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시간은 따라서 전체사의 상층구조의 작동과 관련을 가진다. 그상층구조는 아래층에서 작용하는 힘들이 창조하고 부양해준 결과물이지만,
동시에 그 무게가 아래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장소와 시대에 따라서 이러한 아래에서 위로의 움직임과 위에서 아래로의 움직임의 중요성이 변화한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지역에서도 세계의 시간이 모든것을 다 책임지지는 못한다. - P17

세계경제는 지구 전역에 걸쳐 있다. 시스몽디가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전지구적인 시장 또는 "함께 교역을 하여 오늘날에는 일종의 단일시장을 형성한 인류 전체, 또는 인류의 어느 부분 전체를 가리킨다. 세계-경제(이 말은 사실 어색하고 프랑스어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표현으로예전에 내가 독일어의 ‘벨트비르트샤프트[Weltwirtschaft]의 번역어를 찾을 때그다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달리 나은 표현이 없어서 만든 말이다)는 우선 지구의 일부분에만 관련된 말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경제적으로 독자적이며, 핵심적인 것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고, 내부적인 연결과 교역이 유기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단위를 가리킨다. - P26

세계(또는 세계경제) 차원의 분업은 매번 동등한 파트너 사이에서 조화롭고수정 가능한 협약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결정한 종속관계의 연쇄로서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불평등 교역은 세계의 불평등을 낳고 반대로 세계의 불평등은 끈질기게 교역을 창출한다. 불평등 교역과 세계의 불평등, 이 두 가지는 모두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현실이다. 경제라는 카드놀이에서는 다른 것보다 더 나은 패들이 언제나 존재했으며 때로는 속임수가 개재되기도 했다. 어떤 활동은 다른 활동들보다 더많은 이윤을 가져다준다. - P62

세계-경제야말로 같은 가격진동이 일어나는 가장 넓은 공간으로서, 이것은 단지콩종크튀르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심층에서는 그리고 어느수준에서는 그 콩종크튀르를 만드는 곳이다. 세계경제는 광대한 공간 속에서 가격의 단일성(unicité)을 만든다. 그것은 마치 동맥계가 몸 전체로 피를전달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구조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로 남는 것은 내가 언급한 것처럼 일치를 보인다고는 해도, 장기추제가 이런 공명(共鳴) 구역을 잘 나타내는 지수인지의 여부이다. 나는 세계-경제라는 광대하지만 어쨌든 유한한 공간이 없다면 장기적인 변동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여기에서의 이 장기적인 진동이 콩종크튀르라는 복합적인 흐름을 만들었다가 깨고 다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P114

새로운 유럽의 시작과 관련해서는 사실 이 두 복합체의 성장을 살펴보아야 한다. 북쪽과 남쪽,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북해-이곳으로 합류하는 발트 해까지 포함하여ㅡ와 지중해 전체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서유럽은 하나의 "극"이 아니라 두 개의 극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9-10세기에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직 완전히 모양이 굳어지지 않은 유럽의 여러 활동들을 재료로 삼아 광범위한 두 개의 지역경제가 서로 독립적으로 형성되어갔다. 북쪽에서는 이 과정이 빨리 이루어졌다. 사실 이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주변지방은 신생지역 또는차라리 원시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찬란한 과거의 역사를가진 지중해 지역에서는 뒤늦게 갱신이 이루어졌으나 대신 그후에는 더 빠르게 진보했다. 특히 이탈리아의 팽창에 이슬람과 비잔티움이 가속화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북쪽은 남쪽에 비해서 덜 복잡하고 상대적으로 더 "산업적"이었던 반면, 남쪽은 더 상업적이 되었다.

이 둘 사이의 연결은남북 간의 여러 육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13세기의 샹파뉴 정기시는 그중 괄목할 만한 첫 번째 성과이다. - P133

베네치아의 경제적 풍토는 따라서 아주 독특했다. 상업활동은 전반적으로 대단히 활력이 넘쳤지만 그것은 무수히 많은 소규모 사업으로 나뉘어 행해졌다. 장기간 지속되는 회사인 콤파니아(compagnia) 몇몇이 등장하기는했으나, 피렌체식의 거대주의는 결코 이곳에서 적합한 토양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정부이든 도시귀족 엘리트이든 피렌체에서처럼 도전을 받는 일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베네치아는 안전한 곳이었다. 달리 말하면 일찍이 유복한 삶에 푹 빠진 상업활동은 이미 검증된 전통적인 방법에만 만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래의 성격 역시 하나의 원인이 된다. 베네치아에서 상업은 무엇보다도 레반트 무역을 의미했다. 이것은 분명히 막대한 자본을 요구하는 상업이므로 베네치아의 거대한 화폐자본이 여기에 투입되어서 시리아로 갤리 선단이 떠나고 나면 도시 내에 현찰이 문자 그대로 바닥나는 정도였다. 이것은 나중에 서인도로 선단이 떠난 후에세비야에서 일어났던 현상과 비슷했다. 그러나 자본의 순환은 제법 빠른편이어서 6개월 혹은 1년 정도면 회수되었다. 그래서 선박의 왕복이 이 도시의 모든 활동에 리듬을 부여했다. - P183

아프리카 대륙과 대서양 연안의 여러 섬들에 대한 정복은 주로 포르투갈의 작품이었다. 그렇지만 제노바인과 피렌체인(그리고 아조레스 제도의 경영에 관해서는 플랑드르인 역시)도 여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지중해 동부부터 시칠리아, 남부 스페인, 모로코, 포르투갈의 알가르브 지역 그리고마데이라와 카보베르데 제도 등지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널리 퍼뜨린것은 제노바인 덕분이었다. 더 훗날 카스티야인이 정복한 카나리아 제도에사탕수수가 도입된 것도 이와 비슷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포르투갈의 발견의 정점인 바스쿠 다 가마의 주항이 "제노바인들에게 하나도 빚진 것이 없다"는 렐프 데이비스의 말이 사실이라고해도, 리스본에 정착해 있던, 혹은 그곳에 자주 들르던 이탈리아, 남부 독일, 네덜란드 등지의 상인들이 이 상업적 성공에 두루 연관되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포르투갈이 인도 방향으로 노력을 경주한 - P198

결과 아메리카를 놓치는 대가를 치렀다는 점이다. 아메리카라는 이 보물은거의 이들의 수중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포르투갈 국왕과 그의 보좌관들에게 제안한 여행이 그들에게는 몽상적으로보였다. - P199

안트베르펜의 해결책은 브라반트 정기시들에서 행해지던 방식들을 응용한 아주 단순한 것들이었다. 차변과 대변, 양방향으로의 지불 모두 채무증서(cédule obligatoire), 즉 약속 어음으로 해결했다. 이것은 한 상인이 서명을 함으로써 정해진 시기에 일정한 금액을 갚기로 하는 증서로, 나중에이 증서를 지참한 사람에게 실제로 그 금액을 지불한다.
채권과 채무가 이렇게 서로 상쇄되는 방식이 바로 청산(스콘트로 [scontro], 클리어링 [clearing], 콩팡사시옹[compensation], 혹은 네덜란드에서 말하는 레스콘트레[rescontre])의 비밀이다.
하나의 어음이 여러 사람들 손을 거치면서 유통되다가 마침내 이 어음을 처음에 발행했던 사람 자신이 다른 채권의 지불용으로 이것을 받게 될 때 드디어 이 어음은 사라진다. 이와 같은 배서(endossement) 기능을 보장하기 위해서 소환(assignation)이라는 오래된 관행이 일반화되었다. - P214

제노바의 부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은에 기대는 것보다 더 큰 정도로 이탈리아 자체의부에 근거하고 있었다. 피아첸차 정기시라는 강력한 체제를 통해서 이탈리아 도시들의 부는 제노바로 이끌려 들어갔다. 제노바인이든 타지인이든 수많은 소액 대출자가 아주 적은 보상만을 받고 그들이 저축한 돈을 은행업자에게 맡겼다. 이렇게 스페인의 재정과 이탈리아 반도의 경제는항시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마드리드 정부의 파산은 매번 큰 충격을 가져왔다. 1595년의 파산과 같이 파장이 큰 경우 베네치아의 예금주와 대출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동시에 베네치아 내에서도 조폐국에거액의 은을 제공했던 제노바의 대상들이 환업무와 해상보험 업무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탈리아의 다른 활기찬 도시들에 대해서 연구해보더라도 아마 이와 비슷한 결론을 얻게 될 것이다. 사실 제노바가 그런 게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이 제노바를 그런 수준으로유지시켜주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어느 정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 P2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馮異가 관중을 다스려서 출입한 지 3년 만에 上林苑이 도읍을 이루었다.
어떤 사람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馮異의 위엄과 권세가 지극히 중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咸陽王이라고 부릅니다." 하였다. 황제가 이 글을 馮異에게 보이자, 馮異가 두려워하여 글을 올려 사례하니, 조서로 답하기를 "장군은 우리 국가에 있어서 의리는 군신간이요 은혜는 부자간과 같으니, 어찌 의심하고 혐의하여 두려워하는 뜻이 있는가?" 하였다. - P2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유일(25일)에 황제가 재상에게 말하였다.
"듣건대 조정에는 서로 사귀며 붕당을 만들고 서로 헛된 칭찬을 하면서 빨리 승진하여 쓰이기를 구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들뜨고 경박한 풍조는 자라게 해서는 안 될 것이요."
마침내 조서를 내려서 경고하고 어사대가 이를 규찰하도록 명령하였다.

경서전운부사·태상박사·직사관인 미산(眉山, 四川省 眉山) 사람인 주태부(朱台符, 965~1006)가 말씀을 올렸다.
"폐하께서 천명을 받으시고 사물과 더불어 다시 시작하는데, 이계천에게 절월(節鉞)을 수여하고 여환(黎桓)에게 왕작을 덧붙여 주고68 모두 사자에게 명령하여 그 지역을 진무(鎭撫)하시었지만 오직 저 거란만이 아직 악택(渥澤, 은택)을 입지 않은 것은 왕도(王道)가 치우침이 없게 한다는 까닭이 되지 않습니다. 신은 어리석으나 마땅히 이때를 이용하여 문무에 재주와 지략을 가지고 변경에 관하여 아는 인사를 선택하여 한 명의 경개(耿介)한 신하로 삼으시어 제위(帝位)를 이으시고 상복(喪服)을 벗고69 나서 예(禮)로서는 마땅히 수호(修好)하여야 합니다. 그들과 더불어 전에 있었던 악연을 다 버리고 다시 옛날의 맹약을 찾아 회복하여 재화(財貨)를 가지고 이롭게 하고 관시(關市, 국경무역)를 허락하여 태조시절의 고사(故事)처럼 하여서 두 나라가 이미 화평하게 되면 북쪽을 돌아보는 걱정거리가 없게 되고 오로지 서쪽에 힘을 쓸 수 있으니 이계천은 마땅히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고 손을 맞잡을 것인데 이는 한 번 거동(擧動)하여 두 가지를 얻는 것입니다."

경인일(7일)에 유사에게 조서를 내렸다.
"역역(力役)하는 것 가운데 명목이 없는 것과 영선(營繕)을 하는 것 중에 급하지 않은 것은 모두 이를 철폐하라."

"이들은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 아니고 단지 스스로 승진하고자 하는데 그치고 있으니 마땅히 견책하여 이를 경계해야 하오."
이항이 나아가서 말하였다.
"조정에서는 최근에 언로(言路)를 열었는데 만약에 말한 것이 이치에 맞는다면 의당 표창하고 상을 주어야 하며 아니라면 조정에 남겨 두면 됩니다. 하물며 신 등은 재주에 맞지 않게 태보(台輔, 재상)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만약에 파직되거나 면직된다면 마침내 일을 말한 사람이 조정에 보충함이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경을 정말로 어른 같은 사람이요."

병자일(24일)에 황제가 보필하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일반 관리 가운데서 재간에서는 모자람이 없는데 덕행을 물어 보면 그에 적당한 사람이 아주 적다. 무릇 덕(德)이란 모든 행동의 근본이며 덕을 실천한 집안에는 반드시 충신과 효자가 있을 것인데, 어찌 덕행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그 충성과 효도를 온전히 할 수 있겠는가? 또 일반 관리가 관장하는 업무는 대부분 제대로 처리하지 아니하면서 다른 부문의 이해를 주워들어가지고 진급하려고 도모한다. 만약에 스스로 본래의 부문을 잘 처리할 수 있다면 모든 직책이 엄숙하게 하지 아니하거나, 또 어찌 정사(政事)가 굽어지고 더러워 질 것을 걱정하겠는가?"

장영이 말하였다.
"전당(錢唐, 浙江省 杭州市)지역에는 10만 가구가 있는데 굶주린 사람이 8만~9만이니 만약에 소금을 가지고 스스로 살아가지 못하여 어느 날 벌 떼처럼 일어나서 도적이 된다면 그 걱정거리는 깊다. 가을까지 기다리게 되면 마땅히 옛날 법을 준용하게 될 것이다."

일찍이 조서를 내려서 백성들이 거마하(拒馬河)86를 건너서 거란에 가서 말을 사는 것을 허락한 일이 있는데, 하승구가 말하였다.
"연변전도사(緣邊戰櫂司)87는 도하(淘河)88에서 니고해구(泥姑海口)89까지는 굴곡(屈曲)으로 9백여 리 정도인데, 천연적으로 험하고 굳어서 정말로 지리적으로 이로운 곳입니다. 태종께서는 28개의 채(寨)90에 125개의 포(鋪)를 설치하고 정신(廷臣) 11명과 수졸 3천 명에게 명령하여 배 1백 소(?)를 거느리고 왕래하면서 순찰하고 경계하여 간사함을 막아 완급으로 대비하였으니 대단한 요해처입니다. 지금 공사(公私)의 무역을 허락하여 주시어서 사람과 말이 바꾸어 물을 건너게 하는 것은 대단히 편리하거나 마땅하지 아니합니다. 만약에 그러하다면 채(寨)와 포(鋪)는 헛되이 설치한 것이 됩니다."
황제는 그 말을 받아들여서 바로 전에 내린 조서를 중지시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제가 도착하기 전에 陳俊이 耿에게 이르기를 "劇縣의 오랑캐 군대가강성하니, 우선 營門을 닫고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上이 오시기를 기다려야합니다." 하였다. 耿이 말하기를 "大駕가 장차 이르실 것이니, 신하들은 마땅히 소를 잡고 술을 걸러 百官을 대접하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저 오랑캐 - P271

를 君父에게 남겨 드리고자 하는가?" 하고는 마침내 출병하여 크게 싸워서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하여 다시 대파하니, 張의 군사 중에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도랑에 모두 시신이 가득하였다.
耿은 張가 곤궁하여 장차 후퇴하려 할 줄을 알고는 미리 左 右을설치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는데, ㅅ定(오후 10시경) 때에 張가 과연 군대를이끌고 떠나가자, 耿은 다시 매복했던 군대를 일으켜 크게 공격해서 추격하여鉅가에 이르니, 8, 90리에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졌으며,輜重車2천여 대를 거두어 얻었다.
張가 劇으로 돌아간 뒤 며칠 만에 車駕가 臨淄에 이르러서 직접 군사들을 위로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크게 모였다. 황제가 耿에게 이르기를 "옛날 韓 歷를 격파하여 기반을 닦았는데, 지금 장군이 阿를 공격하여자취를 드러냈으니, 이는 모두 齊나라의 서쪽 지역이다. 功이 충분히 서로 비견할 만하고, 韓信은 이미 항복한 齊나라를 습격하였는데 장군은 홀로 강한敵을 함락시켰으니, 그 功이 韓信보다 더 어렵다. 또 옛날 橫이 酈生(食其)을 삶아 죽였는데, 田橫이 항복하자 髙帝는 衛尉(食其의 아우 商)에게명하여 원수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張가 전에 伏隆을 죽였으나만약 張가 귀순해 온다면 내 마땅히 大司徒(伏隆의 아들 伏湛)에게 명하여그 원한을 풀게 할 것이니, 또 일이 더욱 서로 비슷하다. 장군이 지난번 南陽에 있을 때에 이 큰 계책을 세웠는데 나는 항상 소활하여 부합하기 어렵다고여겼으나 뜻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일이 끝내 이루어지는군요" 하였다. - P2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시에 경조(京兆, 西安)의 지독한 도적인 초사(焦四) 등이 수백 명을 불러 모아 살고 있는 백성들을 겁탈하고 노략질 하며 삼보(三輔, 西安)지역에 해(害)를 끼치자 황제는 상을 내걸고 불러 모집하면서 사형시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기다렸다. 초사 등은 죄를 받게 해달라고 하면서 스스로 귀부하니 각기에게 금포(錦袍)·은대(銀帶)·의복(衣服)·민전(緡錢)을 하사하고 나란히 발탁하여 용맹군사(龍猛軍使)로 삼았다.

황제는 다시 사자를 파견하여 요(遼)에 가서 화의(和議)를 약속하게 하였지만 〔요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람을 모집하여 바다에 배를 띄워 여진(女眞)과 오실(烏實) 등의 부족에게 뇌물을 주면서 그를 배반하게 하였지만 두 부족은 좇지 않았다.

정축일(28일)에 황제는 촉(蜀)지역에서의 도적 떼가 점차 평정되어가자 조서를 내려서 자기에게 죄를 주었다. 애초에 한림학사인 전약수에게 명령하여 조서의 초안을 잡게 하였고 이미 완성되어 황제에게 올리니 황제는 붓으로 친히 몇 글자를 지워버려서 모든 허물을 끌어안는 것이 깊고 절실하였다. 그것에서 대략 말하였다.
"짐은 마땅하지 않은 사람에게 위임하였고 이치를 밝히는 것도 밝지 아니하여 저들 백성과 가까이 하는 관원(官員)이 은혜와 화합으로 정치를 하지 못하는데 이르게 하였다. 관각(??, 전매)의 관리는 오직 각박하게 깎아 내는 것만을 공로로 생각하여 나의 증민(蒸民, 많은 백성)을 어지럽히게 되자 일어나서 미친 듯이 노략질하였다. 이렇게 덕정(德政)을 잃은 것을 생각해 보니 이리하여 힘써 자신에게 책임 지우는 것이다. 고쳐서 다시 설립하는데, 영원히 전의 폐단을 거울로 삼아 지금부터 이후로는 아마도 경계(警戒)함을 줄 것이다!"

요(遼)의 초토사(招討使)인 한덕위(韓德威, 942~996)가 수만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진무(振武, 內蒙古 呼和浩特市 大靑山南麓)에서부터 남침하였는데 영안(永安, 四川省)절도사인 절어경(折御卿, 958~995)이 경기(輕騎)를 인솔하고
52
이를 맞아서 그 무리를 자하차(子河?)에서 크게 패배시키니 그 치중(輜重)을 다 내버리고 숨어 달아났다.
53
승리한 것이 보고되자 황제가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거란은 가볍게 나왔다가 쉽게 물러가는데, 짐은 항상 변경에 있는 장수들에게 훈계하기를 그들과 더불어 칼끝을 가지고 다투지 말고, 그들이 깊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군사를 나누어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요격(邀擊)하면 반드시 남기는 것이 없을 것이다. 지금 과연 나의 말과 같았다."

황제가 말하였다.
"짐의 여러 아들 가운데 누구에게 신기(神器)
87
를 맡길 수 있겠는가?"
구준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천하를 위하여 군주를 선택하시는데 모의 하는 것이 부인과 환관에 미치는 것은 안 되고 모의하는 것이 가까이 있는 신하에게 미치는 것도 안 되니, 오직 폐하께서는 천하 사람들의 희망에 부응하기 위하여 선택해야 합니다."
황제가 머리를 숙이고 오래 있다가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게 하고 말하였다.
"원간(元侃)
88
은 가능하겠소?"
대답하여 말하였다.
"아들을 아는 것은 아버지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성스럽게 생각하신 것이 이미 가(可)하다고 여기시었다면 원컨대 바로 결정하십시오."
황제는 드디어 조원간을 개봉윤으로 삼고 수왕(壽王)으로 고쳐 책봉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세워서 태자로 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태자에게 쏠리고 있으니, 나를 어느 곳에 두려고 하는 것이요?"
구준이 두 번 절하고 축하하며 말하였다.
"이는 사직(社稷)의 복입니다."
황제가 들어가서 〔이 내용을〕 말하자 후빈(后嬪)과 6궁(宮)이 모두 앞으로 와서 축하하였다. 황제가 다시 나가서 구준을 이끌어서 술을 마셨는데, 아주 만취하고서야 끝냈다.

구준은 일찍이 사건을 상주하면서 절실하고 곧아서 황제는 화가 나서 일어났는데, 구준이 황제의 옷을 붙잡고 다시 앉기를 청하였고 일이 결정되고서 마침내 물러갔다. 황제가 칭찬하며 감탄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이 정말로 재상이다!"
또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구준을 얻은 것은 마치 당 태종이 위징(魏徵, 580~643)
89
을 얻은 것과 같다!"

고려에서 해를 이어가며 요(遼)에 진공(進貢)하였는데, 요주(遼主)는 한림학사인 장간(張幹) 등을 파견하여 왕치(王治, 成宗)를 고려 국왕에 책봉하였으며 왕치는 그 동자(童子) 10명을 파견하여 가서 거란어를 익히게 하였다.

3월 임인일(2일)에 고려 국왕인 왕치(王治)가 요(遼)에 청혼하였는데, 요(遼)에서는 동경유수인 소긍덕(蕭?德, ?~996)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허락하였고, 고려는 그 신하인 한언경(韓彦卿)을 파견하여 요(遼)에 가서 납폐(納幣)하게 하였다. 이미 그리하였는데, 왕치가 죽자 요인(遼人)들은 그 폐백(幣帛)을 돌려주었다.

기축일(26일)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요주(遼主)에게 문안(問安)하였는데, 이때에 요주(遼主)는 탄산(炭山, 河北 獨石口 밖으로 西北쪽 ?河上游)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뒤에는 상례(常例)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