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정도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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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은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회피하기 위한 모든 행동을 일컫는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게으름은 때로 삶의 치명적인 위기를 몰고 오기도 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물음들에 대답하지 않았을 때, 그것을 피하기 위해 다만 눈 앞의 순간만에 충실했을 때, 그 순간들의 누적이 나의 삶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낙타>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한 아버지의 여행기이다. 그러나 그 여행은 아들의 영혼과 함께 고비사막을 건너는, 환상 속의 여행이자 이별 여행이다. 생의 가장 아픈 상처에 대해, 이 소설은 절실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아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든 생의 결말을 먼저 맞이하고 싶어했는지, 나는 그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나는 규를 꼭 끌어안았다. 육체의 실감이 생생했다. 녀석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 나의 때의 나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등록금을 못 내 학교에서 쫓겨나올 때, 운동장에 쏟아지던 하얀 햇살이 너무 눈부셔 차마 가로지르지 못하고 그늘에 숨어 교문을 나와야 했다. 울었던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가도 그 순간이 지나면 또 살아지는 것이 아니던가. -61p

두 녀석은 밤을 꼬박 지새운 모양이었다. 밝아오는 새벽을 보며 서로를 들여다봤겠지. 그래도 부족했을 터였다. 삶에 충족감을 느끼는 순간, 인간은 나태해지기 마련이었다. 부족한 것에 대한 갈증을 채우기 위해 바쁘게 사는 것에 생의 동력이 담겨 있었다. -118p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말한다. 타인 혹은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상처를 준 것은 언제나 '나'였다. 내가 준 상처 때문에 나는 언제나 아팠다. -49p


느린 낙타를 타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둘만의 여행을 한다. 꿈 같은 시간 동안 나는 앞으로의 긴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나의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서는 여행이다. 이 여행이 끝나기 전에 나는 필사적으로 묻고, 절실하게 대답해야 한다. 그것이 또 다음 고비를 맞는 우리들의 자세가 될 테니까.

삶의 고비와 마주선, 또는 앞으로 마주설 모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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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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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기로 한 이가 30분 정도 늦는다고 한다. 이 30분은 선물이다. 그 선물을 가장 아름답게 받는 방법 가운데 하나를 알고 있다. 아름다운 단편소설 한 편을 읽는 일. 시는 너무 짧고 장편소설은 너무 길다. 자기 문장을 갖고 있는 작가의 좋은 단편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시간은 음악처럼 흐르고 풍경은 회화처럼 번져갈 것이다. 다 읽고 나면, 기다린 그 사람이 온다. 윤대녕의 책이면 좋을 것이다. (중략)

<대설주의보>를 다 읽은 소회를 아무리 길게 늘어놓아도 책의 말미에 실은 신형철 평론가의 해설만 못할 것 같아, 소설만큼 좋은 이 글을 여기에 옮겨 적는다.

<대설주의보>는 '은어낚시통신'과 '천지간', '상춘곡'으로 나의 20대 초입을 아련하고 희미한 색채로 물들인 윤대녕의 신작 소설집이다.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모두 그만큼 아릅답다고 볼 순 없지만 다 읽고 나면 그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된다. 

휴우, 한숨을 몰아쉬며 해란이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순 눈가가 붉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해란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왜 그러고 살아요?"
젓가락을 든 채 윤수는 멍하니 해란을 바라보았다.
"좀 구체적으로 살면 안돼요?"
"내가 뭘?"                -단편 <대설주의보> 중에서

나는 들창에 비친 달그림자를 이불 밖으로 훔쳐보고 있었다.
"문득문득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느낌이 들어. 여름 한낮에 하얗게 타고 있는 빈 마당을 바라볼 때처럼. 그러다 숨이 멎듯 그 느낌조차 사라지지..."

                          -단편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 중에서


이 소설은 모진 풍파와 청운의 꿈이 다 지나갔다고 느낄 때 읽으면 참 좋을 듯하다. 왠지 삶의 범속함을 알아버리고 난 자와의 모종의 공모가 이루어지는 것 같다. 나의 옛 애인들을 아주 먼 곳으로 떠나보내고, 천지간에 상춘곡 가득한 시절을 맞아 다시 그를 읽는다.

모진 바람이 다 지난 곳에서 이렇게 또다시 봄은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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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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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의 리뷰를 쓰려고 앉았는데, 문득 카프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나는 오로지 꽉 물거나 쿡쿡 찌르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 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각성시키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책을 읽겠는가?
한 권의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이런 말이 떠올랐을까? 최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케이스에 적힌 이 말을 본 기억이 세삼스레 상기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그리고 <은교>를 다시 생각하다 보니 떠올랐을 것이다.

그만큼 소설이 강렬하다. 내게 강렬한 소설은 곧 강렬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 자체의 힘이 폭풍처럼 거칠고 세다. 문장도 마찬가지다. '일필휘지'로 갈겨쓴 듯하다. 마치 너무나 쓰여지고 싶은 소설이 작가의 등을 떠밀며 이야기의 끝까지 어서 달려가자고 채근하는 듯하다. 도대체 이 노작가는 평생 이 소설을 쓰지 않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읽는 독자가 다 후련하다.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처럼, 나의 본성의 욕망과 갈망을 깨어나게 하는 이야기.
그래서 읽고 나면 내 안의 욕망과 컴플렉스가 '철컹, 철커덩' 소리를 내며 재가동하는 느낌이 든다.

어찌할 수 없는 이 밤이 짜릿하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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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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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를 편혜영이라는 작가가 있다. 편혜영은 문학동네, 문학과 지성사에서 소설을 펴내며 몇 개의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천천히, 그러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세계를 축조해 나갔던 이 작가가 올해 초, 등단 10년 만에 첫 번째 장편소설을 펴냈다. 물론 기다리는 사람들은 기다렸을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랐으므로)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든가 말든가, 자기만의 걸음으로 이제 장편이라는 세계에 막 첫 발을 내딛은 작가는 이 <재와 빨강>이라는 소설로 기다렸던 세간의 모든 기대를 충족시켰다. 아직 많은 평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책을 펼치면, 이제 막 C국에 도착해 공항 검색대에서 수색을 당하는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다국적기업의 해외지사에서 일하다 본사로 파견을 나가게 된 한 사나이의 모습이다. 이국의 낯선 풍경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그야말로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풍경이다. '몰'이라는 이름, '4구역'이라는 장소 등, 소설의 끝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배경과 스토리, 인물 등에 대한 전개(또는 묘사)의 보편성은 일부러 만들어내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세련됨이다. 그것은 마치(지금은 제작비를 어느 정도만 들여도 가능하지만)<공동경비구역 JSA>를 보며, 90년대 이전의 한국영화를 볼 때와는 전혀 다른 그 촬영기법의 세련됨을 처음 느꼈던 순간의 희열과도 같다. 판타지의 테두리를 쓴 이야기의 외형은, 비약하자면, 우리도 <어린 왕자>나 <변신> 처럼 세계에 통용될 수 있는 소설을 써 낼 수 있다는 인증처럼 느껴지게도 만든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 소설의 빛나는 부분은 그 외형을 충족시켜주는 디테일이다. 언어가 (거의)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자신의 아내를 죽인 범인으로 몰리고, 부랑자로 전락하며, 그 나라의 치명적인 유행성 질환을 앓고, 급기야 살인용의자에서 살인자로 변해가는 주인공의 상황에 대해 작가는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한다.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타당한 일인지, 그러한 심리 상태인지, 주변의 상황이 그러한지 끊임없이 묻는다. 독자가 궁금해할 만한 것들에 대해 단 한 번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왜, 왜, 왜, 왜, 왜... 질문과 대답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소설이 나온다는 것을 이 작가는 잘 안다.

핵심을 이야기하려면, 미안하게도 앞서 이야기한 소설의 줄거리를 부정해야 한다. 사실 주인공은 언어가 (거의)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아내를 죽였다는 확증도 없으며, 끝까지 부랑자로 남아있지도 않고, 치명적인 유행성 질환의 증상만 있을 뿐 죽음에 이르지도 않는다. 나는 이 소설이 완성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한 인간이 끝없이 몰락하는 데에는 확증, 또는 현상이 필요없다는 것. 다만 실체가 놓일 자리에 욕망이 있다는 것. 그것이 몰락의 당위를 제공한다는 것. 그렇게 보았을 때, 이 소설은 비로소 무서워진다.

카프카의 단편들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재와 빨강>은 몰락의 끝에 서 있는 우리의 자화상과 닮았기 때문이다. 세계의 부조리가 곧 나의 부조리와 맞닿아 있을 거라는,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디스토피아엔 세계의 몰락이 아니라, 나의 몰락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확실한 예감.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고 불안해 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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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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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21세기의 한국소설이다. <고래>를 읽어 본 사람 중에 많은 이들이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장진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천명관이 소설을 쓰지 않길 바라고 있다고 했다. 그만큼 <고래>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이(!) 우리는 6년 만에 천명관의 차기작을 보게 되었다. 이미 가슴에 커다란 실망감을 품은 채.(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세희 작가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쓰고 절필한 것처럼, 기형도 작가가 <입 속의 검은 잎>을 펴내고 아깝게 타계한 것처럼, 천재를 떠올리는 우리의 이미지란 그런 것을 기대하게도 하니까) 

처음 50페이지를 읽을 땐 아쉬웠고, 중간의 200여 페이지를 읽을 땐 피식거렸으며, 마지막 100페이지를 읽을 땐 찡하게 저렸다. 아쉬웠던 것은 엄청난 스케일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 여기의 현실을 얘기하기 때문이었고, 피식거린 것은 특유의 신랄한 유머가 곳곳에 숨어 있다 스프링을 단 것처럼 때때로 튀어나왔기 때문이었고, 찡했던 것은(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것일 텐데) 천명관 작가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감동의 코드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춘희의 바다에서 고래가 물을 뿜듯이)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천명관 작가는 이제 전업으로 소설을 쓸 계획이라고 한다. '작가의 말'까지 읽고 나면 그런 그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고래>의 어이없을 정도로 커다랗게 축조된 세계와 <고령화 가족>의 애잔하고 뭉클한 것이 만나는 지점, 그 곳에서 생겨날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독자는 행복하고 애가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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