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평 145호 - 2023.겨울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 역사비평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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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는 흥미로운 기획과 특집들이 실려 있어 특히나 재미 있게 읽었다. 


특집에서는 기존 냉전사 연구에서 나아가 새로운 냉전사 연구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글들이 실려 있다. 그 중 나는 냉전기 미국의 정치와 종교가 결탁하여 복음주의적 색채를 띄게 되었다는 글이 인상적이었다. 


미국 보수주의의 큰 축인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은 냉전기 소련을 악으로 규정했다. 문제는 이것이 대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국민을 선동했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은 기독교 복음주의자들과 결탁함으로써 이득을 얻었다. 

20세기 전반 미국에서는 기독교적 갱생에 의해 사회가 진보한다는 믿음이 퍼졌는데 정치권에서는 이를 대외관계에까지 확장시키려고 노력했다. 트루먼은 교황에게 보낸 서신에서 공산주의를 "인류의 희망과 이상을 짓밟는 악하고, 거추장스러운 세력"으로 규탄하며 범기독교 세계가 단결해야 함을 외쳤다. 트루먼에게 봉쇄란 무신론의 확산을 막아내는 힘을 의미했다. 트루먼의 뒤를 이은 아이젠하워도 마찬가지다. 그는 미국의 종교적 정체성을 공식적으로 입법화하려는 운동을 지원한 결과 1954년 「국기에 대한 경례문」에 "하나님 아래서 하나 된 나라(one nation under God)"라는 문구를 집어 넣었다. 이듬해에는 "하나님 안에서 신뢰하며(in God we trust)"라는 문구를 화폐 도안에 넣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냉전 초기 미국의 외교사가들이 내놓은 정책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공유했고 이런 바탕에서 봉쇄 지형을 굳건히 다졌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기독교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내세우지 않는 태도를 취하며 형식적으로는 시민종교의 외형을 갖추기를 원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런 정치학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뿐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도 관련하여 자유주의적 교단과 근본주의 교단 간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럼에도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냉전을 반공주의 기치 아래 집결시키며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했다. 남부로 간 백인들이 정치적 목소리와 함께 종교관도 함께 가져갔는데 이 지역이 전후 보수주의 운동을 견인했음은 의미심장하다.


정치와 종교의 결합은 시민종교의 강화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복음주의의 부흥으로 귀결됐다. 또한 미소 관계의 이분법적 사고가 복음주의의 이론론적 세계관과 뒤섞이면서 국가는 종교의 후원자인 동시에 그 적이 되어버리는 사태도 나타났다. 바로 이 지점에서 냉전의 성전화는 역사적인 패러독스를 수반했다. 다름 아니라 냉전을 성전으로 포고한 국가 덕분에 부흥한 복음주의가 대내적 성전의 대상으로 바로 국가를 조준했던 것이다. 

냉전의 성전화는 복음주의 운동의 또 다른 모순도 담고 있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자유기업 이념에 따라 작은 정부를 외쳤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연방정부의 경제적 수혜를 그 누구 못지않게 누렸다. 

복음주의는 미국 보수주의의 한 축을 담당하는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고, 복음주의자들은 냉전 이후에도 성전을 이어가고 있다. - P75~76


관동 대지진 100주년 관련한 기획도 다루어졌다. 작년에 페이퍼에도 다룬 바 있었지만 2023년은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지 꼭 100년이 되던 해였다. 그동안 밝혀진 진실들과 더불어 관련하여 많은 행사들이 열리고 저작물들이 출간되면서 비교적 많은 진상들이 규명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과제들이 남아 있음은 은폐된 사실들이 존재하고 입장에 따른 다양한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진의 원인과 사건 전개 과정을 다룬 글도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지만 나는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 폭동설을 주장하는 근거와 이유를 다룬 글이 더욱 도움이 되었다. 


그럼 일본의 조선인 폭동설의 기원과 출처는 어디인가. 구도 미요코의 저작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진실』에서는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대지진 당시 실제로 조선인은 "섭정궁(나중에 쇼와천황이 되는 인물)을 암살하려고까지 했고," "국난을 회피하기 위한 계엄령이었기에 자위권 행사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테러리스트를 '학살 당했다'고 하지 않는 것이 계엄령하의 국제 상식"이라고 단정한다. 2009년 출간된 이 책은 저자 이름을 바꾸고 2014년 재간행되었으며 일본 사회에 적지않은 영향력을 미쳐왔다. 2017년 도교도지사는 조선인 희생자 추도 식전 추도문 송부를 중지한 이후 계속해서 추도문을 보내지 않고 있다. 이유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진실』의 근거에 따라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의 "잘못된 책동과 유언비어 때문에 6,000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고귀한 생명을 빼앗겼습니다"라는 비문을 문제시한 것이다. 이 숫자는 "근거가 희박한 숫자"이고 조선인들은 "훗날의 쇼와천황의 혼례에 맞춰 위해행위를 준비"했으므로 추도비는 사실이 아닌 내용이 적혀 있다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 책이 주장하는 바의 내용을 비판한 저작은 없을까. 이미 야마다 쇼지와 가토 나오키가 면밀히 검증을 시도한 바 있다. 이들은 유언비사를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신문기사를 비판 없이 사실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고, 사료의 해석과 인용에서도 최소한의 학술적인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 말한다. 또 책에서는 사건에 관한 영국 외교문서로 영국국립공문서관 소장 외교문서 일부를 사료로 삼는다. 


  요코하마의 황폐를 관찰한 후 두 사람은 도쿄로 향해, 오후 7시에는 시나가와에 도착했다. 여기서 4마일 앞에 있는 제국호텔까지 가줄 택시를 잡았다.

  '조선인'과 '빨갱이'에 대해서는 설명할 가치가 있다. 과거 수년 사이에 다수의 조선인이 노동력으로 일본에 유입되었다. 또 일본 군대에는 시베리아에서 귀국하여 볼셰비키의 영향을 받은 병사들도 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중략]

  3일, 월요일 밤 10시 20분경 호텔 관리부에서 모든 객실의 불(작은 양초였다)을 끄라는 연락이 군부에서 왔다고 전했다. 

  조선인과 빨갱이가 10분 이내에 습격해 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호텔에서 야영하고 있던 여러 부대는 머신건을 보급받았다.

  - 존 W.도티의 보고서

  

이 문서는 요코하마 주재 영국총영사관 문서의 Micellaneous 중의 지진보고에 수록되어 있다. 도티는 뉴욕에 본사를 둔 파운데이션 컴퍼니의 사장이었다. 도티는 1923년 8월 중순 도쿄지하철주식회사와의 투자 약속을 위해 일본에 들어왔다. 그는 당시 지하철 설계자로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9월 3일 기술자 존스턴과 함께 도쿄로 가는데 미국 대사로부터 국무장관에게 피해 상황을 보고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10월 10일 송부했다. 


도티와 존스턴은 항구에 내렸을 때 총으로 무장한 자경단으로부터 "조선인으로 오인되지 않도록 오른팔에 흰색이나 녹색 밴드를 두르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후 시나가와역까지 이동하여 택시를 잡은 두 사람은 제국호텔로 향하던 중 다음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택시에 타고 있는 사이에 우리는 몇 차례나 자위단이나 자경단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정지당했다. 이 사람들은 주로 칼이나 죽창, 혹은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매우 흥분하여 공포에 가득 찬 젊은이들이었다. 이들 집단에는 어떤 리더나 규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각자가 개인적으로 면식이 없는 통행인들에게 한껏 성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 사이 한 번은 그들이 우리 차에 올라타 계속 "조선인이다"라고 외치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운전기사를 끌어내려고 했다. 


두 사람은 밖에서는 자경단이나 병사에 의해 정지당해 검문을 받고 호텔에 들어오자 호텔 지배인으로부터 조선인의 침입이 있을지 모르니 불을 끄라는 요청을 받았다.


구도는 9월 3일 요코하마와 도쿄에서 두 사람이 겪은 자경단의 행동이 거의 빠져 있다. 구도는 이 일기를 조선인으로 인한 '공포체험기'로 해석했으나 도티와 존스턴이 본 것은 일본인의 패닉이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자경단이 왜 패닉에 빠졌는지, 조선인의 박해의 기원은 무엇인지를 생략했다는 점이다. 도티의 일기는 조선인이 혼란이나 잔학행위를 조선인이나 사회주의자에게 전가함으로써 재난 지역에서 황당무계한 소문이 유포되고 무고한 조선인이 살해되었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구도는 책에서 "조선인과 빨갱이에 관한 패닉"중 ~에 관한 패닉이라는 글자를 아예 삭제함으로써 주체자를 지워버렸다. 


이뿐만 아니라 구도는 조선인 학살을 사실로 인식한 "해외 영사관은 없었다"라고 주장했으나 마찬가지로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분량상 다 다루기는 어려워서 이쯤에서 줄이겠다.


한국 근대사 이해의 글로벌한 전환과 식민주의 비판에서는 기후변동에 따른 위기에 대응하여 역사 연구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함을 이해시킨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 지배에 대해 자신들이 행한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오히려 과거로 회귀하려는 욕망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은 나치에 의한 제노사이드 학살에 있어서만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할 뿐 아프리카의 식민 지배 및 제노사이드에 대해서는 2021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인정했을 뿐이다. 일본은 그마저도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일의 책임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식민지 지배를 겪은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한국은 근대화를 거치며 서구 지향의 발전 지상주의를 따라왔다. 그 과정에서 환경, 인종(다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문제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이 서구 지향을 그대로 따라나간다면 그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역사 인식이나 시대 상황과 과제의 변화에 따라 항상 새롭게 쓰일 수 있다. 또 역사 인식이나 특정한 과거사에 대한 이해는 인식 대상의 시공간적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매우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이러한 명제들을 받아들인다면 인류 모두의 삶에 대한 반성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기후 변동이나 글로벌화의 급격한 진행에 따른 삶과 인식의 공간적 변화, 그러한 위기나 변화들이 가져올 수도 있는 '미래'라는 시간에 대한 회의 등이 강력한 문제들로 대두된 지금이야말로 바로 역사 인식과 역사 이해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요청되는 바로 그런 때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물론 인류 전체가 새롭고 전례 없는 도전을 맞게 된 시대 상황과 관련하여, 한국 근대사 연구의 '반외세' 프레임, 그 한가운데 자리 잡은 '반일 내셔널리즘'에 대해서도 성찰과 재인식이 필요하다. - P321


얼마 전 1945년 조선의 현실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같은 저자의 글이 실려 있었다. 그것도 조선의 독립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는 카이로 회담에 관한 내용이다. 

카이로 회담에 모인 주체들은 자치능력이 없는 한국의 상황,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반영하여 국제신탁통치라는 합의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카이로회담의 주체였던 미국과 중국의 입장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영국은 카이로 회담을 어떻게 인식했고 회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눈여겨보지 않았던 측면이 있다.  


카이로회담에서 중국은 '한국의 자유독립' 조항을 주장했으며, 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대한 영향력 강조와 임시정부의 '외교'를 반영한 결과였다. 미국은 그것을 중국의 야심으로 판단했지만, 해당 조항을 카이로선언에 삽입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의 자유·독립과 신탁통치 실시는 상충하거나 대립적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카이로선언에 한국 조항을 삽입하는 것 자체에 반대했으나, 미국과 중국의 반대로 시도가 무산되자 가급적 모호하고 불명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 결과 카이로선언의 한국 조항은 외교적 술어로 기술된 불명확하고 모호한 내용이 되었다. 전체적인 기조에서 카이로선언의 한국 조항은 미국이 추구하던 일반론적인 대한 정책 기조를 반영하는 한편 한반도에 이해관계를 가진 특정 강대국의 일방적 결정을 제지하는 '합의에 의한 공동정책'을 추구하는 결과물로 탄생했다. - P397


결국 카이로선언의 모호성은 삼국 간의 이해 관계를 반영했다고 보아야한다. 


올해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많은 대선들이 치뤄진다. 얼마 전에는 대만의 총통 선거가 있었고 그 결과 민진당의 라이칭 더 후보가 당선되었다. 미국은 일찌감치 대선 레이스에 들어간 상태인데 트럼프 당선이 우위에 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가 거꾸로 흘러가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낳게 한다. 며칠 전에는 그가 NATO 참가국에 방위비 분담을 동등하게 한다고 발언한 것이 논란이 되었다. 만약 그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대한민국의 국방비 부담도 늘어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이든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전 세계적으로 국제주의보다는 국가주의적 태도로 접근하여 문제가 발생하는 사례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고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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