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外, 『 이론 이후 삶 』(강우성, 정소영 옮김), 민음사, 2007.

1) 개인적으로 현재 몇 편의 연극 음악 작업과 무용 음악 작업, 그리고 그 외 다른 공연 준비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최근 데리다(Derrida)와의 대담집 『이론 이후 삶』이 국역 출간된 것을 핑계 삼아 앞으로 데리다 읽기에 관한ㅡ역시나 지극히 개인적인ㅡ잡설을 몇 편 연재해볼까 한다. 연재를 약속했던 아날 학파에 관한 글들이 아직 '밀려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연재를 시작하기가 조금 저어되기는 하지만, 데리다가 『이론 이후 삶』에서 말하고 있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연재에 대한 '충절'이야말로 동시에 연재에 대한 '배반'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므로, 또한 '약속'과 '서약'이야말로 언제나 매번 '같으면서도 다르게'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라는 또 다른 핑계를 대면서.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핑계'가 <1. Outside> 앨범의 연재 약속을 어긴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식의 그런 '솔직한' 배반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흩뿌리면서(탐정소설 형식의 이 '연작' 앨범이 '연재' 형식으로 발매될 것이라는 1995년의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지만, <1. Outside> 앨범은 1970년대 말의 '고전적' 일렉트로니카 앨범 3부작(<Low>, <"Heroes">, <Lodger> 연작) 이후 근 20년만에 선보였던 보위-이노(Bowie-Eno) 듀오의 또 다른 '걸작'이었다는, 잡설 한 자락, 지나가는 길에, 즈려밟고).



▷ David Bowie, <1. Outside>, Virgin, 1995.

2) 데리다에게 있어서도 일종의 '예비학(Propädeutik)'이 가능할까? 데리다 '입문'을 위해서는ㅡ또는 심지어 데리다 '심화 학습'을 위해서도ㅡ그의 대담집만한 좋은 자료가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데리다는 대담집을 상당히 많이 '산출'해내고 있는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데, 우선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책은 단연 『입장들(Positions)』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를 비롯한 네 명의 대담자들과의 대화를 싣고 있는 이 책은, 데리다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 '쏟아놓았던' 그의 가장 기본적인 사유의 핵심들을 대담 형식으로 소화할 수 있는 값진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은 과거 1992년에 솔 출판사의 '입장' 총서의 한 권으로 박성창 선생ㅡ이후 수사학에 대한 책을 저술했고 현재는 서울대 국문과에서 가르치고 있는ㅡ의 번역을 통해 소개된 바 있었는데, 현재는 절판인 것으로 알고 있다(이 국역본은 원서에 담긴 세 편의 대담에 덧붙여 1991년의 대담 한 편을 더 번역하여 수록하고 있는데, 하도 소싯적에 읽은 책이라 현재로서는 번역의 질을 왈가왈부할 사정이 되지 못한다).

   

Jacques Derrida, Positions, Paris: Minuit(coll. "Critique"), 1972.
▷ 쟈끄 데리다, 『 입장들 』(박성창 편역), 솔, 1992.



John D. Caputo(ed.), Deconstruction in a Nutshell,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97.

3) 또 하나 추천하고 싶은 데리다의 대담집은 1997년의 것으로 미국의 빌라노바(Villanova) 대학에서 이루어졌던 대화를 수록하고 있는 캐퓨토(Caputo) 편집의 책 Deconstruction in a Nutshell인데, 이 대담은 데리다의 후기 사상, 특히나 법과 정의 또는 신학과 종교학에 관한 그의 생각들을 일별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이 책은 『이론 이후 삶』의 내용과 일정 부분 중첩/반복되는 부분도 찾을 수 있어, 두 책의 비교 독해 또한 시도해볼 수 있다(덧붙여,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나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가 최근에 행한, 국민국가 혹은 교환/증여에 관한 이론적 작업과 맺고 있는 어떤 접점, 혹은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정치철학과 맺고 있는 어떤 접점 또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ㅡ그런데 나의 이 공간에서 '여담'이 아닌 '담론'이 어디 있겠느냐마는ㅡ개인적으로 '대담집'은 매우 흥미로운 책의 '장르' 중 하나인데, 그러한 흥미들 중 먼저 '국적'에 따른 대담 '스타일'의 차이를 꼽고 싶다. 일례로ㅡ이는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인상'에 속하는 것으로 소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대표적인 경우이겠으나ㅡ프랑스의 대담집과 미국의 대담집은 그 '질문과 대답'의 방식에 있어 전혀 상이한 스타일을 보여주는데, 프랑스의 대담집이 '대화'라는 인상을 주는 반면에ㅡ이러한 '인상'에 관해서는 디디에 에리봉(Didier Eribon)과 조르주 뒤메질(Georges Dumézil)의 대담집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텐데, 이 책에 관해서는 차후 뒤메질과 그의 '엄청난' 저작들에 대한 독립된 글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자ㅡ미국의 대담집은 '전투'라는 인상이 강하다. 뭐, 여담은 여담일 뿐, 이하의 내용은 Deconstruction in a Nutshell의 1부에 수록된 데리다와의 대화를ㅡ물론 글뿐만 아니라 말에서도 드러나는 데리다만의 '스타일'이 지닌 매력을 조금 감소시킬 위험을 무릅쓰고서ㅡ내가 개략적으로 번역/요약해본 것이다, 칸트적 의미에서의, 일종의 '예비학'으로서:

캐퓨토(Caputo)의 질문:
1. 해체가 기존의 저명한 철학적 유산과 전통적인 텍스트들에 대해 파괴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른바 "철학의 종언(end of philosophy)"을 고한다는 일반적인 편견에 관한 데리다의 입장은 무엇인가.
2. "전적으로 새로운 것의 돌출(the iruption of something 'absolutely new')"을 의미하는 '개시/시작(inauguration)'은 해체 안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데리다의 답변:
제도/설립(institution)은 무언가를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곧 제도/설립은 과거의 규칙과 유산들을 어느 정도 따라야 하지만, 또한 그것이 새로운 것의 정초인 한에서는 과거와 기억들로부터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며 따라서 과거의 규칙들로부터 그 어떤 보장도 받을 수 없기에 폭력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제도/설립의 순간이 어떤 위험성을 띠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완벽한 단절 또는 이질성(heterogeneity)으로서의 개시(inauguration) 없이는 어떠한 책임도 결정도 있을 수 없다. 나는 철학이라는 학문 분과 안에서 이러한 종류의 제도/설립을 다양한 형태로 계속해왔지만 너무 엄격하거나 교조적인 제도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취해왔다.

브로건(Brogan)의 질문:
1. 서구 철학 전통의 개창자들(inaugurators)인 그리스 철학자들과 데리다와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2. [부가적으로] 데리다가 서양 철학의 고전들을 독해하는 방식과 전략은 해체와 구축 사이의 어떤 긴장(tension)으로 특징 지을 수 있는가.

데리다의 답변:
그렇다. 해체는 그러한 긴장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나 해체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나의 텍스트는 위대한 고전들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는 방식이 단순히 반복적이거나 보존적인 것은 아니다. 나의 분석은 그들의 작품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또한 어디서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를 살펴보는 것, 다시 말해 그 작품이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긴장과 모순과 이질성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따라서 해체란 작품의 외부에서 작품의 내부로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다. 해체는 오직 작품의 내부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민주주의(democracy)와 철학(philosophy)은 모두 그리스 전통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만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와 철학은 그리스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적 형제애의 개념이 그리스적 형제애의 개념을 변용한 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것의 개시, 변형(mutation), 단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그리스적 전통 속에서 잠재적으로 기입되어 있던 그 개념의 본래 모습을 가리키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문화의 출처인 그러한 그리스적 기원으로 계속해서 돌아가서 우리의 역사와 역사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해체가 목표로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원과 변형 사이에 있는 긴장에 대한 감각이다.

부시(Busch)의 질문:
1. "다양한 것들 사이의 통합(E pluribus unum)"이라는 미국의 모토를 떠올려볼 때, 해체는 언제나 다양한 것들, 곧 다양성과 복수성의 입장에 서서 전체성과 동일성을 해체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통합을 결여한] 다양성은 그 자체로 매우 위험한 것은 아닌가.
2. [따라서] 해체 이후에 통일성(unity)은 과연 가능한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을 띨 것인가.

데리다의 답변:
먼제 '국제성(internationality)'이라는 개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는 분명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의 '인터내셔널(International)'과는 다른 것이다. 오늘날의 국제법은 국가와 주권(sovereignty)에 대한 서구 철학의 개념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며, 이는 분명 일종의 한계이다. 우리는 이러한 국제법의 정초를 해체해야 하는데, 이는 국제 기구 자체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국제 기구가 의존하고 있는 철학적 기반들을 다시 사유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국제법의 또 다른 한계는 그것이 군사와 경제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한 특정 국가들에 의해서 운영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국제적인 권력을 현상황의 국제성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서, 곧 국민국가라는 체제에 종속되어 있는 시민성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서 찾아야 한다. 나는 이를 '新 인터내셔널(New International)'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것은 국민국가에 종속된 시민의 개념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의 시민성으로부터, 새로운 개념의 환대(hospitality)로부터, 새로운 개념의 국가와 민주주의로부터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는 그 자체로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우리에게 전통적으로 주어진 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결정을 의미한다. 우리는 통합과 다양성 중에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독특성(singularity)의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독특성은 통합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순수한 통합 또는 순수한 다양성은 죽음과 동의어이다. 문제는 통합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 안에 어떤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문화적, 민족적, 언어적 동일성/정체성(identity)이라는 것은 이미 그 자신과 다른 무엇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구조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타자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것은 바로 내가 내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 이러한 차이 때문이다. 이는 책임의 회피가 아니라 오히려 책임감을 갖고 결정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방식이 된다. 따라서 분리(separation/dissociation)는 타자와의 관계를 위한 조건이며, 이는 블랑쇼(Blanchot)와 레비나스(Levinas)가 말했듯 "관계 없는 관계(rapport sans rapport)"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경우도 단지 통합[unum]만을 중시해서는 안 되고 민족, 언어, 문화, 개인의 다양성에 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슈미트(Schmidt)의 질문:
1. 데리다는 정의가 모든 계산, 경제, 변증법, 교환 체계, 복수와 형벌을 넘어서는 어떤 선물/증여(gift, don)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2. 이러한 정의는 이름의 문제, 곧 독특성(singularity)의 문제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데리다의 답변: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해(in a nutshell), 해체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처럼, 그러한 문제는 결코 이러한 토론의 형식 안에서 간략하게 제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먼저 불어에서 법(law)은 두 개의 단어, 곧 'le droit'와 'le loi'로 구분된다. 나는 정의(justice)를 법/권리(right)와 법체계의 역사를 의미하는 법(law)으로부터 구별시키고자 했다. 곧, 법은 해체 가능한 것이지만, 정의는 바로 그러한 해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법은 법체계와 법 또는 권리들의 역사, 곧 실정법의 역사를 의미하며,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법들을 증진시킬 수도 있고 또한 다른 법들로 교체할 수도 있다. 모든 혁명과 도덕, 윤리, 진보가 지닌 역사성은 이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반면에 정의는 이러한 법과는 달리 우리에게 법 자체를 증진시킬 수 있는 어떤 충동과 욕구 또는 운동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곧 정의는 법의 해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해체 가능성의 조건은 곧 정의에 대한 요청이다. 정의는 법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곧 그 어떤 기존의 법적 구조의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곧 정의는 자기 자신과 동등하지 않음을, 일치할 수 없음을 말한다. '정의'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dike'를 예로 들면, 나는 'dike'와 'adikia'를 '정의(justice)'와 '불의(injustice)'로 구분하는 하이데거의 분석에 반대하여 정의 그 자체 안에 통합적이지 않은 분리의 요소가 있음을, 곧 이질성과 비-동일성(non-identity)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우리가 정의에 대한 요청에 결코 답변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나는 정당하다(I am just)"라고 말하는 것은 이론적인 결정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가 정당한지/정의로운지(just)는 알 수 없고 다만 내가 옳다는(right)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내가 규칙과 법률에 맞게 행동한다면 나는 내가 옳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정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곧 정의는 지식의 문제도 아니고, 계산의 문제도 아니며, 이론적 판단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옳은 것을 계산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계산이 정당하다고/정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결정을 내릴 수 있으려면, 우리는 단지 법전화된/약호화된(coded) 법만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되고 각각의 독특한(singular) 상황에서 그때마다 정당한/정의로운 관계를 새롭게 발명해내야 하는 것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정의는 타자에 대한 관계이며 그것이 전부이다. 왜냐하면 타자와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어떤 계산될 수 없는 것과 마주치며 법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해체는 지속적으로 기존 제도와 법체계를 비판하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그러한 제도와 체계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의에 공정해지기 위해서(to be just with justice), 곧 타자와의 관계를 정의로서 존중하기 위해서이다. 예컨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코라(khôra)'의 개념은 플라톤의 철학 체계를 구성하는 여타 대립 개념의 쌍들과 마찬가지로 동시에 바로 그 체계 자체를 동요시키기도 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 개념에서 새로운 정치적 함의를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곧 환대를 위한 장소, 선물/증여를 위한 장소이며,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정치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정치적 전통을 해체하려는 나의 최근 시도들은 단지 정치를 탈정치화하려는(depoliticize) 것이 아니라 정치라는 개념과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다른 해석을 가하기 위한 것이며, 이러한 작업은 특히 선물/증여와 독특성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선물/증여는 재전유될(reappropriated) 수 없다는 점에서 정의와 공통점을 갖는다. 선물/증여는 감사의 마음이나 상업적 거래 또는 어떤 보충이나 보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내가 선물에 대해서 "감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선물을 거부하고 파괴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나는 그 선물을 재전유하고 그것에 대한 등가물을 제시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네게 이것을 선물/증여한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선물/증여는 그 자체로는 인지될 수 없는 것이며 재전유와 감사의 순환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일이긴 하지만, 또한 이것이 바로 선물/증여가 주어질 수 있는 조건(the condition for a gift to be given)인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선물/증여와 정의가 공유하고 있는 계산 불가능한 성격이며, 우리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개념을 이러한 조건 위에서 다시 사유해보아야 한다.

캐퓨토의 질문:
1. 데리다는 자신의 메시아주의를 성경 전통의 역사적 메시아주의와 구별하여 "유사-무신론적(quasi-atheistic)" 메시아주의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러한 메시아주의란 어떤 것인가.
2. 유대교와 성경에서 발견되는 정의의 예언자적 전통과 데리다의 작업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데리다의 답변:
나는 '종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고 있는 것들(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등) 안에도 긴장과 이질성이 존재한다. 어떤 특정한 종교 안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되는 예언자들의 텍스트들도 하나의 제도나 체계로 환원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항상 새롭게 발명되는 것이자 매순간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이에 나는 종교(religion)와 믿음(faith)을 구분하고자 하였다. 종교라는 것이 신앙과 교리와 제도의 집합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해체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여기서의 믿음은 내가 말하는 정의나 선물/증여와 비슷한 성격, 곧 가장 근본적인 해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 믿음의 행위 없이는, 증언/신앙고백(testimony)의 행위 없이는, 우리는 타자에게 말을 건넬 수 없다. 타자와의 관계의 전체를 이루는 "believe me"라는 요구는 정의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이론적인 진술이나 결정적 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믿음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믿음은 특정 종교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보편적인 것이다. 이러한 독특성에 대한 주목과 주의가 동시에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독특성(singularity)과 보편성(universality)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지 않는다. 메시아주의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 미래를 기다리는, 누군가의 도래를 기다리는 시간적 경험, 이것이 바로 경험의 개시이다. 누군가가 도래할 것이고, 그는 지금 도래할 것이다(Someone is to come, is now to come). 정의와 평화는 타자의 도래, 곧 "believe me"라는 약속과 관계가 있으며, 모든 행위가 이러한 약속에 기반한다. 미래와 도래를 기대하는 이러한 약속의 보편적 구조는 바로 정의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내가 메시아적 구조(messianic structure)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아적 구조는 특정 종교로 환원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미묘한 차이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메시아적인 것(the messianic)과 [특정한 종교의] 메시아주의(messianism)를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는데, 그렇다면 특정 종교의 메시아주의는 단지 이러한 보편적 메시아주의의 한 사례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특정 종교의 전통이 그 자체로 메시아적인 것을 드러내주는 어떤 환원할 수 없는 독특한 사건인가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아직 이 두 가지 가능성 사이를 오가고 있다. 블랑쇼의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구세주(Messiah)가 누더기를 걸친 채 로마의 문에 서 있었다. 그가 구세주임을 알아차린 한 사람이 구세주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언제 오실 겁니까(When will you come)?" 그는 지금 도래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지금 미래를 기다리는 방식이다. 따라서 이러한 메시아적 구조가 가리키는 책임성이란 바로 지금 여기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세주는 미래 시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임박한(imminent)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메시아적 구조를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임박함(imminence)인 것이다. 또한 구세주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구세주가 도래하여 정의와 평화와 혁명이 오기를 희망하지만, 그와 동시에 구세주의 도래를 두려워 하고 그 사건을 무한히 연기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또한 내게 있는 것이다. 메시아적 구조 안에는 이렇듯 무엇을 기다리면서 또한 기다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모호함이 존재하며, 이는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머피(Murphy)의 질문:
데리다의 작업이 문학 작품과 맺고 있는 상관 관계, 특히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문학과 맺고 있는 상관 관계는 어떤 것인가.

데리다의 답변:
내가 조이스의 『율리시즈(Ulysses)』와 『피네건의 경야(Finnegan's Wake)』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 작품들이 하나의 문화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언어와 문학과 종교를 통해 총체성(totality)을 구현하려 하기 때문이다. 조이스 문학의 이러한 시도는 문학사를 재편하고 문학사 안에서 어떤 단절을 개시하고 있음과 동시에 또한 조이스 문학 연구라는 하나의 제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의미에서 나는 그의 문학을 해체의 역사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본다. 조이스를 후설(Husserl)과 비교해보면, 조이스는 은유와 수식의 다의성을 축적함으로써 역사의 전체화를 이루려고 하는 반면에, 후설은 과학적이고 수학적이며 순수한 언어의 투명한 일의성을 통해서 역사성을 구성하려고 한다. 후설에게 있어서 역사성이란 전통의 투명성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 반면, 조이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언어에 있어 다의성의 축적 없이는 역사성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또한 나는 우리 토론의 주제와 관련하여 조이스에 대해 두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스티븐 디덜러스(Stephen Daedalus)가 부성(paternity)이 일종의 법률적 허구(a legal fiction)라고 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프로이트는 부계지배(patriarchy)가 인류사의 진보를 나타내준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이성(reason)이 필요하지만 그에 비해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판단하는 데에는 단지 감각적 지각(sensible perception)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를 판단하는 것 또한 경험의 해석과 사회적 재구성의 문제이며 따라서 일종의 법률적 허구의 성격을 띤다. 또 다른 하나는 『율리시즈』의 마지막 단어인 "yes"와 관련이 있다. 이 말은 개시/시작(inauguration)의 지점이며 이 말에 선행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yes"는 기원이자 설립의 순간이지만, 이러한 "yes"는 그에 이어지는 두 번째 "yes"를 통해 항상 보증되고 확증되어야 한다. 따라서 "yes"는 자기 스스로를 이중화하는 것이며, 이는 "yes"가 약속의 말일 수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되풀이 (불)가능성(iterability)이라고 부르는 것이다['iterability'에 대한 번역어는 진태원 선생의 것을 따랐다]. "yes"는 매일 날마다 새로 시작되어야 하고 새로 발명되어야 한다.

   

▷ Maurice Blanchot, L'écriture du désastre, Paris: Gallimard, 1980.
▷ Jacques Derrida, Gianni Vattimo(éds.), La religion, Paris: Seuil, 1996.

4) 덧붙여 위의 대담에서 데리다가 블랑쇼의 것으로 잠시 언급하고 있는 메시아에 관한 매력적인 이야기는 원래 블랑쇼의 책 『재앙의 글쓰기』의 말미(pp.214-216)에 수록되어 있는 부분이다. 이 책은 특히나 '파편적' 글쓰기를 향한 블랑쇼의 시도가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된 후기의 대표작으로, 끈질기게 일관된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일종의 '풍요로운 잠언집'에 가깝다. 일독을 권한다. 더불어, 종교와 관련된 데리다의 저작들은ㅡ특히나 후기로 오면서 더욱ㅡ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지안니 바티모와 함께 편집한 위의 책을, 또한 그 속에서도 위의 대담 주제와 관련하여 특히 데리다의 글 「믿음과 지식(Foi et savoir)」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5) 일종의 예고편: 다음 '데리다를 읽자'의 재료와 주제는, 첫째, 후설(Husserl)의 텍스트들과 데리다의 『목소리와 현상』 읽기, 둘째,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원전 비교 독해ㅡ최근 진태원 선생의 번역으로 새 번역본이 출간되었는데ㅡ및 후기 저작 일별, 셋째, 데리다의 Otobiographies와 자서전의 규약, 넷째, 데리다와 '메시아적인 것' 혹은 해체론과 종교학, 이 넷 중 하나가 될 것이다(그리고 아날 학파에 대한 다음 글은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와 뤼시엥 페브르(Lucien Febvre)의 저작들에 대한 글이 될 것이라는 예고도 첨언해둔다). 현재의 미친 듯한 일정이 아마도 최소한 11월 중순이 되어서야 마무리가 될 것이기에 이 연재들이 언제쯤 속개될 것인지 속단은 내리지 못하겠지만, 한 지인(知人)의 값진 조언처럼 "끝은 있고, 그 끝은 언제나 달콤한 것"이기에, 그리고 또한 매일 새롭게 쏟아지는 신간들과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추억의 책들 '사이'에서 언제나 매번 '같으면서도 다르게' 일어나는 틈새-글쓰기의 '강박적' 욕망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나를 추동하고 있기에, 무엇을 향한 것인지도 모를 다짐 몇 자락을 두어본다. 그런데 이러한 '글쓰기'의 상황에 대해서 데리다는 '감사하게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나는 이를 두고 일종의 '동병상련'이라고 부르는 모험을 감행한다):

"프로이트나 하이데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자 할 때 그들이 말하고 쓰는 것을 듣기 위해 내가 뭔가를 말해야 하는,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차례가 되어 뭔가를 써야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쓰게 되면 뭔가 다른 것을 말하게 되고, 뭔가 새로운 것, 뭔가 다른 것이 존재하게 되며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충절입니다. 이것이 이론과 철학과 문학의 충절이고, 예컨대 결혼 같은 일상 생활에서의 충절이기도 합니다. 동일한 것을 그대로 반복할 수는 없고 발명해야만 합니다.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하려면 뭔가 다른 것을 행해야만 합니다."
ㅡ 『이론 이후 삶』, 24쪽.

그러고 보면 데리다는, 그가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음성'과 '현전'에 대한 '이론적' 거부의 몸짓과 함께 그러한 '음성'과 '현전'을 향한 '삶의' 욕망으로 동시에 꿈틀거리고 있는, 여전히 '살아 있는' 한 명의 철학자가 아닌가, 그런데 나에게 그 '살아 있음'이란, 데리다의 용어를 차용하자면, 벌써부터[아직도?] 어떤 '유령'의 모습으로, 혹은 지젝의 용어를 차용하자면, 마치 'undead'와도 같은 느낌으로, 그렇게 다가오는 것은 혹여 아닐 것인가, 그런 잡생각에 미치게 되는 것, 이 혼곤한 새벽녘에.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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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10-12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절한 타이밍의 유익한 페이퍼입니다.^^

람혼 2007-10-12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짧은 댓글이, 지쳐 있는 제게 힘을 주네요.^^

yoonta 2007-10-12 0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람혼님 오랜만의 글이네요. ^^ 벌써부터 기대되는 연재입니다. 데이빗보위도 좋아하시나봐요? 저도 좋아하는 편이라고 할수있습니다만..전 그의 일렉트로니카?계열음반보다는 지기스타더스트같은 초기스타일의 음악이 제일 좋더군요. 한동안 듣고 또 듣고를 무한반복했던 기억이 나네요.

람혼 2007-10-12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교 때부터 Bowie 오빠의 음악에 완전 빠져서 저 역시나 숱한 '무한반복'의 추억을 갖고 있는데, yoonta님과의 공유지점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아 반갑습니다.^^
대략 "The Man Who Sold the World" 앨범부터 "Diamond Dogs" 앨범까지를 아우르는 글램록 시기의 Bowie, 저 역시 무척이나 사랑한답니다.^^

2007-11-16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7-11-22 05:24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너무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죠? ^^;
음악 잘 들어주시고 방송까지 봐주셨다니, 너무 너무 감사드립니다.

2007-11-23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7-11-24 04:44   좋아요 0 | URL
연쇄적으로 이어졌던 공연들을 끝내고 최근에야 조금 정신을 차렸습니다. 네이버 블로그도 방문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제가 아무래도 알라딘을 네이버보다는 드물게 방문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댓글이 늦었습니다,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