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애초 "좌파 예술가"라는 말 자체가 일정부분 어불성설 아닌가 싶다.

 

즉, 광의적 의미에서 좌파라는 것이 진보(progress)를 표방하는 집단이라면,

미학적 "혁신성"을 추구하는 것이 본령인 예술가들은 본질적으로 진보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술가가 "이전 것"을 넘어서 끝없는 새로움을 추구하고 갈망하는 자라 한다면

-적어도 나는 장신정신의 구현자를 예술가로 보지 않기에-

예술가는 존재론적으로 진보주의자이고, 이 점에서 좌파라 아니할 수 없다.

(진보=좌파의 공식에 대한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임으로 한국사회에서 쓰이는 보편적 의미를 따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발생한다.

바로 미학적 진보성과 정치적 진보성에 관한 문제이다.

예술가가 진보(광의적 의미의 진보) 지향의 존재라면 협의적 의미의 진보,

즉 정치적 의미에서도 예술가는 진보인가의 문제이다.

 

좀 거칠게 말하면 "예술가는 정치적 좌파여야 하는가?"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기본적으로 "미학적 진보성은 정치적 진보성"과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절대 적잖은 비판을 받을 명제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술이 기존 체계에 균열을 일으켜 새로운 사태를 그 균열 안으로 호출하는 행위라면,

그리고 한 인간의 의식이란 것이 "지향성과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구성체라면,

그 지향성과 통일성의 맥락에서 분열증자가 아닌 이상 예술가는 정치의 영역에서도 진보주의자,

소위 좌파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인간 의식의 특성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단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 발생한다.

"예술은 정치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는 예술가는 진보(좌파)인가?와는 다른 질문이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 하면 나는 "예술은 탈 정치적이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예술 이외의 다른 대상에 대한 기표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예술의 "쓸모없음"에 대한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가능하다.

예술은 자신이 자신을 지시하는 존재이다.

그 자체가 기표이자 기의인 존재, 그것이 바로 예술이고 이것이야 말로 예술이 예술이 되는 기본 조건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 - 예술 안의 목적에 맞서는 싸움은 항상 예술 안에 있는 도덕화하는 경향에 맞서는 싸움이며,

 예술이 도덕의 하위에 놓이는 것에 맞서는 싸움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도덕 같은 것은 꺼져버려라!"이다."

 

니체의 말이다.

 

니체가 예술이 도덕에 맞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기표로써 전락하는 예술을 경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술은 그 자체로 내적 완전성을 가지고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로써의

신적 절대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태를 호출하는 명령권을 가질 때에만 예술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예술은 "탈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예술이 일련의 정치적 이념을 대변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정치란 계급, 성, 인종을 포함한 일련의 정치적인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렇다면 예술은 삶과 동떨어진 유미주의의 길로 가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예술을 유미주의의 틀 속에 가두는 것에 반대한다. (삶과 유리된 예술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의 유미주의)

 

내가 말하고자 하는 "탈 정치적 예술"이란 특정한 정치적 의식으로 수렴되지 않는 예술,

즉 정치적인 것을 뿌리로 삼을지라도 이로부터 독자적 미적 성취를 이루어내어

자기 지시성의 힘으로 그 정치성을 뛰어넘는 "초 정치적 예술"을 의미한다.

 

예술은 정치적 상황을 얼마든지 담고 있을 수 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생각해보라.)

이 점에서 정치적 상황을 찍은 다큐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얼마든지 열려있다.(나는 개인적으로 "조셉 쿠델카"가 그런 작가 가운데 하나라 생각한다.) 

 

다만 나의 주장은 예술이 다른 지시체를 가리키는 것에서 끝나는 기표의 지위에서 머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점 특히 사진 예술에서 그러하다.

 

가난한 자들의 삶을 조명하는 사진부터 어느 집창촌의 현실을 찍는 사진을 포함하여

값비싼 물건이 진열된 명품 샵을 찍는 사진까지 피사체가 그 사진의 예술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미적 혁신성에서 비롯되는 사태의 개방성,

즉 "새로움의 전개 가능성"만이 사진이 예술이 되도록 하는 유일한 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투쟁의 대상, 새로운 열망의 대상은 계속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등장해야만 한다.

 

다만 예술가가 지향해야 할 것은

투쟁의 한 좌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투쟁의 동력, "새로움으로의 감각"이다.

바로 "살아있음에 대한 자극"이다.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목적이 없다거나,

 목표가 없다거나,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이해될 수 있단 말인가?" 

 

 니체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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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작가임ㅋ 2014-03-24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숭군, 나 K네. 잘 읽었네. 내가 궁금한 건 이런 것이네.
자네 글을 따라가다 보니 진은영이 랑시에르 가지고 ‘감각적인 것의 분할’ 을 가지고 논점을 제기하던 것이 생각나네. 정치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그러니까 시나 소설이 정치에 의미가 한정되는 경우에 그게 문학일 수 있는가, 오히려 선동시 아닌가 하는 그 창비 논쟁이지?
나는 이 문제의 가장 어려운 점 중에 하나가 어떤 시를(사진을) 정치적인 것이라 판단하는 사람이 그 시를 문학다운 문학이 아니라고 말할 ‘권리’의 문제, 그러니까 우리 시선에서 봤을 때는 어떤 주제에 국한되어 버린 듯한 시-사진에게, 더 이상의 의미의 잉여와 사념함을 발생시키지 못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거지.

‘다만 나의 주장은 예술이 다른 지시체를 가리키는 것에서 끝나는 기표의 지위에서 머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점 특히 사진 예술에서 그러하다.”

신용준이 이렇게 말하면서, 어떤 작품에 대해서 사태개방성이 없다고 할 때, 좌파 예술가가 집창촌의 현실을 찍을 때 거기에 미적 혁신성이 없다는 것은 그저 직관에 의존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게 있는지가 해명되는게 중요한 것 같아. 수많은 노동시는 왜 시가 아닌 ‘노동시’일 수밖에 없었는지는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이 될 때 확실해지는 거 아니겠나 싶어. 물론 직관에 의존한다고 해도 상관 없는 것이지만, 그렇게만 말해 버리면 어떤 사진이 '살아있음에 대한 자극'이 되는 사진인지에 대한 합의도 미술시장에나 맡겨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겠지? 즉, 이런 논의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거야. (나는 직관적 이해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자기 직관은 다른 직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되지 않지)

덧붙이면, 나는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 아닌 것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에, 그래서 '정치적인 시'도 시로 표현된 정치라는 점에서 그저 정치적인 이야기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식의 생각을 어떻게 뚫을 수 있을까. 이건 결국 이런 질문이기도 할 것 같아. - 이 사진이 개방하려는 그 사태로 개방되지 않으려는 감상자로 인해 사진은 그저 기표가 되는 것은 아닌가?

숭군 2014-03-25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군! 위에다가 댓글 옮겨서 새로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