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대국을 섬기는 것은 어찌 모든 것이 잘 넘어가는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와 같이 한다면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목이 말하였다.

"조현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강남국의 주군께서 스스로 처리하실 일이지만 그러나 조정의 갑병은 아주 날카롭고 물자와 힘이 크고 많아서 아마도 그 칼끝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의당 깊이 계산하시어서 후회를 하는 일이 없애십시오."

임오일(10일)에 요(遼)의 야율소살(耶律蘇薩, 速撒)이 당항(?項)33의 포로들을 헌상하니 군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월국에서 처음에 군사를 발동할 적에 승상인 심호자(沈虎子)가 간하여 말했다.

"강남국은 우리나라의 울타리이고 가림막인데, 어찌하여 그 울타리와 가림막을 철거하십니까?"

듣지 않고 끝내 심호자를 정사에서 파면시키고 통유학사(通儒學士)인 전당(錢塘, 절강성 항주) 사람 최인기(崔仁冀)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송의 군사가 국경으로 들어오자 강남국의 주군은 걱정하지 아니하고 날로 후원에서 승(僧, 불교 승려)·도(道, 도교 도사)를 이끌어다가 경전(經傳)을 외우고 《주역(周易)》을 강론하게 하면서 정치적인 일을 소홀히 하니 군대에서 보낸 편지가 급하다고 알려 주어도 모두 연락할 수 없었고, 군사가 성[금릉성, 남경] 아래에 다가와서 몇 달이 되었지만 강남국의 주군은 오히려 알지 못하였다.

당시에 오래 된 장수들은 모두 앞에서 죽었고, 신위통군(神衛統軍)도지휘사인 황보계훈(皇甫繼勳)이라는 사람은 황보휘(皇甫暉, ? ~956)의 아들인데 나이가 아직 어리지만 강남국의 주군은 병권을 위임하였다. 황보계훈은 평소에 귀하다고 교만하여 처음부터 목숨을 바쳐 죽을 생각을 갖지 않았으며 도리어 강남국의 주군이 빨리 항복하기를 바랐지만 그러나 입으로 감히 발설하지 아니하면서 매번 무리들과 더불어 말하였다.

"북쪽의 군대는 세고 강하여 누가 그들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군사가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쁨이 얼굴에 드러내면서 말하였다.

"나는 본디 그들이 이기지 못할 것을 알았다!"

편장이나 비장들 가운데 결사대를 모집하여 밤중에 군영을 나가서 싸우려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황보계훈은 그 등을 채찍질하면서 구금하니 이로부터 무리들은 마음속으로부터 분노하였다.

이달에 강남국의 주군이 스스로 나와서 성을 순시하였는데, 송의 군사가 목책으로 만든 성 밖에 늘어 서 있고 정기(旌旗)가 들에 가득한 것을 보자,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덮어 버린 것을 알고 비로소 놀라며 두려워하고서 마침내 황보계훈을 잡아서 감옥에 넣었다가 그를 죽이었더니 군사들이 다투어 그 살점을 베어 씹으니 잠깐 사이에 모두 없어졌다.

주전윤은 10만 명의 무리를 가지고 호구(湖口, 江西省 九江市)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여러 장수들은 강물이 불어난 것을 이용하여 빨리 내려가자고 하였더니 주전윤이 말하였다.

"내가 지금 앞으로 나아가면 적들은 반드시 도리어 나의 배후를 점거할 것인데, 싸워서 이기면 좋겠지만 이기지 못하면 양도(糧道)가 또한 끊어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도 008-1〕 북송군의 강남국 공격도

이에 편지를 써서 남도(南都)유수인 시극정(柴克貞)을 불러서 대신 호구를 진수하게 하라고 하니 시극정은 병들었다고 하면서 미적미적하며 미루고 가지 아니하니 주전윤도 역시 감히 나아가지 아니하였고, 강남국의 주군이 누차 그에게 독촉하였지만 주전윤은 좇지 않았다.

요(遼)의 황룡부(?龍府)43의 위장(衛將)인 연파(燕頗)가 도감(都監)인 강호(彊瑚, 張?)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니 창사(敞史, 궁궐의 좌리)인 야율갈리필(耶律曷里必)을 파견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요(遼)의 야율갈리필(耶律曷里必)이 치하(治河)에서 연파(燕頗)를 패배시키고 그의 동생인 야율안박(耶律安搏)을 파견하여 이를 추격하게 하였다. 연파가 올약성(兀惹城)45으로 도망하여 지키자 야율안박이 마침내 돌아왔는데, 그 나머지 무리 1천여 호를 가지고 통주(通州, 京杭大運河의 北端)에 성을 쌓았다.

주전윤이 호구(湖口)에서부터 무리를 가지고 금릉을 도우니 호칭하기를 15만 명이라고 하면서, 나무를 묶어서 뗏목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100여 장(丈)이었고, 전함 가운데 큰 것은 1천 명을 수용하였다. 곧 채석(采石)의 부량(浮梁)을 끊으려고 하였지만 마침 강물이 말라서 전함이 빨리 나아갈 수 없었다. 왕명(王明)은 독수구(獨樹口, 河南省 方城縣 獨樹鎭)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아들을 파견하여 말을 달려서 들어가 상주하니 황제는 비밀리에 사자를 파견하여 왕명으로 하여금 주포(洲浦)49 사이에 긴 나무를 세우는데 마치 배의 돛대 모양으로 하여 이를 의심하게 하였다.

기미일(21일)에 주전윤이 홀로 큰 배를 탔는데, 높이가 10여 층으로 위에 대장의 깃발을 세웠다. 환구(?口)50에 이르러서 행영보군(行營步軍)도지휘사인 유우(劉遇, 920~985)가 군사를 지휘하여 급히 이를 공격하고 주전윤은 불타는 기름으로 멋대로 태우자 유우의 군대는 지탱할 수가 없었다. 잠깐 사이에 북풍이 불자 도리어 불길로 스스로를 태우니 그 무리들은 싸우지 않고도 스스로 무너졌으며 주전윤은 당황하고 놀라서 불속으로 뛰어 들어 죽었다. 그들의 전도도우후(戰櫂都虞候)인 왕휘(王暉) 등을 사로잡고 병장기 수만을 노획하였다. 금릉에서는 다만 이들의 원조만을 믿다가 이로부터는 외로운 성이 더욱 위태롭고 오그라들었다.

을미일(27일)에 금릉성이 깨졌는데, 장군인 괘언(?彦)·마성신(馬誠信) 그리고 그의 동생인 마승준(馬承俊)이 장사를 인솔하고 골목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근정정(勤政殿) 학사인 예장(豫章, 江西省 南昌市) 사람 종천(鍾?)이 조복을 입고 집에 앉아 있는데, 어지러이 병사들이 도착했지만, 온 가족이 죽더라도 떠나지 않았다.

진교가 말하였다.

"신(臣)이 폐하께 잘못하였으니 원컨대 죽음을 내려 주십시오. 만약에 중원지역에 있는 조정에서 힐책하는 바가 있다면 청컨대 신을 가지고 말씀하십시오."

강남국의 주군이 말하였다.

"기수(氣數)56가 이미 다 하였으니 경이 죽는다고 하여도 이익이 될 것이 없소."

진교가 말하였다.

"설사 신을 죽이지 않는다고 하여도 무슨 면목으로 선비들을 보겠습니까?"

드디어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장계가 말하였다.

"신은 진교와 함께 추밀의 업무를 장악하였는데, 나라가 망하면 마땅히 함께 죽어야 하지만 또 폐하께서 조정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누가 폐하와 더불어 이 일을 변명하겠습니까? 죽지 않는 까닭은 곧 있을 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조빈이 군대를 정돈하고 열을 세우고서 그 궁성에 도착하니 강남국의 주군은 마침내 표문(表文)을 받들고서 항복을 받아 달라고 하며 여러 신하들과 함께 문에서 영접하며 절하였다.

이욱은 바야흐로 나라가 망한 것을 분해하고 한탄하여 재물을 쌓아 둘 생각이 없어서, 자못 황금을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하사하였다. 조빈이 이미 금릉(金陵)에 들어가고 나자 포악한 짓을 엄금하는 명령을 되풀이 하니 사대부들로 목숨을 보전한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이어서 군중에서 크게 수색을 하여 다른 사람의 처자(妻子)를 숨길 수 없게 하였으며, 창름(倉?)과 부고는 전운사인 허중선(許仲宣, 929~990)에게 위탁하

여 서류에 따라서 검사하게 하고 조빈은 하나도 묻지 않고 군사를 돌렸는데 오직 도적(圖籍, 도서와 전적)·의금(衣衾, 의복과 침낭)뿐이었다.

요(遼)의 대승상(大丞相)인 고훈(高勳, ? ~978)·거란행궁(契丹行宮)도부서인 니리(尼?, 女里)가 총애를 차지하고 방자하였는데, 요주의 이모(姨母)·보모(保母)의 세력이 일시에 작열하여 뇌물을 받고 알현을 요청하니 문 앞이 마치 장사하는 곳 같았다. 북추밀원사(北院樞密使)인 야율현적(耶律賢適, 928~980)이 이를 근심하여 요주에게 말하였는데 회보하지 않았다. 야율현적이 아프다고 직책을 사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지 아니하고 수인(手印)을 주조하여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서현(徐鉉, 916~991)이 이욱을 좇아서 경사에 도착하였는데, 황제가 이욱에게 권고하여 더 일찍 조정으로 귀의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는데, 목소리와 안색이 모두 심하였다. 서현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신은 강남의 대신입니다. 나라가 없어지니 죄는 진실로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인데 다른 것은 물으셔서는 안 됩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충신이다. 나를 섬기는 것도 마땅히 이씨를 섬기는 것처럼 하여야 한다."

자리를 내려 주면서 그를 위무하였다.

또 장계(張?, 934~997)를 책망하여 말하였다.

"네가 이욱에게 항복하지 않도록 가르쳐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어서 그가 성을 포위하고 있는 중에 원병(援兵)을 부르는 납서(蠟書)69를 꺼냈다. 장계는 머리를 조아리며 죽여주기를 청하며 말하였다.

"편지는 실제로 신이 만든 것입니다. 개는 그 주인이 아닌 사람을 보고 짓는 것인데, 이것은 그 하나일 뿐입니다. 다른 것은 오히려 많습니다. 지금 죽을 수 있는 것이 신의 본분입니다."

언사와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황제는 처음에 장계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이에 이르러 그를 기이하게 여겨서 말하였다.

"경은 대담함을 가졌으니 짐은 경에게 죄를 주지 않겠다. 지금 나를 섬기면서 옛날의 충성심을 바꾸지 말라."

요(遼)의 남경유수(南京留守, 북경)인 진왕(秦王) 고훈(高勳)은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을 믿고 교만하였는데, 일찍이 남경의 교내(郊內, 근교)에 놀리고 있는 땅이 많았으므로 밭둑을 터서 벼를 심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요주(遼主)는 이를 좇으려고 하였는데 임아(林牙)96인 야율곤(耶律昆)이 조정에서 선언하여 말하였다.

"고훈의 이 주문은 다른 뜻을 갖고 있으니 과연 벼를 심게 한다면 물을 끌어들여 밭둑을 만들고 경(京, 남경)을 가지고 반란한다면 관병(官兵)은 어디에서부터 들어갑니까?"

요주(遼主)가 이를 의심하여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마침 영왕(寧王) 야율질목(耶律質睦, 只沒)의 처가 사사롭게 짐독(?毒)을 만들었는데, 고훈 역시 독약(毒藥)을 가지고 부마도위(駙馬都尉)인 소묵리(蕭默?, ?里)에게 먹이다가 사실이 발각되었다. 가을 7월 초하루 병인일에 야율질목은 작위를 박탈당하여 오고부(烏庫部)로 귀양 보내졌고, 고훈은 제명이 되어 동주(銅州, 黑龍江省 寧安市)로 유배 갔다.

경오일(8일)에 제주(齊州)방어사인 이한초(李漢超, ? ~977)를 운주(雲州, 연운 16주의 하나)관찰사로 하고 판제주(判齊州)103로 하여 겸하여 관남둔병(關南屯兵)을 통괄하게 하였다. 명주(?州, 河北省 永年)방어사 곽진(郭進, 922~979)은 영응주(領應州)104관찰사로 하여 판형주(判邢州) 겸서산순검(兼西山巡檢)은 예정대로 하였다

무자일(14일)에 오월왕(吳越王) 전숙(錢?, 929~988)이 사신을 파견하여 공물을 올리면서 불러서 위무하는 조치하도록 명령을 내린 것에 감사하였다. 아울러 강남국주가 보낸 편지를 올렸는데, 거기에서 말하였다.

"오늘날 내가 없어지면 다음날 어찌 그대가 있겠습니까? 밝으신 천자가 어느날 땅을 바꾸고 공훈을 준다면 왕께서는 역시 대량(大梁, 河南省 開封, 송의 도읍)의 한 명의 포의(布衣)일 뿐이요."

갑오일(20일)에 조빈 등이 신채(新寨)에서 강남국의 군사를 패배시키고 전함 30척을 노획하였다. 정언화(鄭彦華)·두진(杜眞)은 송의 군사와 만났는데, 두진이 거느리는 군사를 가지고 먼저 싸웠지만, 정언화는 군사를 움켜쥐고 구원하지 않아서 두진의 무리가 대패한 것이다.

요(遼)의 탁주(?州, 北京 ?州)자사 야율종(耶律琮, 耶律合住, 929?~979?)이 권지웅주(權知雄州) 손전흥(孫全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대략이다.

"두 조정은 처음에는 털끝만큼도 틈새가 없었으니 만약에 한 명의 사자가 말을 달려 교환하여 두 주군20의 마음을 드러낸다면 피로한 백성들을 쉬게 하고 오래도록 이웃나라가 될 터인데 역시 쉬지 않겠습니까!"

신축일(27일)에 손전흥이 야율종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올리니 황제는 손전흥에게 편지에 답을 쓰도록 하여 수호(修好)를 허락하였다.

12월에 금릉(金陵, 남경, 강남국 도읍지)에 처음으로 엄하게 경계하며 명령을 내려서 개보(開寶, 송의 연호)의 호칭을 없애게 하고 공적이든 사적이든 기록에 다만 갑술세(甲戌歲)라고 부르게 하였다. 더욱더 백성들을 모집하여 군사를 만들고 백성들로 재물과 곡식을 헌납하는 사람에게는 관작(官爵)을 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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