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종교/신학이 지배하는 사회는 기본적으로 위계(位階=hierarchy)의 사회이다. 초월적 신들과 그들에 의해 권력을 위임받은 사제들 및 귀족들,
그리고 평민들, 그 아래에 천민들이 피라미드를 형성한다. 지중해세계에종교는 항상 존재해왔지만, 우리는 로마 제국에서 이런 위계가 점차 두드러지고 또 철학사의 흐름과 일정 대목에서 교차함을 볼 수 있다.
AD 2세기 서구사상사에는 또 한 번의 거대한 변환이 도래한다. 이흐름은 ‘스토아주의에서 플라톤주의로‘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플라톤주의는 사실상 철저히 종교적인 플라톤주의였다. - P587

지중해세계에서는 여러 형태의 일신교들이 명멸했지만, 후대의 역사를 염두에 둔다면 유대교의 일신교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유일신에 대한 표상은 매우 작은 종족이었던 유대의 문화맥락에서 점차 확대되어 후에는 지중해세계 전반, 적어도 그 절반으로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런 확장은 유대교 자체로써가 아니라 그것이 기독교의 형태로 바뀜으로써 가능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P650

기독교 서사가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데에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이런비극의 정조(情)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에게는 논리적 설득력이나 학문적 사실성, 엄밀성보다는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 (현대식으로 말해 ‘스토리텔링‘)나 감각적인 이미지 등이 더 호소력 있는 법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신학적 해석은 이런 비극성과 이율배반적 관계를 형성했다. 만일 이 모두가 신의 각본이라면, 즉 예수가 많은 고난을 겪는다해도 결국 그 모두가 ‘해피엔딩‘으로 가는 과정으로 이미 정해져 있는것이라면, 역사적 예수의 진실성과 감동은 현저하게 증발해버릴 수밖에없는 것이다. 예수의 행적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위대한 기획에의해 연출된 것일 뿐, 인간인 우리가 그것을 경모하고 사랑하고 그처럼되기를 즉 예수-되기(becoming-Jesus)를 희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 P652

사건이기를 그쳐버리는 것이다. 기독교의 정통은 그노시스학파의 SF와도 같은 예수 해석을 거부하고 보다 역사성 있는 예수상을 수립했지만,
그 상은 결국 역사적 진실성이 휘발된 신학적 예수상에 불과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이런 예수상이 아니라 깨달음과 고난과 희망으로 가득 찬, 우리 자신이 그것 ‘되기‘를 꿈꿀 수 있는 그런 예수상이아닐까.

서구에서 종교는 특정한 한 심급(審級)이지만, 이슬람세계에서 이슬람교는 모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에의해 기획되고 모색되고 성취된 것이다. 예수는 사랑받을 수 있는 인물이지만, 무함마드는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이다. 기독교가 예수의 삶에대한 추후적인 음미를 통해 그의 사후에 조금씩 형성되어간 것이라면, 이슬람교는 무함마드가 그의 생전에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알라와 무함마드의 거리는 야훼와예수의 거리보다는 물론이고 야훼와 모세의 거리에 비해서도 비교할 수없을 정도로 크다.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는 어디까지나 ‘예언자‘일 뿐이다. "신의 아들인 예수와는 격차가 큰 셈이다. - P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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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는 차이의 체계를 구성하고 분류하는 핵심이다. ‘섹스‘와 ‘젠더‘라는 용어의 복잡한 분화와 융합과정은 이 단어들의 정치적 역사의 한 부분이 된다. ‘섹스‘와 관련되었던 의학적 의미들은 20세기를 통과하면서 영어에서는 점진적으로 ‘젠더‘에 축적된다. - P235

엥겔스는 계급과 국가 사이의 매개적인 구성체로서 가족을 최우선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성별의 구분을 분리하여 고려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적대적인 구분에 포함시켰다[카워드(Coward), 1983]‘ 가족 형태의역사적 다양성과 여성의 종속이라는 문제의 중요성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연스러운 이성애를 토대로했기 때문에 섹스와 젠더를 역사화할 수 없었다. - P238

여성을 자연의 범주에서 벗어나, 문화적으로 구성되고, 역사적으로 자기 구성적인 사회적 주체로 자리매김하려는 정치적·인식론적 노력 중에, 젠더의 개념은 생물학적 섹스의 오염으로부터격리되는 경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종속적인 존재로 출현한다고 주장하는 ‘나쁜 과학‘을 제외하고는, 무엇을 섹스 혹은 여성으로 간주하여 구성할 것인가라는 진행 중인문제는 이론화하기 힘들어졌다. ‘생물학‘은 개입에 열려 있는 사회적 담론이라기보다 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 P243

섹스-젠더 체계의 보편화 권력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분석적인 분열은 유럽-아메리카 페미니즘의 자민족중심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경향의 일부로서 특히 유색 여성들로부터치적으로 신랄하게 비판받았다. 젠더 범주는 그 밖의 모든 ‘타자들‘을 모호하게 하거나 혹은 종속시켰다. 하나의 ‘제3세계 여성(Third World Woman)‘을 특징짓기 위해 서구의 혹은 ‘백인‘의 젠더 개념을 이용하려는 노력은 오리엔탈리즘, 인종차별주의, 식민주의 담론을 재생산하는 결과를 종종 초래했다 [모한티(Mohanty),1984; 아모스 외(Amos et al), 1984]. 게다가 미국 ‘유색 여성‘ 자체의 섹스화된 정체성은 복잡한 다툼을 통해 정치적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위계적인 차이의 생산 체계에 대한 비판적인 이론을 산출했다. 그런 생산 체계 속에서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그리고 1960년대 시민운동과 반전운동으로부터 출현했던 여성운동초기 시절부터, 인종, 국적, 섹스 계급 등은 서로 얽혀 있었다. "여성들의 사회적 입장성에 관한 이런 이론들은 ‘총칭적인‘ 페미니스트 이론에 토대를 제공하고 조직했다. - P261

젠더, 인종, 계급에 대한 의식은 가부장제, 식민주의, 자본주의라는모순적인 사회 현실을 겪어 온 우리의 비참한 역사가 강제로 떠안긴 성과다. 그렇다면 내 화법에서는 누가 ‘우리‘로 간주되는가?
‘우리‘라는 강력한 정치 신화를 정초하는 정체성은 무엇이며, 이모임에 들어오고 싶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 있을 법한 단층선은모조리 따라 (여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페미니스트들이 고통스럽게 분열되면서, 여성들 사이에 자행되는 각종 지배의 기반을 정당화하는 변명이 되어 온 여성의 개념을 규정하기 어려워졌다. 나자신, 그리고 나와 비슷한 역사적 위치(백인, 전문직, 중산층, 여성, 급진 정치, 북미, 중년의 신체)에 있는 사람들 상당수에게 정치적 정체성이 위기에 처하게 만드는 근원은 너무나 많다. - P282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페미니즘이 본질화하는 것은 노동의 존재론적 구조, 혹은 그 유비물인여성의 활동이다. "내가 볼 때 이 입장을 취할 경우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마르크스식 인본주의를 계승하면서 너무나 서구적인자아를 함께 물려받게 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페미니즘의 경우에 문제는 단일한 여성이라는 실체와 같은 것이 있다는 식으로 자연화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입장은 여성들을하나로 단결시키기 위해 현실의 여성들이 일상에서 감당하는무를 강조했고, 이와 같은 공식화를 통해 페미니즘에 기여했다. - P288

여성들이 실제로 처한 상황은 지배의정보과학이라는 생산/재생산과 커뮤니케이션의 세계 체제 속으로 통합/착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 일터, 시장, 공적 영역, 몸 자체, 이 모든 것이 거의 무한한 다형적 방식으로 분산되고 인터페이스로 접합될 수 있다. 이 과정은 여성과 다른 이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사람마다 대단히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렇기에 이에 대응하는 국제적 저항운동을 만들어 내기가무척 힘들어지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이와 같은운동이 절실하다. - P297

새로운 경제적, 기술적 배치는 복지국가의 붕괴, 그리고 여성에게 본인뿐 아니라 남성, 아이, 노인의 일상까지 챙기라는 주문이 점점 강해지는 것과도 관련된다. 복지국가가 해체되는 과정에 안정된 직장을 예외로 만드는 가사경제에 의해 산출되고, 여성임금은 자녀 부양을 위한 남성 임금과 같을 수 없다는 기대로 지탱되는 빈곤의 여성화(feminization of poverty)는 긴급한 관심의대상이 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여성 가장 가구가 생겨나는 원인은인종, 계급, 섹슈얼리티의 함수다. 하지만 이 추세가 일반화되면서 여성 연대의 기반이 다양해졌다. 여성들에게 어머니라는 지위를 강요해 온 현실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결과, 여성이 일상을 지탱하는 역할을 으레 맡게 되는 현상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자본주의적이며 갈수록 전쟁 의존적인 경제와 통합되는 현상 자체는 새롭다. - P303

사이보그는 부분성, 유동성, 때로는 성과 성적 체현의 측면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젠더는 심오한 역사적 폭과 깊이를지녔어도, 결국에는 보편적인 정체성이 아닐 수도 있다. - P326

사이보그 젠더는 글로벌한 복수를행하는 로컬의 가능성이다. 인종, 젠더, 자본은 전체와 부분에 대한 사이보그 이론을 요청한다. 사이보그에게는 총체적 이론을산해 내려는 충동이 없지만, 경계 및 경계의 구성과 해체에 대한개인적 경험은 있다. 파급력 있는 행위를 위해, 과학기술에 대한하나의 관점과 지배의 정보과학에 도전하는 하나의 방법을 하나제시할 정치적 언어가 되기를 기다리는 신화 체계가 있는 것이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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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3-25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휴 저 이제 퇴근하는데요. 퇴근길에 저도 이 책 또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화이팅!!
 

18세기 후반에서부터 19세기 초반에 형성되었던 초기의 공식(formulation) 이후로, 생물학에 관해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생물학이 기원에 관해, 창세기에관해, 자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근대 페미니스트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가부장제적 목소리로부터 물려받았다. 생물학은 아버지의 말에 의해 잉태되고 창시된 생명과학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부계로부터 지식을 전수받았다. 그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자 갈릴레오의 말이며, 베이컨의 말이고 뉴턴의 - P128

말이자, 린네의 말이고, 다윈의 말이었다. 반면 육신은 여성의 것이었다.! 그리고 말씀은 자연스럽게 육신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젠더화되어 왔다(engendered). 샌드라 길버트(Sandra Gilbert)와 수전 구바(Susan Gubar)는 19세기 여성작가들을 연구하면서,
목소리를 구성하고, 권위를 가지고, 텍스트를 저술하고, 이야기를말하고, 말씀을 출산하려고 애쓴 여성들의 노고에 관해 논의한다.
저술한다는 것은 창시하고 이름 짓는 권력을 갖는 것이다. 글쓰기와 말하기를 배워야만 했던 우리의 자매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연과학적 지식을 생산하고자 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합법적권위를 부여받았던 텍스트인, 자연의 책(book of nature)을 읽어내야만 했다. - P129

남아 있는 유일한 문제는 우리가 다양한 목소리로 여기서, 무엇을말하느냐는 것이다. 다시 시작하기 위한 목소리 하나를 여성은생물학을 바라본다』의 후기가 제공한다.
남성 인간/자연의 안티테제는 인간에 의해 발명되었다. 우리가 할 일은 자연과 더불어 인류의 통일성을 실현하게(현실화한다는 말뜻 그대로) 될, 그리고 내부로부터 이해하게 될 관계를 재발명하는 것이다. (...) 과학은 인간의 자연 지배가 긍정적이고 가치 있는 목표처럼 보였던 특정한 역사적 조건 아래 출현했다는 점에서 인류의 구성물이다. 그런 조건들은 변했고 우리가 여행하고 있는 그 길이 자연을 설명하고 향상시키기보다 파괴하기 쉬울 것이라는 점을 이제는 알고 있다. 여성들은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의 운명은 제대로 보살펴 주지 않았던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는 점을 남성들보다 훨씬 더 빈번히 인정해 왔다. 이제 우리는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실천해야 한다. (허버드 외, 1979) - P145

생물학의 규칙을 탈신비화하는 것이 내게는 중요해 보인다.
자연은 구성되고 역사적으로 구축되지, 화석 지층이나 열대우림에서 헐벗은 형태로 발견되지 않는다. 자연은 논쟁 대상이며, 여성은 그 싸움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일부 여성에게는 과학적인이야기의 저자가 될 수 있는 사회적 권위가 있다.

여성 학자를 포함한 많은 영장류학자들은 젠더가 자연과학의 내용을 물리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결과는 형편없는 과학이라고 일컬어지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증거가다른 해석을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젠더는 관찰에서 피할수 없는 조건이다. 계급, 인종, 국가도 마찬가지다. - P192

여성 과학자들이 남성에 비해 더 착하거나 심지어 더 자연적인 이야기를 생산해 내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과학이라는 규칙의 안내를 받은 사회적 학문을 공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들은 규칙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구체적인 여성의 삶 속에서 훈련된 에너지를 사용하는 평범한 문제인 것이다. 과학적 이야기의 질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 비교 설화들의 의미를 향한 의무, 모델의 지위를 책임질 의무는 다면적이고 신비롭지 않으며 과학의 ‘내부‘와 ‘외부‘에 있는 평범한 여성들에게 잠재적으로 열려 있다. 과학을 만드는 사회적 과정을 무시하고, 그 과정에 참여하는 데 실패하고, 과학적 작업의 결과만을 사용하거나 오용하는 태도는 무책임하다. 나는 현재의 역사적 조건속에서 여성, 양육 그리고 남성의 전쟁으로 얼룩진 오염에서 자유롭다고 주장되는 다른 무언가를 이상화하는, 자연에 대한 반과학적 설화를 추구하는 것은 책임감이 훨씬 덜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 P193

포함과 배제는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혹은 국적과 같이 고정된 범주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픽션 읽기라고 일컬어지는 고도로 정치적인 실천을 통해 생산된 포함과 배제, 동일시와 분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구에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읽기 자체 속에서 생산된다. 모든 읽기는 잘못된 읽기이자, 다시 읽기이며, 편파적인 읽기이자 강제적읽기이며 상상된 텍스트의 읽기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원래부터궁극적으로 그냥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세계가 원래부터 무너져 있었던 것처럼, 텍스트는 이미 언제나 서로 경합하는 실천과 희망으로 뒤엉켜 있다. 여성 의식을 표시한 당대의 지1도 위에서 대단히 특수하고 순수하지 못한 지역적/지구적, 개인 - P224

적/정치적인 우리의 위치에서 비롯된, 이들 각각의 읽기야말로교육적 실천이다. 그런 실천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여성 경험‘이라는 막강한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권력으로 충전된 차이, 특수성, 친화성이라는 호명을 통해 작동한다. 만회 불가능한 하나라는환상의 상실은 차이 속에 자리한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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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로마 시대가 점차 진행되면서 철학은 양극으로 갈라졌다.
이 시대는 전통적인 공동체의 정체성이 무너지면서 ‘개인‘이라는 존재가 등장한 시대였다. 이 개인은 두 가지 상반된 방향으로 나타났다. 그하나는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접고서 내면으로 또는 작은 ‘우리‘로 움츠러든 개인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에는 금기시되었던 초월적 권력의 화신을 추구한 개인이었다. 전자는 디오게네스와 에피쿠로스로 상징되는이 시대의 상당수 사상가들에게서 볼 수 있고, 후자는 알렉산드로스, 로마의 군벌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로마 황제라는 존재로서 구현되었다.
이에 따라 철학 역시 양극화된다. 한쪽에는 소집단에 안주하면서 심리적평정을 꾀했던 철학 학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거대 권력에 봉사하면서 통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던 어용 철학자들-물론 현대적 의미와는 다른 의미이지만 이 있다. 어느 형태가 되었든, 이는 그리스 민주정과 로마 공화정에서의 철학/철학자에 비한다면 전락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 P582

헬레니즘 - 로마 시대의 다른 철학들과는 달리 스토아철학은 수준 높-
은 논리학적 사유와 자연철학적 탐구를 보여주었고, 그 바탕 위에서 특히 윤리적 문제들에 천착했다. 이 점에서 그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은 세 번째의 위대한 철학 체계였다. 나아가 그것은 특히 지중해세계의 운명을 결정한 로마라는 거대한 힘을 떠받쳐준 정신적 기둥이기도 했다. 전문적인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로마의 지도급 인사들의 상당수가 스토아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사에서 진정으로 군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장교들도 대개 스토아주의자들이었다. 광폭했던 로마이지만 스토아철학이 그것을 굳게 받쳐주었던 것이다. 철학 자체로서는쇠락한 이후에도 그것은 지중해세계의 주요 가치로서 남았으며, 오늘날까지도 서구 사유의 한 성취로서 이해되고 있다. - P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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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 많은 대화편에서 전개했던 이야기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가어렵다. 철학의 거의 모든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고, 대화편마다 다양한 주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게다가 그의 사유 자체가 계속 변모를겪어나갔으며, 때때로 모순된 이야기들까지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의 대화편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나는, 그래서 그의 사유 전반을 꿰고 있다고 생각되는 테마가 존재한다. 바로 ‘이데아론‘이다. 이데아론이라는플라톤의 존재론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그의 사유를 비로소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P252

플라톤 자신은 그가 "형상(相)"(‘idea‘ 또는 ‘eidos‘라는 말을 썼다)이라 부른 이런 존재의 차원이 실재한다는 가설을 제시했으며, 더 중요하게는 그러한 차원이 우리가 감각으로 확인하는 현실적차원보다 더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후에 등장하는 이런 유형의생각들 모두에 ‘플라톤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 감각을 넘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이성‘의 존재와 이성의 파악 대상인 ‘본질‘의 실재성을 믿는 각종 유형의 철학들은 모두 플라톤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해 플라톤은 "이데아들이 존재한다"고 응했고(본질주의 존재론), "존재한다 해도 알 수가 없다"에 "이성이 알 수 있다"고 응했으며(합리주의 인식론), "알 수 있다 해도 전달할수가 없다"에 "우리 모두는 이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응한 것이다(보편주의 윤리학). 플라톤이 최초의 위대한 ‘철학 체계‘를 세웠다는 것은 바로 이 점을 뜻한다. 이후에 전개되는 서양 철학사에서 누구도 이 플라톤적 울림에 귀를 막을 수가 없었다. - P254

플라톤 철학 전체를 관류하는 문제의식은 ‘가짜‘에 대한 경계심과 그반면으로서 진짜를 가려내려는 열정이었다. 그의 사유는 가짜가 판을치는 그리고 오히려 진짜는 핍박받는 현실에 대한 의구심과 환멸에서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유는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려는, 사물들에 상이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함으로써, 달리 말해 사물들을 존재론적 위계(ontological hierarchy)에 따라 분류함으로써 진품을 가려내려는 열망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의 사유 전체는 모방(‘미메시스‘) 개념에 의해 추동되고 있으며, 모든 구별, 평가의 기준으로서 제시된 것이 바로 이데아 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데아를 얼마나 잘 모방하고 있는가가 그 사물의 존재론적 위상을 판별할 수 있게해주는 기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 보기에 사람들이 사물들의 실재, 진상(眞相)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감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 P341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음으로 학문을 분류했으며 그 각각에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비로소 ‘학문의 체계‘를 만들어냈다.
그가 분류한 학문 체계는 그 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많은 변이를 겪게 되지만 그 근본 구도는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학문을 분류한 후 그 분야 하나하나에 대해 저작을 썼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의 제목(또는 관련어) 자체가 바로 그 학문 분야의 이름이 되었고, 그의 학문 체계가 바로 학문의 체계가 되었다. - P353

사유의역사를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지성과 논리를 넘어선다는 상당수의 시도들이 진정한 철학적 도약을 이루기보다는 반지성주의적 폐해들로 흐르곤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다른 한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잘 보여주었듯이 이성/지성은 그 한계에 갇힐 때 얄궂게도 비이성적/비합리적인 폭력으로 흐를 수 있다. 때문에, 앙드레 랄랑드가 특히 강조했듯이, 진정한 이성/지성은 항상 스스로의 한계를 비판하고 초월해가는 이성/지성이어야 한다. 자체의 한계에 갇힌 이성도 또 그것을 빗나간 방식으로 초월하려 하는 반(反) 이성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은 이 모든 문제들의 중심축이다. 이 텍스트들이야말로 한편으로 기성 사유의 한계들을 돌파해나가려는 진지한시도들이 출발해야 할 지점이고, 또 온갖 형태의 반지성주의적 사조들을 그것으로 데려와 보어야할 지점일 것이다. - P396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질료 및 시간과 떼어서는 의미를 상실하는, 플라톤의 형상과 성격을 달리하는 실체이다. 그러나 현실태로서의 형상이 잠재태로서의 질료를 이끌어가는 목적론적 구도는 그가 결국 플라톤을 잇고 있다는 점을 다시한 번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형상과 질료가 오로지 형식적으로만 구분되는 이원적 일원의 세계이며, 질료의 잠재성을 형상이 이끌어가는 목적론적 세계이다. 그리고 이런 존재론은 무엇보다 생명체들의세계에서 두드러지게 확인된다. 그의 존재론은 근본적으로는 플라톤을잇고 있지만, 보다 경험주의적이고 유기체주의적인 색채를 통해서 새롭게 재구성된 플라톤주의인 것이다. - P440

인간의 인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이 물음은 곧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식물에게도 다른 동물에게도 없는 것,
인간에게만 있는 것, 그것은 곧 이성(‘로고스‘)이다. 인간의 핵심적인 능력은 곧 이성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 맥락에서 본다면 인간이 그이성을 현실적으로 발휘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성 또는 이성을갖춘 영혼이야말로 인간의 아레테이며 인간의 아레테를 발휘하는 것이행복이라면, 행복이란 결국 "이성을 발휘하는 실천적 삶", "이성에 따른영혼의 활동", "인간다움/인간적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최고선/행복이란 가장 인간다운 것 즉 이성에따라 실천하는 삶이다. - P447

플라톤에게 당대 현실은 어떻게든 극복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BC 399년)을 전후한 그리스의 상황은 그가 꿈꾸었던이데아의 차원과는 대극에 있는 현실이었다. 그에게 이데아란 이 현실을그쪽으로 변화시켜가야 할 방향/목적이었고 현실의 타락을 비추어주는시금석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은 현실의 사물들에 내재해 있는 것이고, 그것들을 좀더 완성된 형태로 끌어주는 동력이었다. 그리스 문명의 가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는 아테네에서 ‘이방인‘이었다. 때문에 그 자신 인생에서 몇 차례의 굴곡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현실을 긍정하면서 거기에 보다 높은완성도를 부여하려는 안온(安穩)한 눈길이 존재한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윤리학이 매우 세련되고 균형 잡힌 사유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그의 정치학은 당대에 새롭게 도래하던 기운(氣運)들에 무척이나 둔감할 수밖에 없었다. - P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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