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시간은 따라서 전체사의 상층구조의 작동과 관련을 가진다. 그상층구조는 아래층에서 작용하는 힘들이 창조하고 부양해준 결과물이지만,
동시에 그 무게가 아래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장소와 시대에 따라서 이러한 아래에서 위로의 움직임과 위에서 아래로의 움직임의 중요성이 변화한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지역에서도 세계의 시간이 모든것을 다 책임지지는 못한다. - P17

세계경제는 지구 전역에 걸쳐 있다. 시스몽디가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전지구적인 시장 또는 "함께 교역을 하여 오늘날에는 일종의 단일시장을 형성한 인류 전체, 또는 인류의 어느 부분 전체를 가리킨다. 세계-경제(이 말은 사실 어색하고 프랑스어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표현으로예전에 내가 독일어의 ‘벨트비르트샤프트[Weltwirtschaft]의 번역어를 찾을 때그다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달리 나은 표현이 없어서 만든 말이다)는 우선 지구의 일부분에만 관련된 말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경제적으로 독자적이며, 핵심적인 것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고, 내부적인 연결과 교역이 유기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단위를 가리킨다. - P26

세계(또는 세계경제) 차원의 분업은 매번 동등한 파트너 사이에서 조화롭고수정 가능한 협약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결정한 종속관계의 연쇄로서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불평등 교역은 세계의 불평등을 낳고 반대로 세계의 불평등은 끈질기게 교역을 창출한다. 불평등 교역과 세계의 불평등, 이 두 가지는 모두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현실이다. 경제라는 카드놀이에서는 다른 것보다 더 나은 패들이 언제나 존재했으며 때로는 속임수가 개재되기도 했다. 어떤 활동은 다른 활동들보다 더많은 이윤을 가져다준다. - P62

세계-경제야말로 같은 가격진동이 일어나는 가장 넓은 공간으로서, 이것은 단지콩종크튀르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심층에서는 그리고 어느수준에서는 그 콩종크튀르를 만드는 곳이다. 세계경제는 광대한 공간 속에서 가격의 단일성(unicité)을 만든다. 그것은 마치 동맥계가 몸 전체로 피를전달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구조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로 남는 것은 내가 언급한 것처럼 일치를 보인다고는 해도, 장기추제가 이런 공명(共鳴) 구역을 잘 나타내는 지수인지의 여부이다. 나는 세계-경제라는 광대하지만 어쨌든 유한한 공간이 없다면 장기적인 변동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여기에서의 이 장기적인 진동이 콩종크튀르라는 복합적인 흐름을 만들었다가 깨고 다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P114

새로운 유럽의 시작과 관련해서는 사실 이 두 복합체의 성장을 살펴보아야 한다. 북쪽과 남쪽,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북해-이곳으로 합류하는 발트 해까지 포함하여ㅡ와 지중해 전체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서유럽은 하나의 "극"이 아니라 두 개의 극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9-10세기에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직 완전히 모양이 굳어지지 않은 유럽의 여러 활동들을 재료로 삼아 광범위한 두 개의 지역경제가 서로 독립적으로 형성되어갔다. 북쪽에서는 이 과정이 빨리 이루어졌다. 사실 이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주변지방은 신생지역 또는차라리 원시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찬란한 과거의 역사를가진 지중해 지역에서는 뒤늦게 갱신이 이루어졌으나 대신 그후에는 더 빠르게 진보했다. 특히 이탈리아의 팽창에 이슬람과 비잔티움이 가속화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북쪽은 남쪽에 비해서 덜 복잡하고 상대적으로 더 "산업적"이었던 반면, 남쪽은 더 상업적이 되었다.

이 둘 사이의 연결은남북 간의 여러 육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13세기의 샹파뉴 정기시는 그중 괄목할 만한 첫 번째 성과이다. - P133

베네치아의 경제적 풍토는 따라서 아주 독특했다. 상업활동은 전반적으로 대단히 활력이 넘쳤지만 그것은 무수히 많은 소규모 사업으로 나뉘어 행해졌다. 장기간 지속되는 회사인 콤파니아(compagnia) 몇몇이 등장하기는했으나, 피렌체식의 거대주의는 결코 이곳에서 적합한 토양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정부이든 도시귀족 엘리트이든 피렌체에서처럼 도전을 받는 일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베네치아는 안전한 곳이었다. 달리 말하면 일찍이 유복한 삶에 푹 빠진 상업활동은 이미 검증된 전통적인 방법에만 만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래의 성격 역시 하나의 원인이 된다. 베네치아에서 상업은 무엇보다도 레반트 무역을 의미했다. 이것은 분명히 막대한 자본을 요구하는 상업이므로 베네치아의 거대한 화폐자본이 여기에 투입되어서 시리아로 갤리 선단이 떠나고 나면 도시 내에 현찰이 문자 그대로 바닥나는 정도였다. 이것은 나중에 서인도로 선단이 떠난 후에세비야에서 일어났던 현상과 비슷했다. 그러나 자본의 순환은 제법 빠른편이어서 6개월 혹은 1년 정도면 회수되었다. 그래서 선박의 왕복이 이 도시의 모든 활동에 리듬을 부여했다. - P183

아프리카 대륙과 대서양 연안의 여러 섬들에 대한 정복은 주로 포르투갈의 작품이었다. 그렇지만 제노바인과 피렌체인(그리고 아조레스 제도의 경영에 관해서는 플랑드르인 역시)도 여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지중해 동부부터 시칠리아, 남부 스페인, 모로코, 포르투갈의 알가르브 지역 그리고마데이라와 카보베르데 제도 등지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널리 퍼뜨린것은 제노바인 덕분이었다. 더 훗날 카스티야인이 정복한 카나리아 제도에사탕수수가 도입된 것도 이와 비슷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포르투갈의 발견의 정점인 바스쿠 다 가마의 주항이 "제노바인들에게 하나도 빚진 것이 없다"는 렐프 데이비스의 말이 사실이라고해도, 리스본에 정착해 있던, 혹은 그곳에 자주 들르던 이탈리아, 남부 독일, 네덜란드 등지의 상인들이 이 상업적 성공에 두루 연관되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포르투갈이 인도 방향으로 노력을 경주한 - P198

결과 아메리카를 놓치는 대가를 치렀다는 점이다. 아메리카라는 이 보물은거의 이들의 수중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포르투갈 국왕과 그의 보좌관들에게 제안한 여행이 그들에게는 몽상적으로보였다. - P199

안트베르펜의 해결책은 브라반트 정기시들에서 행해지던 방식들을 응용한 아주 단순한 것들이었다. 차변과 대변, 양방향으로의 지불 모두 채무증서(cédule obligatoire), 즉 약속 어음으로 해결했다. 이것은 한 상인이 서명을 함으로써 정해진 시기에 일정한 금액을 갚기로 하는 증서로, 나중에이 증서를 지참한 사람에게 실제로 그 금액을 지불한다.
채권과 채무가 이렇게 서로 상쇄되는 방식이 바로 청산(스콘트로 [scontro], 클리어링 [clearing], 콩팡사시옹[compensation], 혹은 네덜란드에서 말하는 레스콘트레[rescontre])의 비밀이다.
하나의 어음이 여러 사람들 손을 거치면서 유통되다가 마침내 이 어음을 처음에 발행했던 사람 자신이 다른 채권의 지불용으로 이것을 받게 될 때 드디어 이 어음은 사라진다. 이와 같은 배서(endossement) 기능을 보장하기 위해서 소환(assignation)이라는 오래된 관행이 일반화되었다. - P214

제노바의 부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은에 기대는 것보다 더 큰 정도로 이탈리아 자체의부에 근거하고 있었다. 피아첸차 정기시라는 강력한 체제를 통해서 이탈리아 도시들의 부는 제노바로 이끌려 들어갔다. 제노바인이든 타지인이든 수많은 소액 대출자가 아주 적은 보상만을 받고 그들이 저축한 돈을 은행업자에게 맡겼다. 이렇게 스페인의 재정과 이탈리아 반도의 경제는항시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마드리드 정부의 파산은 매번 큰 충격을 가져왔다. 1595년의 파산과 같이 파장이 큰 경우 베네치아의 예금주와 대출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동시에 베네치아 내에서도 조폐국에거액의 은을 제공했던 제노바의 대상들이 환업무와 해상보험 업무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탈리아의 다른 활기찬 도시들에 대해서 연구해보더라도 아마 이와 비슷한 결론을 얻게 될 것이다. 사실 제노바가 그런 게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이 제노바를 그런 수준으로유지시켜주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어느 정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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