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력 운동의 과학 - 근육과 뼈를 강화하는 해부학과 생리학의 원리 DK 운동의 과학
오스틴 커런트 지음, 권기호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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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력 운동 왕초보자에게 적당한 책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근육의 위치와 쓰임새를 잘 알 수 있도록 한다. 헬스장 등에서 하는 기구 운동과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함께 실어 두어 적당한 코스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잘못된 자세를 알려 주어 부상의 위험을 예방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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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2-15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근력 운동 시작하셨습니까!!

거리의화가 2024-02-15 09:05   좋아요 1 | URL
시작이 반이겠지요^^; 지속성을 갖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삼가 대국을 섬기는 것은 어찌 모든 것이 잘 넘어가는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와 같이 한다면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목이 말하였다.

"조현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강남국의 주군께서 스스로 처리하실 일이지만 그러나 조정의 갑병은 아주 날카롭고 물자와 힘이 크고 많아서 아마도 그 칼끝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의당 깊이 계산하시어서 후회를 하는 일이 없애십시오."

임오일(10일)에 요(遼)의 야율소살(耶律蘇薩, 速撒)이 당항(?項)33의 포로들을 헌상하니 군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월국에서 처음에 군사를 발동할 적에 승상인 심호자(沈虎子)가 간하여 말했다.

"강남국은 우리나라의 울타리이고 가림막인데, 어찌하여 그 울타리와 가림막을 철거하십니까?"

듣지 않고 끝내 심호자를 정사에서 파면시키고 통유학사(通儒學士)인 전당(錢塘, 절강성 항주) 사람 최인기(崔仁冀)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송의 군사가 국경으로 들어오자 강남국의 주군은 걱정하지 아니하고 날로 후원에서 승(僧, 불교 승려)·도(道, 도교 도사)를 이끌어다가 경전(經傳)을 외우고 《주역(周易)》을 강론하게 하면서 정치적인 일을 소홀히 하니 군대에서 보낸 편지가 급하다고 알려 주어도 모두 연락할 수 없었고, 군사가 성[금릉성, 남경] 아래에 다가와서 몇 달이 되었지만 강남국의 주군은 오히려 알지 못하였다.

당시에 오래 된 장수들은 모두 앞에서 죽었고, 신위통군(神衛統軍)도지휘사인 황보계훈(皇甫繼勳)이라는 사람은 황보휘(皇甫暉, ? ~956)의 아들인데 나이가 아직 어리지만 강남국의 주군은 병권을 위임하였다. 황보계훈은 평소에 귀하다고 교만하여 처음부터 목숨을 바쳐 죽을 생각을 갖지 않았으며 도리어 강남국의 주군이 빨리 항복하기를 바랐지만 그러나 입으로 감히 발설하지 아니하면서 매번 무리들과 더불어 말하였다.

"북쪽의 군대는 세고 강하여 누가 그들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군사가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쁨이 얼굴에 드러내면서 말하였다.

"나는 본디 그들이 이기지 못할 것을 알았다!"

편장이나 비장들 가운데 결사대를 모집하여 밤중에 군영을 나가서 싸우려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황보계훈은 그 등을 채찍질하면서 구금하니 이로부터 무리들은 마음속으로부터 분노하였다.

이달에 강남국의 주군이 스스로 나와서 성을 순시하였는데, 송의 군사가 목책으로 만든 성 밖에 늘어 서 있고 정기(旌旗)가 들에 가득한 것을 보자,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덮어 버린 것을 알고 비로소 놀라며 두려워하고서 마침내 황보계훈을 잡아서 감옥에 넣었다가 그를 죽이었더니 군사들이 다투어 그 살점을 베어 씹으니 잠깐 사이에 모두 없어졌다.

주전윤은 10만 명의 무리를 가지고 호구(湖口, 江西省 九江市)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여러 장수들은 강물이 불어난 것을 이용하여 빨리 내려가자고 하였더니 주전윤이 말하였다.

"내가 지금 앞으로 나아가면 적들은 반드시 도리어 나의 배후를 점거할 것인데, 싸워서 이기면 좋겠지만 이기지 못하면 양도(糧道)가 또한 끊어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도 008-1〕 북송군의 강남국 공격도

이에 편지를 써서 남도(南都)유수인 시극정(柴克貞)을 불러서 대신 호구를 진수하게 하라고 하니 시극정은 병들었다고 하면서 미적미적하며 미루고 가지 아니하니 주전윤도 역시 감히 나아가지 아니하였고, 강남국의 주군이 누차 그에게 독촉하였지만 주전윤은 좇지 않았다.

요(遼)의 황룡부(?龍府)43의 위장(衛將)인 연파(燕頗)가 도감(都監)인 강호(彊瑚, 張?)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니 창사(敞史, 궁궐의 좌리)인 야율갈리필(耶律曷里必)을 파견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요(遼)의 야율갈리필(耶律曷里必)이 치하(治河)에서 연파(燕頗)를 패배시키고 그의 동생인 야율안박(耶律安搏)을 파견하여 이를 추격하게 하였다. 연파가 올약성(兀惹城)45으로 도망하여 지키자 야율안박이 마침내 돌아왔는데, 그 나머지 무리 1천여 호를 가지고 통주(通州, 京杭大運河의 北端)에 성을 쌓았다.

주전윤이 호구(湖口)에서부터 무리를 가지고 금릉을 도우니 호칭하기를 15만 명이라고 하면서, 나무를 묶어서 뗏목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100여 장(丈)이었고, 전함 가운데 큰 것은 1천 명을 수용하였다. 곧 채석(采石)의 부량(浮梁)을 끊으려고 하였지만 마침 강물이 말라서 전함이 빨리 나아갈 수 없었다. 왕명(王明)은 독수구(獨樹口, 河南省 方城縣 獨樹鎭)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아들을 파견하여 말을 달려서 들어가 상주하니 황제는 비밀리에 사자를 파견하여 왕명으로 하여금 주포(洲浦)49 사이에 긴 나무를 세우는데 마치 배의 돛대 모양으로 하여 이를 의심하게 하였다.

기미일(21일)에 주전윤이 홀로 큰 배를 탔는데, 높이가 10여 층으로 위에 대장의 깃발을 세웠다. 환구(?口)50에 이르러서 행영보군(行營步軍)도지휘사인 유우(劉遇, 920~985)가 군사를 지휘하여 급히 이를 공격하고 주전윤은 불타는 기름으로 멋대로 태우자 유우의 군대는 지탱할 수가 없었다. 잠깐 사이에 북풍이 불자 도리어 불길로 스스로를 태우니 그 무리들은 싸우지 않고도 스스로 무너졌으며 주전윤은 당황하고 놀라서 불속으로 뛰어 들어 죽었다. 그들의 전도도우후(戰櫂都虞候)인 왕휘(王暉) 등을 사로잡고 병장기 수만을 노획하였다. 금릉에서는 다만 이들의 원조만을 믿다가 이로부터는 외로운 성이 더욱 위태롭고 오그라들었다.

을미일(27일)에 금릉성이 깨졌는데, 장군인 괘언(?彦)·마성신(馬誠信) 그리고 그의 동생인 마승준(馬承俊)이 장사를 인솔하고 골목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근정정(勤政殿) 학사인 예장(豫章, 江西省 南昌市) 사람 종천(鍾?)이 조복을 입고 집에 앉아 있는데, 어지러이 병사들이 도착했지만, 온 가족이 죽더라도 떠나지 않았다.

진교가 말하였다.

"신(臣)이 폐하께 잘못하였으니 원컨대 죽음을 내려 주십시오. 만약에 중원지역에 있는 조정에서 힐책하는 바가 있다면 청컨대 신을 가지고 말씀하십시오."

강남국의 주군이 말하였다.

"기수(氣數)56가 이미 다 하였으니 경이 죽는다고 하여도 이익이 될 것이 없소."

진교가 말하였다.

"설사 신을 죽이지 않는다고 하여도 무슨 면목으로 선비들을 보겠습니까?"

드디어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장계가 말하였다.

"신은 진교와 함께 추밀의 업무를 장악하였는데, 나라가 망하면 마땅히 함께 죽어야 하지만 또 폐하께서 조정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누가 폐하와 더불어 이 일을 변명하겠습니까? 죽지 않는 까닭은 곧 있을 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조빈이 군대를 정돈하고 열을 세우고서 그 궁성에 도착하니 강남국의 주군은 마침내 표문(表文)을 받들고서 항복을 받아 달라고 하며 여러 신하들과 함께 문에서 영접하며 절하였다.

이욱은 바야흐로 나라가 망한 것을 분해하고 한탄하여 재물을 쌓아 둘 생각이 없어서, 자못 황금을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하사하였다. 조빈이 이미 금릉(金陵)에 들어가고 나자 포악한 짓을 엄금하는 명령을 되풀이 하니 사대부들로 목숨을 보전한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이어서 군중에서 크게 수색을 하여 다른 사람의 처자(妻子)를 숨길 수 없게 하였으며, 창름(倉?)과 부고는 전운사인 허중선(許仲宣, 929~990)에게 위탁하

여 서류에 따라서 검사하게 하고 조빈은 하나도 묻지 않고 군사를 돌렸는데 오직 도적(圖籍, 도서와 전적)·의금(衣衾, 의복과 침낭)뿐이었다.

요(遼)의 대승상(大丞相)인 고훈(高勳, ? ~978)·거란행궁(契丹行宮)도부서인 니리(尼?, 女里)가 총애를 차지하고 방자하였는데, 요주의 이모(姨母)·보모(保母)의 세력이 일시에 작열하여 뇌물을 받고 알현을 요청하니 문 앞이 마치 장사하는 곳 같았다. 북추밀원사(北院樞密使)인 야율현적(耶律賢適, 928~980)이 이를 근심하여 요주에게 말하였는데 회보하지 않았다. 야율현적이 아프다고 직책을 사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지 아니하고 수인(手印)을 주조하여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서현(徐鉉, 916~991)이 이욱을 좇아서 경사에 도착하였는데, 황제가 이욱에게 권고하여 더 일찍 조정으로 귀의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는데, 목소리와 안색이 모두 심하였다. 서현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신은 강남의 대신입니다. 나라가 없어지니 죄는 진실로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인데 다른 것은 물으셔서는 안 됩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충신이다. 나를 섬기는 것도 마땅히 이씨를 섬기는 것처럼 하여야 한다."

자리를 내려 주면서 그를 위무하였다.

또 장계(張?, 934~997)를 책망하여 말하였다.

"네가 이욱에게 항복하지 않도록 가르쳐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어서 그가 성을 포위하고 있는 중에 원병(援兵)을 부르는 납서(蠟書)69를 꺼냈다. 장계는 머리를 조아리며 죽여주기를 청하며 말하였다.

"편지는 실제로 신이 만든 것입니다. 개는 그 주인이 아닌 사람을 보고 짓는 것인데, 이것은 그 하나일 뿐입니다. 다른 것은 오히려 많습니다. 지금 죽을 수 있는 것이 신의 본분입니다."

언사와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황제는 처음에 장계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이에 이르러 그를 기이하게 여겨서 말하였다.

"경은 대담함을 가졌으니 짐은 경에게 죄를 주지 않겠다. 지금 나를 섬기면서 옛날의 충성심을 바꾸지 말라."

요(遼)의 남경유수(南京留守, 북경)인 진왕(秦王) 고훈(高勳)은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을 믿고 교만하였는데, 일찍이 남경의 교내(郊內, 근교)에 놀리고 있는 땅이 많았으므로 밭둑을 터서 벼를 심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요주(遼主)는 이를 좇으려고 하였는데 임아(林牙)96인 야율곤(耶律昆)이 조정에서 선언하여 말하였다.

"고훈의 이 주문은 다른 뜻을 갖고 있으니 과연 벼를 심게 한다면 물을 끌어들여 밭둑을 만들고 경(京, 남경)을 가지고 반란한다면 관병(官兵)은 어디에서부터 들어갑니까?"

요주(遼主)가 이를 의심하여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마침 영왕(寧王) 야율질목(耶律質睦, 只沒)의 처가 사사롭게 짐독(?毒)을 만들었는데, 고훈 역시 독약(毒藥)을 가지고 부마도위(駙馬都尉)인 소묵리(蕭默?, ?里)에게 먹이다가 사실이 발각되었다. 가을 7월 초하루 병인일에 야율질목은 작위를 박탈당하여 오고부(烏庫部)로 귀양 보내졌고, 고훈은 제명이 되어 동주(銅州, 黑龍江省 寧安市)로 유배 갔다.

경오일(8일)에 제주(齊州)방어사인 이한초(李漢超, ? ~977)를 운주(雲州, 연운 16주의 하나)관찰사로 하고 판제주(判齊州)103로 하여 겸하여 관남둔병(關南屯兵)을 통괄하게 하였다. 명주(?州, 河北省 永年)방어사 곽진(郭進, 922~979)은 영응주(領應州)104관찰사로 하여 판형주(判邢州) 겸서산순검(兼西山巡檢)은 예정대로 하였다

무자일(14일)에 오월왕(吳越王) 전숙(錢?, 929~988)이 사신을 파견하여 공물을 올리면서 불러서 위무하는 조치하도록 명령을 내린 것에 감사하였다. 아울러 강남국주가 보낸 편지를 올렸는데, 거기에서 말하였다.

"오늘날 내가 없어지면 다음날 어찌 그대가 있겠습니까? 밝으신 천자가 어느날 땅을 바꾸고 공훈을 준다면 왕께서는 역시 대량(大梁, 河南省 開封, 송의 도읍)의 한 명의 포의(布衣)일 뿐이요."

갑오일(20일)에 조빈 등이 신채(新寨)에서 강남국의 군사를 패배시키고 전함 30척을 노획하였다. 정언화(鄭彦華)·두진(杜眞)은 송의 군사와 만났는데, 두진이 거느리는 군사를 가지고 먼저 싸웠지만, 정언화는 군사를 움켜쥐고 구원하지 않아서 두진의 무리가 대패한 것이다.

요(遼)의 탁주(?州, 北京 ?州)자사 야율종(耶律琮, 耶律合住, 929?~979?)이 권지웅주(權知雄州) 손전흥(孫全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대략이다.

"두 조정은 처음에는 털끝만큼도 틈새가 없었으니 만약에 한 명의 사자가 말을 달려 교환하여 두 주군20의 마음을 드러낸다면 피로한 백성들을 쉬게 하고 오래도록 이웃나라가 될 터인데 역시 쉬지 않겠습니까!"

신축일(27일)에 손전흥이 야율종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올리니 황제는 손전흥에게 편지에 답을 쓰도록 하여 수호(修好)를 허락하였다.

12월에 금릉(金陵, 남경, 강남국 도읍지)에 처음으로 엄하게 경계하며 명령을 내려서 개보(開寶, 송의 연호)의 호칭을 없애게 하고 공적이든 사적이든 기록에 다만 갑술세(甲戌歲)라고 부르게 하였다. 더욱더 백성들을 모집하여 군사를 만들고 백성들로 재물과 곡식을 헌납하는 사람에게는 관작(官爵)을 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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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145호 - 2023.겨울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 역사비평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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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는 흥미로운 기획과 특집들이 실려 있어 특히나 재미 있게 읽었다. 


특집에서는 기존 냉전사 연구에서 나아가 새로운 냉전사 연구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글들이 실려 있다. 그 중 나는 냉전기 미국의 정치와 종교가 결탁하여 복음주의적 색채를 띄게 되었다는 글이 인상적이었다. 


미국 보수주의의 큰 축인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은 냉전기 소련을 악으로 규정했다. 문제는 이것이 대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국민을 선동했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은 기독교 복음주의자들과 결탁함으로써 이득을 얻었다. 

20세기 전반 미국에서는 기독교적 갱생에 의해 사회가 진보한다는 믿음이 퍼졌는데 정치권에서는 이를 대외관계에까지 확장시키려고 노력했다. 트루먼은 교황에게 보낸 서신에서 공산주의를 "인류의 희망과 이상을 짓밟는 악하고, 거추장스러운 세력"으로 규탄하며 범기독교 세계가 단결해야 함을 외쳤다. 트루먼에게 봉쇄란 무신론의 확산을 막아내는 힘을 의미했다. 트루먼의 뒤를 이은 아이젠하워도 마찬가지다. 그는 미국의 종교적 정체성을 공식적으로 입법화하려는 운동을 지원한 결과 1954년 「국기에 대한 경례문」에 "하나님 아래서 하나 된 나라(one nation under God)"라는 문구를 집어 넣었다. 이듬해에는 "하나님 안에서 신뢰하며(in God we trust)"라는 문구를 화폐 도안에 넣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냉전 초기 미국의 외교사가들이 내놓은 정책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공유했고 이런 바탕에서 봉쇄 지형을 굳건히 다졌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기독교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내세우지 않는 태도를 취하며 형식적으로는 시민종교의 외형을 갖추기를 원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런 정치학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뿐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도 관련하여 자유주의적 교단과 근본주의 교단 간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럼에도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냉전을 반공주의 기치 아래 집결시키며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했다. 남부로 간 백인들이 정치적 목소리와 함께 종교관도 함께 가져갔는데 이 지역이 전후 보수주의 운동을 견인했음은 의미심장하다.


정치와 종교의 결합은 시민종교의 강화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복음주의의 부흥으로 귀결됐다. 또한 미소 관계의 이분법적 사고가 복음주의의 이론론적 세계관과 뒤섞이면서 국가는 종교의 후원자인 동시에 그 적이 되어버리는 사태도 나타났다. 바로 이 지점에서 냉전의 성전화는 역사적인 패러독스를 수반했다. 다름 아니라 냉전을 성전으로 포고한 국가 덕분에 부흥한 복음주의가 대내적 성전의 대상으로 바로 국가를 조준했던 것이다. 

냉전의 성전화는 복음주의 운동의 또 다른 모순도 담고 있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자유기업 이념에 따라 작은 정부를 외쳤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연방정부의 경제적 수혜를 그 누구 못지않게 누렸다. 

복음주의는 미국 보수주의의 한 축을 담당하는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고, 복음주의자들은 냉전 이후에도 성전을 이어가고 있다. - P75~76


관동 대지진 100주년 관련한 기획도 다루어졌다. 작년에 페이퍼에도 다룬 바 있었지만 2023년은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지 꼭 100년이 되던 해였다. 그동안 밝혀진 진실들과 더불어 관련하여 많은 행사들이 열리고 저작물들이 출간되면서 비교적 많은 진상들이 규명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과제들이 남아 있음은 은폐된 사실들이 존재하고 입장에 따른 다양한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진의 원인과 사건 전개 과정을 다룬 글도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지만 나는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 폭동설을 주장하는 근거와 이유를 다룬 글이 더욱 도움이 되었다. 


그럼 일본의 조선인 폭동설의 기원과 출처는 어디인가. 구도 미요코의 저작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진실』에서는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대지진 당시 실제로 조선인은 "섭정궁(나중에 쇼와천황이 되는 인물)을 암살하려고까지 했고," "국난을 회피하기 위한 계엄령이었기에 자위권 행사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테러리스트를 '학살 당했다'고 하지 않는 것이 계엄령하의 국제 상식"이라고 단정한다. 2009년 출간된 이 책은 저자 이름을 바꾸고 2014년 재간행되었으며 일본 사회에 적지않은 영향력을 미쳐왔다. 2017년 도교도지사는 조선인 희생자 추도 식전 추도문 송부를 중지한 이후 계속해서 추도문을 보내지 않고 있다. 이유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진실』의 근거에 따라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의 "잘못된 책동과 유언비어 때문에 6,000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고귀한 생명을 빼앗겼습니다"라는 비문을 문제시한 것이다. 이 숫자는 "근거가 희박한 숫자"이고 조선인들은 "훗날의 쇼와천황의 혼례에 맞춰 위해행위를 준비"했으므로 추도비는 사실이 아닌 내용이 적혀 있다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 책이 주장하는 바의 내용을 비판한 저작은 없을까. 이미 야마다 쇼지와 가토 나오키가 면밀히 검증을 시도한 바 있다. 이들은 유언비사를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신문기사를 비판 없이 사실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고, 사료의 해석과 인용에서도 최소한의 학술적인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 말한다. 또 책에서는 사건에 관한 영국 외교문서로 영국국립공문서관 소장 외교문서 일부를 사료로 삼는다. 


  요코하마의 황폐를 관찰한 후 두 사람은 도쿄로 향해, 오후 7시에는 시나가와에 도착했다. 여기서 4마일 앞에 있는 제국호텔까지 가줄 택시를 잡았다.

  '조선인'과 '빨갱이'에 대해서는 설명할 가치가 있다. 과거 수년 사이에 다수의 조선인이 노동력으로 일본에 유입되었다. 또 일본 군대에는 시베리아에서 귀국하여 볼셰비키의 영향을 받은 병사들도 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중략]

  3일, 월요일 밤 10시 20분경 호텔 관리부에서 모든 객실의 불(작은 양초였다)을 끄라는 연락이 군부에서 왔다고 전했다. 

  조선인과 빨갱이가 10분 이내에 습격해 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호텔에서 야영하고 있던 여러 부대는 머신건을 보급받았다.

  - 존 W.도티의 보고서

  

이 문서는 요코하마 주재 영국총영사관 문서의 Micellaneous 중의 지진보고에 수록되어 있다. 도티는 뉴욕에 본사를 둔 파운데이션 컴퍼니의 사장이었다. 도티는 1923년 8월 중순 도쿄지하철주식회사와의 투자 약속을 위해 일본에 들어왔다. 그는 당시 지하철 설계자로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9월 3일 기술자 존스턴과 함께 도쿄로 가는데 미국 대사로부터 국무장관에게 피해 상황을 보고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10월 10일 송부했다. 


도티와 존스턴은 항구에 내렸을 때 총으로 무장한 자경단으로부터 "조선인으로 오인되지 않도록 오른팔에 흰색이나 녹색 밴드를 두르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후 시나가와역까지 이동하여 택시를 잡은 두 사람은 제국호텔로 향하던 중 다음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택시에 타고 있는 사이에 우리는 몇 차례나 자위단이나 자경단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정지당했다. 이 사람들은 주로 칼이나 죽창, 혹은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매우 흥분하여 공포에 가득 찬 젊은이들이었다. 이들 집단에는 어떤 리더나 규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각자가 개인적으로 면식이 없는 통행인들에게 한껏 성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 사이 한 번은 그들이 우리 차에 올라타 계속 "조선인이다"라고 외치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운전기사를 끌어내려고 했다. 


두 사람은 밖에서는 자경단이나 병사에 의해 정지당해 검문을 받고 호텔에 들어오자 호텔 지배인으로부터 조선인의 침입이 있을지 모르니 불을 끄라는 요청을 받았다.


구도는 9월 3일 요코하마와 도쿄에서 두 사람이 겪은 자경단의 행동이 거의 빠져 있다. 구도는 이 일기를 조선인으로 인한 '공포체험기'로 해석했으나 도티와 존스턴이 본 것은 일본인의 패닉이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자경단이 왜 패닉에 빠졌는지, 조선인의 박해의 기원은 무엇인지를 생략했다는 점이다. 도티의 일기는 조선인이 혼란이나 잔학행위를 조선인이나 사회주의자에게 전가함으로써 재난 지역에서 황당무계한 소문이 유포되고 무고한 조선인이 살해되었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구도는 책에서 "조선인과 빨갱이에 관한 패닉"중 ~에 관한 패닉이라는 글자를 아예 삭제함으로써 주체자를 지워버렸다. 


이뿐만 아니라 구도는 조선인 학살을 사실로 인식한 "해외 영사관은 없었다"라고 주장했으나 마찬가지로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분량상 다 다루기는 어려워서 이쯤에서 줄이겠다.


한국 근대사 이해의 글로벌한 전환과 식민주의 비판에서는 기후변동에 따른 위기에 대응하여 역사 연구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함을 이해시킨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 지배에 대해 자신들이 행한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오히려 과거로 회귀하려는 욕망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은 나치에 의한 제노사이드 학살에 있어서만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할 뿐 아프리카의 식민 지배 및 제노사이드에 대해서는 2021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인정했을 뿐이다. 일본은 그마저도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일의 책임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식민지 지배를 겪은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한국은 근대화를 거치며 서구 지향의 발전 지상주의를 따라왔다. 그 과정에서 환경, 인종(다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문제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이 서구 지향을 그대로 따라나간다면 그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역사 인식이나 시대 상황과 과제의 변화에 따라 항상 새롭게 쓰일 수 있다. 또 역사 인식이나 특정한 과거사에 대한 이해는 인식 대상의 시공간적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매우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이러한 명제들을 받아들인다면 인류 모두의 삶에 대한 반성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기후 변동이나 글로벌화의 급격한 진행에 따른 삶과 인식의 공간적 변화, 그러한 위기나 변화들이 가져올 수도 있는 '미래'라는 시간에 대한 회의 등이 강력한 문제들로 대두된 지금이야말로 바로 역사 인식과 역사 이해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요청되는 바로 그런 때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물론 인류 전체가 새롭고 전례 없는 도전을 맞게 된 시대 상황과 관련하여, 한국 근대사 연구의 '반외세' 프레임, 그 한가운데 자리 잡은 '반일 내셔널리즘'에 대해서도 성찰과 재인식이 필요하다. - P321


얼마 전 1945년 조선의 현실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같은 저자의 글이 실려 있었다. 그것도 조선의 독립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는 카이로 회담에 관한 내용이다. 

카이로 회담에 모인 주체들은 자치능력이 없는 한국의 상황,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반영하여 국제신탁통치라는 합의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카이로회담의 주체였던 미국과 중국의 입장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영국은 카이로 회담을 어떻게 인식했고 회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눈여겨보지 않았던 측면이 있다.  


카이로회담에서 중국은 '한국의 자유독립' 조항을 주장했으며, 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대한 영향력 강조와 임시정부의 '외교'를 반영한 결과였다. 미국은 그것을 중국의 야심으로 판단했지만, 해당 조항을 카이로선언에 삽입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의 자유·독립과 신탁통치 실시는 상충하거나 대립적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카이로선언에 한국 조항을 삽입하는 것 자체에 반대했으나, 미국과 중국의 반대로 시도가 무산되자 가급적 모호하고 불명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 결과 카이로선언의 한국 조항은 외교적 술어로 기술된 불명확하고 모호한 내용이 되었다. 전체적인 기조에서 카이로선언의 한국 조항은 미국이 추구하던 일반론적인 대한 정책 기조를 반영하는 한편 한반도에 이해관계를 가진 특정 강대국의 일방적 결정을 제지하는 '합의에 의한 공동정책'을 추구하는 결과물로 탄생했다. - P397


결국 카이로선언의 모호성은 삼국 간의 이해 관계를 반영했다고 보아야한다. 


올해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많은 대선들이 치뤄진다. 얼마 전에는 대만의 총통 선거가 있었고 그 결과 민진당의 라이칭 더 후보가 당선되었다. 미국은 일찌감치 대선 레이스에 들어간 상태인데 트럼프 당선이 우위에 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가 거꾸로 흘러가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낳게 한다. 며칠 전에는 그가 NATO 참가국에 방위비 분담을 동등하게 한다고 발언한 것이 논란이 되었다. 만약 그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대한민국의 국방비 부담도 늘어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이든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전 세계적으로 국제주의보다는 국가주의적 태도로 접근하여 문제가 발생하는 사례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고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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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몸의 회고록

비판의 한 양태로서 몸의 회고록은 인정받지 못함을 감수하는 자기-질문하기를 수행한다. 하지만 이 자아들을 식별하기 어렵게 만드는것은 그것들이 규범과 원칙, 계보학에 대한 조사뿐만 아니라 자신의 물질성, 빈번하게 과학 지식을 경유하여 이해해야만 하는 물질성에 대한조사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몸의 회고록의 자아, 환경, 횡단-신체적인 것, 그리고 포스트휴머니즘과 함께 존재하는 자아는 울리히 벡이말한 ‘위험사회‘에서 행하였던 환경보건운동을 과학적이고 대중적인운동으로 체현하는자아이다. - P220

현대 환경보건운동과 환경정의운동은 위험사회risk society에서 생존하는 방식을 모색하고 또한 위험사회를 비판적으로 변화시키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울리히 벡은 "위험"을 "근대화 자체가 유발하고 발 - P228

생시킨 위험요인과 불안정성을 다스리는 체계적인 방식으로 정의한다. 과거의 위험danger과는 대립되는 것으로서 위험risk은 근대화의 위협적인힘, 그리고 의심의 전지구화와 연관된 결과물이다". 후기 근대의 위험은 다음과 같은 것을 포함한다.
방사능은 물론이고 공기 ·물·음식에 있는 독성물질과 오염물질은 식물·동물·인간에게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장·단기적 영향을 발휘한다.
그것들은 체계적이고 종종 불가역적인irreversible 손상을 유발하고,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으며, 인과관계적 해석에 기반하고, 따라서 최초에는 오로지 그것에 대한 과학적 또는 반과학적 지식 속에서만 존재가 드러난다." - P229

디 치로는 "새로운 종류의 ‘전문가‘ ㅡ품격 있는 삶을 살고픈 욕구와 욕망을 이해하고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일상에서 노력하는 사람들―가 출현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경계선상에서의 환경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발생하는 지식은 "지역적인 것 이상이고 일회성이아니고 단순한 개인적 경험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공유된 관찰과 주의 깊은 연구조사, 다양한 ‘전문가들‘이 형성한 모임의 결과이다." 스티븐 카우치와 스티브 크롤-스미스는 평범한 사람들도 "이제 환경 위기에 대한 기술적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점점더 전문가들을 불신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비전문가들은 "과학의 전문적 자료를 공동체로 가져와 나름대로 학습을 한다. 자신의 고통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또 공동체주의적 합리성이나 도덕적 합리성에 근거해서 관계 기관에게 해결책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지식이필요하기 때문이다. - P232

대항-기억은 "중요한 윤리적 실천이다. 하나의 이유는 그것을 통해 공인된 진리의 새장에서 탈출할 수 있고, 원점으로부터 새로운 사유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의미의 대안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재료로서 권력과 지식의 대안적 모체를 구성하는 바로 그 물질이기 때문이다"."오드리 로드, 캔디다 로런스, 질라아이젠스타인, 수잔 안토네타, 그리고 샌드라 스테인그래버는 객관적과학 지식과 주관적인 자서전적 회상 사이, 외부의 물질 환경과 자아의내면 작업 사이의 대립을 거부함으로써 "권력과 지식의 대안적 모체"
를 구상한다. 과학적 글쓰기, 행동주의, 계보학, 회고록이 한꺼번에 혼합된 이 작품들은 자서전이라는 장르뿐 아니라, 놀랍게도 과학적 글쓰기의 관행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다. - P234

자체의 원동력이라는 듯이, 우리는 수많은 유전학자들에게 유전학적오류들을 찾도록 떠맡기고, 양수검사를 임신 여성이 치르는 통과의례로 거쳐 간다. 마치 임신이 물 순환과 먹이 사슬과 동떨어진 밀실에서발생하기라도 하다는 듯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책임이 있는 산업체들과 기관들, 정부기관들을 폭로하며 외부 환경과 관련해 환경보건이다루는 불쾌한 문제들은 ‘유전자‘에 의해 대체된다. 유전자에 비춰지는스포트라이트는 윤리적·정치적 질문들을 제기하지 않는다. 오로지 출생기형을 다루는 환경주의의 역사만이 누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형식의 지식이 신뢰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불편한 질문들을 제기하는 탈리도마이드와 미나마타병과 같은 것들을 다룬다. - P261

가정용 공기청정기를 사용하는 것은 식물과 동물, 서식지, 생태계를 손상시키는 전지구적 기후변화를 가속화한다는 점에서 이기적인 행위다. 그것들의 녹색 포장들에도 불구하고, 가장 유아론적인 환경보건 실천들은 우리, 다행스러운 소수인 우리 자신만을 구하려는 방공호 사고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요약하면, 횡단신체적 상호교환들의 위험을 인정하는 것은개인들을 세계로부터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일련의 심리적·정치적·물질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실천들을 자극한다. 다른 한편으로, 몸의 회고록이 그러하듯이, 세계와 자아가 함께 존재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경계선들보다는 연결들을 만들고, 전지구적 시스템들과 교환들, 흐름들 내부로부터 윤리적 행동들을 수행하는 횡단-신체적이고 포스트휴먼인 환경주의운동을 고취할 수 있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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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2-15 07: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시작했어요!
읽다 보니 도나 해러웨이도 크리스테바도 생각 나더라고요!!
 

3장

"화학제품들이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질문에 "화학제품들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라고 응답하는 사회적 책임을 위한 의사회physicians for Social Responsibility 웹사이트에서 인종은 거론되지 않는다. 대신 그 사이트는 "아이들", "임신한 여성과 발달 단계의 태아", 그리고 "농촌공동체"라는 세 가지 특정 범주를 강조한다. 마지막 범주는 미국에 있는 "5,640만 명의 거대한 농촌 인구"를 포함하며, 그 중 900만 명이 농업에 종사한다. 이때 특정 인종이나 계급에 한정되지 않는 [농촌] "공동체"라는 범주는 "농장노동자"라는 범주로바꿈한다. "살충제에 노출되는 농장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연방법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자녀들은 일반인들보다 높은 수위의 독성물질들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있다." ‘농장노동자‘가 계급과 관련된 범주이기는 하다. 그러나 독성물질과 건강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는 의사회의 캠페인은 인종을 언급하지 않는다. 큰 글씨체로 쓰인 농 - P206

촌 공동체들"은 인종이 아니라 지리적 영역을 강조하는 것이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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