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는 1919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태어난 화학자다. 그는 1943년 파시즘에 저항하는 지하 활동을 벌이다 체포돼 아우슈비츠 행 화물 열차를 타게 됐다. 거기서 그는 병에 걸리지도, 가스실로 가지도 않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난 뒤, 레비는 증언을 하려는 목적에서 <이것이 인간인가>(이현경 옮김, 돌베개 펴냄)를 썼다. 이 책은 여러 나라에 번역됐고, 그는 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우리나라에도 이 책은 번역됐다. 그의 <휴전>(이소영 옮김, 돌베개 펴냄)은 1946년에 쓴 <이것이 인간인가>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회상록이다.

프리모 레비가 실제로 겪은 일들을 적었기에 회상록이라고 말했지만, 한편으로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사실들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여과된 사실들"이다. 1962년, 이 책을 쓸 당시에 레비는 셋티모 토리네제의 수지 및 페인트 생산 공장의 기술 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야 집필 시간이 났다. 한 달에 한 장씩 200시간에 걸쳐 이 책을 썼다. 화학자니까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글을 쓴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규칙적인 집필이 가능했던 건 오래 전부터 이 책에 실린 내용을 반복적으로 친구들에게 들려줬기 때문이었다. "사실들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여과된 사실들"이라는 말의 본뜻이 여기에 있다.


▲ <휴전>(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돌베개 펴냄). ⓒ돌베개
너무나 바쁜 사람이라면 이 책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필요가 없다. 이 책의 내용은 바로 '휴전'이라는 단어에 있다. 분명 책의 내용은 "1945년 1월 초, 이미 가까워진 러시아 붉은 군대의 진격으로 독일군은 황급히 슐레지엔의 광산에서 철수했다"라는 문장으로, 그러니까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가던 무렵의 일들로 시작해서 결국에는 베를린 함락과 종전 이후까지 이어지는데, 제목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다.

내게는 이런 게 바로 화학자의 감각처럼 보인다. 프리모 레비는 정치적 수사나 분식에 동요하지 않는다. 정의와 분노를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정밀한 단어를 동원해서 자신이 본 것들에 대해서 말한다. 그래서 그는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 제목이 '휴전'인가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다음 구절을 보면,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맞아들일 시설이 갖춰진 수용소로 가기 위해, 우리의 집들을 대신할 만한 어떤 곳으로 가기 위해 짧고 안전하게 여행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이 희망은 훨씬 더 큰 어떤 희망의 일부였다. 그것은 격변과 오류와 대학살의 영겁이 흐른 뒤, 우리의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 흐른 뒤, 올바르고 곧은 세계, 자신의 자생적인 토대 위에 기적적으로 재건된 세계에 대한 희망이었다.

(…)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우리 가운데 극소수의 현자들만이 예견했던 일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자유,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자유, 아우슈비츠로부터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어서 꿈속에서만 감히 바라보아야 했던 그 자유가 찾아왔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데려다주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 주위에, 무자비하고 황량한 벌판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시련, 또 다른 피로, 또 다른 배고픔, 또 다른 추위, 또 다른 두려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56~57쪽)

또 다른 시련의 실상은 이렇다. 러시아 정찰대가 수용소에 도착한 1945년 1월 27일부터 마침내 토리노의 집에 도착하는 10월 19일까지 프리모 레비는 장장 10개월에 걸쳐서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독일 등을 거치는 기나긴 귀환 과정을 밟는다.

포로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자유의 몸도 아니다. 그는 마치 연옥을 떠도는 단테처럼 동유럽 전역을 헤맨다. 거긴 가스실이나 경비원이 없는, 느슨한 형태의 연옥이지만 결정적으로 거길 빠져나갈 수 있는 국경은 완강하게 봉쇄됐다.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가 있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향할 때,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자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 책의 기저에 나오는 우울함은 불가피하다. 그건 '휴전' 상태의 우울함이다. 이 우울함을 이해해야만 레비의 다음과 같은 말에 마음 깊이 동의할 수 있다.

우리는 패배한 독일인들과 파괴된 비엔나를 보면서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가슴 아팠다. 연민이 아니라 좀 더 폭넓은 의미의 아픔이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비참함과 혼동되는, 가혹하고 곧 닥쳐올 듯한 느낌, 회복될 수 없고 결정적이고 도처에 있는 병의 느낌, 유럽의, 세계의 뱃속에 궤양처럼, 미래 재앙의 씨앗처럼 자리 잡은 병마의 느낌과 혼동되는 아픔이었다. (319쪽)

여기까지는 사실들이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프리모 레비는 <휴전>에서 이 사실들을 여과시켜서 썼다. <휴전>이 뛰어난 문학 작품이 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는 마지막 부분에 그가 환영처럼, 혹은 열병처럼 직관적으로 보게 되는 이 우울함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시종일관 라블레적인 시각으로 귀환 과정에서 자신이 만난 인간들의 행태에 대해서 쓴다.

여기에는 어떤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가장 비극적인 것을 우리는 가장 비극적으로 묘사하지 못한다. 글쓰기의 역학에서 그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종종 가장 비극적인 것을 희극적인 것으로 묘사하는데, 그 때 가장 비극적인 묘사가 가능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휴전>은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나중에 슬루츠크라는 곳의 숲에서 여러 명의 처녀들과 함께 만나게 되는 그리스인 모르도 나훔, 어디를 가나 장사꾼적인, 혹은 사기꾼적인 수환을 발휘하는 체사레, 부나 수용소에서 레비에게 빵을 주었던, 하지만 종전 뒤에는 구두 수선공의 노예로 살아가다가 우연히 스타리예 도로기라는 곳에서 다시 재회한 플로라 등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하나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들은 속이고 증오하고 절망하고 아파하고, 그럼에도 다시 또 살아간다. 이 살아간다는 말에 어떤 희망 같은 걸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말하자면 레비의 눈에 그들은 곤충이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니까. 레비도 한 때 말하지 않았던가? 수용소에서는 단 한 번도 자살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고. 거기에서는 오직 살아갈 뿐이다.

희망에 대해서 말할 때도 아이러니는 발생한다. 인간의 희망이란 희망차게 말할 수가 없다. 그건 회의와 의심에 가득 차서 말해야만 한다. 희망차게 말할 때, 그건 정치적으로 오염된 희망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의 <휴전>은 희망을 말하는 대신에 인간을 얘기한다. 온갖 아이러니로 둘러싸인 인간이다.

인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세계에 대해서는 말하는 게 주저된다. 왜냐하면 그건 아이러니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의 세계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딱히 답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직 질문할 뿐이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고통 받고 죽어간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는 걸 우리도 안다면, 레비가 그랬듯이, 우리도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해서는 안 된다. 질문은 계속되어야만 할 것이다.

레오나르도와 나는 기억으로 가득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출발할 때의 인원 650명 중에 단 세 명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10개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되찾게 될까? 우리 자신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침식당하고 꺼져버렸을까? 돌아가는 우리는 더 풍요로워졌을까 아니면 더 가난해졌을까, 더 강해졌을까 아니면 더 공허해졌을까? 우리는 알지 못했다. (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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