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기로 한 이가 30분 정도 늦는다고 한다. 이 30분은 선물이다. 그 선물을 가장 아름답게 받는 방법 가운데 하나를 알고 있다. 아름다운 단편소설 한 편을 읽는 일. 시는 너무 짧고 장편소설은 너무 길다. 자기 문장을 갖고 있는 작가의 좋은 단편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시간은 음악처럼 흐르고 풍경은 회화처럼 번져갈 것이다. 다 읽고 나면, 기다린 그 사람이 온다. 윤대녕의 책이면 좋을 것이다. (중략) <대설주의보>를 다 읽은 소회를 아무리 길게 늘어놓아도 책의 말미에 실은 신형철 평론가의 해설만 못할 것 같아, 소설만큼 좋은 이 글을 여기에 옮겨 적는다. <대설주의보>는 '은어낚시통신'과 '천지간', '상춘곡'으로 나의 20대 초입을 아련하고 희미한 색채로 물들인 윤대녕의 신작 소설집이다.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모두 그만큼 아릅답다고 볼 순 없지만 다 읽고 나면 그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된다. 휴우, 한숨을 몰아쉬며 해란이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순 눈가가 붉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해란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왜 그러고 살아요?" 젓가락을 든 채 윤수는 멍하니 해란을 바라보았다. "좀 구체적으로 살면 안돼요?" "내가 뭘?" -단편 <대설주의보> 중에서 나는 들창에 비친 달그림자를 이불 밖으로 훔쳐보고 있었다. "문득문득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느낌이 들어. 여름 한낮에 하얗게 타고 있는 빈 마당을 바라볼 때처럼. 그러다 숨이 멎듯 그 느낌조차 사라지지..." -단편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 중에서 이 소설은 모진 풍파와 청운의 꿈이 다 지나갔다고 느낄 때 읽으면 참 좋을 듯하다. 왠지 삶의 범속함을 알아버리고 난 자와의 모종의 공모가 이루어지는 것 같다. 나의 옛 애인들을 아주 먼 곳으로 떠나보내고, 천지간에 상춘곡 가득한 시절을 맞아 다시 그를 읽는다. 모진 바람이 다 지난 곳에서 이렇게 또다시 봄은 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