.
읽다보니 몇가지 다시 궁금한 점이 생겼오. 또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네.

자네가 정식화 해둔 명제들을 중심으로 다시 거친 질문들을 해보겠네.

1) 숭군의 정식화 1과 2 검토

1. 사진의 장르적 구분이 필요하다. 예술사진과 다큐멘터리 사진을 비롯한 타장르의 사진은 구분되어야 하며 좋은 사진이 반드시 예술사진은 아니다.
2. 예술사진의 목적은 새로운 인식(감각) 영역의 확장이다.

자네는 다큐멘터리 사진과 예술 사진을 구분하면서 다큐멘터리 사진에는 ‘사태 개방성’이 요구되지 않지만 예술사진은 사태 개방성, 즉 인식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을 정도의 새로운 감성과 감각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네. 그러니까 이것을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사진이 1차 담론으로서의 지위를 얻을 때에만 예술 사진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 다큐멘터리 사진은 말그대로 그것이 다큐(기록)인 한 다른 1차 담론에 대한 2차 담론의 기능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네. 일정부분은 나 역시 자네 의견과 같아.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한 보충적 기록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면 그것이 어떤 독자적인 사태를 개방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 그야말로 '시 없는 노동시'와 같은 처지일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자네는 다큐멘터리 사진은 예술 사진에 비해 열등한 것이라 생각하나?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과 나쁜 다큐멘터리 사진이 있다고 할 때 전자는 후자에 비해 2차 담론의 기능을 충실히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나는 2차 담론의 기능을 하지 제대로 못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은, 이것은 하나의 비유가 아니라 사실로서 다큐멘터리 사진일 수 없고, 다큐멘터리 사진 역시 필연적으로 2차 담론을 넘어서는 지점을 반드시 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나 싶네. 그러니까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은 2차 담론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2차 담론일 수 없는 사진이지.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의 <내면의 침묵>이라는 사진첩은 다큐멘터리 사진인가, 예술 사진인가? 만일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면 이 사진들은 어떤 인물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저 2차 담론인가? 2차 담론이기 때문에 예술 사진으로 인식의 확장을 가져오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인가? 나는 브레송이 촬영한 초상 사진들이 인물들의 또 다른 면을, 영화나 책에서 읽고 느낀 것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사태개방성’을 지닌 사진들로 보았네. 그건 자네가 언급한 헬무트 뉴튼이 촬영한 초상 사진들도 마찬가지라 보네.

만일 예가 적절하지 않았다면 용서하게.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진 예술에서 이 같은 장르의 구분이 꼭 필요한가 하는 점, 더 정확히 말해 자네는 ‘구분’이라고 하지만 두 사진 간의 관계를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우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이네. 파인 아트에 대해서만 사태 개방성을 요구할 때 자네는 파인 아트 외의 장르 사진들에는 그런 사태 개방성이 어째서 요구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지 궁금하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네는 요구되지는 않지만 만일 사태개방성을 가지고 있다면 예술 사진으로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 부분이 잘 정리가 되지 않아. 어쩐지 충돌처럼 여겨지거든. 그런 점에서 그런 ‘우열’관계가 정당한 것인지, 사진계에서 어느정도까지 보편화된 입장인지 궁금하네. 자네가 더 잘알겠지만 뷰먼트 뉴홀의 경우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건을 기록할 수도 있지만 ‘뉴스사진’이 지닌 특수한 의미보다 어떤 보편적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하지 않나. 나는 자네가 혹시 예술 사진을 심상 사진이나 회화성을 지닌 사진으로만 국한해서 이해하는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구만. 사진가들이 취할 수 있는 포지션으로는 시인, 정치가, 철학자 등 다양한 시선이 있을텐데 나는 자네가 작품이 지니는 ‘시적 특성’에만 사진을 국한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굳이 표현을 바꾸자면 자네가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부른 사진은 결국 ‘보도 사진’을 말하는 것 아닌가? 보도 사진은 2차 담론 외의 기능을 스스로도 의도하지 않지만 다큐멘터리 사진은 다르다고 생각하네. 물론 자네가 조셉 쿠델카 같은 작가들이 다큐멘터리 사진이지만 새로운 사태를 개방하는 사진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그들의 작품을 예술 사진이라고 말한 것도 기억하고 있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다큐멘터리 사진과 타장르의 사진을 구분해야 할 정당성이 있는가? ‘좋은 사진’은 ‘예술 사진’이라고 말하면 왜 안되는가? 잘 만든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라도 예술 영화로 부를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터미네이터', ‘배트맨', '반지의 제왕' 시리즈 등을 포함해 최근의 ‘노아'까지도 예술이라 부르지 않을/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네. 블록버스터의 공식이 반복되더라도 그 반복이 단순 반복일 수 없다는 점, 걸작과 걸작을 매개하는 아류에 불과하더라도 아류가 예술이 아닌 것은 아니듯이 말이네. 솔직히 '매트릭스' 정도 되면 이미 예술을 넘어선 예술 아닌가.

여기서 질문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한가지만 용어를 정의하고 싶네. 나는 ‘좋음’을 기술적으로 정밀한 것과는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사진가 세계에서 기술적으로 정밀하지 못한 것은 아예 우리 논의의 고려대상 자체가 아니네. 나는 ‘좋음’을 사태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내지 사태를 얼마나 개방하는지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러니까 사태에 대한 ‘엄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정밀함과 엄밀함의 구분은 현상학의 개념적 도식이기도 하네. 나는 사진의 매체적 독특성을 나름대로 실현하고 있는 사진이라면 여전히 예술사진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네. 보도사진이나 상업사진들 역시 사진의 메채적 독특성을 실현해내고 있다면 예술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네. 그것의 창작 내지 제작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말이네. 내가 말한 사진의 매체적 독특성은 언어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사진만의 잉여적 의미를 작품이 생산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이네. 나는 자네와 같은 직관으로 여지현 작가의 작품의 경우 의미의 보편성이 좀 의심스럽네. 그러나 정연두, 김옥선 작가의 경우에도 같은 식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요컨대 사회주의 선전화들이 그저 키치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저항’이나 ‘자유’와 같은 나름의 보편성을 지녔다고 평가되지도 않나? 자네 말대로 해석학적 시간축을 고려했을 때 소통불가능한 작품에 대해서 그렇다고 말하려면 조심해야 하듯이, 이들의 작품들에 대해서 ‘진부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유의해야 하지 않나 싶네.

내 관점에서 예술의 범위가 많이 넓어질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네. 나는 내가 예술 범위에 있어서 최대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아.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술의 조건’이니까.

2)

3. 예술사진의 조건이 반드시 형식적 혁신성이 될 필요는 없으나 감각의 층위에서 탈영토화를 전제로 한 독창성의 성취는 필수적이다.
4. 예술사진은 3에서 밝힌 예술사진의 기본 조건을 토대로 형식적 혁신성을 지향해야 한다.
5. 예술사진이 생성하는 사태 개방성의 수준, 예술사진의 수준은 개념화(언어화)될 수 없는 의미 잉여분과 비례한다. 단, 독해불가능한 자폐적 지시성과 시적 지시성은 구별되어야 한다. 


나는 이번 자네의 답변을 읽으면서 자네와 내가 생각하는 ‘사태’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여겼네. 사실 현상학계 내에서도 ‘사태’(Sachen)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합의가 되지 않고 있네. 오이겐 핑크는 “사태 자체는 반드시 무언가 이미 확정된 것으로서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엇이 사태 자체인가는 연구주제의 관점으로부터만 추정될 수 있다”고 한다네. 자네는 예술이 인식영역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하며 예술 사진이라면 새로운 감수성과 감각을 호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네. 그리고 그것은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 모두 추구될 수 있는 것이라고도 했네. 그러면서 독창성, 즉 탈영토화에 대한 지향이 없을 때 그것을 과연 예술로 부를 수는 없기에 감각적 독창성과 독자성이 추구될 필요가 있다고 봤네. 이 답변으로 왜 예술에서 새로움이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 새로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느정도 이해하게 되었다네. 고맙네.

질문은 이런 것일세. 그러면 자네가 말하는 독자적인 감각이나 감수성은 무엇인가?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감각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주는 공포심, 비열한 웃음처럼 언어화 되기 이전에 감상자에게 주는 충격과 같은 직접적 감각을 말하는 것인가? 만일 자네가 첫번째를 의미했다면 나는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감각, 개념화될 수 없는 의미의 잉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 같네. 예를 들면 성서가 열어주는 신적 사태를 경험했다고 해보자구. 그 사태에 대해서 우리가 온전하게 지시할 수 있는 의미, 경험이 완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시의 성공’과는 별개로 ‘지시의 실패’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더라도 ‘언어화’에 대한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네. 사실 지시의 실패, 기표의 흘러내림이라는 것은 언어의 본질적 한계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예술 사진이 개념화될 수 없는 의미의 잉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결국 ‘감각’이나 ‘예술'을 신비화하는 것 아닌가?. 감각이 주는 사태의 풍부함을 언어로 모두 담기는 불가능하겠지만, 만일 나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사진은 언어화되기 이전의 풍부한 감각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언어보다 감성적 차원에서 언어보다 우등하고, 따라서 사태개방성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하네. 그러니 좋은 사진 예술은 언어와 사태 간의 관계만으로는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사태의 또 다른 면을 사진이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그 때 사진이 드러낸 사태의 또 다른 측면은 환원이 실패하더라도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네. 나는 언어와 사태의 관계에 기생하는 사진은 나쁜 사진이지만, 사태의 또 다른 측면을 열어주는 사진은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고 보네. 다른 말로 하면 한 사진이 사태, 경험 현실의 재구성을 통해 사태의  '진실'(truth)을 담고 있다면 좋은 사진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싶어. 정리하자면, 나는 자네가 '언어화될 수 없는 감각, 감수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네. 

만일 자네가 의미하는 것이 두번째, 즉 감상자에게 주는 충격과 직접적 감각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나는 그보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의 경우라면 이 작품이 지닌 시적 측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자네가 보여준 헬무트 뉴튼과 로버트 메이플소프 모두 그런 차원이 있다고 생각하네. 그러면 자네가 ‘정형화된 감각’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정형화가 수식하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작품이 시적 언어의 지시성을 지니지 않고 단지 일상 언어의 지시성을 갖는 경우를 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네.  만일 그렇다면 내 생각도 바로 그러하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는 사태 개방성은 우리의 일상적 시선을 해방하는 기능이 있어야 예술이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그러니까 우리가 존재와 세계를 정립하는 ‘서정’의 방식에 의문을 던지는 정도에 따라, 그리고 다른 ‘서정’으로 돌변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카프카의 작품이 나를 추방하며, 내게 형벌을 부과하면서 세계와 존재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하듯이 사태 개방성은 ‘시선의 전향’ 외에 다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네. 내가 상업 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 보도 사진을 순수 사진과 구분할 수 없다고 보는 지점이 바로 이것이네. 그런 점에서 헐리우드 영화도 이런 시선의 전향을 불러온다면 예술로 기능하는 것으로 봐야해. 예술의 조건이라기 보다 좋은 예술의 조건은 이런 사태 개방성을 얼마나 가지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겠지.

한가지 더 보태자면, 앞서 말했든 나는 예술의 범위에 있어서 최대주의자라고 생각하네. 예술에 대해 너무 과장할 필요가 없고, 예술을 신비화시켜서도 안되고, 어떤 대상 내지 사태가 지닌 다른 측면을 보여주며 예술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면 예술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그리고 쉽게 언어로 해석되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일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보네. 내 경우에 ‘상록타워(evergreen tower)’를 보면서 과연 이게 전부일까, 즉 내가 해석한 내용이 이 작품의 최종적 의미일까 하고 묻고 작품을 더 고민해야만 했었네. 그 작품이 지니는 여러 층위가 있다고 보고 나는 표층만을 봤을 수도 있다고 본것이지. 감각은 모두 지시될 수 없더라도, 언어화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작품은 끝없이 새로운 감각, 새로운 사태를 생산해 낸다. 나는 그것이 작품을 경험하는 자의 입장에서 가져야 할 태도, 작품에 대한 윤리가 아닌가 하네. 

질문을 정리하겠네.
1) 첫 번째 질문은 예술 사진의 조건이네. 왜 예술 사진을 말하는데 있어서 다른 장르와의 구분이 필요한가?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에 사태개방성이 요구되지 않는다면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과 나쁜 다큐멘터리 사진의 차이는 무엇인가?

2) 두 번째 질문은 훌륭한 예술 사진의 조건이네. 자네가 훌륭한 예술 사진의 조건으로 말한 형식과 내용 측면에서의  ‘사태개방성’에서 ‘새로운 감각과 감수성’을 호출한다는 말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내가 말한 둘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외의 다른 어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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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군 :

 

답글 고맙네! 덕분에 정말 평소에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네!

 

나는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과 나쁜 다큐멘터리 사진의 기준은 기술적 완성도에 있다고 생각하네.

즉, 잘 찍었느냐, 못 찍었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네.

 

그리고 이전에 언급했다시피 이같은 기준에서 더 나아가서 상황의 새로운 측면을 환기시키는 힘을 가진 사진을

나는 예술로 작동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생각하네.

이 점 많은 다큐 사진가들에게 적잖히 욕먹을 일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예를 들어

얼마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박노해의 다큐사진을 보겠네

 

 

 

 

 

 

 

 

 

 

이상의 박노해의 사진은 정말 잘찍은 다큐사진이라 생각하네.

내가 죽기 전에 저렇게 잘찍은 사진을 한번 남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드네.

 

그러나 나는 과연 박노해의 사진이 예술작품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네.

적어도 나에게는 박노해의 사진은 기존에 너무나 많이 보아왔던 그런 이미지의 반복 생산이라고 생각하네.

즉 새로운 감각, 새로운 의식의 지평을 한치도 넓히지 못했다는 것이지.

좀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박노해의 사진은 사진은 "인간 사랑, 가난한 이웃에 대한 따뜻한 시선" 등으로

너무나 쉽게 수렴 되어버린다는 것이지.

이는 사진이 애초에 "기존의 관념이나 생각"을 지시하는 일종의 지시기호로 기획되어

사용되었기에 발생하는 당연한 결과라 생각하네.

 

그리고 나는 이 점에 대해 다큐사진으로서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네.

나는 다큐사진이 기존의 양식화 된 이념이나 세계관을 사진을 통해

그려낸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반드시 이 사명 역시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위의 사진은 자네도 알다시피 2007년 처음 내가 처음 사진을 시작할 때 신촌에서 찍었던 사진이네.

사진 기술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위의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게

내가 지시하는 상황이 이미 일반화, 도식화된 지점을 지시하고 있다고 있기 때문이지.

 

즉, 내가 이 사진으로 그려내고자 했던 것은

소위 "어려운 이웃에 대한 무관심", 혹은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 등에 대한 고발이겠지.

 

내가 "언어화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네.

그러니까 내가 말한 "언어"란 "정형화된 인식", "정형화된 의식"의 구조적 틀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네.

 

이 점 자네가 이미 앞서 나와 동일한 생각을 아래와 같이 이야기해 주었네.

 

"나는 사태 개방성은 우리의 일상적 시선을 해방하는 기능이 있어야 예술이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그러니까 우리가 존재와 세계를 정립하는 ‘서정’의 방식에 의문을 던지는 정도에 따라, 그리고 다른 ‘서정’으로 돌변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결코 예술사진이 다큐사진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예술가가 혁명가보다 더 우위에 있지 않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그렇다고 생각하네.

다만 서로의 영역이 다르고 나의 경우에 있어서 예술 쪽에 더 선호를 가지고 있을 뿐이네.

만약 우위를 따지자면 소위 미학적 차원에서 예술사진이 우위를 가질 것이고,

운동성의 차원에서 다큐사진이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네.

즉, 상대적 우위를 모두 나름대로 점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거듭이야기 하자면 조셉 쿠델카의 사진과 같이 어느 지점에서

"일반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의 영역이 아닌 "예술로서의 사진"  영역으로 침투하는 사진이 있다고 생각하네.

 

조셉 쿠델카의 사진

 

 

 

 

 

 

 

그리고 이러한 예술 영역으로의 침투는

이미 말했다시피 패션 사진을 비롯한 상업사진 뿐만 아니라 헐리웃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네. 내가 이전에 말한 소위 "헐리웃 영화"는 매트릭스와 같은 작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래도 진부한 상업 영화를 지칭하는 것이었네.(소위 킬링타임용 영화)

 

그러니 첫번째 문제에 대해 정리하자면 나는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과 나쁜 다큐멘터리 사진의

기준을 기술적 완성도로 보고 있다네. 예를 들어 좋은 다큐멘터리 작가로 "스티브 맥커리" 같은 작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네. (물론 그가 찍은 사진 가운데에서도 예술 사진의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사진도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한편, 보도사진의 경우는 오히려 나는 저널리즘이 핵심인 사진이라 생각하네.

분명 상황을 담는다는 차원에서는 다큐나 보도사진 모두 같은 맥락이겠지만,

 

좋은 기사가 개인의 "주관적 가치관"을 글로써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듯이,

(물론 여기서 말하는 "주관적 가치관"을 드러내는 사진이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생각하네)

 

좋은 저널리즘 사진, 보도사진은 사진 기자의 주관적 가치관을 드러내는 것을 지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네.

(물론 어디 개인의 주관성이 투영되지 않은 사진이 있겠는가만은 나는 그 비중과 지향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네)

 

 

아주 거친 비유를 들자면 다음과 같을 것 같네.

 

보도사진(정확성,객관성) = 기사(정확성,객관성)

다큐사진(기술적 완성도) = 사설(논리성)

예술사진(미학성) = 시,문학(미학성)

 

 

 

그리고 내가 "사태개방성", "독자적 감각"이란 용어로 말하고자 한 것은

자네가 이미 앞서 말했던 두번째 상황("언어화 되기 이전에 감상자에게 주는 충격과 같은 직접적 감각")

의미하는 것이었네.

 

내가 말하는 "언어"란 앞서 말했듯, "일종의 도식화, 정형화된 해석틀"을 일컫는 것이네.

이같은 맥락에서 "개념화(언어화)될 수 없는 의미 잉여분" 이란 것도 

"기존에 확보되었던 정형성"(언어)을 넘어서는 새로움에 대한 잉여를 이야기 하는 것이지.

이 점 자네와 나 역시 생각을 같이 한다네.

 

또한

 

"쉽게 언어로 해석되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일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보네. 내 경우에 ‘상록타워(evergreen tower)’를 보면서 과연 이게 전부일까, 즉 내가 해석한 내용이 이 작품의 최종적 의미일까 하고 묻고 작품을 더 고민해야만 했었네."

 

라고 밝혀주었듯이 작품에 대해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자세의 생각에 역시 동의하네.

 

솔직히 그동안 내가 많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너무 쉽게 빨리 판단했을 수 있었을 것이란 반성을 하게 되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가치 없는 작품"을 "그 작품보다 더 가치없는 사이비 평론"으로 

포장하는 예술계의 관행도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네.

 

자네가 말했듯 속단하지 않고 진중하게 작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감상자와 평론가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자세이겠지만,

 

"없는 목소리"를 거짓말로 만들어내는 일부 몰지각한 사이비 평론가들에게도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네.

좋은 감상, 좋은 평론이란 말 그대로 "냉정과 열정사이"에서의 균형이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하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니까. 그리고 때론 "진실"은 "냉혹한 것"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를 위해 정직하고 냉정한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네.

 

자본의 논리에 봉사하는 거짓 칭찬에 편승하여, 혹은 그 거짓과 공모하여

한 평생을 고작 "비싼 쓰레기"를 만들기 위해 산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작가 자신에게 너무 잔혹한 형벌이라 생각하네.

 

그러니 나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바로 작가를 위해 정직하고 냉정한 감상과 평이 필수적이라 생각하네.

 

한가지 덧붙이면

이상의 내 생각이 물론 사진계와 공유하는 보편적 생각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참고해주시게나.

각 작가들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개념미술에 대한 생각, 사진 장르의 구분, 예술 사진의 조건 등등 역시

전혀 공식화된 생각이 아니니까 다른 분들의 생각을 많이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네.

나 역시 사진을 공부하는 사진학도의 한명일 뿐이니까.

 

다만 나는 나의 미적판단에 대한 나름의 정당성과 기준을 확보하고,

이 정당성과 기준을 근거로 내 작업을 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를 위해 불가피하게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다소 거친 개념화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점 이해해주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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