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회를 100년 넘게 미국을 지배하는 록펠러와 jp 모간 가문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낸다.  

남북전쟁에서 전쟁이 진행될 때 마다 북군의 무기를 사놨다가 다시 3배 넘은 가격에 팔고, 전쟁의 승패 미리 알고(!) 금을 사고 팔아 큰 돈을 모아온 jp모건. 석유로 부터 시작하여 미국 재계를 지배하는 록펠러 가문.  

둘은 경쟁자일뿐 한번도 적인 적이 없다. 저자는 케네디 암살이나 메카시 광푸의 배후에 이 두 거대기업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레이건 시절 백악관 중요 인사의 90%는 두 기업과 직, 간접적인 연관을 맺은 인사들이 채워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두 기업의 성장을 그대로 닮아가는 삼성은 그들의 또 다른 아바타일 뿐이다.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책이다. 삼성 비판서 중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아마 김용철이라는 이름과 조,중,동의 광고거부라는 특이한 사건이 일으킨 빅 이벤트이다. 이 책의 가치는 너무 큰 비리를 강하게 고발하는 이 책에 대해 삼성이 묵묵부답으로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마 앞의 두 재벌이 그랬듯이 자기들 고발서도 몇 년 지나면 시들어갈뿐 자신들의 권력은 영원한다는 생각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은 법조계 전체를 비판으로 대상으로 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신성 가족 동맹을 비판하는 <신성가족>을 연상케하는 제목만큼이나 외부의 청탁이 많이 개선되었지만 내부에서 그들 끼리의 관계는 오히려 더 단단해져 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 검찰이 승진을 위해서 올이하는 최근의 모습은 법조계 내부의 신성가족 동맹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막장 토론은 든든한 그들의 가족들이 있기에 가능한 하나의 모습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인맥과 승진 관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이 책의 내용은 김두식 교수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 중의 일부와의 인터뷰를 통한 내용이니 더욱 진실성에 다가가 있다고 볼 수 있는 놀랍다.  

 

 김종인 전 의원과 장화식 위원장의 공동 집필이지만 사실은 김종인 전 의원은 자료 제공과 바람막이 역할을 한 셈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책은 장화식 전 외환은행 노조위원장의 끊임없는 투쟁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매주 화요일 마다 집회를 열어 김앤장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한 싸움에서 그는 무수히 많은 자료와 조사를 통해 김앤장이 우리 사회의 권력집단과 얼마나 많은 연결을 가지고 있고, 또 김앤장의 권력이 어떻게 비호받고 있는 지를 밝혀내고 있다.  

김앤장의 고문이었던 사람이 재경부 장관으로 가거나 그 역순은 이제 흔한 일이다. 한국 사회의 권력집단은 서로를 서로가 탄탄히 밀어주고 당겨주는 카르텔의 현장과 다름아님을 잘 보여준다.  

 정치권력의 삼각편대에서 재벌, 변호사에는 약하지만 가장 강력한 로비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 의료계이다. 미국에서 국민의료보험 도입이 50년 넘게 걸린 것 처럼 의료계의 자기 이익을 위한 영향력은 막강하다.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생명보다 이익을 앞에운 제약회사와 병원의 이익 구조를 실천적으로 묘사한다. <건강세상 네트워크>라는 시민단체의 대표로 활동하며 쌓은 그의 투쟁의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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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을 만드는 두가지 반대되는 방법

[만들어진 현실] 과 [만들어진 조선의 영웅들]

‘민심은 곧 천심이다.’

성리학이라는 지배이데올로기를 강조했던 조선 시대 지배층도 권력자의 입장에서 민중의 여론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왕권을 강화의 방법으로 신격화, 군사력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많았다. 임꺽정, 장길산, 홍길동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하나같이 파렴치한 도적으로 묘사한 것도 무관하지는 않아 보인다. 조정과 관료들이야 그랬지만 민중들은 입에서 입으로 ‘영웅’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삶의 팍팍함과 부패한 권력을 조롱하고 비판하였다. 이익은 조선 전기의 인물인 홍길동이 조선 후기에 까지 전해져 아이들의 ‘맹세 구호’로까지 행해진다 이야기할 정도로 민중은 스스로 자신의 여론을 이야기를 통해 만들어갔다.

 

힘으로 권력을 누렸던 왕조시대를 지나 근대에 오면서 권력은 무력에서 여론으로 무게 이동한다. 여론을 지배하는 방법의 첫째는 강제로 억제하고 매체를 장악해서 집권층의 의도를 전파하는 것이다. 이러한 처방은 정권이 바뀌면 새롭게 변화할 수 있지만 여론 통제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공포감을 조성하여 콤플렉스를 조장하는 것과 집단이 서로 대립하도록 여론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어떤 이슈에도 ‘친북 용공’딱지만 붙이려는 사람들의 행태야 웃기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것이 먹히는 것은 오래 뿌리내린 ‘레드 콤플렉스’가 아직도 잔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중의 눈을 가려는 또 다른 것은 민중간의 분열과 대립을 유도하는 것이다. 삼국지에 보면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몰아내게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고도의 외교술로서 국가나 집단 간의 전쟁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이것은 최근에는 분리 독립, 혹은 정치적 지배방법론으로 많이 사용된다. 제국주의 전쟁으로 지탄 받던 이라크 전에서 미국이 ‘평화롭게’ 후퇴할 수 있는 배경은 다수파인 시아파에 대한 수니파의 위기의식이었다. 알카에다와의 관계를 끊는다면 민병대를 조직하게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당근과 채찍을 준 것이다. 지금은 아프카니스탄에서도 이런 방법을 사용하려 하고 있다. 파슈툰족이 대부분 인 탈레반과 싸우려고 한다면 다른 부족에게 민병대를 조직할 수 있도록 돈과 총을 주겠다는 것이다. 설혹 탈레반이 무너져도 향후에는 결국 부족 간의 전쟁의 도화선이 될 지언정 미국으로서는 지배를 공고히 할 수 있다.

 

한국 정치사회에서 이이제이는 지역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지역감정이라는 복마전은 민중들의 자신의 이익보다 지역의 이익을 앞서는 모순을 야기한다. 1992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 3당이 합당해 만든 민자당의 후보 김영삼의 당선을 위해 부산의 기관장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 것을 도청한 사건이 있었다. 모임자체가 불법행위였음은 명백했지만 투표는 오히려 김영삼에 대한 몰표가 나왔다. 달보다는 손가락을 보듯이 도청자체를 문제삼은 보수언론은 은근히 지역주의에 기대해 표를 몰아주었다. 지역감정은 과연 버릴 수 없는 ‘현실’인 것일까? 지역감정의 근원에 대해 『만들어진 현실』(후마니타스)를 쓴 박상훈은 지역감정은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해방이후에 서울 사람들은 호남이 아닌 이북사람들에 대해서 안 좋은 감정을 가졌다. 산업화이후 호남사람들이 대거 충청도와 수도권으로 오자 이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지만 영남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호남인구가 몰리지 않아 지역감정이 없는 편이다. 애초부터 영호남 지역감정은 조선시대도 없었고, 많은 기록들이 호남의 인재와 충성심을 칭찬하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떻게 영호남의 지역감정이 이렇게 변하지 않는 화두가 되었을까?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60년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은 강원도였고, 1971년 대선 때는

대구와 부산 등에서 박정희를 앞서는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막걸리를 나눠주고 조작투표로 당선되었지만 박정희는 향후 집권에 대한 불안감으로 유신체제를 1972년 선언하고, 자신의 출신지인 경상도를 자기편으로 하기 위한 지역감정 선동하였다. 인재선발과 산업단지등에서 경상도에 몰아주었지만 그 자체로서는 지역감정이라는 실체가 서민들에게까지 체감되는 것은 아니었다. 1979년 부마항쟁이 일어난 후 박정희가 몰락하고 집권한 신군부는 김대중을 내란 음모사건으로 구속한다. 이후 1980년 광주 항쟁에서 총칼로 탄압당한 광주와 호남은 상처와 회한을 가졌지만 항상 약자에 머무를 뿐, 대립적 관점을 가지지 않았다. 2002년 경상도 출신을 1위 대선후보로 밀었던 광주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지역감정이 회자되고 확대된 것은 1987년 대선 때이다. 이때 양김이 분열되었으나 노태우는 당선이 불확실했다. 경북의 지지와 보수파만으로는 지지율이 높지 않았다. 대표적인 보수언론의 논객들은 사설을 통해 영호남의 지역감정이 고질적인 문제인양 보도했다. 없는 문제도 만들어내는 솜씨이다. 영남과 호남을 비롯한 전국이 지역적인 투표성향을 보이는 것을 근거로 한 것이지만 민주화를 이끈 두 정치인에 대한 선택의 성향이상은 아니었다. ‘망국적인 지역감정’이라는 식의 기사가 도배되면서 없던 지역감정이 껍질을 가지게 된다. 지역 간에 대립이라는 것이 전혀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니 자꾸 부채질 할수록 실체가 있는 ‘유령’이 되었다. 그 유령은 ‘사실’이 되면서 모든 언론이 언급하게 된다. 지역감정에 대한 부채질은 2002년 대선 때까지도 여전했다. 많은 허물을 가졌음에도 경제를 살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선택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서 지역감정은 영호남이 중심이 아니라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나뉘어 나타나고 있다.

 

신자유주시대에 부동산 등 재산 증식에 대한 욕망이 강조되면서 수도권의 아파트 가격은 정치적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행정수도 이전을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막겠다던 서울시장 출신이 대통령이 되면서 수도권 규제완화와 수도권 중심주의는 극에 달했다. 삶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수도권 주민들은 세종시 수정안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이유를 부동산 가격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대다수의 판단이다. 비슷한 인구를 가진 세계 도시들의 면적에 비해 1/4, 1/10 에 불과하고, 직장을 찾아 20대가 계속 서울로, 서울로 올 수 밖에 없는 구조가 결국 나라를 망칠 수 있다는 상식은 사라졌다. 망국적 행태가 ‘재테크’이라는 이기적 인 의지와 표를 사는 ‘정치적 술수’꾼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결국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개발에서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준다면 강압, 거짓말, 말바꿈, 전과 등은 용서되는 기이한 나라가 되었다. 심지어는 민주국가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행동조차도 용인되고 있다.

 

잘한 것도 없고, 잘할 것도 없는 대통령이 뻔한 정치적 쇼와 입 발린 소리를 하는 것을 대다수가 알고 있음에도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것은 대항마가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민중이 염원하는 것은 싸울 수 있는 전사이고, 영웅이다. 그렇지 않다면 순응하는 것이 심리적 기재라는 이야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5공 청문회 때 야합하려는 국회의원들에게 명패를 던지며 항의했다. 군사독재정당과 합당하려는 당시의 ‘민주당’의 총회에서 손을 들어 이의를 제기하고 반대했다. 편안한 길을 갈 수 있을 때, 국민의 정서에 다가왔기에 그는 기득권 집단의 거센 반대에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1987년에는 서울대생이던 박종철이 고문 치사 당함으로써 국민의 거센 저항의 불길을 태웠다. 죽음으로써 더 영웅이 된 것을 두고 미화한다고 비방하는 ‘독사같은 신문’들이 있지만 노무현의 죽음은 더욱 그와 같은 존재에 대한 갈증을 일으킨다.

 

 

『만들어진 영웅들』(평사리)의 저자 이희근은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이 의적이라는 증거가 명확하지 않고 이를 문학적으로 의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 필요가 조선시대 허균에 의해, 일제시대 홍명희에 의해, 군사독재 시절 황석영에 의해 이루어졌다. 주인공들은 실존인물이다. 수 십 년에서 수 백 년이 지나도 이들의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은 민중들이 이야기를 전하고 확대하고, 나름 각색하여 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단순한 도적이든 의적이든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산더미 같이 쌓인 양반들의 곳간을 헐어내고, 자신들을 억압하기 위해 사용된 무력과 싸워 이기는 것을 통해 민중들은 ‘해방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전해온 영웅들이 ‘만들어졌’던들 어떠하랴. 지금도 러시아에 스텐카라친의 전설이 전해오듯이 배고픈 사람들이 굶주릴 때 거대한 돼지처럼 먹어대는 집단과 구조를 파괴하고 민중의 삶을 구원해 줄 영웅은 항상 민중의 가슴속에 담겨져 있다. 지금 우리의 영웅은 누구인가? 영웅은 한 사람일 수도 있고, 한 집단일 수도 있고, 큰 하나의 흐름일수도 있다. 촛불소녀가 영웅일 수도 있고, 유모차 어머니가 영웅일 수도 있다. 1980년 5월 광주 진압전날 확성기를 들고 소리 높여 외쳐대던 분노의 절규의 목소리처럼 하나의 소리가 영웅일 수도 있다. 직업을 가진 정치인이 아닌 우리와 같고, 우리의 이해를 대변하는 ‘영웅’들을 민중들은 만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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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위녀 2010-05-25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이 책 정말 읽어보고 싶네요..
 
지구를 구하자! - 왜 당장 시작하지 않는 거야? 청소년을 위한 세상읽기 프로젝트 Why Not? 2
마르틴 라퐁 지음, 모니크 프뤼당-미노 그림, 이충훈 옮김 / 개마고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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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나무가 베어지고, 최후의 강물이 오염되고, 최후의 물고기가 죽으면, 그때 인간은 돈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p.109 

 

생태나 환경을 이야기 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일부분만 보게 되는 일이다. 작은 실천도 중요하지만 크게 보면 하루 하루 변화는 시시각각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 지구가 몸살을 앓으며 우리 주변의 환경이 바뀌고, 북극에서는 큰 빙하가 깨져나가도 일상의 삶은 변화가 없다.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가기 때문에 잘 느끼기 힘들다.

 

생태 환경교육이 중요한 이유가 그렇다. 지금까지 생태 환경에서 빠지지 않는 책들은 중학교 학생들을 위해서는 아직은 어려운면이 많다. 침묵의 봄, 가이아는 두께 때문에 조금 부담이 되고 하나의 관점을 중심으로 쓰기 때문에 일단 전체를 본 후에 읽으면 좋을 것이다. 생활속의 환경 관련 책도 초등학생들 읽기에는 적합하지만 중학생들에게는 너무 쉬운 면이 있다.

 

중학생들을 위한 생태 환경책이 드물다. 사례를 쉽게 하고 내용은 철학, 정치를 함께 어우어져 있는 책이 필요하다. 철학적으로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나 원래부터 지구와 식물, 생태계가 원래 부터 지구의 주인이고 지구의 일부였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생태는 개인의 실천뿐만 아니라 연대가 필요하다. 또,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그물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점이 이 책이 다른 책들보다 돋보이는 점이다.

 

 

프랑스책이라 프랑스의 국내 사례가 들어있는 것이 아쉽지만, 중학생을 위한 생태, 환경 입문서로 추천할 만한 책이다.

 

또 중학생들을 위한 책으로는 <나무를 심은 사람> <어머니 지구를 살리는 녹색세대> <최열 아저씨의 지구 온난화 이야기> <청소년을 위한 환경교과서>도 함께 읽어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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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세대 새판짜기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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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의 실천편, 특유의 상상력으로 20대의 권리를 위해 조용하게 혁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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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지 2010-01-04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심한 경쟁시대일수록 혼자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보다는 같이 살아남을 수 있는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 알게 해준 책
 
순례자의 책
김이경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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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책에 관한 책에 손이 가게 마련이다.  

 읽다가 미처 알지 못했던 소중한 한 권의 책이라도 발견하면 뛸뜻이 기뻐하고, 소개된 책을 지름을 못해 열병에 시달리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작가의 유명세에 비해서 그냥 서평에 불과한 것에 속은 것에 실망하고 얼마동안은 비슷한 류의 책을 거들떠 보기 않기도 한다.  

 책에 대한 책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순례자의 책』은 지금까지 봐왔던 책들과는 달라,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힘들다. 책에 대한 책이기도 하고, 책의 인문(역사)에 대한 책이기도 하고, 책에 대한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잘 알지 못했던 조선시대 패설(소설)에 대한 은밀한 문화를 살짝 들쳐 보여준다. <미쳐야미친다>에 나오는 간서치라 자칭한 이덕무의 이야기나, 백이전을 십만번 읽었다는 이의 이야기를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우리 역사속의 책이야기를 몰래 흥미롭게 마주하는 기쁨을 준다. - <상동양화> 

소크라테스는 글로 남기는 것을 싫어해 책을 쓰지 못하고, 피타고라스는 글의 한계를 지적하며 머뭇거리고, 피카소는 자만으로 책을 못써 지옥에 잔류한 오래된 세대들이다. 자서전을 써야 다음 세상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관문은 글자도 배우지 못하고 온 어린아이에게는 쉬운일.  

지옥을 도서관으로 상정한 것도 특이하지만, 유명인사들을 자서전을 쓸 줄도 모르는 부진아로 몰아붙이는 것도 재미있다.  작가의 불온한 상상력이 책에 수도 없이 언급되는 인사들에 던지는 풍자가 왠지 모르게 기쁜 것은 나만의 일일까? - <저승은 커다란 도서관> 

 <최초의 책>, <최고의 책>, <책의 적>을 찾아가는 과정은 오래된 고정관념을 깬다. 최초의 책이 형태라는 집착을 벗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여지 없이 무너진다면, 최고의 책은 최고라는 형용의 모순과 나름대로 이유들이 비등하여 선정의 의미 자체가 사라진다. 비교적 쉽게 찾으리라던 책의 전은 진시황, 히틀러, 신앙을 이유로 도서관을 파괴한 테오필로스, 이민족 문화를 말살한 카라지치에 대한 갑론을박을 넘어서며 독자들 자신이 책이라는 반전(? -반성)을 만나면 아이쿠 스럽다. - <책의 적을 찾아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책읽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처음에는 책을 이런 저런 이유로 읽었다해도 책읽기 그 자체가 좋아지는 것이 어쩔 수 없다. 황제의 명이 거두어졌을 때 조차도 세상의 책을 찾아가는 순례자의 발길이 계속되는 것처럼. 산을 왜 오르느냐는 질문에 산이 있기에 오른다는 이야기처럼 책이 있기에 읽는다는 것이 독자의 모습이 아닐까.    

 책의 순례를 조금은 지름길로 돌아 본 느낌이다. 책 읽기가 끝나는 것은 아닐터이지만, 종이밥을 제대로 먹어 배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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