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과 호명의 미학, 고유명과 국적의 정치 (1)

 


1.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가사

1) 하나의 지도에서 시작해보자. 한국과 일본 사이에 펼쳐져 있는 저 바다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우리, 한국인들은 이 바다를 '동해(東海)'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동쪽에 있는 바다'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른다(당신은, 나의 저 주어를, 말 그대로, 잘 읽어야 한다, 나는 저 '우리'라는 주어에 언제나 기시감 같은 경기와 구토증 같은 혐오를 일으킬 정도의 경계심을 품고 있으므로). 주지하다시피, 일본인들은 같은 바다를 '일본해(日本海)'라고 부른다(또한 당신은, 나의 저 부사어를, 말 그대로,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주지하다시피'라는 말이 드러내고 행사하는 가장 근본적인 폭력성에 매혹되는 동시에 압살되므로). 이는 말 그대로, '말 그대로' 말하자면, '일본의 바다'라는 뜻이겠는데,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을 '말 그대로'라는 말 그대로 지나치는 말로 부연해서 설명하려고 할 때부터 어떤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무엇보다 이름의 문제이다. 이 '일본해'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일본의 바다라는 뜻을 갖는가? 여기서 소유격 조사 '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어떤 소유의 관계를 나타내는가(그리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 이름이 이렇듯 어떤 실제적이고도 실효적인 '소유 관계' 혹은 '지배 관계'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열을 올리지 않는가)? 혹은, 여기서 '소유'라는 말은 법적이거나 경제적인 권한의 문제가 아닌 단순한 문법적 관계를 가리키는 규정어인가(그런데 우리는 그 말이 이렇듯 '단순한 문법적 규정'이 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곧 하나의 이름은 '단순한 이름'의 지위를 넘어 어떤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인정하면서 또한 그렇게 열을 올리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러한 질문들 때문에[라도], 하나의 바다를 '동해'라고 부를 것인가 혹은 '일본해'라고 부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자존심이나 자긍심 따위의 문제를 훨씬 상회하는 문제, 곧 근대 국민국가라는 체제 그 자체의 미학적 이데올로기라는 문제가 된다. 하여 나는 이 바다의 이름(들), 하나의 바다를 가리키는 두 개의 이름을 일종의 화두로 삼고자 한다, 국가라는 괴물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말하기 위하여.

2) 여기까지 되물었을 때, 이 문제들은 단지 '일본해'라는 이름을 둘러싼 '국지적'인 문제이기를 그치고, 우리가 매우 당연한 듯 지나친 저 첫 번째 이름, 곧 '동해'라는 이름을 둘러싼 '국가적'인 문제로 옮겨간다. '동쪽에 있는 바다'라니, 어디의 동쪽, 누구의 동쪽이란 뜻일까? 이거 왜 이래(우리가 남인가), 어디라니, 소위 '대한민국'의 동쪽이라는 뜻이지 않은가? 왜 당연한 걸 몰라?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다시 묻자면, 이러한 이름은, 그리고 우리가 그 바다를 그러한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는, '말 그대로', 당연한가? 하지만 나는 여기서 지극히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방위의 개념을 바다의 이름에 포함시킨 이러한 명명법의 어떤 자기본위적 성격을 문제 삼으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쩌면 이 문제는, 말 그대로, 지극히 당연하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자기본위적 성격을 지닌 일견 '중립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름에 담겨 있는 어떤 '편향성'이다(그리고 '우리'란 이러한 편향성 안에 지극히 '편향적'으로 묻혀 있는 주체, 매몰된 주어이다). 여기에는 어떤 하나의 미학이, 그것도 눈먼 미학이 놓여 있다. '동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일견 '중립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우리가 그 이름을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부를 때 그 이름이 감추고 있는 어떤 중요한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름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잘 생각하지 못한다고 [누군가에게서] 질책을 받는 '애국심' 따위가 아니라(여기서 잠시 친절한 금자 씨의 명언을 빌리자면, '너나 잘하세요'), 지극히 중립적이면서 동시에 편향적인 방위의 개념을 통해 하나의 지명을 규정하고 있는 어떤 미학적인 이데올로기이다. '동해'라는 이름은 사실 '한국해'라는 이름을, '한국의 동해'라는 '본명'을 숨기고 있는 이름인 것. '우리'라는 주체/주어는 '동해'가 '일본해'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 '국적의 침탈'을 느끼며 불쾌해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동해'라는 이름 자체가 지닌 저 국적의 성격과 저 침탈의 성격을 보지 못한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아름다운' 가사로 시작하는 애국가를 우리가 다시금 눈여겨보고 귀 기울여 들어봐야 하는 이유이다. 그 지극히 당연하며 진부하게까지 느껴지는 가사는 바로 이러한 '아름다움'의 정서와 국적의 이름을 둘러싼 하나의 미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지중해(Mediterranean Sea)'라는 또 다른 바다의 이름: 그렇다면 왜 세계의 모든 '지-중(地-中, medi-terranean)해'들은 그 고유명의 고유성을, 혹은 그 보통명사의 보편성을 주장하거나 기소하지 않는가?


2. "구미(歐)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문형

3) 왜 그것은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하나의 '아름다움', 혹은 그러한 '아름다움'을 둘러싼 미학적 투쟁인가? 게다가 그것은 왜 또한 그러한 '이름'들을 둘러싼 투쟁인가? 여기서 잠시 이 문제를 에둘러 가보자(그리고 내가 항상 이렇게 에둘러 가는 길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데, 그 우회의 길에는 급행의 길 안에 없는 어떤 일말의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 '일말의' 진리야말로, 그 '전체 아닌' 진리야말로, 실은 '전부의'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러한 길에 대한 선택과 사랑은, 어쩌면 선택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지극히 가능한 사랑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일례로 우리에게는 '구미(歐美)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진부하리만치 익숙한 하나의 문형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 문형은 이런 식으로 사용되곤 한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인권의 사각지대가 있었다니, 이는 미국 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수치스러운 일이다" 혹은 "이렇듯 국회 안에서 날치기가 횡행하고 폭력이 난무하다니, 이는 유럽 의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해외 토픽감이다" 등등. 그러나 이러한 진부한 문형들을 일거에 각성케 하는 명문이 있었으니, 그 일례로 <뉴데일리>라는 보수반동 언론의 최근 기사 한 토막을 살펴보자. 김진숙 씨가 여전히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고 '희망버스'가 오가는 한진중공업의 영도조선소가 군함 등의 군사 장비를 생산하는 국가 보안 시설임을 강조하면서 이 언론은 이 '가장 중요한' 사실을 모른다고 상정된 '무지한'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그런데 여기서 진짜 '무지'한 것은 누구인가): "이런 중요시설에 '희망버스'라는 정체불명의 시민단체 차량을 내세우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사다리를 이용해 침입한 것이 자랑스럽게 언론에 올라올 정도라는 것은 총체적인 국가 혼란 상태를 의미한다. 공권력의 힘이 강력한 러시아나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이나 유럽의 어느 국가였더라면 A급 국가 보안 시설에 무기를 들고 난입한 자들은 경비 병력들에 의해 무력 저지(경고 사격 후 실탄 사격)되었을 것이다. 도대체 한국의 국가 보안 등급 시설물을 지키고 있는 군과 경찰 병력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뉴데일리> 기사 「한국 공권력은 죽었다?」: http://j.mp/k9AZxL 참조) 이 땅의 우익은 모두 죽었는가, 하고 절규하듯, 마치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그 심정과 그 정서로, 이 실로 거대한 엄살을 떨고 있는 문장을, 우리는 함께 읽는다, 이 시대에, 마치 하나의 진기한 기적처럼, 그렇게 함께 읽게 된다.



 


▷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의 그림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1814)과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1951). 이 절멸의 신화는 왜 역사 안에서 다양한 욕망의 형태로 반복되는가? 그리고 저들의 절멸에 맞서는 우리의 절멸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4) 반복하자면, 그렇게 나와 당신은 이 글을 함께 읽었다. 저 진부한 문형('구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을 이 얼마나 참신하게 사용한 경우인가! '미국이나 유럽의 국가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저 언론이 부러워하고 있는 어떤 '선진국'의 위용이란, 바로 저 무지하고 무례한 폭도들을 일거에 총살시킬 수 있는 어떤 '용기', 그런 불순분자들을 일거에 절멸시킬 수 있어야 하는 어떤 '애국심'인 것. 그렇다, 나와 당신은 이 글을 함께 읽었다, 그렇게 함께 읽고 있다, 믿을 수 없게도, 말하자면, 다른 나라도 아닌 소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한 언론의 지면에서, 그렇게 초현실적으로 함께 읽고 있다(그렇다면 그 '자랑스러움'이란 누구를 위한 자랑스러움이었는지 여기서 보다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가). 자, 그렇다면, 만약 정말로 '구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연 어느 쪽일 것인가? 국가 보안 시설을 제멋대로 침탈하는 폭도들을 향해 사격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저 병신 같은 군과 경찰일 것인가, 아니면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라고 종용하며 강권하는 저 대쪽 같고 위엄 어린 자유 언론일 것인가? 우리에게는 없고, 저 구미에는 있는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이고 또 과연 어느 쪽인가? 나는 위의 주장과 정확히 정반대에 위치한 하나의 반례를 생각한다.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는 그의 다큐멘터리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에서, 어쩌면 오히려 반대로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한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1936년 GM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있었을 때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은 그곳에 군대를 파견한다. 왜 그는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 군대를 파견했을까? 그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그들에게 발포하기 위해서? 전혀 아니었다. 군대의 총구는 노동자들이 아니라 바로 사측의 용역과 구사대를 향했던 것. 말하자면 루즈벨트는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했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 자유 언론의 말을 그대로 비틀어 그들에게 다시금 되돌려주자면, 이는 실로, 경찰이 용역 깡패를 비호하고 서민과 노동자들을 폭도로 규정하여 진압하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는 다시 묻는 것이다: '구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란, 또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없고 저들에게만 있는 것, 우리에게만 있고 저들에게는 없는 것이란, 그 부재하는 동시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이란, 그 상상 가능한 것과 상상 불가능한 것이란, 정말 무엇인가?



▷ 마이클 무어 감독,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Capitalism: a Love Story)>(2009)의 한 장면. 되묻자면, 진정한 '범죄 현장(crime scene)'은 과연 어디인가?


3. "우리가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이라는 당위

5) 그렇다면 왜 저 '구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문형은 계속해서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저 모든 '상상 가능한 것'에 관한 담론들이 특정한 장소나 지역을 중심으로 그렇게 '환상적'이고 '허구적'으로 구성되는 것일까? 'orange'를 '아린지'라고만 발음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또한 그러한 발음법만이 세계화 시대의 '진정한' 생존 전략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 식민지 국가 안에서, '구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이 협박과 공갈의 문형은 하나의 영속적인 지배 규준으로 기능한다(그러므로 진정한 '식민지 국가'란, 상상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범위와 경계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하나의 미학적 체제이다). 그리고 그 지배적 규준이란 '선진국-개발도상국-후진국'이라는 한 절체절명의 분류법 속에서 작용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 때때로 발생하곤 하는 일들이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으로 설정된 저 '선진국'이란,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발전 단계로 설정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계속해서 지연되고 유예됨으로써만, 오직 그렇게 계속 연기됨으로써만, 하나의 전범이자 모범이자 규준으로 기능하게 되는 뒤틀린 욕망의 장소이다. '우리'는 '선진국'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죽었다 깨어나도 소위 '한국인의 국민성'은 선진국 진입에 맞지 않는 전근대적 요소들을 다분히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런 층위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선진국 진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조건들 그 자체가 아니라, '선진국'이라는 단계가 하나의 허구적 전범으로 기능하고 있는 한, 우리가 그 허망한 욕망의 문법과 지연의 체제를 직시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선진국'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노파심에서 반복하자면, 여기서의 문제는 '우리'가 선진국에 '도달'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 누군가를 크레인 위에서 치워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그리고 용역이든 경찰이든 동원해서라도 누군가를 재개발 구역에서 몰아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그들이 오매불망 불철주야 노력하고 경주하는 저 선진국 진입이라는 허상은 여전히 요원하다. 그리고 실은 그들은 바로 그 허상의 '요원함' 자체를 무기로 지배하고 군림한다.


 

 

 

 

▷ 용산의 기억과 망각: 그들이 원하는 '선진국'으로 가는 데 방해가 되었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대했는가를 우리는 매순간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결코 바라지 않는 '선진국'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떤 식으로 대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매순간 망각하고 있기도 하다. 아마도 가장 무서운 것은 이러한 망각일 것이다. '이름'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망각'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어떤 것이다.

6) 그러나 '선진국이 될 수 없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나는 모종의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를 유포하고 있는가? 전혀 아니다. 전혀 아닌 이유는, 그럼에도 내가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되는 어떤 당위를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니고, '선진국'이 되는 어떤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소위 '구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문형으로 이 땅의 '후진성'을 진단하고 '선진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그들 자신이 믿든 믿지 않든, 그들은 바로 그 '선진국'이라는 환상의 체제를 통해서, 바로 그 '개발도상국-선진국'이라는 허구의 발전 단계 도식을 통해서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선진국'을 앞당기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과정들을 끊임없이 유예하고 지연함으로써 바로 이 현재의 체제를 공고히 만들기를 원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그들의 욕망이 지닌 진짜 모습일 것이며, 그들이 왜 진정한 선진화를 주장하는 다른 많은 목소리들을 그렇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잠재우는가 하는 궁금증이 여기서 풀릴 수 있다. 하여 다시 묻자면, 왜 우리는 어떤 바다를 ['일본해'가 아니라] '동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 문제는 단지 '대한민국'에 사는 이들의 자존심과 애국심을 건 사활의 문제가 아니라, 각각 자국의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참칭되고 환원되며 소급되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저 국가라는 괴물을 공동으로 마주하여 함께 생각해야 하는 문제이다(그러므로 당신이 당신 자신의 자생적이고 민족적인 분노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당신은 어쩌면 저 찬란한 '선진국'이라는 담론에 의해서 가장 '감정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는 것). 그러므로 한쪽에는 이 땅의 아름다움을 상찬해 마지않는 눈물 나는 국민주의 미학이 존재하며, 그리고 또 다른 한쪽에는 이 땅이 선진국으로의 진입 따위를 절체절명의 문제로 삼는 국가와는 전혀 별개의 장소임을 깨달은 자들의 미학이 존재한다. 어떤 미학 위에 설 것인가 하는 이 가장 '미학적'인 문제는, 그것이 그렇게 미학적인 문제인 한에서, 다시금 가장 '정치적'인 문제로 연결되며, 결국 그러한 정치의 문제가 궁극적으로 미학적 이데올로기의 문제임을 직시하게 한다. 하여 나는, 당신과 함께, 저 바다를 마주 보며, 그 이름 없는 이름을 부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에둘러 가는 길을 통해, 시작하고자 한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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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8-02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거 같애요. 특히 식자입네, 하는 사람들에게서요. 그럴때면 괜히 주눅들면서도 뭔가 모를 반항심이 생기기도 했던 거 같애요. 저 사람은 그 말 빼면 할 말이 없지..등이 고작이었는데요. 오늘 이 글 읽으니, 속이 후련! 합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이 화면에 나오신 분인가봐요. 저 영화도 본인이 등장을 했나봐요? 식코처럼.

람혼 2011-09-11 16:27   좋아요 0 | URL
속이 후련하다고 하시니 저도 기쁩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달사르님. 화면에 나오는 사람은 마이클 무어 감독 본인이 맞습니다. 진정한 범죄현장은 바로 이곳이라며 금융기관 건물 바깥에 폴리스 라인을 설치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장면이죠. <식코>가 재미있으셨다면(재미있다기보다는 씁쓸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도 매우 흥미롭게 보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가합니다.^^

굿바이 2011-08-03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바다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갖는 것 자체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그래서 이미 질문 자체가 나쁜 선택이 되어버리는 분위기가 답답합니다.
더 나아가 네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진행되는 그들의 나쁜 버릇도 참기 힘든 시절입니다.

람혼 2011-09-11 16:28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정말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질문 자체가, 그런 질문 자체를 던지는 일 자체가 의심스러운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 그 자체가 저도 불만이고, 이 글도 그러한 불만의 연장선상에서 쓰인 글입니다. 결을 따라 섬세하고 꼼꼼히 잘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11-08-03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에서야 올려주신 연재글을 모두 정독했습니다. 읽기 전엔 휴우 이 긴 걸 언제 다 읽나 싶다가도 다 읽고 나면 어, 벌써 끝났나? 싶어 늘 아쉬운 것이 람혼님의 글입니다ㅋㅋ '하나의 시점, 두 개의 시선, 세 개의 시각'도 3편으로 끝나고 나니 아쉽네요. 람혼님을 계속 쪼아대면 '노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시'나 '평가하거나 분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평론'은 제가 잘 모르니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소설'은 마치 바다 속에서 끊임없이 소금을 만들어내는 맷돌처럼 무궁무진하게 해주실 것 같네요. 유난히 비가 많은 여름인데 건강 잘 챙기시구요^^

람혼 2011-09-11 16:30   좋아요 0 | URL
언제 다 읽나, 그럼에도 벌써 끝났나, 이 말은 제가 들었던 찬사 중 최고의 찬사인데요.^^ 잘 읽어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유난히 비가 많았던 여름을 거의 살아남듯 통과했더니 아주 짤막한, 그만큼 잔뜩 찌푸린 가을이 기다리고 있었네요. 후와님도 이 힘든 계절(들), 무탈히 나시길 바랍니다. (연재는 네이버 자음과모음 카페에서 계속 되고 있습니다.^^)

2011-09-10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1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