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오늘은 시험에 잘 나오는 시인, 김광균을 공부해 보자.
오늘 시 간단하게 두 개만 하고, 다음 시간에 더 해야 할 것 같아.
김광균 시가 시험에 많이 나거든.
그럼, 김광균 시가 시험에 잘 날 만한 요소가 뭘까?
우선, 그의 시는 <이미지즘> 시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감각적 심상을 활용하고 있단다.
그러다 보니 '공감각적 심상'도 많이 등장하지.
우선 '가스등'을 한자로 적은 표기, '와사등'부터 읽어 보자.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녀 있다.
내 호올노 어델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냐.
긴---여름 해 황망히 날애를 접고
느러슨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저저
찰난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크러진 채
사념(思念)의 벙어리 되여 입을 담을다.
피부의 바까테 숨이는 어둠
낫서른 거리의 아우성 소래.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석기여
내 어듸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왓기에
기일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듸로 어떠케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니여 잇다. (와사등) 1939년
한글 맞춤법이 1933년에 처음 제정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땐 전혀 교육되지 않을 때였으니, 그 당시 표기엔 이렇게 일관성이 없기도 하구나.
1연과 5연은 수미상관이지?
이 시에서 '차단---한' 하는 단어는 사전에 없는 단어야.
'차가운' '차단된' 이런 정도의 뜻으로 쓰인 말이겠지.
이렇게 화자가 만들어 쓸 수 있는 용어를 '시적 허용, 시적 자유'라고 한단다.
차가운 가로등이 '텅~ 빈(쓸쓸한 분위기겠지?)' 하늘에 걸려 있어.
화자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 지를 모르겠대.
농촌에서야 해지면 집으로 가는 것이지만, 쓸쓸하고 고독한 도시 생활이 보여지지.
긴---여름 해 황망히 날애를 접고
느러슨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저저
찰난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크러진 채
사념(思念)의 벙어리 되여 입을 담을다.
2연을 보면, 화자의 '시각적 심상' 활용이 잘 드러난다.
길던 여름해가 지는 모습을 '해가 당황하며 급하게 날개를 접'는다고 했지.
시각적 감각에 보이는 것 같잫아. 해가 주저주저하면서 지는 모습이...
늘어선 고층 빌딩이랬자, 그 당시엔 3층 정도 됐겠지.
건물들도 마치 <묘비석> 같다는구나. 생기가 없고 왠지 쓸쓸하고 외로운 분위기.
찬란한 야경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잡초처럼 헝크러져 있고,'
화자는 생각이 멈춘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고 있대.
전체적으로 도시의 고독한 분위기가 '감각적(시각적)'으로 그려지고 있지.
피부의 바까테 숨이는 어둠
낫서른 거리의 아우성 소래.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다음 3연은 '공감각적 심상'이 드러난 부분이야.
어딘지 찾을 수 있겠니?
'스미는 어둠'이야.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어둠은 보이는 거(시각)잖아. 피부에 스며드는 것은 촉각이겠지.
근데 이 사람이 피부로 느낀 걸까, 눈으로 본 걸까?
어둠은 본 거잖아. 그걸 피부에 스며든다고 과장해서 표현했으니,
<시각의 촉각화>라고 하는 <공감각적 심상>이 쓰인 거란다.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이런 것은 너무 '감상적'이라고 해.
'음악 감상' 이런 감상이 아니라 '감각을 아프게 하는 감상', 영어로 센티멘탈...이라고 하지.
도시의 경관을 그리는 시를 <모더니즘> 시라고 하는데 좀 센티~한 부분이 들어가서 분위기를 죽이네.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석기여
내 어듸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왓기에
기일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생각나지?
많은 사람 속에서 더 외로운 법이지. 남들은 다들 저렇게 잘 살고 있는데, 난 뭔가~ 싶어서 말이야.
화자의 마음은 '비애'와 '어두움'이구나.
전체적인 주제는 '도시 문명 속에서 느끼는 현대인의 고독과 비애' 정도가 되겠지.
1930년대 후반, 어두운 도시의 문화를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는 시란다.
이 시가 3년 전에 수능에 출제되었는데,
수미상관의 특징 찾는 쉬운 문제,
그리고 <슬픈 신호>, <늘어선 고층>,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이 다섯 개 중에 아래 설명에 해당하지 않는 것을 찾는 문제가 출제 되었어.
서정적 자아는 세계를 내면화한다. 이런 작용으로 서정시에서 자아는 상상적으로 세계와 하나가 된다.
그렇지만 근대 이후의 문명사회에서 자아와 세계의 조화나 통일은 달성하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근대 이후의 서정시에서는 자아와 세계 사이의 분열에 대한 자아의 반응을 함축하고 있는 시어들
이 자주 나타난다.
답은 당연히 두 번째 것이었지. 어렵지 않지?
수능에서 어려운 시가 나오면, 문제에서 해설을 많이 붙여 두니깐, 긴장할 필요 없이 즐겁게 풀면 된다.

다음엔, 김광균의 <추일 서정>을 한번 읽어 보자.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ㅡ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 - 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우러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추일서정 秋日敍情) 1940년.
제목 추일 서정은 '가을날의 정서를 쓴다'는 뜻이지.
폴란드의 도룬 시, 전쟁으로 인한 황폐와 망해버린 정부의 쓸모없는 지폐...
이런 역사적인 정황을 자세히 모르더라도 감각적으로 피폐함을 느낄 수 있단다.
이 사람이 본 것은 폴란드나 지폐가 아니야.
'낙엽'을 본 것 뿐이지.
그 '낙엽'을 무엇에다 빗대냐면,
망해버린 폴란드의 쓸모없는 지폐에 빗대는구나.
그저 낙엽이라고 하는 것보다 '지폐' 쪽이 훨씬 눈에 잘 보이는 것 같다.
구불구불한 길을 '구겨진 넥타이'처럼 비유하고,
햇빛이라고 하면 될 것도 '햇빛(일광)의 폭포'라고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오후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리는데(현대적인 모~던한 분위기, 모더니즘)
기차 연기는 '담배 연기'같다고 비유하네.
포플라 나무, 공장의 이빨같은 지붕, 철책 모두 현대적인 소재란다.
셀로판지도 마찬가지지.
이 부분까지는 그야말로 <가을의 풍경>이란다.
앞부분에서 '풍경'을 노래하는 <선경>
그럼 뒷부분에선 뭐가 나오지?
<후정>
자욱 - 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우러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어떤 감정이 느껴지니?
풀벌레소리 가득한데, 혼자서 마음이 바삭 부스러질 것 같은 외로움.
그래서 별 의미도 없이 돌 하나 던져 본다.
돌이 반원을 긋고 떨어지는 모습조차 <고독한 반원>이 되었구나.
뒷부분의 감정은 <외로움, 애수> 이런 거란다.
자,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의 공감각적 심상을 하나 보자.
이 사람의 '감각'이 느낀 것은 뭘까? 풀벌레 소리를 들은 거야.
그런데 '자욱한 풀벌레 소리'라고 했으니까, <청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거지? 청각의 시각화.
그런데, 그 <자욱한 풀벌레 소리>를 발로 찼다고 하는구나.
차는 건 촉각화잖아. 이 표현은 (<청각을 시각화>한 것을 다시 촉각화>)하는 공감각적 심상을
겹쳐 쓰는 방법을 쓰고 있지.
그리고, 외로움도 생각을 어쩔 수 없어 허공에 돌팔매 하나 띄웠는데,
기울어진 풍경 저쪽으로 고독한 반원으로 떨어져 가는 돌의 모습을 통해 외로움을 드러내는 시각적 수법을 쓰지.
자. 이 시의 주제는?
가을날의 애수 어린 풍경과 고독감, 이정도가 되겠지?
오늘은 김광균의 시 두 편을 통해 <감각적 이미지>를 다양하게 쓴 시를 읽었다.
어두운 시대를 보여주는 방법도 다양하지?
사람은 언제 어느 시대를 살든 자신이 작아 보이고 쓸쓸하게 느낄 수 있단다.
특히 즐거운 일보다 힘든 일이 더 많을 땐 그렇지.
이런 말이 있어.
사람은 희망만으론 살 수 없다. 그러나, 희망 없이는 더욱 살 수 없다.
힘이 빠질수록, 뭔가 희망을 찾아서 붙들고 사는 것이 삶의 '원기'가 될 수도 있겠구나.
민우도, 그 희망 하나 꼭 잡아 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