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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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슴에 남은 말, 평생 지고 가야 할 <십자가 - 시게마츠 기요시>

 

 

 

 

 

  학교를 배경으로 왕따문제를 그려낸 책들은 참 많다. 마치 사회의 골치아픈 문제들이 점점 부풀어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흔히들 왕따에 대해서 생각할 때 대부분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기 마련인데, '가해자는 왜 왕따라는 문제를 만들어냈으며 피해자는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대충 이런 식으로 이야기 되곤 하는 게 보통 일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는 거기서 지나칠 수 있는 방관자에게 더욱 무게를 두고 이야기를 꺼낸다. 방관자, 아무 짓도 하지 않았기에 법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숨어버릴 수 있는 존재. 그렇기에 더욱더 찝찝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그들.

 

  책의 초반은 '후지슌'이라는 아이의 자살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유서에 적힌 네 명은 가해자 둘과 '유', '후지슌'이 사랑했던 소녀 '사유'이다. '후지슌'과 같은 반이었지만 다른 동급생들 처럼 왕따에 관여하지 않고 무시하며 생활해왔던 주인공 '유'는 왜 자신의 이름이 그곳에 쓰였는지 답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일파만파 퍼지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십자가를 지게 된다.

 

  잊혀지지 않는 기억을 품은 채 20년을 지나보내고 딱 그때와 같은 나이의 아들을 갖게 된 주인공이 절친의 의미와 부모의 의미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그토록 잊으려고 애썼지만 잊지못한 그 십자가가 단지 고통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번 생각해보았다. 그가 십자가를 메고 온 것일까, 십자가에 그가 지탱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중간에 완전히 내려놓으려 애썼다면 그 십자가의 무게는 더욱더 무거워졌을 지도 모른다. 그가 길을 걸어 언덕을 올라올 수 있었던 것, 그것은 함께하고 있는 십자가의 모습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유'가 바라본 십자가를 지고 올라선 언덕, 그리고 후지슌이 꿈꾸던 여행의 종착점인 '숲의 묘지'. 아마도 그들은 그곳에서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응어리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독자들, 혹시나 같은 경험을 보고·듣고·행한 독자들 또한 아픈 기억을 삼키고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 실제로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때? 너도 알고 있지?"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학급 회의나 도덕 시간에 일방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지?"라고 물었다면 우리는 모두 "예,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으리라. 그 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었겠는가. 신호등의 색깔은 파랑이 전진이고 빨강이 멈춤이다. 모두 알고 있는데도 신호를 무시한 교통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30p)

 

  - "나이프의 말에서 가장 아플 때는 찔린 순간이야." 그러나 십자가의 말은 다르다고 했다. "십자가의 말은 평생 등에 져야 하는 말이지. 그 말을 등에 진 채 계속 걸어가야 해. 아무리 무거워도 내려놓을 수 없고 발길을 멈출 수도 없어. 걷고 있는 한, 즉 살아 있는 한 계속 그 말을 등에 지고 있어야 하는 거야." 어느 쪽이 더 낫냐고 묻지는 않았다. 물었다고 해도 대답할 수 없었으리라. 그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그 대신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어느 쪽이야? 넌 나이프로 찔렸어? 아니면 십자가를 등에 졌어?" (75p)

 

 - 그 애의 죽음도, 우리가 그 애에게 한 일도 마음의 한쪽 구석에는 계속 남아 있었다. 다만 그곳에 뚜껑이 생겼다. 처음에는 뚜껑이 열리지 않도록 억지로 닫았지만, 어느새 뚜껑이 딱 맞아서 그냥 내버려두어도 열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 불안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래서 혼자 있으면 정말로 열리지 않는지 살며시 뚜껑을 들어올리는 게 인간의 본성이었다. (138p)

 

  - 어느 날, TV에서 범죄 드라마를 보고 깨달았다. 그 드라마에 우리를 닮은 2인조가 나온 것이다. 공범자. 그렇다, 우리는 공범자였는지도 모른다. 죄를 저지르고 도망치는 2인조처럼 우리는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를 쫓아오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150p)

 

  - 책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도쿄에 와서 또 새로운 페이지를 펼친 것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 몇 페이지를 읽는 사이에 가끔 주인공을 잃어버렸다. 앞으로 넘길 페이지에 주인공이 제대로 나올지 불안해지기도 했다. 애당초 우리가 보고 있던 책은 정말로 같은 책이었을까? (283p)

 

  - 사람의 기억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의 사건이나 한 사람에 얽힌 추억이 강물에 떠내려가듯 조금씩 멀어지고 잊힌다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충분히 멀어졌다고 여겼던 추억이 갑자기 등골이 오싹할 만큼 생생하게 다가오고, 손에 들고 있던 것이 파도에 씻기듯 한꺼번에 먼 곳으로 떠나기도 한다. 바다는 잔잔할 때도 있고 거칠어질 때도 있다. 밀물일 때도 있고 썰물일 때도 있다. 그것을 반복하면서 추억은 조금씩 바다로 떠내려가서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그 때 우리는 겨우 하나의 추억을 잊어버릴 수 있지 않았을까? (284p)

 

    잊혀지지 않는 마지막 페이지.

  자신도 모르게 십자가를 지게 되었을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힐링의 책, 굳굳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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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들의 나라
가쿠타 미츠요 지음, 임희선 옮김, 마츠오 다이코 그림 / 시드페이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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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젠가 꺼내보고 기억할 수 있도록 <잃어버린 것들의 나라 - 가쿠타 미츠요> 

 

 

 

 

언제 어디서 없어졌는지도 모를, 그런 것들을 도통 찾을 수 없을 때가 있다. 내 경우에는 양말 한쪽, 머리에 꼽는 실핀, 고무로 된 머리끈들이 그런 것들이다. 도대체 그런 것들이 어디에 있는 거야 .. 하고 생각했을 때, 천계영의 만화책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모여사는 공간이 있지 않을까하는 의문을 심어주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이 책을 보니 그 만화의 온갖 잃어버린 소품들이 둥둥 떠다니던 장면이 떠오른다.

 제목을 보고 상상하는 것처럼 책에는 다소 판타지스러운 요소들도 함께한다. 주인공 나리코가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다던지, 지독한 사랑때문에 생령이 된다든지 혹은 '진짜'세상에 있는 것과는 다른 분실물 창고 같은 것들이다.

 

 잃어버린 것들.. 주인공 나리코에게 그 잃어버린 것들의 모습은 단순히 사물이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자세하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감정들도 포함된다. 그것을 찾는 여정을 보면서 왠지 모를 공감이 들었고 가끔은 아련하고 찡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토록 담담하게 써내려가던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조금씩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분출하는 것 같았다.

 

 세상을 살다가 우리가 가끔은 잃어버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두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가슴 속 작은 방에 살고 있고, 언젠가 꺼내보고 기억할 수 있도록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들의 자리에 지금, 내가 있다는 것이다.'

 

 

- '응? 난 어디서 여기까지 멀리 온 걸까?' 아주 멀리서 여기 온 기억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런 말을 들으니까 어디 먼 곳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여기까지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면, 아아 그렇구나, 바로 이것 때문에 내가......." (40p)

  - 쓰레기 버리는 곳에 버려져 있는 곰 인형도, 나뭇잎들도, 야채가게 앞에 진열된 형형색색의 야채도, 새들도, 고양이도, 밥그릇도, 문고리도, 이제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가끔씩 나는 가다가 서서 "저기......" 하고 작게 말을 걸어보았다. 무언가 나에게 대답을 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나뭇가지들은 바람에 흔들릴 뿐이었고, 처마 밑에 달린 풍경은 산들바람에 맞춰 '딸랑'하고 울릴 뿐이었다. (51p)

  - "어, 안 보이네, 어디 갔지? 했던 것들이 실은 모두 사라져버린 게 아니라 거기로 옮겨져 있는 거야. 거기 가면 틀림없이 내 카메라도, 네 왕관도, 그리고 어쩌면 유키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지. " (76p)

  - 언젠가 이게 그리운 추억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간이 오래오래 흘러서 내가 생령이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내가 빙의했던 사람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게 되어버린다 해도 말이다. 그래도 나는, 다른 이들과 함께 한밤중 육교에서,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중요할 수도 있고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알사탕처럼 아름다운 달을 다 같이 올려다보았던 일, 바로 이 순간을 틀림없이 그리운 추억으로 떠올릴 것이다. (145p)

 

 

책의 일러스트가 굉장히 예쁘고 몽환적이라고 느꼈는데, 알고보니 그림을 먼저 그리고 거기에 글을 덧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림과 글의 분위기가 너무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치즈랑 소금이랑 콩이랑> 이 책도 읽어보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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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 - 누구나 생애 한 번은 그 길에 선다
윌리엄 폴 영 지음, 이진 옮김 / 세계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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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윌리엄 폴 영의 신작, <갈림길>

 

 

 

 

 

 

도서출판 세계사 서포터즈로 활동하고 있는 저, 곧 판매예정인 신간도서 <갈림길>을 사전 원고로 먼저 만나보았어요.

<갈림길>은 영어 원제 The Crossroad로, <오두막> 작가 윌리엄 폴 영의 신작입니다.

사전원고, 꽤나 두터워서 얼른 읽고 리뷰 올리려고 했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어요. 오늘에서야 다 읽고 간단하게 남겨봅니다.

 

'누구나 생애 한 번은 그 길에 선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갈림길>. 제목부터 왠지 인생에 커다란 교훈을 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일단 줄거리를 말씀드려보자면... 성공을 위해서 앞뒤안보고 달려온 앤서니 스펜서라는 남자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만 냉철하고 이기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갑작스럽게 혼수상태에 빠지고 두개의 공간을 넘나들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인생의 많은 부분들과 새로운 감정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새로운 것들 중 하나가 '영성을 얻게 되는 과정'인데요. 사실 이건 작품속에서 그리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이 작품은 기독교적 색채를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저는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독실하진 않지만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고 불편함도 느끼지 않았지만

만약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분에게는 '이해'의 문제는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갈림길>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인생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종교적 색채에 대한 불편함은 크게 느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전반부에는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고, 후반부에는 흥미롭고 판타지적인 체험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갈림길>.

주인공인 앤서니 스펜서가 종착점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인생의 갈림길에서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치유의 메세지가 되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좋았던 부분을 미리 공개하자면..

 

진실이 아닌 것을 믿고, 또 그 속에서 산다면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당신이 진실을 믿건 믿지 않건, 그 진실이 당신에게 사실이건 사실이 아니건, 당신이 지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건, 당신은 결코 단절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는 세 가지 선택 앞에 서 있었고 그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전혀 알지 못했다. 놀랍게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는 어떤 길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 그 자유가 그를 흥분시켰고 또 두렵게도 했다. 마치 불과 얼음 사이의 줄타기 처럼"

 

"당신이 우리 이름을 지었어요 아니, 당신의 행동과 선택이 우리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 게 더 맞겠군요."

 

 

<갈림길> 북 트레일러.

배우 김재원이 나레이션 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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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트레일러 분위기가 장난 아니죠..... 왠지 가슴이 벅차는 영상이에요.

 

책 속에는 각 챕터마다 명언들이 윗쪽 귀퉁이에 써져있는데요. 그걸 보는 것도 참 쏠쏠합니다.

제가 맘에 들었던 명언은.. "우리 뒤에 놓인 것과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우리의 내면에 들어 있는 것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다" - 랠프 왈도 에머슨 -

 

 

 

 

 

 

출간일이 이 달 23일이라 여러 인터넷 서점에서 예약판매중인데요. 링크 연결해드릴게요.

yes24 http://www.yes24.com/24/goods/8430896?scode=029

교보 http://www.yes24.com/24/goods/8430896?scode=029

알라딘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3830529

인터파크 http://book.interpark.com/product/BookDisplay.do?_method=detail&sc.shopNo=0000400000&sc.prdNo=211917674&bid1=search&bid2=product&bid3=img&bid4=001

11번가 http://book.11st.co.kr/Goods.do?cmd=detail&&dispCtgNo=002030002000000000&dispCrnNo=LIST_CRN_11&plnDispNo=&pgUnqNo=030&gdsNo=M0000001796797

제본된 책으로 읽는 <갈림길> 저도 무척 기대되네요 *_*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도 책장에 꽂은 채로 있는데 언제 한번 읽어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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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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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이면 화끈하게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자유'란 무엇일까? 어떠한 삶을 살아야 자유롭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인생의 반도 살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내내 나는 심한 강압을 받아본 적도 없었고 무엇인가 탈출하고자 미친 짓을 해본 적도 없던 것 같다. 가끔의 사소한 일탈은 있긴 했지만 그것도 벌벌 떨면서 찡찡거리곤 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나에게 조르바가 외치는 영혼의 자유는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극찬하는 <그리스인 조르바>. 나에게도 벅차는 감동을 안겨주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며 중반까지 읽었으나 생각보다 크게 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리스 사회와 영혼의 대한 개념, 니체의 사상, 종교와 같은 것들까지 새겨져있는 이 글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책에서 무언가 뽑아내겠다는 부담'이 작용한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천천히, 침착하게 계속해서 읽었더니 진정한 조르바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조르바의 행동들에 모두 고개가 끄덕여진 것은 아니었지만, 조르바는 '자유' 그 뜻대로 '내 멋대로 하는'자신만의 삶을 만들어내는 건 성공한 것 같다. 조르바의 인생철학, 한 마디로 말해서 '한 번 사는 인생, 진흙밭에 굴러도 봐야 재미있는 거 아니겠어?' 이런 식이다. 각자의 인생의 주도권은 물론 자신에게 있지만, '내 멋대로 해라!'는 쉽고도 어려운 명령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 자신의 행동에 이유를 붙이고 결과를 생각하고 도움을 바란다. 내가 한 일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한다. 내가 준 것, 받은 것을 따지고 관계를 저울질한다. 조르바처럼, 화끈하게 딱 잘라버릴 순 없을까? 쿨하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 내가 대꾸하지 않자 조르바가 계속했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게 바로 삶이오!" - 149p

 

"......그리스도가 나셨소, 우리 현명한 솔로몬이여, 죄 많은 백면서생이여! 세상 잡사 꼬치꼬치 따지지 맙시다! 예수님이 태어났어요, 안 났어요? 물론 태어나셨지....... 그런데 왜 멍청하게 앉아 있어요? 확대경으로 음료수를 들여다보면 (언젠가 기술자 하나가 가르쳐 줍디다) 물에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쬐그만 벌레가 우글거린답디다. 보고는 못 마시지...... 안 마시면 목이 마르지....... 두목, 확대경을 부숴 버려요. 그럼 벌레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신이 번쩍 들고!" - 173p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은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 391p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 (혹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 417p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 이 잡것이! 줄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이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지.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안흘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노란 카밀레 맛이지. 멀건 카밀레 차 말이오. 럼주 같은 맛이 아니오.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 429p

 

 

내가 인생과 맺은 계약에 시한 조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나는 가장 위험한 경사 길에서 브레이크를 풀어 봅니다. 인생이란, 가파른 경사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지요. 잘난 놈들은 모두 자기 브레이크를 씁니다. 그러나 (두목, 이따금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가를 당신에게 보여주는 대목이겠는데)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기계가 선로를 이탈하는 걸 우리 기술자들은 <꽈당>이라고 한답니다. 내가 꽈당 하는 걸 조심한다면 천만의 말씀이지요. 밤이고 낮이고 나는 전속력으로 내달으며 신명 꼴리는 대로 합니다. 부딪쳐 작살이 난다면 그뿐이죠. 그래봐야 손해 갈 게 있을까요? 없어요. 천천히 가면 거기 안가나요? 물론 가죠. 기왕 갈 바에는 화끈하게 가자 이겁니다. - 215p

 

이 부분 너무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암요 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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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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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들어진 문장들이 부르는 <칼의 노래 - 김훈>

 

 

 

 

 

내 책장 옆 언니의 책장 속에서 계속 눈에 아른아른 했던 <칼의 노래>의 모습. 그리고 이번에 통영 여행이야기를 다시 쓰면서 거북선 모형의 사진을 보고, 정보 검색 중에 만나게 되었던 '통제영'이라는 단어. 이 책은 이렇게 눈에 익다가 미루면서 우연히 나에게 들어오게 되었다. 이름만 들으면 다 알법한 한국 작가들 중에서 내가 아직 한 작품도 읽어보지 못한 작가분들이 많다. 김훈 작가는 그 중 하나였다. 옴니버스 에세이에서 조그만 토막글을 읽어본 것 이외에는 작품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김훈의 문장을 제대로 알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야 약간은 느껴본 것 같다.

 

<칼의 노래>는 비장함 그 자체일 것만 같았다. 충무공 이순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왜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라는 구절은 뭐 지금이야 패러디로 많이들 이용되지만 비장함의 대명사로 남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칼의 노래>는 이 비장함과 더불어 이순신 장군이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을 내비치고 있다. 이 감정들을, <칼의 노래>는 전쟁상황에서 영웅의 행위로써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입을 빌린 그의 목소리로 보여주면서 줄기차게 가슴을 때린다. 그것도 엄청난 힘으로. 책 전체를 아우르는 분위기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보다는 일정하게 바람타고 흔들리는 불꽃같다. 하지만 상상할 수도 없는 먼 옛날의 그 사람이 실제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시종일관 그가 외치는 자연적인 죽음, 그리고 그가 어깨에 짊어진 백성과 조선과 왕의 무게가 나에게도 너무나 크게 느껴질 정도로. 조용히 폭발하는 그의 내면의 고민과 생각들이 내 속에도 깊이 남았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과 더불어 소중한 것들을 얻었다. 책 속의 하나하나의 문장들이다. 조용한듯, 휘몰아치는 듯, 내리치는 듯한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책을 빠른 속도로 읽곤 하는 내가 책 넘김을 멈출 정도로 매료되었다. 끝부분, 그의 눈으로 보이는 고요한 싸움 뒤에서의 관음포의 노을이 잊혀지지 않는다.

 

'한국문학의 희귀한 스타일리스트'라고 불리는 김훈 작가. 사실 스타일리스트라는 단어는 왠지 좀 가벼운 느낌이 들어서 바꾸어 말하고 싶다. '멋'이라는 말로.

그의 펜 끝에서 제대로 멋들어지는 단어들, 그의 솜씨가 무척이나 멋있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멋'을 창조한 김훈의 다음 글이 벌써부터 보고 싶다.

 

 

 

 

 

 

목이야 어디로 갔건 간에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몸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내가 알 수 없는 뼛속의 심연에서, 징징징, 칼이 울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등판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캄캄한 바다는 인광으로 뒤채었다. - 26p

 

울어지지 않는 울음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불덩어리가 내 몸 깊은 곳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방책, 아아 방책. 그때 나는 차라리 의금부 형틀에서 죽었기를 바랐다. 방책 없는 세상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또다시 방책을 찾는다. - 39p

 

내가 적을 죽이면 적은 백성을 죽였고 적이 나를 죽인다면 백성들은 더욱 죽어나갈 것이었는데, 그 백성들의 쌀을 뺏고 빼앗아 적과 내가 나누어 먹고 있었다. 나의 적은 백성의 적이었고, 나는 적의 적이었는데, 백성들의 곡식을 나와 나의 적이 먹고 있었다. - 117p

 

죽음은 저마다의 죽음처럼 보였다. 적어도, 널빤지에 매달려서 덤벼들다가 내 부하들의 창검과 화살을 받는 순간부터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들의 살아 있는 몸의 고통과 무서움은 각자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각자의 몫들은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무서움이었다 하더라도, 서로 소통될 수 없는 저마다의 몪이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끝은 적막했고, 적막한 끝들이 끝나서 쓰레기로 바다를 덮었다. 그 소통되지 않는 고통과 무서움의 운명 위에서, 혹시라도 칼을 버리고 적과 화해할 수도 있을 테지만 죽음은 끝내 소통되지 않는 각자의 몫이었고 나는 여전히 적의 적이었으며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나는 칼을 차고 있어야 했다.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 나의 연안은 이승의 바다였다. - 135p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는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 칼로 찰나를 겨눌 때 칼은 칼날에 닿지 않은, 닥쳐올 모든 찰나들을 겨눈다. 적 또한 그러하다. 공세 안에 수세가 살아 있지 않으면 죽는다. 그 반대도 또한 죽는다. 수와 공은 찰나마다 명멸한다. 적의 한 점을 겨누고 달려드는 공세는 허를 드러내서 적의 공세를 부른다. 가르며 나아가는 공세가 보이지 않는 수세의 무지개를 동시에 거느리지 못하면 공세는 곧 죽음이다. 적과 함께 춤추며 흐르되 흘러들어감이 없고, 흐르되 흐름의 밖에서 흐름의 안쪽을 찔러 마침내 거꾸로 흐르는 것이 칼이다. 칼은 죽음을 내어주면서 죽음을 받아낸다. 생사의 쓰레기는 땅 위로 널리고, 칼에는 존망의 찌꺼기가 묻지 않는다. - 202p

 


읽고 싶었던 김훈 작가의 세설이 절판되었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라는 제목. 얼마전까지만 해도 팔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내가 잘못봤나...)

이제는 회원중고에 거의 두배 가까이 가격으로 팔린다는. 그래도 갖고싶다.... ㅠㅠㅠㅠㅠㅠㅠ 살까....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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