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 경조(京兆, 西安)의 지독한 도적인 초사(焦四) 등이 수백 명을 불러 모아 살고 있는 백성들을 겁탈하고 노략질 하며 삼보(三輔, 西安)지역에 해(害)를 끼치자 황제는 상을 내걸고 불러 모집하면서 사형시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기다렸다. 초사 등은 죄를 받게 해달라고 하면서 스스로 귀부하니 각기에게 금포(錦袍)·은대(銀帶)·의복(衣服)·민전(緡錢)을 하사하고 나란히 발탁하여 용맹군사(龍猛軍使)로 삼았다.

황제는 다시 사자를 파견하여 요(遼)에 가서 화의(和議)를 약속하게 하였지만 〔요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람을 모집하여 바다에 배를 띄워 여진(女眞)과 오실(烏實) 등의 부족에게 뇌물을 주면서 그를 배반하게 하였지만 두 부족은 좇지 않았다.

정축일(28일)에 황제는 촉(蜀)지역에서의 도적 떼가 점차 평정되어가자 조서를 내려서 자기에게 죄를 주었다. 애초에 한림학사인 전약수에게 명령하여 조서의 초안을 잡게 하였고 이미 완성되어 황제에게 올리니 황제는 붓으로 친히 몇 글자를 지워버려서 모든 허물을 끌어안는 것이 깊고 절실하였다. 그것에서 대략 말하였다.
"짐은 마땅하지 않은 사람에게 위임하였고 이치를 밝히는 것도 밝지 아니하여 저들 백성과 가까이 하는 관원(官員)이 은혜와 화합으로 정치를 하지 못하는데 이르게 하였다. 관각(??, 전매)의 관리는 오직 각박하게 깎아 내는 것만을 공로로 생각하여 나의 증민(蒸民, 많은 백성)을 어지럽히게 되자 일어나서 미친 듯이 노략질하였다. 이렇게 덕정(德政)을 잃은 것을 생각해 보니 이리하여 힘써 자신에게 책임 지우는 것이다. 고쳐서 다시 설립하는데, 영원히 전의 폐단을 거울로 삼아 지금부터 이후로는 아마도 경계(警戒)함을 줄 것이다!"

요(遼)의 초토사(招討使)인 한덕위(韓德威, 942~996)가 수만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진무(振武, 內蒙古 呼和浩特市 大靑山南麓)에서부터 남침하였는데 영안(永安, 四川省)절도사인 절어경(折御卿, 958~995)이 경기(輕騎)를 인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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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맞아서 그 무리를 자하차(子河?)에서 크게 패배시키니 그 치중(輜重)을 다 내버리고 숨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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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한 것이 보고되자 황제가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거란은 가볍게 나왔다가 쉽게 물러가는데, 짐은 항상 변경에 있는 장수들에게 훈계하기를 그들과 더불어 칼끝을 가지고 다투지 말고, 그들이 깊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군사를 나누어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요격(邀擊)하면 반드시 남기는 것이 없을 것이다. 지금 과연 나의 말과 같았다."

황제가 말하였다.
"짐의 여러 아들 가운데 누구에게 신기(神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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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맡길 수 있겠는가?"
구준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천하를 위하여 군주를 선택하시는데 모의 하는 것이 부인과 환관에 미치는 것은 안 되고 모의하는 것이 가까이 있는 신하에게 미치는 것도 안 되니, 오직 폐하께서는 천하 사람들의 희망에 부응하기 위하여 선택해야 합니다."
황제가 머리를 숙이고 오래 있다가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게 하고 말하였다.
"원간(元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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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가능하겠소?"
대답하여 말하였다.
"아들을 아는 것은 아버지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성스럽게 생각하신 것이 이미 가(可)하다고 여기시었다면 원컨대 바로 결정하십시오."
황제는 드디어 조원간을 개봉윤으로 삼고 수왕(壽王)으로 고쳐 책봉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세워서 태자로 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태자에게 쏠리고 있으니, 나를 어느 곳에 두려고 하는 것이요?"
구준이 두 번 절하고 축하하며 말하였다.
"이는 사직(社稷)의 복입니다."
황제가 들어가서 〔이 내용을〕 말하자 후빈(后嬪)과 6궁(宮)이 모두 앞으로 와서 축하하였다. 황제가 다시 나가서 구준을 이끌어서 술을 마셨는데, 아주 만취하고서야 끝냈다.

구준은 일찍이 사건을 상주하면서 절실하고 곧아서 황제는 화가 나서 일어났는데, 구준이 황제의 옷을 붙잡고 다시 앉기를 청하였고 일이 결정되고서 마침내 물러갔다. 황제가 칭찬하며 감탄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이 정말로 재상이다!"
또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구준을 얻은 것은 마치 당 태종이 위징(魏徵, 58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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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얻은 것과 같다!"

고려에서 해를 이어가며 요(遼)에 진공(進貢)하였는데, 요주(遼主)는 한림학사인 장간(張幹) 등을 파견하여 왕치(王治, 成宗)를 고려 국왕에 책봉하였으며 왕치는 그 동자(童子) 10명을 파견하여 가서 거란어를 익히게 하였다.

3월 임인일(2일)에 고려 국왕인 왕치(王治)가 요(遼)에 청혼하였는데, 요(遼)에서는 동경유수인 소긍덕(蕭?德, ?~996)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허락하였고, 고려는 그 신하인 한언경(韓彦卿)을 파견하여 요(遼)에 가서 납폐(納幣)하게 하였다. 이미 그리하였는데, 왕치가 죽자 요인(遼人)들은 그 폐백(幣帛)을 돌려주었다.

기축일(26일)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요주(遼主)에게 문안(問安)하였는데, 이때에 요주(遼主)는 탄산(炭山, 河北 獨石口 밖으로 西北쪽 ?河上游)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뒤에는 상례(常例)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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