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이야기 나비클럽 소설선
김형규 지음 / 나비클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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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내가 발 붙고 서 있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많은 탓이다. 몇 달 전 서재 친구분께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신 것을 보고 작가도 나처럼 현실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관심이 갔다. 작년 말 희망 도서로 신청했는데 예산 때문에 잘려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 비로소 내 손에 받아들 수 있었다. 


우선 작가의 이력이 흥미로웠다. 동양사를 전공하고 러시아 현대사를 연구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사회과학 분야의 출판사를 차리기도 했다. 현재는 티셔츠를 입고 대중 교통으로 출퇴근을 하는 변호사로 일한다. 


러시아 현대사와 동양사를 공부해서인지 소설의 배경에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한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졌을 때 나처럼 어릴 때라 당시 한국의 노동계와 사회계에 일어났던 일들을 잘 모르던 사람도 이런 사실이 있었고 이런 대화가 오갔겠구나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와 ‘너’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나온다. ‘너’는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하고 질문의 대상이기도 하며 공포, 또는 연민의 대상이기도 하다. 


표제작인 <모든 것의 이야기>는 슬픔과 연민에서 시작해 이상과 희망으로 나아가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20년 대림동 수정커피호프에서는 슬픔과 외로움의 냄새가 진하게 흐른다. 나는 수정커피호프에서 일하는 탈북자 여성을 위험에서 구해준다. 나는 가난과 폭력 속에서 살아왔다.


있잖아, 내가 되게 무서운 사람이거든. 사람들은 나를 많이 무서워해. 

그런데 내가 집에만 들어가면, 들어가서 문을 닫으면, 곧바로 눈물이 막 쏟아져.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언제나 그래. 엉엉 울어. 무서운 것도 없는데 무서워서 온몸이 덜덜 떨려. 추워서 덜덜 떨려. - P24


내가 가진 것이 없고 나를 지켜주는 이가 아무도 없을 때,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를 더 강하게 다그쳐야할지 모른다(사회적 가면). 세상은 폭력과 위협이 난무하고 나를 지키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과 온종일 부딪치며 돌아온 나는 피투성이가 된다. 이럴 때는 우는 것이 나의 마음을 해소하는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2043년 화성 마오 기지에는 두 명의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은 중국의 우주본부가 핵폭격을 받고 인공위성도 격추되어 본부와 통신도 할 수 없고 지구로도 돌아갈 수 없는 고립된 상황이 되었다. 둘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아끼며 나아갈 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너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며 울음을 터뜨린다. 지구를 그리는 두 사람. 문을 열고 나아간 너. 둘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돌아갈 수 있을까.


1999년 마석 어쭈구리 테이블에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흐른다. 


우리의 꿈을 위하여!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한때나마 품었던 꿈들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쏟아낸다. 선생님, 용접공, 과일 가게 주인, 경찰관, 소방관, 사냥꾼, 가수, 우주인. 꿈은 일관성도 없이 다종다양하다. - P56


‘어쭈구리’라는 상호명을 볼 때 반가웠다. 대학 근처에 어쭈구리가 있었는데 만 원에서 이만 원이면 다양한 안주에 소주를 마실 수 있어서 친구들, 선배들과 무척 많이 갔던 기억이 난다. 대학을 다니면서 장학금을 얻기 위해 공부도 하고 동시에 돈을 벌기도 해야 했다. 당시는 IMF를 막 넘은 터라 여전히 경기는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취업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던 때였다. 그 시절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꿈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하루를 무사히 넘기길 바랐던 것 같다. 


1951년 하동군 양보면에서는 한국 전쟁이 한창이다. 

3년 간 이어진 한국 전쟁은 시시각각 전황이 바뀌었다. 인민군이 내려와 인민군의 세상이 되었다가, 얼마 후에는 국군의 세상이 되었다. 내가 알던 사람이 인민군으로 변신하고 사람들에게 평등 세상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반동분자를 가려내어 처형하는 일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곳에서 인간이란 어느 장단에 맞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간절히 그리운데 누가 그리운지 모르겠고, 그리운 누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내가 누군지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가고 싶은 데가 있는지도,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겠고, 거기 가면 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거기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뜻을 헤아리려 애써보아도 헤아릴 수 없는 부서지고 조각난 말들이었다. - P90


앞이 보이지 않는 뿌연 세상 속에서도 결국 이야기의 마지막 말은 ‘네가 문을 열고 나아간다.’이다. 희망 섞인 바람이자 주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어서 기다리면 변하는 것은 없다. 문을 열고 나아가야 무엇이든 실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림동에서, 실종>은 차별과 배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대림동’하면 떠오르는 주입식 이미지들이 있지 않나. 대림동을 가자고 하니 택시 기사가 하는 반응은 너무나 뻔하다. “그 위험한 곳에 왜 가려고 하세요?” 계속 읽고 있으려니 부끄러워서 어디에 숨고 싶어진다.


대림동은 분지예요. 아무 건물이나 옥상에 한번 올라가서 보세요. 신도림동, 신길동, 신대방동, 구로동의 고층 아파트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요. 거인의 성벽처럼요. 대림동은 아파트가 거의 없잖아요. 그래서 그 성벽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누가 뭘 하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지 못하는 거예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거죠. 제대로 된 이름도 없고요. 조선족, 중국 동포, 그런 이름들도 웃기잖아요. - P113


가난한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이 제 몫을 누리고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꼭 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런 세상으로 가는 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면 하고 싶어요.

그게 연극이지? 있잖아,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은 늘 배신당해. 힘없는 목소리였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나는, 우리가, 이겼으면 좋겠어요. 이길 거라고 믿어요. 우리가 끝까지 함께 한다면요. 그러고는 모두 말이 없어졌다. - P165


<가리봉의 선한 사람>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다. 작가가 경험한, 보고 느낀 것이 가장 많이 담겨져 있는 이야기라 생각됐다. 선한 노동자는 거지꼴이 되거나 아귀들에 뜯겨 살아남지 못한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자신의 밥그릇을 뺏는다고 생각하고 사장은 노조가 만들어지거나 노조가 목소리를 내는 것을 혐오한다. 지금은 폭력으로 할 수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방법들로 노동자를 무너뜨리게 하는 일이 많다. 


- 정규직: 청소부들이 주제를 모르고 정규직이 되려 하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우리가 취준생으로 몇 년을 고생했나

  공정하지 않아 정의롭지 않아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세상은 평등하지 않아 평등해선 안 돼 세상은 원래부터 불평등한 것

  오른쪽 공장 건물의 창문에서 누군가 얼굴을 내민다. 살집이 두툼한 사장님이다.

- 사장님: 공순이들이 겁도 없이 파업을 하려 하네

  세상 무서운 줄 몰라 백골단을 불러 묵사발을 내줄까

  하지만 나는 교양 있는 사장님 근로자를 자식처럼 사랑하지

  건전한 노조 활동을 육성하려 하네 건전한 어용노조를 육성해 - P176~177


<구세군>은 어떤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하는 이야기다. 기본 소득에 대한 이야기, AI의 등장으로 사람과 기계가 직업을 두고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일 등.

기본 소득이 실현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일하지 않을까. 일반 납세자들, 무직자들, 재벌을 비롯한 기업가들 간에 충돌은 여전하지 않을까. 지금의 굳어진 양당제가 의원 내각제로 변화할 수 있을까. 


사육되기를 거부하라. 세계는 사람의 것이다. - P222


사육되기를 거부하라는 메시지는 ‘동물 농장’을 읽었을 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과학과 기술로 환경은 무너지고 인류는 기술과 실력을 겨루어야 하는 시대가 올 지 모른다.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시간 뿐 아니라 레닌그라드, 한국 등 공간을 뛰어넘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읽고 나면 슬프고, 벅차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뒤섞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역시 읽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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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1 09: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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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1 18: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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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5 17: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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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8 2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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