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바이라면 우리 시대의 시민들도 모두 갖고 있다. (...) 1984년 7월 나는 몇 장의 사진을 찍어와 들여다보며 우리 시대의 이 완벽한 알리바이를 생각하고 또 그것을 슬퍼했다." 

소설가 조세희는 사북사태가 있은 지 몇 년 뒤 사북을 다녀와서 <침묵의 뿌리>에 이렇게 썼다. 그는 이 책에서 "나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이땅에 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동안 우리가 지어온 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 시대의 죄와 우리의 죄책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치의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 한나 아렌트는 '죄'와 '책임'을 구별해야 된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 모두 죄가 있다"라는 호소는 실제 죄를 지은 자를 무죄방면하는 데 일조할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죄'는 법적 개념이기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인 또는 인류에게는) 그와 다르게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누구나 짊어져야 할 '집단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경식<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지난 노무현의 죽음에서 나는 어떤 집단적 죄의식과 그에 대한 속죄의 행렬을 본 듯 하다. 나 또한도 어느정도의 미안함과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이 또 다른 희생자, 이를테면 노무현이 "죽음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갔다"고 선언했음에도 이미 죽어버린 한진중공업 김주익, 홍콩에서 자결한 농민 이경해, 이라크에서의 김선일, 대추리의 주민들, 부안과 새만금... 이런 이들에 대한 집단적 책임의식과 겹치면서 복잡한 심경이 되기도 했다.

벌써 많이 잊혀진, 9명의 목숨을 앗아간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아직 장례조차 치루지 못한 용산참사, 대한통운 택배노동자 투쟁에서 목숨을 내놓은 박종태. 그리고 기륭전자와 쌍용자동차. 이런 사건에 대한 집단적 책임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꽤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최소한 이 나라에서는.  

그 노력의 하나로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을 읽어볼 참이다. 
"우리는 80년대에 또 어떤 진행을 맞게 될까? 당신은 아는가?" 
1985년 나온 <침묵의 뿌리> 마지막 문장이다.
우리는 이미 그 후 20년을 알고 있다.
하지만 2009년, 그리고 다가올 2010년대 어떤 진행을 맞게 될지 알지 못한다.
'침묵의 뿌리'를 찾아 캐내고 싶다.  

 
<한겨레 서평>-----------------------------------

인권침해 감추는 ‘3가지 끔찍한 논리’ 
 

“용산참사 과잉진압 안해” 문자적 부인
“정당한 공무집행”
해석적 부인
“체제전복 시도 말라”
함축적 부인
피해자도 침묵하게 하는 메커니즘 고발 


가령 당신은 직장에서 당신의 인사고과 책임자가 한 직원에게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걸 언뜻 들었다. 또는 마을에서 나치 부대원들이 민간인을 총살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치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이렇다. ‘눈감아 버린다/못본 체한다/보고 싶은 것만 본다/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모르는 게 약이다/그건 나와 무관해/침묵의 음모/괜한 평지풍파 일으키지 마라/전체 사회가 현실을 부정하고 있어/차라리 몰랐다면/외면해 버렸지/심지어 자신도 인정하지 않았어.’

사회학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스탠리 코언 교수가 쓴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States of Denial)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며, 타인의 고통을 알게 됐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의 소산이다. 20세기 이후 국가권력이 저지른 인권침해의 메커니즘과 이를 방관한 대중심리의 속살을 사회학과 심리학, 인식론의 틀을 통해 파헤치고 있는 저작이다.

지은이 코언은 유대인으로서 1990년 이스라엘 인권단체의 일원으로 이스라엘 당국이 상습적으로 팔레스타인 구금자를 고문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가 이른바 ‘부인의 정치’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런 일이 없었다는 새빨간 부인에서, 그가 속한 인권단체가 애당초 편향적이며 배후세력에 속아 넘어갔다는 흠집내기, 비슷한 일이 일어났으나 그것을 고문이라 부르기 어렵다는 호칭 변경 등 정당화 논리가 동원됐다. 이른바 이스라엘 현실에서 인권침해는 일정 부분 감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고, 어쨌든 이런 문제를 계속 듣고 싶지 않다는 ‘암묵적 카르텔’ 속에서 그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졌다. 그는 자신이 속했다고 믿었던 진보 그룹마저 고문사건에 침묵하는 데 더 충격을 받았다. 


»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작은 공감과 비인간성에 대한 작은 저항이 세상을 바꾼다. 오른쪽 사진은 용산참사 현장에서 희생자 영정을 들고 묵념중인 유가족. 왼쪽은 1969년 비아프라 내전 당시 굶주려 아사 직전에 놓인 아이의 모습.  

이 경험은 이 책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코언이 인권침해와 이로 인한 인간의 고통을 분석하는 틀은 ‘부인’(Denial)이라는 개념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부인을 심리적 방어기제로 개념화했는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편한 사실에 직면했을 때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많아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코언은 인권을 침해한 가해자뿐만 아니라 이를 보거나 인지한 관찰자, 심지어는 피해자조차도 때로는 사실 정보를 어떤 식으로든 부정하거나 제쳐두거나 재해석한다고 말한다.

인권침해를 부인하는 메커니즘은 문자 그대로 사실을 부인하는 ‘문자적 부인’, 사실은 인정하지만 다른 해석을 갖다 대는 ‘해석적 부인’, 사실과 그 해석은 부정하지 않지만 그에 따른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함축적 부인’으로 나뉜다.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국가권력은 “학살은 없었다”(문자적 부인)고 사실 자체를 공식 부인한다. 다음은 완곡어법이나 초점을 흐리는 용어를 써서 “실제론 그렇지 않다”(해석적 부인)고 주장한다. 인종청소를 인구교체로, 학살을 부수적 피해로 표현하는 식이다. 영국군은 북아일랜드에서 ‘고문’을 자행한 뒤에 이를 ‘집중 심문’이라고 표현했다. 인권침해 증거가 너무 많거나 여론의 향배에 따라 “그 사건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함축적 부인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올해 초 일어난 용산참사에서는 3가지 부인논리가 다 동원됐다. “경찰의 과잉진압은 없었다.”(문자적 부인) “사망자 발생은 사실이지만 정당한 공무집행중 일어난 것으로 인권침해라 할 수 없다.”(해석적 부인) “진압 책임자 사퇴 주장은 반정부세력의 체제전복 시도다.”(함축적 부인)

코언은 이 책에서 아르메니아 대학살에서부터,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집시 대학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주민 탄압, 소련 스탈린의 인권유린,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 아르헨티나 군부의 더러운 전쟁, 동티모르·르완다 학살,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민간인 학살 등 20세기 이후 발생한 다양한 역사적 인권침해 사건들을 종횡하고 있다. 권위적 국가권력의 인명학살과 인권유린은 이를 바라만 보는 방관국가들에 의해 더욱 악화됐다. 1992년 뼈만 남은 보스니아 무슬림 주민들의 이미지와 함께 세르비아 강제수용소의 참상이 폭로되었을 때 미국 정부는 아는 바 없다고 잡아떼다 결국 처음부터 알았다고 인정했다. 참상을 알고도 모른 척 부인했던 것이다.

코언이 이스라엘에서 몸소 체험했다시피 ‘부인’이 일부 우익세력이나 권위주의 국가권력 혹은 가해자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좌파 지식인들도 자기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회가 저지른 잘못을 비판하려 들지 않았다. 스탈린이 고문과 자의적 구금을 자행하고 굴락 강제수용소를 설치하던 시점에 소련을 방문했던 그들은 문제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보긴 했지만 자기가 본 것에 담긴 의미를 부인했다. 코언은 그런 태도가 공산주의 평등사회라는 대의명분에 해를 끼칠지 모른다는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다고 꼬집는다.

코언은 인권침해와 이에 따른 인간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재생산하는 데에는 가해자와 관찰자(방관자)의 완고한 ‘부인’ 제도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가해 권력의 인권침해 부인은 이를 방관하는 일반대중의 태도와 무관할 수 없으며, 일반대중의 부인은 가해 권력의 행위를 정당화해주는 것이다.
 
» 인권침해 감추는 ‘3가지 끔찍한 논리’
 
코언은 타인의 고통에 눈감는 상태, 곧 ‘부인’과 자기기만은 인간 존재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코언은 왜 그 사건에 침묵하고 부인하는지 묻기보다 대다수가 부인하지만 왜 어떤 이들은 이를 ‘시인’하고 인권단체에 가입하며 행동에 나서는가, 왜 어떤 사람은 권위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이타적 인간들이 더욱 많아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인간을 양성하고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 책을 옮긴 성공회대 조효제 교수는 “코언의 작업은 지금까지 인권침해 연구와 인권운동이 상정해온 ‘사실→진상규명→처벌·제재→재발방지’라는 문제 해결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한다”며 “기존 관점은 인권침해 사실이 폭로되어도 왜 가해자는 끝까지 부인하기 십상이고 왜 관찰자들은 엄연한 사실 앞에서도 눈을 감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코언은 오랫동안 방치돼온 인권의 잃어버린 고리, 곧 현실의 부인 메커니즘을 해부함으로써 21세기 인권운동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것이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
“인권은 타인 고통에 대한 공감과 정치적 연대”
‘잔인한 국가…’ 저자 코언 교수
 
 


» 스탠리 코언(67) 영국 런던정경대학 명예교수

20세기 인권의 격랑을 온몸으로 헤쳐온 인물. 인권과 일탈사회학·범죄사회학 분야의 독보적인 학자. 지행합일의 행동하는 지식인.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을 쓴 스탠리 코언(67·사진) 영국 런던정경대학 명예교수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그는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권침해와 인간 고통이라는 주제를 평생 탐구해온 학자이자 인권운동에 매진해온 운동가이다. 유대인인 그는 남아공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이스라엘로 ‘귀향’해 18년을 살다가 현재 영국에 살고 있는 흔치 않은 궤적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1942년 요하네스버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학생 시절 남아공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 인종분리정책) 반대운동에 투신했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타향살이를 해온 부모와 유대인 동포사회의 영향 아래 사회주의적 청년 시온주의 운동에 빠져들었다.

그 자신이 회고하는바 유년기에 겪었던 경험은 그의 평생의 학문세계와 삶을 규정하는 원초적 밑불을 이룬다. “1950년대 요하네스버그의 한겨울밤. 남아공 여느 중산층 집처럼 우리 집도 아버지 출장 때면 야경꾼을 부르곤 했는데, 줄루족 출신의 야경꾼 노인이 외투 깃을 올리고 웅크린 채 숯불 곁에서 손을 비비는 것을 창 너머로 보았다. 오리털 이불이 선사하는 포근한 잠자리에 들다가 나는 퍼뜩 왜 저 노인은 밖에 있고 나는 안에 있는가 생각했다. … 왜 그들은 나를 주인나리라고 부르는 걸까. … 훗날 아파르트헤이트, 곧 인종차별과 특권, 불의 등을 사회학적으로 고민할 때도 왠지 마음이 편치 않던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코언의 학문은 범죄·일탈 사회학 시기와 인권의 시기로 나뉘는데, 1972년 런던에서 출간된 <대중의 적과 도덕적 공황>은 지금까지도 범죄사회학 분야의 손꼽히는 저작으로 알려졌다. 코언의 인권사상은 계몽주의적 휴머니즘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인권은 ‘인간’과 ‘권리’로 이뤄진 개념이고 권리 담론의 바탕에는 인도적 휴머니즘이 깔려 있어야 하며, 다른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를 정치적 연대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권의 깊은 의미라고 코언은 말한다.

영국 에식스대학에서 촉망받는 교수생활을 하던 1980년 그는 이스라엘 헤브루대학의 초청을 받아 가족과 함께 ‘귀향’을 결행했다. 그러나 그의 이상과 이스라엘의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헤브루대학에서 이스라엘 범죄 현황을 연구하다, 그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인권을 대변하는 운동으로 나아간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미국의 행동하는 지성 노엄 촘스키와 교분을 맺게 된다. 1987년 팔레스타인 주민의 봉기(인티파다) 직후 이스라엘 당국의 구타·고문·살상·추방 등의 실상이 인권단체 보고서를 통해 드러났지만 진보 자유주의자들조차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데 그는 절망했다. 결국 그는 98년 ‘이향’을 결행한다.

코언은 현재 파킨슨병 선고를 받고 투병중이라고 한다. 그는 촘스키가 가장 존경하는 사회학자이기도 하다. 촘스키는 코언 기념논총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우리 미래에 희망이 있다면 코언이 용기있고 헌신적이고 정직하게 걸어간 길을 다른 사람들도 따라갈 것이기 때문이리라.”  

허미경 기자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로이카 2009-06-07 0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처럼님 안녕하세요. 오래 전 조세희의 저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서경식과 코언의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맥락을 잘 짚으신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나무처럼 2009-06-07 12:16   좋아요 0 | URL
네.. 반가와요. 죄의식과 책임에 대해 조세희의 글이 깊다면 서경식은 그 깊이를 확장시키는 것 같아요. 코언은 우선 매우 두꺼울 듯 하군요^^

머큐리 2009-06-07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찜해두고 있어요...나중에 나무처럼님이 리뷰해 주시겠죠 ??

나무처럼 2009-06-07 19:52   좋아요 0 | URL
제 리뷰가 워낙 시원치 않아서^^;
 

"고통은 계량되지 않는다"
- 고통을 수치로 환산하고 계량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상화, 타자화를 경계할 것인가

또한 '증언의 도구화'를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 것인가 

-------------------------------- 

고통을 말하고 듣는다는 것
(정유진 / 오키나와대학 특별연구원 , yujinblue@yahoo.co.kr> ) 

 
<시민이 그리는 원자폭탄 그림>을 둘러싼 어떤 정치

기지촌 여성운동단체인 두레방,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할 때,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그들의 편>에 서서 일한다고 간주되는 내가 오히려 <그들의> 고통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자괴감같은 것이었다. 그런 시달림은, 정도는 달라졌지만, 2007년 현재 일본 교토에서 생활하는 과정에서도 문득문득 나를 덮치곤 한다. 이 글은 NHK히로시마 방송국이 지난 1974년과 75년에 거쳐, 원자폭탄의 참화를 그림으로서 남겨 두고자하는 취지로 기획한 <시민이 그리는 원자폭탄 그림(市民が描いた原爆の繪)>에 관한 이야기를, 고통 담론을 둘러싼 문제의식(혹은 나의 자괴감)에 비추어 본 소고이다.

어떤 전제 -고통은, 당사자 밖에 이해할 수 없다?

"원자폭탄 피해자들은 상상의 너머에서 서성거리며 이야기 하고 있는데 우리는 마치 다 아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우리는 피폭자들이 그린 <지옥화>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원자폭탄 체험과 관련하여 자주 등장하는 위와 같은 말들. 나는 타인의 고통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어떤 암묵적인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감정이나 체험이라는 것이, 개개인의 신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이기 때문에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라면, 타인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단정은 어떻게 가능한가? 단정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은 “피해자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미리 말해두고자 한다.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나의 문제제기는 타인의 고통이 내 몸 안에 있을 가능성, 나의 고통이 타인의 몸 안에 있을 가능성, 혹은 서로의 몸과 몸사이에 고통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단언은, 고통을 계량의 문제로서 다루려고 하는 시선의 결과이기도 하다. 고통을 계량의 대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과 관련한 고통이기때문이야말로, 오히려 “혹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희망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설령 그것이 어떤 도박과 같은 것일지라도,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 가능성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고통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라는 식으로 설정되어 버릴 때, 결국 피해자의 경험은, 고통은, 대상화, 타자화, 본질되는 경향성을 갖게되기 때문이다. 아프다는 감정은 (그것이 마음이든 몸이든)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처한 여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안에 가두어 고정시키려는 본질화된 시선은 피해자의 역사성을 억압한다.
군 위안부 여성이 어린 나이에 강제연행되어 겪었던 성폭력의 고통, 간신히 살아돌아왔지만 ‘몸이 망가져 정상적인 결혼’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느꼈던 고통, 증언대에 서서 본인의 체험을 이야기할 때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시선에 의한 고통은 모두 제각각 다른 성격의 고통일 것이다. ‘어린 나이에 강제연행되어 겪었던 성폭력의 고통’ 만이 반복될 때 그들의 체험은 ‘식민지치하에서’라는 식으로 현재와는 단절된 과거의 일로서만 의미를 갖게 되며, 그러한 의미화 과정이 피해자를 억압하는 것과 맞물리게 된다.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 줄 아느냐"라는 고발의 정치. 혹은 고통의 비참함을 강조하면서, ‘우리민족의, 여중생의, 할머니의, 대추리주민의’라는 식으로 ‘피해자의’라는 소유격을 절대화하면 할 수록 피해를 받았다고 간주되는 그들의 고통은 영구적으로 변화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시선은, 결국(그것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관계라는 것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는 고통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간과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피해자를 규정지으려는 논의보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받고 있다고 간주되는 그들과 나와의 거리(차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어떠한 맥락에서 그것이 의미화되고 있는지 되묻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정치공간은 생성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피해자, 당사자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사건을 둘러싼 이해관계에 의해 변화할 수 있는 유동적 개념이다. 정치적 이해관계(利害關係)를 논의할 수 있는 장(자리)가 만들어지고, 그 공간에서의 논의를 통해 이해(利害)라는 것은 상황에 의해, 맥락에 의해 변화될 수 있음을, 관계(關係) 역시 다르게 구성될 수 있다는 인식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물철학자인 하러웨이(Donna J. Haraway)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이 아니라 부분적이며 상황적 지식에 천착했던 것은 이해관계의 변화가능성에 대한 통찰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증언을 듣는다는 것

“우리들이 원자폭탄의 참화를 경험하는 사태가 발생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원자폭탄 피해자들은 스스로의 체험을 증언하는 것이다”
“원자폭탄의 피해자들은 피해의 실상뿐만아니라, 핵근절을 호소하고 있다”
“원자폭탄 피해자들은 스스로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자기만 살아남았다고 하는 찝찝함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목적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다”
“(시민이 그리는 원자폭탄 그림은) 원자폭탄 피해라는 직접 체험의 기억을 적나라하게 다음 세대에 계승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NHK히로시마 방송국이 지난 1974-1975년에 기획한 <시민이 그리는 원자폭탄 그림>에 대한 “평가(의미부여)”들이다. <시민이 그리는 원자폭탄 그림>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는 이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또 요구하고 있는가. 증언이라는 일은 왜 중요시되고 있는가. <전쟁체험을 계승하기 위해(핵근절을 위해서>라는 식의 해석에 대하여 나는 저항감을 느낀다. 이 감정은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정치를 둘러싼 위계관계, 즉 큰 정치와 작은 정치라고 간주되는 위계적 구분에 관한 것이다.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의 체험을 말한다는 것이, 마치 <핵근절의 호소>와<전쟁체험의 계승>을 위한 기록으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다루어지는 문제이다. 이것은 개개의 고통이 역사라는 것을 보충하기 위한 재료, 하나의 도구로서 취급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라는 것은 큰 정치이고, 개인의 것으로 간주되는 고통은 작은 정치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때의 역사라는 것은 무엇을 위한 누구의 역사인가? 누가 그것을 결정하는가? 역사기술자라는 개인과 고통받은 개인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 개인들인가? 질문은 계속될 것이다.

두 번째는 <대의를 위한 올바른 증언>이라는 식의, 증언자에게 부여된 ‘주체화’의 문제일 것이다. 주체성이 부여된 것에 의해 위축되는 정치의 영역이란 무엇인가. 혹은 증언자에게 주체성을 담보시킴으로서 획득되는 정치의 영역이란 어떤 것인가. 원자폭탄의 피해자는 스스로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자기만 살아남았다고 하는 찝찝함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목적으로 그림을 그려서는 안되는 것일까. 고통과 피해의 실상만을 그려서는 안되는 것일까. 고통은 아프다는 감정 그 자체로만은 무언가 부족한 것, 불충분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왜...

이러한 논의에는 감정의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이항적인 정치의 구분과 고통을 타자화하려는 시선이 뒤얽혀 있다. 이 시선은 고통받는 몸을 억압하고, 몸과 몸사이의 엉겨있는 말들을 억압하고, 고통받는 몸들의 연대를 억압한다. <참의 고통>을 요구하고 <올바른 증언>을 전유하려는 시선은 수단로서의 고통을 요구하는 욕망의 시선이기도 하다.

피해자의 체험이 <핵근절을 위한 호소>로서, <계승해야하는 전쟁체험>으로서 의미화되는 것은 증언자와 청자 사이에서 일어난 우연한 결과일 뿐, 증언이라는 것이 핵근절을 위해서, 전쟁체험 계승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목적으로 상정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원폭체험이란, 계승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 피해자들이 처해있던 시간과 청자가 존재하는 현재라는 공간을 들락날락하면서 개입적으로 사고해야만 하는 어떤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이 그리는 원자폭탄 그림>에 얽혀있는 내러티브는 미완의 것이고 미정(未定)인 것이며, 그들의 목소리는 미지의 관계로서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시민이 그리는원자폭탄 그림>을 표본적 기억으로서, ‘성스런’ 기록으로서 피해자의 소유격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자기와 타인의 고통을 규정하거나 고발하기 보다는, 아프다고하는 신체감각을 관계적인 감정으로, 관계성으로 사고하려는 노력과 시도들은, 지금과는 다른 사회성(삶의 가능성)으로서의 “여성주의 평화”의 전망을 일구는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군 위안부 여성”, “기지촌 매춘여성”, 성매매산업에 합법적으로 종사할 권리를 요구하는 여성, 성폭력 ‘피해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혹은 병역기피자, 군의문사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혹은 그들의 침묵은 한국사회에 어떤 메아리로 남아있는가. 또한 어떤 울림을 가지고 작동하고 있는가. <시민이 그리는 원자폭탄 그림>을 통해 다시금 생각해 본다.

<그림출처>
http://www.pcf.city.hiroshima.jp/virtual/VirtualMuseum_j/visit/art/art00.html#

다음은 그림을 그린 분들의 설명입니다.
1.<쫓아오는 불을 피해 강에 뛰어들지만 많은 사람들이 떠내려갔다>,菅 葉子, 원폭 투하 당시 14세, 그림 그린 때 43세
2.<수십 명의 승객과 함께 타버린 시내전차와 바깥에 쓰러진 희생자>,橫山 正 ,원폭 투하 당시 36세, 그림 그린 때 66세
3.<거대한 불기둥>, 松室 一雄, 원폭 투하 당시 32세 그림 그린 때 61세
4.<건물에 깔려서 화염에 싸인 사람을 구하지못하고 그저 바라볼 뿐>, 宮地 臣子, 원폭 투하 당시 34세, 그림 그린 때 64세


*글을 퍼 가실 때에는 출처를 꼭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월간 언니네(www.unninet.co.kr) 2007년 8월 특집 '전쟁에 관한 그녀들의 기억'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대담은 2002년에 있었고 내가 이 글을 읽은 것은 2006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지금 읽어봐도 시의성이 있는 거 같다. 권터 그라스의 <나의 세기>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물론 <세계의 비참>도 2권 중간 쯤 읽다가 중단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게으름 때문에... 웬지 다시 읽으려면 1권부터 읽어야 할 거 같은데 엄두가 나질 않고...)  

우리로 치면, 한국과 일본, 오에 겐자부로와 김지하, 황석영 등이 했던 대담들이 예가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여기서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꽤 긴 글이고 생소한 사람들과 작품들이 나와 끝까지 읽기도, 읽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대담이지만, 무엇보다 <세계의 비참>이 어떤 의도로 쓰여졌는지를 알게 해주는 부분에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리고 지식인과 작가의 위치와 역할에도 많은 고민거리를 주고 있다.

................................................................................................................

귄터 그라스와 피에르 부르디외 - '진보적' 복고
<뉴레프트리뷰> 14호, 2002년 3-4월호

신자유주의가 정치적 퇴보를 사회 진보의 표준으로 만들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고 유럽연합을 이끄는 두 나라의 문화풍토에서 계몽의 운명에 대한 프랑스 사회학자와 독일 소설가의 대담.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 피에르 부르디외가 숨짐으로써, 세계는 가장 유명한 사회학자를 잃었으며 유럽의 좌파들은 지난 10년 동안 가장 열정적이며 권위 있던 목소리를 잃었다. 프랑스 남서부 외딴 곳에서 태어난 부르디외는 젊은 시절 철학자로 훈련받았으나 - 그는 알제리 수도 알제의 고등학교에서 한동안 가르쳤다 - 알제리 전쟁을 겪은 뒤 사회과학자로 탈바꿈했다. 전쟁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였으며 제4공화국이 전복된 해에 출판된 그의 첫번째 책은 <알제리 사회학>(Sociologie d'Algerie 1958)이다. 60년대 중반부터 그는 경험적 연구와 이론적 야심을 훌륭히 결합한 프랑스 사회에 대한 일련의 연구서를 내놨다.

그의 전 생애동안 중심 사상은 불평등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다양한 형태와 기제(메커니즘)들에 대한 장기간의 연구로 볼 수 있다. 1968년 5-6월의 봉기 훨씬 전에 그는 학생조직(<후계자들> Les Heritiers 1964)에 초점을 뒀으며 이 중요한 연구는 나중에 가르침(<재생산> La Reproduction 1970)과 교수집단(<호모 아카데미쿠스> Homo Academicus 1984)으로 확장됐다. 교육에 관한 논문들과 동시에 예술의 '문화의 장'에 대한 중요한 논문들도 나왔다. 이 논문들은 사진에서 출발해 박물관(<예술의 사랑: 유럽의 미술관과 대중> L'Amour de l'art 1966), 기호(<차이> La Distinction 1979), 그리고 19세기의 새로운 문학개념 생성(<예술의 규칙> Les Regles de l'art 1992)으로 확장됐다.

정치적으로 부르디외는 언제나 좌파였다. 미테랑 집권시절 사회당 정권에 질린 그는 1990년대 들어 날로 더 급진적인 글을 썼다. 1993년 프랑스 사회당이 도입한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인간에 끼친 여파에 대한 강력한 비판인 <세상의 비참>은 이런 태도 변화를 보여준다. 1995년 그는 쥐페 정부에 맞선 대규모 파업투쟁에 대한 지식인 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앞장섰으며, 그 이후 조스팽 정부에 대한 정치적 반대세력을 조직하고 대변했다. 그는 조스팽 개인에 대해서도 아주 비판적이었다. '저격수'방식 개입 연대망을 구축한 사람이며 행동하는 지성인 동시에, '좌파의 좌파' 운동가이며 유럽 사회운동의 옹호자인 그는, 말년에 프랑스 언론의 부패상과 지식인들의 타협주의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큰 미움을 샀다.

<행동하는 지성> 시리즈의 하나로 발간된 세르게 알리미(Serge Halimi)의 <새로운 감시견들>이 바로 이것이다. <뉴레프트 리뷰> 독자들은 그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의 대담과, 그의 생각을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생각과 나란히 비교한 알렉스 칼리니코스(Alex Callinicos)의 글을 기억할 것이다. 그의 정치적 비타협 정신이 잘 드러나는 1999년 그와 귄터 그라스의 대담을 소개함으로써 그를 기린다. 그는 누구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에밀 졸라와 장폴 사르트르를 계승했다.


--------------------------------------------------------------------------------

그라스: 독일에서는 사회학자와 작가가 얼굴을 맞대는 것이 흔치 않습니다. 한쪽엔 철학자들이 자리잡고 그 반대편에는 사회학자들이 앉으며, 작가들은 뒷방에 모여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죠. 우리가 이렇게 대담을 나누는 것 같은 일은 참 드뭅니다. 그러나 당신의 책 <세계의 비참>이나 제가 최근 쓴 책 <나의 세기>를 생각해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밑에서부터 나오는 이야기를 한다는 거 말입니다. 우리는 둘 다 사람들 머리 위로 떠드는 것도, 승리자의 위치에서 떠드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의 일에서 패배자와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 경계에 선 이들 쪽에 서 있기로 악명 높죠.

<세계의 비참>에서 당신을 포함한 저자들은 각자의 개성을 억누르고, 프랑스의 사회 조건들에 대한 뛰어난 지식보다는 그에 대한 이해에 집중했습니다. 이런 조건들은 분명히 다른 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겠죠. 작가인 저는 당신의 이야기들을 기초 자료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3세대 금속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어 사회에서 격리되는 `종킬(Jonquil) 거리'에 대한 묘사 같은 것들 말입니다. 다른 예를 들자면, 농촌을 떠나 파리로 와서는 밤 근무를 하면서 편지를 분류하는 젊은 여성 이야기도 있습니다. 몇년만 지나면 자신들의 꿈을 이뤄서 고향으로 돌아가 우편배달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모집에 응한 다른 젊은 여성들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끝내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고 영원히 우편물 분류원으로 남죠. 이런 일터에 대한 묘사 속에서 사회 문제가 슬로건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이런 것이 전 아주 좋습니다. 우리나라의 사회 관계에 대해 이렇게 쓴 책이 있으면 좋겠어요. 사실 어느 나라에나 이런 책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이제는 완전히 경제에 의해 대체된 정치의 실패의 결과에 대한 세밀한 연구들을 모아놓은 전집이 있던가요. 제 마음속에는 사회학의 질서 일반에 대한 한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이런 책들에는 유머가 없어요. 제 이야기에서는 중요한 구실을 하는 실패의 코미디 말입니다. 어떤 대립에서 나타나는 모순이라고 할까요. 왜 이런 게 없는 걸까요?

부르디외: 실제 삶을 겪은 이들로부터 경험을 직접 얻어내 기록하는 것에 압도되어서, 거리를 유지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너무 가슴 저미고 고통이나 아픔으로 가득 찬 몇몇 이야기는 책에서 빼야하는 게 아닌가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라스: 제가 유머를 거론한 것은, 비극과 코미디가 서로 배타적이지는 않으며 둘 사이의 경계가 유동적이라는 뜻에서 입니다.

부르디외: 우리가 원한 건, 독자들이 이 모순들을 꾸밈 없는 본디 모습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세운 한가지 지침은 문학적인 것을 피하자는 겁니다. 놀라실 수도 있겠지만 이런 드라마들을 접하게 되면 잘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원칙은 가능한 한 혹독하리 만치 직접적으로 묘사하자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이고 거의 견디기 어려운 폭력에 다가가기 위해서죠.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방법을 통해 문학성을 달성하기 위해 비문학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었기 때문에, 책은 과학적이었으며 제가 보기엔 문학적이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이유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등 많은 나라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만들어낸 폭력이 너무나 심해서, 순전히 개념적인 분석으로는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자유주의 정책 비판들은 정책의 결과에 대해서는 똑같이 적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라스: 이는 책에도 나타나더군요. 종종 인터뷰 진행자들이 대답에 충격을 받아서 말문이 막히고, 그래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생각의 흐름을 잃어버리더군요. 내부의 강력한 고통이 표현되기 때문이겠죠. 인터뷰 진행자들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거나 주장을 강요하는 식으로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앞에서 한 질문을 좀더 진행해보죠. 사회학자인 당신이나 작가인 저는, 계몽의 후예들입니다. 이 전통은 적어도 현재 독일과 프랑스에서만큼은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유럽의 계몽 과정이 실패했거나 뭔가 미비했다거나, 아니면 이제는 계몽이 필요없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계몽 과정에 결함이 있고 이 과정이 완성된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예를 들자면, 이성을 순수히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인 양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계몽이 처음 제시됐을 때 지녔던 상상력의 다양한 방식이 몇세기를 거치면서 사라졌고, 그렇게 사라진 것 가운데 하나가 유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건 몽테뉴인데요. 그리고 볼테르의 <캉디드(Candide)>나 디드로의 소설 <운명론자 자크(Jacques le fataliste)>에 보면 당시의 주변 상황이 오싹할 지경입니다만, 고통과 실패 속에서도 코믹하고 의기양양한 인물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저는 계몽의 일탈을 보여주는 증표는 웃는 법, 고통속에서도 웃는 법을 잊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패배했으나 승리자처럼 웃는 사람이 이 과정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부르디외: 그러나 계몽의 전통을 잃었다는 느낌과 신자유주의 전망의 전지구적 승리 사이에는 연관이 있습니다. 저는 신자유주의를 보수 혁명으로 봅니다. 이 용어는 과거를 복구하려는 것이지만 외관은 진보적이고, 퇴보를 진보의 모습으로 치장하는 이상한 혁명을 두고 독일에서 1,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쓴 용어죠. 이 혁명에 반대하는 이들을 반동적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로 이 작업은 성공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우리 두사람 모두 겪은 거잖아요. 우리는 쉽사리 구식이며, "답습하는 이들"이며 "퇴보하려는 이들"로 취급당하니 말이에요.

그라스: 공룡...

부르디외: 그렇죠. `진보적인' 복고를 위한 강력한 보수혁명입니다. 오늘 당신이 한 말 일부에도 이 영향이 나타납니다. 유머가 부족하다는 말 같은 경우요. 그러나 시절이 재미라고는 없어요! 진정 웃을 일은 없습니다.

그라스: 우리가 즐거운 시절을 살고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문학이 불러일으키는 지독한 웃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에 대한 또 다른 항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보수 혁명을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지금 신자유주의라고 팔고 다니는 것은 역사는 되돌아간다는 믿음을 지닌 19세기 맨체스터 자유주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50년대에도, 60년대에도, 심지어 70년대에도, 자본주의를 문명화하려는 시도가 유럽에서 꽤 성공적이었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계몽시대의 독창적이고 제멋대로인 후예라고 한다면, 서로를 어느정도씩 견제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는 어떤 종류의 책임을 떠안을 의무가 있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이를 사회적 시장 경제라고 부르며, 심지어 기민당(독일 최대의 우파 정당: 옮긴이) 안에서도 바이마르 공화국 때의 상황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걸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감대가 80년대 초반에 깨졌죠. 그리고 공산주의 위계질서가 무너진 이후, 신자유주의라고 이름을 바꿔 단 자본주의는 통제에서 벗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폭동을 일으켜도 된다고 느끼게 됩니다. 더 이상 균형을 맞출 세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엔 심지어 책임의식 있는 일부 자본가들까지 경고의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구가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있으며, 신자유주의가 자유시장의 대안은 없으며 신자유주의는 오류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공산주의가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공산국가 중앙위원회의 관료들이 이전에 그랬듯이 가톨릭도 도그마에 빠져서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구요.

부르디외: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힘은 적어도 유럽의 경우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정착시켰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슈뢰더(독일 총리), 블레어(영국 총리), 조스팽(프랑스 총리)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운운했습니다. 이 때문에 비판적인 분석이 극도로 어려워졌습니다. 논쟁의 용어가 모두 뒤집어졌으니까요.

그라스: 경제에 대한 투항이 나타나고 있죠.

부르디외: 동시에, 사민주의 정부의 왼쪽에서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1995년 총파업은 광범한 노동 대중과 지식인을 결집했습니다. 그 이후 실업자들이 조직한 유럽 전역의 행진, `불법체류자(sans-papiers)' 운동 같은 일련의 운동이 나타났습니다. 일종의 영구적인 소요 상태가 나타났고 그래서 권력을 쥔 사민주의자들은 사회주의적 논의 시늉을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비판적 운동은 여전히 약합니다. 여전히 개별 국가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주요 정치적 문제 하나는, 사민주의 정권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좌파적 자세를 어떻게 국제적인 수준에서 형성하느냐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럽 사회 운동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잠정적인 수준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우리 지식인들이 이 운동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입니다. 이는 아주 필수적인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적 전망과는 정반대로, 역사적으로 볼 때 모든 사회적 이익은 적극적인 투쟁을 통해 얻어냈습니다. 그래서 종종 이야기하듯 우리가 `사회적인 유럽(Social Europe)'을 원한다면, 유럽 사회운동을 조직해야 합니다. 저는 이 운동이 나타나도록 돕는 것이 지식인들의 중요한 책임이라고 믿습니다. 지배질서의 힘은 단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신념의 영역에 존재하는 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토피아적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회복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필요한 겁니다. 신자유주의의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는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말살하거나 낡아빠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라스: 아마도 사회주의적 또는 사민주의적 정당들이, 공산주의의 종말은 곧 사회주의의 종말이라고 부분적으로 믿게 된 탓도 있을 겁니다. 그들은 공산주의보다 훨씬 역사가 긴 유럽 노동운동에 대한 믿음을 잃었습니다. 자신의 전통과 결별하는 건 일종의 투항이죠. 이 결별은 스스로 자연의 법칙이라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와 동거하는 것으로 이어지구요. 1995년 프랑스 총파업을 말씀하셨는데, 독일에서도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작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금방 잊혀졌습니다. 몇년동안 저는 노동조합에 “일자리를 갖고 있는 노동자들만 돌봐서는 안된다. 그들이 일단 실업자가 되면 바닥 없는 구렁텅이로 빠지고 만다. 유럽 차원의 실업자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하려 애를 썼습니다. 유럽 통합이 경제적 측면에서만 이뤄졌다고 우리가 불평을 합니다만, 개별 국가의 틀을 깨고 국경을 넘나드는 조직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그동안 없었습니다. 지구화 슬로건에 대한 즉각적인 맞대응이 결여되어 있는 거죠. 우리는 여전히 일개 국가 틀에 갇혀 있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처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에서조차, (독일이) 프랑스의 성공적인 실험을 채택할 처지가 못됩니다. 게다가 독일을 비롯한 어디서도 지구적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비슷한 시도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편 많은 지식인들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킵니다. 그러니 소화불량만 생기죠. 지식인은 소리를 내야 합니다. 지식인들에게만 의지하는 걸 제가 신뢰하지 않는 이유가 이겁니다.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지식인'을 말하고 있지만, 적어도 독일내 제 경험으로는 지식인을 자동적으로 좌파로 연결시키는 것은 실수인 것같습니다. 20세기 역사는 몇가지 반대 사례를 보여줍니다. 예컨대 괴벨스는 지식인이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지식인이라는 사실은 질을 보장하는 것이 못됩니다. 프랑스 상황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수 있지만, 독일에서는 1968년에 저보다 훨씬 왼쪽에 있던 이들을 지금 찾아보려면 오른쪽으로 고개를 휙 비틀어야할 지경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극단적 우파쪽으로요. 당시 학생 지도자였던 버른트 라벨(Bernd Rabehl)은 지금 이 진영으로 옮긴 상태입니다. 제가 `지식인'이라는 말을 비판적으로 보는 또 다른 이유죠. 사실 <세계의 비참>은 전체 삶을 노조에 헌신한 이들이 지식인들보다 훨씬 놀라운 사회 경험을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그들은 실업자이거나 은퇴했으며 누구도 그들을 필요로 하지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힘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거죠.

부르디외: <세계의 비참>에서 저는 지식인들이 익히 아는 것보다 훨씬 온건하지만 유용한 구실을 그들에게 부과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북아프리카에 있을 때 제가 본 바로는 대중적인 글쟁이는 어떤 사안을 잘 아는 사람들을 대신해 그 사안을 표현해주려 글을 쓰거나 기술을 그들에게 빌려주는 사람입니다. 사회학자들이 바로 이런 이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지식인들과 다릅니다. 그들 대부분은 대체로 남들이 하는 말을 듣고 해석할 줄 알며, 글로 적어서 전달할 줄도 압니다. 어쩌면 이 말이, 일종의 길드를 말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생각하고 글을 쓸 시간이 있는 지식인들이 이런 일에 참여한다면 좋다고 봅니다. 물론 이 작업은 지식인에게는 아주 드믄 능력 곧 통상적인 이기심과 자기도취를 버릴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만.

그라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신자유주의에 동조하는 지식인들에게도 호소력이 있어야 하잖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영역에서 의심을 하는 부류가 하나 또는 둘 정도 있습니다. 그들은 지식인이라는 위치 때문에 그런 부류거나 계몽 사상 전통속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런 부류인데,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 광기 곧 돈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전 지구를 돌아다니는 것을 반대하지 않아도 되는지 약간 의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분별하게 또는 별다른 목적도 없이 2천, 3천 또는 1만명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합병 따위에 대한 의심이죠. 증권시장은 이익의 극대화만을 반영한다는 생각도 하죠. 우린 이런 의심하는 이들과 대화해야 합니다.

부르디외: 불행하게도, 문제는 보편적인 지혜라도 되는 양 우쭐대는 주류 논의에 맞서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효과적으로 싸우려면, 비판적인 논의를 확신시키고 대중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지금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또 당신도 그러시겠지만, 제 경우는 지식인 세계 밖의 대중들에 다가가기 위해 텔레비전에도 나갑니다.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침묵의 벽에 일종의 구멍을 내고 싶습니다. 이는 돈의 벽, 그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아주 모호합니다. 우리에게 말할 자리를 주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우리를 침묵시키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우린 주류 논의로부터 계속 공격을 받고 포위되지요. 언론인 절대 다수는 이런 논의의 무의식적인 공범이 되곤 합니다. 일치된 목소리에 파열을 내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프랑스에선, 아주 유명한 인물이 아니고서는 공공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아주 존경받는 인물이나 이 떼거리 집단을 깰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이들은 자족하고 침묵하고 그래서 계속 침묵할 거라는 점 때문에 존경받는 것이 거든요. 아주 극소수만이 명성 때문에 얻은 상징 자본 곧 떠들 수 있는 지위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남들에게 전할 수 있는 지위를 활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라스: 제가 이해하는 이야기체 소설은 언제나, 정확하게 말하면 <양철북> 이후부터지만요, 역사를 만들지 못하지만 역사의 영향을 받는 이들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피해자, 범죄인, 기회주의자, 동조자 같은 이들이요. 저는 이를 독일 문학 전통에서 얻었습니다. 만약 그림멜스하우젠(Grimmelshausen 17세기 독일 바로크문학 시대의 작가: 옮긴이)의 <모험가 짐플리치시무스(Simplicissimus)>가 아니었다면 30년전쟁 기간의 일상 생활을 우리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프랑스에도 여기에 비견될 예가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역사학자들의 글에 의존하면, 승리자에 대해서는 많은 걸 알게 되죠. 그러나 패배자들의 이야기는 있다고 하더라도 정확하지 못합니다. 문학은 여기서 일종의 메우기 기능을 하죠. 발언할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필요가 있을 때 개입함으로써요. 이 지점이 당신 책의 시발점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텔레비전을 말씀하셨는데, 다른 거대 기구들과 똑같이 텔레비전도 스스로의 미신을 키웁니다. 절대로 복종해야 하는 시청률이라는 미신을 요. 이런 대화가 주요 채널에 거의 등장하기 않고 <아테(ARTE)> 같은 방송에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거죠. 심지어 <노르드도이체 룬트푼크(Norddeutscher Rundfunk)>조차 이 대화의 방송을 거부했습니다. 우스운 측면이지만 작은 곳일수록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나중에 <브레멘라디오>가 들어와서 제 스튜디오의 책상에 모여앉게 된거구요.

50년대, 60년대의 패널토론에서 토크쇼가 생겨났습니다. 저는 토크쇼에 전혀 나가지 않는데요. 이런 형식은 가망이 없고, 생산해내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그런 쇼에서 이기는 사람은 가장 오래 이야기한 사람이거나 상대를 가장 심하게 무시한 사람이기 마련입니다. 대체로 주목할 말이라고는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뭔가 재미있는 순간이나 쟁점이 드러나는 순간에 앵커가 주제를 바꿔버리거든요. 우리 두 사람은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논쟁 전통의 후예들입니다. 두사람, 두가지 다른 생각, 두가지 경험이 서로를 보완하죠. 우리가 뭔가 진정 노력을 한다면 뭔가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이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것 곧 토론에서 하듯이 특정 주제를 다루는 중요한 대화의 양식으로 돌아갈 것을 텔레비전에 대해 권할 수 있을 겁니다.

부르디외: 당신의 목표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논의의 생산자들 곧 저술가, 예술가, 연구자들이 '생산 수단'을 다시 획득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여건이 마련되어야 할 겁니다. 약간은 구식인 마르크스의 용어를 일부러 썼습니다. 역설적으로, 저술가와 사상가들은 오늘날 생산 수단과 전송 수단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이것들을 통제하지 못하며 온갖 요령과 협잡을 이용해 짧은 프로그램에서나 주장을 제시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지식인을 대상으로 하는 제한적인 방송에 그것도 밤 11시에 방송될 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을 대중적인 방송채널에서 말하려고 하면, 당신이 지적하셨듯이 사회자가 즉각 제지하고 나설 겁니다. 이건 사실상 검열입니다.

그라스: 하지만 우린 불평에만 빠져서는 안되죠. 우린 언제나 소수였고 역사의 과정을 보면서 놀라운 것은 소수가 아주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한 전략과 책략을 개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시민의 자격으로 `스스로를 반복하지 말라!'는 문학의 기본법칙을 깨도록 강요받음을 느낍니다. 정치 영역에서는 옳은 것임을 우리가 알고 또 옳음이 증명된 것을 앵무새처럼 계속 반복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 하다보면 자기 목소리의 메아리를 계속 듣게 되고 정말 자기 스스로에게도 앵무새처럼 들리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분명 수많은 다양한 목소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의 말에 경청하는 이들을 찾으려면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일의 일부입니다.

부르디외: 당신의 작업, 예컨대 <나의 세기> 같은 작품에서 제가 존경스럽게 느끼는 것은, 많은 청중들에게 비판적이고 파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다양한 표현 수단을 탐구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은 계몽 시대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백과사전은 계몽 반대론에 맞서기 위해 새로운 소통 도구를 이용한 일종의 무기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혀 새로운 계몽 반대론에 맞서 싸워야할 처지입니다.

그라스: 그러나 여전히 소수로서요.

부르디외: 이 새로운 계몽 반대론은 계몽시대에 활개 친 반대론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강력합니다. 우리는 강력한 거대 다국적 언론 기업에 맞서고 있습니다. 이들은 극히 일부 영역을 뺀 전체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출판계에서조차 비판적인 책을 만들기가 날로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전혀 다른 방식의 연구를 수행하는 국제 저술가 또는 작가 단체를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각자가 자기 영역에서 싸움을 벌여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런 방식은 현재 상태에서 효과가 없다고 저는 봅니다. 제가 당신과 나누는 이 대화가 아주 중요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우리가 메시지를 구성해 전달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을 만들려고 시도해야 한다는 점에서 입니다. 텔레비전의 도구가 되는 데 그치지 말고,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통하는 수단을 만들어내야 하는 겁니다.

그라스: 예 물론, 그런데 일을 벌일 공간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놀랍다고 느끼는 일이 제게서 지금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국가의 기능 확대를 요구하게 되는 때가 오리라고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독일에서는 언제가 정부가 너무 과했으며 모두 위에 군림해 질서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정부의 영향력을 민주적인 통제 아래 둘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반대의 극단에 이르고 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무정부주의의 가장 깊은 야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념적으로는 한치도 닮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국가에서 완전히 벗어나자는 생각 말입니다. 이들의 메시지는 `벗어나자. 우리가 이제부터 접수하겠다'는 겁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무엇보다 필수적인 개혁이 있다 하더라도, 제가 말하는 건 혁명적 수단이 아니라 개혁인데, 사기업의 세금인하 요구가 관철되고 경제가 승인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성사되지 못합니다. 이건 무정부주의자들이나 꿈꾸는 정부 권력의 박탈입니다. 또 당신도 저와 마찬가지로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정부가 다시 책임을 지고 사회를 다시 규율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기묘한 생각을 제가 하게 됐습니다.

부르디외: 이건 제가 먼저 말씀드린 것들을 뒤집어 놓은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결코 옹호할 수 없는 것을 옹호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나 `더 강한 정부'로 돌아가는 것만으로 족할까요? 보수 혁명이 쳐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른 국가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라스: 서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천성적으로 신자유주의는 경제에 영향을 끼치는 정부 활동만을 제거하고 싶어합니다. 정부는 경찰을 소집해서 공공 질서를 유지해야 하고, 이는 신자유주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부가 사회 영역을 규제할 권한을 빼앗기고 장애인, 어린이, 노약자 뿐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소외됐거나 아직 참여하지도 못한 모든 계층을 책임질 힘을 빼앗기면, 또 지구화로 도피함으로써 모든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경제형태가 퍼지게 되면, 그 때는 사회가 정부를 통해 복지와 사회적 공급을 회복하기 위해 개입해야 합니다. 무책임은 신자유주의 전망의 조직 원리입니다.

부르디외: <나의 세기>에서 당신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상기시켰습니다. 그 가운데 몇가지가 제게는 감동적이었습니다. 리프크네히트(Liebknecht)가 연설하는 모임에 갔다가 자기 아버지의 목에다 오줌을 싼 어린 소년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것이 사적인 회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주의를 발견하는 아주 독창적인 방식인 것은 분명합니다... 윙거와 레마르크에 대해 당신이 할 수밖에 없었던 말들도 참 좋더군요. 행간에서 당신은 지식인들이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해 비판적일 때조차 그런 사건의 공범이 되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에 대한 당신의 견해도 좋습니다. 이건 우리가 통하는 어떤 것이죠. 저도 하이데거의 수사(레토릭)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수사는 아주 최근까지도 프랑스에서 대 혼란을 유발했죠.

그라스: 프랑스 지식인들이 윙거(Junger) [옮긴이의 인물 소개] 와 하이데거에 매혹당하는 건, 저를 즐겁게 만드는 일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왜냐하면 프랑스와 독일이 상대에 대해 품고 있는 상투적인 생각을 완전히 뒤집기 때문입니다. 독일에 치명적인 결과를 유발한 모호한 사상을 프랑스에서 그렇게 높이 평가한다는 건 정말 바보스런 일입니다.

부르디외: 제 경우는 새로운 하이데거 숭배에 분명히 반대했기 때문에 완전히 고립당했습니다. 근대적 반계몽주의에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나라에서 여전히 계몽에 대한 믿음을 지키려고 하는 프랑스인으로 사는 건 즐거운 것이 못됩니다. 제 눈에는 프랑스공화국의 대통령이 윙거에게 훈장을 주는 건 소름끼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파리에서 윙거를 보수 혁명주의자로 묘사하면, 저는 그의 이른바 '이론적' 글들과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시절 일상생활을 묘사한 일기를 분석했습니다만, 고루한 국수주의자 등으로 의심받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어떤 형태의 국제주의조차 의심받는 시절입니다.

그라스: 리프크네히트 이야기로 돌아가고 싶군요. 이 이야기에 나오는 가족은, 아들을 함께 데려가는 것이 전통입니다. 이 전통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사민주의노동자당 창당 주역: 옮긴이) 때부터 시작돼 칼 리프크네히트 때에도 계속됐죠. 아들은 아버지의 어깨 위에 앉아 대중 연설을 들은 거죠. 제가 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리프크네히트가 어려서부터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진보 운동에 나서도록 자극받았다는 것이고, 이와 동시에 집회에 열중한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어깨에서 내려오고 싶어하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자신의 목에 오줌을 싸자 아버지는 리프크네히트가 연설중인데도 아들을 때립니다. 사회주의자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이런 권위주의적 행동은,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아들이 입대하게 만듭니다. 그리곤 이 아들은 리프크네히트가 하지 말라고 한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의도적으로 비튼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저에게 말이죠.

윙거와 하이데거가 프랑스에서 명백하게 얻고 있는 명성으로 돌아가자면, 아마 프랑스 지식인들은 독일 계몽 사상가들에 주목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겁니다. 프랑스에 디드로와 볼테르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레싱(Lessing 18세기 독일의 극작가: 옮긴이)과 리히텐베르크(Lichtenberg 18세기 독일의 물리학자 겸 계몽사상가: 옮긴이)가 있습니다. 리히텐베르크는 게다가 위트도 넘치는 인물인데, 그의 풍자(boutades)는 아마 윙거의 어떤 글보다 프랑스인들에게 호소력이 클 겁니다.

부르디외: 좀더 가까운 예를 들자면,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신칸트학파 출신의 20세기 철학자: 옮긴이)가 계몽 사상 전통의 위대한 후예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는 프랑스에서 기껏 그저그런 호응을 얻는 데 그쳤습니다. 그의 큰 적수인 하이데거가 아주 성공적이었던 것과 대비되는 것입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지위가 이렇게 뒤바뀌는 것은 언제나 저를 괴롭혀온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두 나라가 각자의 가장 매력 없는 측면들을 단순히 합치지 않도록 보장할 수 있을까? 역사의 아이러니에 의해서 프랑스인들은 독일의 최악을 취하고 독일인들은 프랑스에서 최악을 취한다는 인상을 종종 갖게 되지 않습니까.

그라스: <나의 세기>에서 저는, 학생 시절이던 1966~68년에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30년 뒤 수요일의 세미나에서 되돌아보는 교수를 묘사했습니다. 30년전에 그는 하이데거의 글을 따르는 거창한 철학에서 시작했고 30년만에 다시 이 철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급진주의의 파도에 직면했고 아도르노(Adorno)를 공개적으로 내놓고 공격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이것이 이 시절, 그러니까 이제는 1968로 약칭되는 시절의 아주 전형적인 인생 여정입니다.

저는 이 모든 사건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학생시위는 정당화됐으며 필요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68년의 가짜 혁명 대변인들이 허용하고 싶어 한 것 이상을 성취했습니다.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혁명의 기반도 없었지만 사회는 변화했습니다. 진보는 달팽이 같은 것이라고 말했을 때 제가 얼마나 조롱을 당했는지는 <달팽이의 일기장에서>에 묘사해 놨습니다. 물론 말로 큰 도약을 이루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마오주의자들이죠. 그러나 당신이 뛰어넘은 단계를, 당신 밑바닥에 놓여있는 사회는 재빨리 따라오지 않습니다. 사회를 훌쩍 뛰어넘은 뒤에 사회조건의 역풍을 맞게 되면 놀라서는 반혁명이라고 부르죠. 이 말은 공산주의가 상습적으로 쓰는 말인데, 이 말을 쓸 때는 공산주의 자체도 동요하곤 합니다. 이 전체에 대해 제대로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부르디외: 당시 저는 <후계자들>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노동계급, 프티부르주아, 부르주아 출신 학생들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묘사하는 내용입니다. 부르주아 학생들이 가장 급진적이었고 프티부르주아 학생들은 더 개량주의적이었습니다. 더 '보수적'으로 보인거죠.

그라스: 일반적으로 부유한 가정의 아들들은 감히 드러낼 수 없었던 아버지와의 갈등을 사회에 투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마찰을 빚으면 돈이 바닥나니까, 감히 엄두를 못 냈던 거구요.

부르디외: 이런 이중성은 68 운동에서 아주 분명했습니다. 다른 봉기들과 다름없이 말이죠. 그래서 실제로는 여러가지 혁명이 그 안에 공존했습니다. 아주 선명히 드러난 화려한 혁명이 있었죠. 이 혁명은 상당히 상징적이며 예술적인 성격을 띄었는데 외견상 아주 급진적이었고, 이 혁명을 이끈 이들은 나중에 상당히 보수적인 이들이 됐습니다. 이보다 더 아래에는 당시에는 우습고 개량주의적이라고 여겨지는 요구조건을 내건 다른 혁명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온건했지만 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한 그들이 요구한 것은, 강의법 변경, 고등교육 기회 확대 같은 것이었고, 이들의 요구는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이 된 당시의 급진적인 이들에게 조롱거리였습니다.

그라스: 70년대에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서는 경제가 계속 천연자원을 착취하도록 그냥 두면 결국 환경이 파괴될 것이라는 인식이 자라났습니다. 생태운동이 등장한 거죠. 그러나 사회주의 정당과 사민주의 정당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사회 문제에 집중하면서 생태 문제를 완전히 지나쳤거나, 생태 문제를 자신들의 요구에 적대적인 것으로 치부했습니다. 다른 모든 면에서는 진보적인 좌파 노조운동가들은 생태 문제가 부각되면 자신들의 일자리가 위험해질 것이라고 믿었으며, 이런 생각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우파와 신자유주의자들이 지성을 발휘하고 양식을 회복하기를 기대한다면, 좌파들에게도 똑같은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생태 문제는 노동, 고용 문제와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이해해야 하며, 모든 결정 사항은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부르디외: 그렇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생태주의자와 관련해서 한 말은 사민주의자들 경우에도 맞는 것입니다. 사회적 자유주의, 블레어주의, 제3의 길, 이런 가짜들은 지배당하는 계층에게 지배권력의 시각을 내면화하는 과정들입니다. 유럽인들은 내심으로 자신들의 문명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더 이상 전통을 옹호할 엄두를 못냅니다. 이 과정은 경제 영역에서 시작되어서 점차로 문화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 전통을 부끄러워 하고, 영화나 문학 등 온갖 영역에서 고리타분하다고 비난하는 그 전통을 옹호할 때는 자주 죄의식을 느낍니다.

그라스: 우리나라에서 사민당의 슈뢰더 진영은 자신들을 뺀 나머지를 전통주의자라고 몰아붙이면서 스스로는 근대화론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는 광적인 환원주의죠. 신자유주의자들은 독일과 다른나라의 사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무의미한 정의에 부닥쳐 좌초하는 걸 봐야만 흡족해 할 수 있습니다.

부르디외: 문화 문제를 이야기하자면, 저는 당신이 노벨상을 탔을 때 아주 기뻤습니다. 아주 훌륭한 작가가 제대로 대접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당신은 다른 이들이 구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는 예술의 과정을 옹호하고 소리높여 주장할 채비를 갖춘 유럽 작가라는 점 때문에도 아주 기뻤습니다. 당신의 소설 <너무나 멀리 떨어진>에 대한 반대 운동은, 이 소설이 문학적으로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구실을 내세우면서 등장했습니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표준이 뒤바뀌면서 문학이나 영화, 미술의 전위적 형식실험이 구닥다리로 치부되는 일이 늘고 있습니다. 위선적인 모더니즘에 저항하는 것이 날로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전형적으로 영-미 국가에서 출발한 것인데, 모든 낡은 형식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자처하지만 사실은 20세기의 어떤 예술혁명에도 못미치는 수준으로 퇴보하는 것입니다.

그라스: 노벨상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지금까지 그 상 없이도 잘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 상과 함께도 잘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침내 받았군!'이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너무 늦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로서는 70살이 훨씬 넘은 나이에 그 상이 내게 왔다는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더 젊은 작가, 한 35살의 작가가 그 상을 받는다면 상당히 큰 부담을 느끼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너무 많을 테니까요. 나는 역설적이게 노벨상과 관계를 맺게 됐으며 그럼에도 행복합니다. 내가 신경쓰게 되면 그것이 주제를 소진시킬 것입니다.

사람들이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제안들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거대 텔레비전 방송사들조차 잘못된 쪽으로 흐르고 있는 시청률 숭배 때문에 어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줘야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나라는 서로 싸워서 상대의 마지막 한방울의 피까지 모두 쏟아내게 했습니다.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러번의 전쟁과 그 전쟁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두 나라는 화해를 위해 온갖 수사를 지금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가르는 것은 단지 언어 장벽뿐이 아니며 우리가 덜 인식하고 있는 다른 차원들도 우리를 가르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됩니다. 저는 그 가운데 하나를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유럽의 공통적인 계몽의 과정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 말입니다. 민족국가가 지배하기 전에는 문제가 달랐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독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았고, 독일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괴테가 디드로의 작품을 번역했고, 두나라에서 검열에 맞서 계몽 사상을 확산시키려고 싸우던 소수 계층간에 일정한 의사소통이 이뤄졌습니다.

이 관계를 복원할 때입니다. 우리가 전해줘야 할 것은, 유럽의 계몽 사상이 우리에게 남겨준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계몽 사상이 추가적으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그 상태인 것이지만요. 계몽의 방법을 통해서 계몽 사상을 개혁하는 것 곧 필요성이 있는 모든 곳에서 계몽 사상을 수정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습니다. 신자유주의 지배와 신자유주의의 무책임한 부분을 비판하는 것은 옳은 것이지만, 유럽의 계몽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제가 이미 말했듯이, 자본주의의 마지막 형식과 사회주의의 초기 형식은 공히 계몽 사상의 자식들입니다. 그리고 아무튼 둘은 다시 한 탁자에 마주 앉을 필요가 있습니다.

부르디외: 당신이 조금은 과도하게 낙관적이라고 느껴지는군요. 불행하게도, 저는 이런 용어들로 문제가 제시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습니다. 현재 유럽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 정치 세력들의 양상이 계몽 사상의 유산을 진정한 위험에 처하게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역사학자 다니엘 로체(Daniel Roche)는 바로 얼마전 계몽 사상 전통의 의미가 프랑스와 독일에서 아주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책을 내놨습니다. '아우프클래룽(Aufklarung)'과 '루미에레(Lumieres)'가 독일과 프랑스가 완전히 공유하는 어떤 한가지 같아 보였을지라도 실제로는 서로 다른 뜻이라는 내용입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좀더 폭넓게 봐서 계몽과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러니까 과학 및 기술 진보와 이 진보에 대한 통제력이 파괴되는 걸 막으려면 분명히 극복해야 하는 큰 걸림돌입니다. 우리는 현재 사회 세력에 뿌리를 둔 새로운 이상주의를 창출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비록 구시대의 정치 비전으로 돌아가도록 부추긴다는 인상을 줄지라도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현재의 노조는 낡은 조직 형태입니다. 개혁과 변신, 스스로를 재설정하는 것이 필요하고 스스로 국제화 해야하며 합리적이 되어야 합니다. 또 사회과학의 업적을 자신들의 근거로 삼아야 합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면 말이죠.

그라스: 당신이 제시하는 것이 유토피아군요. 그렇게 하려면 노조운동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우리 모두 잘 압니다.

부르디외: 그러나 그 유토피아는 우리가 일정한 구실을 하는 유토피아입니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의 사회운동은 몇십년전보다 훨씬 힘이 약합니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운동은 강력한 '노동자 중심주의적' 전망을 지녔고 지식인들에 대해 아주 적대적이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그럴만했구요. 오늘날 위기에 처한 사회운동은 전반적으로 볼 때 비판에 대해 좀더 개방적이며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훨씬 더 사려깊어졌습니다. 갑자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새로운 유형의 비판을 훨씬 더 환영하게 됐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런 비판적이고 반성하는 사회운동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라스: 저는 이를 좀더 비관적으로 봅니다. 우리 두사람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목소리를 높이겠다고 약속할 수 있는 나이가 됐습니다. 비록 시간은 제한적이지만요. 저는 프랑스의 상황이 어떤지 모릅니다. 그러나 독일의 젊은세대 작가들은 계속 목소리를 내고 개입하는 계몽의 전통을 유지하려는 경향도, 관심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가장 좋은 뜻에서 우리의 짐을 덜어줄 이들이 더 이상 없다면, 유럽의 훌륭한 전통 가운데 하나는 사라지고 말 겁니다.


--------------------------------------------------------------------------------

[윙거 소개] 에른스트 윙거(1895~1998)는 하이델베르크 출생의 독일 작가이다. 1, 2차 세계대전에 독일군 장교로 참전했으며 1920-30년대는 군국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였으나 1939년 <대리석 절벽 위에서>라는 우화적인 작품을 통해 나치 이념 곧 독일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942년에는 1940년 프랑스 파리에서 독일군 장교로 주둔하면서 파블로 피카소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교류한 생활을 적은 일기 <정원과 거리들>을 발표했다. 이 때의 글들에 대해서 “유럽의 낡은 계급질서의 병폐를 보고 횡행하는 폭력에 맞서 평화와 자유를 역설하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 대담에서도 언급되지만, 나치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철학자 하이데거와 절친한 친구이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에 대해, 부르디외는 “정치적-형이상학적 쓰레기”라고 평했다. 부르디외가 본문에서 말하는 그에게 훈장을 준 프랑스 대통령은 미테랑 대통령인 것으로 보인다. 95년 그의 100회 생일을 즈음해 미테랑은 '여기 자유로운 인간이 있다'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그를 한껏 칭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감히 이 책에 대한 서평이나 리뷰를 쓰지 못하리라.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세기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책으로 <전태일 평전>이 꼽힌다면 21세기에는 이 책이 꼽힐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특히나 이 책에 있는(동영상으로 먼저 알려진) 고 김주익 열사 추도사 '전태일과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는 명문으로 길이 남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 이런 추도사는, 이런 책은 한갓 먹물들이 손끝을 놀려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나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아니 김하경 같은 소설가가 한 생각을 나도 했다는 점에서 많이 우쭐했다. <내 사랑 마창노련>이란 한국 기록문학의 역작을 만들어낸 그 김하경 말이다. 

그이의 아들은 지금 노동자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노동자 역사 한내'라는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얼마전 아들이 엄마인 김하경에 대한 글을 썼다. 그 글은 1987년 '사당'이 2009년 '용산'으로 이어져왔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김진숙의 글처럼 전태일과 김주익, 그리고 박종태, 한국 노동자들의 유서는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김하경의 <소금꽃나무> 서평(어디에 실렸던 글인지는 모르겠다)과 김하경의 아드님이 쓴 글을 같이 올린다.

가슴으로 쓴 글 
 - 김하경(소설가)

첫 인연

김진숙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건 1989년 겨울쯤으로 기억한다.

당시 <그해 여름>을 쓰기 위해 창원 통일중공업 노조를 취재하고 있었는데, 마산창원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해서, 때마침 부산지법에 있던 강금실씨(전 법무장관)가 혼자 기거한다는 얘기를 듣고 염치 불구하고 찾아가, 그의 아파트 방 한 칸에 눌러앉아 식객노릇을 하던 참이었다. 때마침 그 아파트는 부산의 서쪽 끝 사상 시외버스터미널과 가까운 동네에 있었고, 사상에서 마산까지는 5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서 버스 타고 부산과 마산을 왔다갔다하며 자료도 수집하고 인터뷰도 하고 그랬다.  

인터뷰가 없는 날은 가끔 부노련(부산노동조합총연합)의 행사도 기웃거리고 자료도 얻고 했는데, 그때 거기서 처음 <조공노동자신문>을 봤고, 신문을 만든 이가 중학교를 중퇴한, 그것도 여성 용접공 김진숙이란 사실에 깜짝 놀라서 단순한 호기심 차원에서 달려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글을 다 읽은 다음 나는 잠시 머리가 멍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한마디로 믿을 수 없었다. 말도 안돼. 학출이 대신 썼거나, 최소한 뒤에서 코치를 했거나, 아님 학출한테 글쓰기 훈련을 빡쎄게 받았거나....그렇다고 생각했다. 글을 써본 사람들은 쉽게 쓴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안다. 어려운 얘기를 어렵게 쓰는 게 쉬운 얘기를 쉽게 쓰기보다 더 힘들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그냥 말하듯 술술술 힘 안 들이고 쓰면서도 노동자의 생활과 생각을, 안 봐도 비디오처럼, 안 들어도 오디오처럼,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듯,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려면, 최소한 선수가 돼야 한다고, 글쓰기의 고수가  되야 한다고, 아니면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더욱이 새해 첫 논설치고는 파격적이었다. 다른 일간신문은 물론 다른 노동자신문과도 달랐다. 흔히 연두사설에는 보통 때보다 더 힘이 들어간다. 신문의 논지를 더욱 뚜렷이, 새해의 목표나 전망을 강하게 드러내야하므로, 목소리를 높이고 잔뜩 권위를 부풀리면서 여간 폼을 잡는 게 아니다. 감동이 목적이 아니라 가르침이 목적이기 때문에 관념어 추상어가 난무하는 건 물론이고, 첫째 둘째 셋째 등등 요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딱딱한 글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의 글에서는 판에 박은 듯한 천편일률적인 관념어 추상어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인다. 

그때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지금도 그때 읽은 글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시간이 많이 흘러 자세한 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걸로 짐작된다. ... 늙은 노동자가 새끼줄에 꿴 연탄 두 장을 들고 힘겹게 산동네 오르막길을 올라오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런 노동자들이 그나마 하루 연탄 두 장씩이나마 떨어뜨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추운 겨울 가난한 노동자가 연탄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그런 한 해가 되어야하지 않겠냐....고 끝난 걸로 기억된다.

그의 글은 처음부터 읽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분칠한 얼굴과 콧소리로 가장하는 싸구려 유혹과도 달랐고, 거창한 거대담론으로 기를 죽이듯 압박하는 당위성과도 달랐다. 아주 작고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조용조용 시작되는 그의 글은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한 발짝 두 발짝 들어가게 만든다. 그리고 어느 새 아무렇지도 않게 가난한 노동자의 일상에 뒤섞여 함께 밥 먹고 함께 일하고 함께 웃고 떠들다 잠이 들게 한다. 그들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한숨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그들의 얼굴에 깊이 팬 주름살 하나하나를 가만히 더듬고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콧마루는 시큰해지고 눈앞은 뿌옇게 흐려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낀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꽉 쥐기도 한다. 단결! 투쟁! 올 상반기 투쟁의 목표! 투쟁의 전망! 이런 단어나 느낌표조차 하나 없이도 몸과 마음은 결기로 단단해지고 뻣뻣하게 긴장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엄청난 변화다. 이런 변화야말로 진정 깊은 감동이고 강한 설득력이 아니고 무엇이랴.



염화시중의 미소

솔직히 말해 충격 그 자체였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글을 쓸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왔다. 노동자 김진숙의 글이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뇌관을 건드린 것이다. 혼자 몰래 삭이고 또 삭이던 치명적 약점 하나가 상처를 입은 것이다. 바로 지식인 콤플렉스였다. 김진숙의 글을 계기로  폭발하고 만 것이다. 구미호처럼 아홉 번 둔갑을 해도 노동자가 될 수 없다는 그 절망감. 지식인도 노동소설을 쓸 수 있다고 겨우 버티고 있던 얄팍한 사명감과 당위성이 한방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애진작에 노동소설을 쓰겠다고 떠들고 다니며 똥 폼을 잡은 내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부끄러웠는지, 취재와 인터뷰만으로 소설을 쓸 수 있다던 호언장담이 얼마나 허황된 욕심이고 오만이었는지,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대로 보따리 싸서 서울로 올라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해 여름>을 끝까지 완성한 것 역시 그의 글 덕분이었다. 그의 글이 나를 아프게도 했지만, 동시에 그 아픔이 나를 일으켜 주었다.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글을 써서 누군가를 감동시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써야 감동을 줄 수 있는지도 몰랐다. 김진숙의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써온 글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김진숙의 글이 감동적인 건 단지 그가 노동자라서가 아니었다. 그가 누구보다 노동자를 사랑하고 노동자의 삶에 대해 항상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게 뭔지, 아픔과 슬픔과 두려움이 뭔지를 예리하게 포착하여 잘 헤아리고 따뜻하게 보듬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진짜 감동적인 글을 쓰려면 노동자와 노동자의 삶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사랑을 가지면 되었다. 그 관심과 사랑이 진정이기만 하면 되었다. 한마디로 가슴으로 쓰면 되는 것이었다. 가슴으로 쓰는 글이 진정한 감동을 주는 글이었다. 그때서야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희망의 등불이 켜졌다. 바로 이거야! 가슴으로 쓰는 글! 

나도 한번 그런 글을 써보고 싶었다. 가슴으로 쓰는 글을 써보고 싶었다.

노동자냐 지식인이냐의 구분은 핑계일 뿐이었다. 손끝 글재주만으로 쓰느냐? 머리로 쓰느냐? 가슴으로 쓰느냐? 감동은 이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노동자가 썼냐 지식인이 썼냐의 차이에서 감동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 감동적인 글을 쓰려면 가슴으로 써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보다 인간과 삶을 가슴으로 사랑하며 살아왔기에, 그로 인해 누구보다 상처와 아픔을 많이 겪었기에, 그래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주제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오만이고 욕심인 줄은 나중에 알았지만, 그 때는 그나마도 없었으면 버티지도 살아가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나도 가슴으로 글을 써보리라.

이심전심이라고 했던가. 그의 글이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다가와 나의 가슴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지식인이 노동소설을 쓸 수 있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이 미소를 떠올린다. 

그 길로 나는 짐을 싸들고 다시 서울에서 마산으로 이사를 내려오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지역노동자들과 살을 부대끼며 함께 울고 웃고 살아가면서 <그해 여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전노협 창립과 동시에 상층 지도부 대부분이 구속 수배로 공백 상태가 되었다. 울산에서는 골리앗투쟁이 벌어지고 창원에서도 통일중공업 노조 이영일 열사가 분신하는 등으로 전노협 차원의 총파업이 내려진 상황이었다. 밖으로 뛰쳐나가 투쟁대열에 동참해야 하나 아니면 안에 틀어박혀 소설을 마저 끝내야 하나, 두 갈래 갈림길 앞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할 때마다 <조공노동자신문>을 떠올렸다. 그 신문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투쟁동참과 글쓰기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피가 튀고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투쟁하는 것과 똑같이, 투쟁하는 것처럼 치열하게 글을 쓴다면, 그런 글은 투쟁과 똑같다고, 하나라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 깨달음의 힘으로 나는 부족하나마 <그해 여름>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영도 앞바다도 울었다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한 뒤 인사차 부산을 찾았을 때가 1990년 말인지 1990년 초인지는 모르겠다. 겨울인 것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박창수 위원장이 강제 연행된 게 1991년 2월 10일 대기업연대회의 수련회장에서였으니까 아마도 그 이전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부산에 내려가 강금실씨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부노련 사무실을 찾았다.

마침 회의실에는 부산지역 노조간부들이 송곳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빼곡했다. 한 겨울인데도 뜨거운 열기가 후끈후끈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연단에는 박창수 한진중공업 위원장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지역적 공동파업이나 공동대응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던 걸로 추측된다. 그 회의실 맨 앞자리에 김진숙씨가 앉아있었다. 처음 얼굴을 본 게 그날이지 싶다. 무척 앳되 보였고, 열기 때문인지 볼이 발그레 상기되었고, 그 때문에 얼굴 전체가 복숭아처럼 발그레 빛났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박창수 열사의 장례식장에서 다시 김진숙을 만났다. 

그날 한진중공업 맞은 편 언덕받이 산동네는 까마귀떼가 덮친 것처럼 사람들로 새까맣게 뒤덮였다. 이른 아침부터 박창수 열사의 운구를 배웅하기 위해 할머니 아줌마 아이들이 몰려나와, 길을 메웠고, 장독대와 담장은 말할 것 없고 심지어 지붕 위까지 올라앉아 일제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생떼 같은 지아비와 애비를 잃은 젊은 아내와 어린 두 남매를 바라보면서, 하나같이 발갛게 부어오른 그들의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굵은 뼈마디가 불거진 손으로 눈물을 훔치던 검고 주름진 얼굴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장례식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오후 늦게서야 시작되었다. 기다리던 사람들의 얼굴엔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다. 몇몇 유명 인사들의 추도사가 지루하게 흘러가자 모두들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거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마이크가 터질듯 쩌렁쩌렁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저마다 누고? 하면서 목을 길게 빼밀고 앞쪽을 바라보았다. 부산시민들이 김진숙의 이름을 알게 된 계기가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박창수 열사여! 당신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러봅니다.”

김진숙이 한번씩 목 놓아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영도 앞 바다가 쩌렁쩌렁 울렸고, 흐느낌은 오열로 변했다. 장례식장은 순식간에 울음바다로 변했다.   

운구 행렬이 영도다리를 지나 시청 앞으로 향했다.  

“창수야, 일어나라. 일어나서 싸워라!”

온 부산이 다 일어나 울부짖는 듯 메아리치던 이 목소리, 이 목소가 <소금꽃나무>를 읽는 지금도 귓전을 울린다. 새삼 그때처럼 눈물이 또 흘러내린다.

1992년 나는 다시 서울에서 마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어느 날 누가 <연대와 실천>에 글 쓸 사람을 물어보기에 김진숙을 적극 추천했고, 정확한 날짜는 가물가물하지만 그 즈음 정식으로 얼굴을 맞대고 인사를 나눈 것 같다. 김진숙은 잦은 수배와 구속으로, 나는 서울과 마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노라고 매번 어긋나기만 했었다. 그런데 첫 만남인데도 흥분도 설렘도 없이 덤덤하기만 했다. 아마 그동안 많은 글을 읽어서 잘 안다고 착각한 모양이다. 마치 아주 오래 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여겨져 그랬는지도 모른다.



완벽주의자 = 지독한 노력파 

‘김진숙이 만난 사람들’(1994년 12월~ 1995년 5월)은 꽤 인기가 있어서 나도 그랬지만 그를 좋아하는 애독자가 참 많았다. 그런데 갑가기 그가 구속되는 바람에 연재가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석방된 뒤에도 그의 글은 다시 볼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무척 아쉬워했다. 그는 글쓰기에 대한 부담이 어찌나 큰지 진짜 감옥보다 더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누구보다 글쓰기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성격을 알기에 서운한 마음을 뒤로 한 채 그를 글 감옥에서 놓아 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김진숙은 완벽한 글쓰기로 꽤 정평이 나있다. 강의안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일 정도로 거의 완벽에 가깝다. 교육이나 연설을 의뢰했을 때 그에게 수락을 받기가 쉽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강의할 자신이 없으면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에 승낙하면 거의 백 프로 절대적으로 신뢰해도 좋다. 

이런 유명세에는 ‘지독한 노력파’라는 또 다른 별칭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는 항상 강의안이나 연설문 하나를 준비하는데도 엄청난 시간과 정성을 기울인다. 사전에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핵심 주제나 전달할 내용을 꼼꼼하고 정확하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건 물론 수많은 예를 찾아내 들어주며 쉬운 말로 정리한다. 그렇게 하여 하나의 완벽한 강의안이나 연설문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그의 강의안이나 연설문은 그 자체가 잘 쓰여진 하나의 작품에 비유되기도 한다.

<소금꽃나무>에 실린 글 중에는 강의안이나 집회장에서 한 연설문을 그대로 옮긴 것도 있다. 김진숙에게는 말과 글이 하나기에, 새롭게 고치거나 바꿀 이유가 없을 정도로 말과 일치하기에, 강의안이 연설문이 곧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고전 <전태일과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김진숙의 이름이 전국에 알려진 건, 그러니까 전국적으로 뜬 건 2003년 한진중공업노조 김주익 열사 추모사 때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의 교육과 강의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조합원도 많을 테고, 이래저래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겠지만, 부산역광장에서 낭독한 김주익 열사의 추모사가 인터넷으로 퍼져나간 뒤부터 그 이름이 전국적 지명도를 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글 한 편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전태일과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119쪽~123쪽)를 손꼽을 것 같다.

이 글은 한 시대를 풍미하다 잊혀 질 그런 글이 아니다. 아마도 노동문학의 고전으로 남아 영원히 우리 가슴에 기억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도,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콧마루가 시큰거리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고전의 반열에 올려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열사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김주익이 죽는 방식이 같은 나라.”(같은 글 123쪽)

노동자가 가혹한 운명을 지고 살아가야하는 이 비극의 땅을 이 한마디로 절절하게 표현한 문장을 나는 어디서도 읽어본 적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민주노조 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그냥 그렇게 살 걸 그랬습니다....못 본 척 못 들은 척 살걸 그랬습니다.....감지덕지 살 걸 그랬습니다.” (같은 글 120쪽~121쪽)

지면상 생략했지만 말 줄임표(....) 안에 들어간 내용은 반드시 읽어보아야 한다.

차라리 노예로, 짐승처럼, 벌레처럼 살았다면 최소한 이 젊은 열사들의 죽음만은 막을 수 있지 않았겠냐는 반어법 앞에서 회한과 허탈감이 밀려온다. 어쩌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품었냐는 그의 절규를 들으면서는 비수로 후벼 파는듯 가슴이 저며온다. 이런 추모사를 들으며 어떻게 카메라 렌즈가 눈물로 얼룩지고 부산역 광장이 눈물바다로 변하지 않을 수 있겠나.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국경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리는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그들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저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으므로 깨지는 겁니다. 만날 우리만 죽고 천날 우리만 깨집니다. 아무리 통곡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고스란히 되돌려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버이날 요구르트 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아빠를 기다리던 용찬이, 아빠 얼굴을 그려보며 일자리 구해줄테니 사랑하는 아빠, 빨리 오라던 혜민이. 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동지 여러분! 좀 달라야하지 않겠습니까?”(같은 글 123쪽)

이 마지막 살 떨리는 문장을 읽으면서 태연히 배를 깔고 엎드려 책장을 넘길 배짱이 나는 없다. 이런 문장을 읽고 있으면 저절로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똑바로 앉게 된다. 하긴 이 책은 결코 편한 책이 아니다. 벌러덩 누워서 술렁술렁 읽을 수 있는 책이 분명 아니다. 불편한 책이다. 읽다보면 왠지 벌을 서거나 야단을 맞는 기분이 든다. 한마디 한마디 아픈 데만 골라 콕콕 찔러댄다. 그런데도 신기하게도 반박하거나 핑계대거나 도망갈 수가 없다. 김진숙의 글이라서 그럴 것이다.  

사실 이런 글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김진숙이기에 쓸 수 있다. 아니 김진숙만이 쓸 수 있다. 그가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이유다. 



산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바치는 추모사

그런데 말이다. 나는 그의 추모사가 얼마나 문학적으로 탁월한지, 얼마나 감동적인지를 말하면서도 자꾸만 속이 거북하다. 마음에 안 든다. 칭찬할 게 따로 있지, 어떻게 죽은 자를 기리는 글을 잘 썼다고 추켜세운단 말인가. 

반대로 생각해보면 김진숙의 추모사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은 그만큼 열사가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줄줄이 이어진 열사들의 죽음이 김진숙으로 하여금 억장 무너지는 슬픔과 치 떨리는 분노에 찬  추모사를 쓰게 한 것이다. 결국 그 추모사는 수많은 열사들에 의해 만들어낸 거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잘 썼다고, 감동적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칭찬할 수 있나. 아무리 잘 써도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함부로 칭찬도 할 수 없는 글, 그것이 바로 추모사다.

추모사는 쓰기 힘들다. 꺼린다. 좋은 일도 아니고 죽은 사람 일에 나서는 데, 그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고 뽀다구가 나는 일도 아니다. 아무리 잘 써봤자 본전도 못 건질 게 뻔하다. 고인을 잘 알아도 어렵고 조심스러운 게 추모사다. 그래서 대부분 형식적인 요식절차로 때우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에는 김진숙이 쓴 열사들의 추모사가 6편이나 등장한다. 다른 건 다 그만두고라도,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는 추모사를 도맡았다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나는 김진숙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은 왜 그렇게 힘든 추모사를 많이 썼냐는 것이다. 단지 마음이 약해서,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닐 것이다.

추모사는 무엇보다도 다른 글과 달리 슬픔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슬픔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이 점에서 김진숙은 누구보다 슬픔을 잘 아는 사람이다. 

이 책에는 남달리 굴곡이 많았던 그의 가족사와 개인적 삶이 나온다. 아울러 가혹한 운명 속에서도 얼마나 그의 가슴이 따뜻한 넓은지 잘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본질을 꿰뚫어보는 정확하고 날카로운 눈과 귀를 가진 운동가도 드물지만, 남녀노소, 지역과 업종, 정규직 비정규직, 여성과 장애인 소수자까지 두루두루 포용하는 가슴이 넓은 운동가, 진심으로 따뜻한 가슴으로 동지를 안아주는 운동가는 더 드물다. 그 흔치않은 운동가 중 한사람이 바로 김진숙이다.

그는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 슬픔과 기쁨을 느끼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중년 남성노동자들을 어린애처럼 꺼이꺼이 울게도 만들고, 젊은 조합원들이 배꼽을 잡고 웃게도 하고, 여리고 예쁘기만 한 아가씨들을 거친 싸움꾼으로 변모시키기도 하니 말이다.

한마디로 타고난 심령술사다. 그 심령술로 사람들 마음을 쥐락펴락하며 글을 쓰니 어찌 감동을 받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의 추모사는 열사의 영혼이 그의 입을 대신 빌려 한을 토해내는 것처럼 들린다. 천도제를 관장하는 스님이나, 살풀이굿 씻김굿을 인도하는 무당처럼 느껴지는 게 바로 이런 때다. 죽은 영혼들의 한을 굽이굽이 풀어주고 못다 이룬 갈망을 달래주는 솜씨가 딱 그 짝이다. 죽은 자의 혼령뿐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한과 욕망까지도 다 풀어주고 달래준다. 한이 무엇이고 욕망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그 한을 풀어주고 욕망을 달래주는가. 이런 것들을 속속들이 잘 알지 않으면 제관이 될 수 없다. 그의 추모사가 한 편의 감동적인 시요, 산문으로 변하는 건 바로 이런 순간이다.



촌천살인의 한 문장에 담긴 책 한권 삶의 무게   

나는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만나면 밑줄을 치는 버릇이 있다. 아껴두었다가 필요할 때 인용도 하고 다른 곳에 퍼 나르기도 한다. 그런데 <소금꽃 나무>를 읽으면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처음 몇 번 밑줄을 치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밑줄 칠 문장이 하도 많다보니 책 한권 전체가 밑줄 천지가 될 것 같았다. 그의 문장은 펄떡펄떡 살아 날뛰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밑줄 긋고 싶은 문장이 수두룩했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점은 한 문장 한 문장이 책 한편을 압축한 것 같은 경구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긴 시간도, 아무리 넓은 공간도, 아무리 많은 사람도, 아무리 처절한 삶도, 한마디 문장으로 표현하는 비범한 재주가 있다. 아마도 돈벌이 책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가 쓴 한 문장 한 대목만 뽑아 늘려서 책 한권을 너끈히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한 문장 한 문장이 주옥같았다. 

문장 하나로 삶의 한 세대를 드러내는 걸 보면 놀랍기만 하다. 가출해서 여기저기 공장을 떠돌던 김진숙의 십대 정서가 한 문장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집에 편지를 쓴다고 화창한 일요일 기숙사 창문 아래 배를 깔고 엎드려 “어머니 아버지 보세요.” 한줄만 써놓고는 편지지에 눈물 콧물 칠갑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든지, 그럴 때는 뭔지 모르게 자꾸 억울하다는 생각이 치밀고는 했다.”(<그 시절의 이력서> 중에서 40쪽)

그런가하면 얼마나 짓밟혔으면, 얼마나 무서웠으면....하는, 한 문장이 백 마디 설명보다 더 또렷하게 각인되는 문장도 있다.

“자면서도 ‘잘못했으예.’ 잠꼬대를 하며 흐느끼던 영숙이, 미순이, 상남이들.” (<그 시절의 이력서> 중에서 43쪽)

오늘의 그가 태어난 삶의 전환점으로 추측되는 대목도 나온다. 공부에 목말라 찾아간 근로야학에서 처음 전태일 평전을 읽고,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워 꺼이꺼이 지리산 계곡처럼 울었다던 그 대목이다. 

“가슴에 큰 산 하나가 들어앉아 그 산에서 돌덩이가 와르르 쏟아져 양심에 돌팔매질을 해대는 그런 느낌이었다.”(<그 시절의 복직>중에서 47쪽)    

그런가하면 <20년만의 복직>에서는 20년 해고자 생활을 동거동락하던 두 형들이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복직이 된다. 그제서야 김진숙은 20여년동안 어깨를 짓누르던 부채감에 대해 털어놓는다.

“단지 나 때문에 해고당했다고 말하면 그 형들의 신념이나 자존감들을 폄훼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20년 세월 내가 지니고 있었던 건 분명 ‘부채감’이었다. 나를 여기까지 꾸역꾸역 떠메고 온 9할은 사실 ‘부채감’이었다. 저들이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내가 먼저 떠날 수는 없는, 그러면 어디 가서 뭔 일을 하고 살더라도 필시 응징을 당하고야 말 것 같은.....이제 와 말이지만 떠나고 싶은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이제는 정말 벗어나고 싶었던 순간들이 얼마나 시시때때였는지. 그래서 내가 막 못되게 굴어도, 고랑을 파고도 남았을 상처들을 주었음에도 날 한번 세우지 않던 그들의 둔함이, 쇠심줄 같던 늑수긋함이 권태기처럼 지긋지긋했던 날들이 또 얼마나 많았는지, 제발 내일 아침에는 저들 중 누구 하나라도 안 나타나기를, 힘들어서 더는 못 하겠다 취중이라도 선언해주기를 얼마나 빌었는지, 차마 먼저 가겠단 말은 못하고 그걸 빌미로라도 그만 떠나고 싶을 만큼 고단했던 날들.” (<20년만의 복직>중에서 16쪽) 

마침내 20년만에 복직되어 출근하던 날, 세 사람은 회사 정문 앞에 나란히 선다. 그러다 두 사람은 들어가고 한 사람은 밖에 남겨진다. 김진숙은 자신이 비로소 그 만성적이고 고질적인 부채감을 내려놓았다고 안도하면서도 그 부채감이 복직한 형들에게 고스란히 되지우게 될까 걱정한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그들에 대한 부채감도 20년 아니 40년이 걸리더라도 이렇게 내려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덧붙이는 대목에서는 피붙이보다 더한 동지애에 울컥 감동이 치받친다.

해고자 생활 20여년을 버텨낸 힘을 ‘부채감’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고, 책 한권을 써도 모자랄 것 같은 해고자 생활 20여년을 몇 문장으로 다 표현하는 이 사람,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삶의 전면적 진실   

고달픈 노동자의 삶을 이야기할 때도 김진숙은 길게, 어렵게, 진지하게 얘기하지 않는다. 짧고 쉽고 가볍게 얘기한다. 가볍다는 인상을 주는 건 아무리 심각하고 진지한 이야기도 해학과 낙관으로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해학과 낙관은 김진숙 글의 트레이드 마크다. 흔히 이런 걸 노동자만의 독특한 표현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달리 말하고 싶다. 삶의 전면적 진실이라고 말이다.

<동네사람들아!>(24쪽~32쪽)를 예로 들어보자. 이 글은 1986년 처음 대공분실에 끌려가 살인적인 고문에 시달리던 때의 얘기다. 그 시절의 살벌한 얘기를 하면서도 그는 주머니에서 나온 사탕 한 알에 대해 이렇게 허허실실 풀어놓는다.

“어버이날 회사 여직원회에서 나눠준 사탕 한 알을 아끼노라 안 먹고 넣고 다녔던 건데 아끼면 똥 된다더니 그 사탕도 나도 그렇게 됐다.”(같은 글 24쪽) 

여기에 “독극물 묻었는지 조사해 봐.”라는 한마디가 이어지면서 상황은 엽기적으로 치닫는다. 그런데도 김진숙은 제3자 얘기를 하듯이 이죽거리며 태연하게 이어간다.       

“사탕 한 알의 운명은 졸지에 반공전시관이나 전쟁박물관 같은데 보면 반드시 전시돼있는 남파 간첩들의 필수품인 독극물 앰프의 품위로 격상돼 버렸고, 그걸 소지한 나는 남파 간첩의 예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처우를 유감없이 당하게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자취방을 발칵 뒤집으며 수색한 끝에 그들이 찾아낸 건 ‘갈까 말까’ 네 글자만 적혀 있는 달랑 쪽지 한 장이었다. 몸이 아파서 일요일에 특근을 하러 갈까 말까망설이며 긁적이던 네 글자는  남파간첩이 북으로 갈까 말까 망설이는 낙서로 둔갑한다. 기가 막히고 허탈하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픽’하는 소리와 함께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렇듯 그의 글은 살벌하다가도 웃고, 웃다가도 소름이 돋는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특히 가족사나 개인의 삶을 이야기를 할 때 더 심하다.

<부고없는 죽음>(243쪽~246쪽)은 집안의 유일한 아들인 남동생이 노숙자 신세로 처연하게 객사한 이야기다. 마침 설날이라서 온 가족이 다 모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하지만 설날이라서 문상객이 하나도 없었던 건 불운이었다. 같은 설날이 이렇듯 행운과 불운을 함께 품는다.

빈소에는 큰 언니의 곡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큰언니의 가게 차부상회(<차부상회 문근부>(197쪽~199쪽) 참조)는 한 번도 문을 닫은 적 없어서, 그날도 아들이 가게를 맡아 보고 있다.

“잊고 있었다는 듯 큰언니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가게를 보던 조카가 “엄마 와사비 얼마야?”라고 묻는 전화가 오면 “큰 거? 짝은 거?” 묻고는 “짝은 건 820원”대답하고는 다시 우는 사이....셋째 언니네 식구들이 도착했다.”(<부고없는 죽음>244쪽)

콩트 한 장면이 연상된다. 웃으면 실례인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팍’하고 웃음이 터져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동생의 돌연사라는 기박한 운명과 구멍가게라는 엄연한 현실이 한 문장 속에서 나란히 목을 내밀고 있다. 슬픔과 웃음이 함께 어우러져있다. 이것이 김진숙이 우리에게 드러내주는 삶의 전면적 진실이다. 그의 글에서는 웃기기만 하는 삶이나 심각하고 진지하기만 한 삶은 부분적 진실에 불과하다. 진지하고 심각했다가도 웃음이 나는가하면, 웃다가도 진지하고 심각해지는 것이야말로 삶의 전면적 진실이다. 이런 점에서 <소금꽃 나무>는 삶의 전면적 진실을 말하는 책이다. 

처음 <조공노동자신문>을 읽었을 때 나는 김진숙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는 걸 예감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세상이 그의 진가를 몰라주는 게 말할 수 없이 서운했다. 이제 늦은 감은 있지만 내 예감이 적중하여 이렇게 <소금꽃 나무>가 출간된 걸 볼 수 있어서 진심으로 기쁘다.

책을 읽으면서 불편하고 아파보기는 참 오랜만이다. 책은 쉽게 빨리 읽었지만 여운은 쉽게 빨리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아주 오래오래 나를 불편하게하고 아프게 할 것만 같다. (끝)  

 

----------------------------------- 

 1987년 사당동에서

양돌규(노동자역사 한내 조직국장)

 

엄마가 다쳤다 

그때 난 중학교 2학년이었다. 1987년 10월 19일.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평소처럼 총신대학교 뒤편 산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날씨는 쌀쌀했고 곧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산길을 올라 고갯마루를 넘었을 때, 동네 놀이터 풍경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웬 아저씨들이 페인트 통에 나무들을 불쏘시개 삼아 불을 피웠다. 꽤 추운 날씨라 두세 명이 불 주위로 둘러서 쬐고 있었다. 머리에는 하얀 헬멧을 쓰고 손에는 목장갑을 낀 채 각자 각목을 들고 있었다. 그곳에 사람들이 있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있다 하더라도 하릴 없이 친구들끼리 노느라 바쁜 중학생들 정도였다. 심상하지 않은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서였을까. 평소에는 잘 가지 않던 아파트 단지 안으로 접어들어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는 일찍 기울었다. 집안은 조용했고 난 혼자 있었다. 어두컴컴한 집에서 깜빡 잠이 들었을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들었다. 지금도 난 그 전화를 누가 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전화 내용은 간명했지만 무거웠다.

“엄마가 다쳤다.”

엄마가 입원한 병원은 30분 거리에 위치한 사당의원이었다. 한달음에 달려갔다. 달려가면서 늦은 오후 하교길에 마주쳤던 헬맷 쓴 사내들이 바로 그 ‘철거 깡패’들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자들이 엄마를 때렸을 것이었다. 그 곁을 그냥 지나쳤다는 것이 그렇게 수치스러울 수 없었다. 



6.29는 속이구

사당3동에 살인철거가 진행된 건 9월부터였고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10월 접어들어서였다. 6월항쟁의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그때, 온통 세상은 대통령선거 얘기뿐이었다. 사당3동에도 추석 무렵 대통령 후보들이 번갈아 방문했다. 자신이 당선되면 달동네 사람들의 생존권도 지켜주겠노라 약속했다. 군부독재는 이미 끝장났고 대통령선거는 그걸 승인하는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한 순간에 터뜨려 버린 것 중 하나가 사당3동 철거였다. ‘6.29는 속이구’라는 말이 회자됐다. 경찰은 철거깡패와 한통속이었고 그건 군부독재와 건설자본이 하나라는 의미였다. 폭력을 휘두르는 철거깡패를 잡아 경찰에 넘기면 경찰은 바로 풀어주곤 했다. 심지어 이에 항의하는 주민들을 향해 최루탄까지 난사했다. 선대책 후철거, 강제철거 금지, 영구임대주택 건설 등의 구호가 제대로 외쳐질 기회는 없었다. 그러던 것이 10월 19일 강제철거가 진행되면서 20여 명의 중상자들을 낳기에 이른 것이었다. 누가 군부독재가 끝장났다 했는가. 



침대 밑에서 바라본 세상

엄마는 대통령선거 즈음까지 사당의원에 입원해 있었다. 20여 명의 중상자 중 가장 많이 다쳤기 때문이었다. 기브스를 하고 누운 엄마 침대 밑이 나와 동생의 자리였다. 학교가 끝나면 침대 밑에 들어가 있었고 때론 거기서 잤다. 세입자대책위나 그곳을 드나들던 활동가 형, 누나들이나 방문하는 분들을 난 얼굴보다 발로 기억한다. 입원실은 회의실이었고 토론장이었다. 사람들은 정세를 논하거나 그날 그날 있었던 집회나 주요 단체들의 결정, 대통령선거 정국 등에 대해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웃으며, 때론 싸우며 이야기 나누곤 했다. 병상 밑에서 올려다본 세상은, 병상 밑에서 듣는 세상은 그 이전에 학교에서 가르치던 세상과는 아주 달랐다.

그래서였을까. 방학에 접어들자마자 형, 누나들이 얘기하는 집회장에 우리 형제는 힘 닿는껏 다녔다. 백기완 선생 유세도 다녔고 집회들도 다녔다. 사당동 투쟁이 일정하게 합의에 이르고 종결된 후, 사당3동 철거민들은 보라매공원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렸다. 아저씨들은 북을 쳤고 아줌마들은 떡을 돌렸다. 모두 흥겨웠고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부부들이었다. 난생 처음 먹어본 막걸리가 달았다. 



로봇이 있다면

세입자대책위 한 아줌마의 아들이 있었다. 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어디를 가셨는지 내게 맡기고 가셨는데 장난감 로봇을 가지고 잘 놀던 아이가 이런 얘기를 했다.

“나한테 진짜 로봇이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물었다.

“왜?”

“그러면 로봇 시켜서 철거깡패들 다 밟아서 벌레처럼 죽여버릴 거야”

아이의 말이 이렇게 잔인하고 독할 수가 있을까. 이후로도 그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보다 더 독하고 잔인한 아이의 언어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일곱 살의 말 속에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증오심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 아이의 말이 자연스럽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들이라고 왜 원한의 마음을 가지지 않겠는가. 오죽하면 당시 방영중이던 드라마 ‘인간극장’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을까. 그 아이의 말은 내 심정이기도 했다. 



전환점

22년 세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1987년 10월의 사당동과 2009년 1월 용산은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다섯 분이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사실 뿐이다. 1월 20일 뉴스를 보면서 ‘나도 그때 고아가 될 뻔했구나’ 새삼 깨달았다. 거리나 명동성당 근처, 용산 참사 현장 멀찍이에서 유족들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87년의 기억이 회상됐다.

용산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린 영원히 87년 사당동과 2009년 용산이 반복되는 걸 남은 생 동안 목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폭력과 수탈이 우리를 어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22년이 지났어도 그와 같은 사건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게 인생을 바꾸어놓는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세상과 자신 사이를 단호하게 직접 연결시켜버리는 전환점이 있다. 내게 그것은 사당동이었고 다른 이들에게는 그 무엇일 것이다.

그런 전환을 겪은 이들이 만나 엮어가는 것이 운동이라 나는 믿는다. 그렇게 운명을 엮어 살아가다보면 때로 용산과 사당동이 반복되더라도 좀 더 견뎌낼 힘이 샘솟지 않을까. 그 힘으로 아직 가지 않은 겨울을 한사코 밀어내야 하지 않을까.


댓글(2) 먼댓글(1)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소금꽃나무
    from 성실히 살았으면 2009-08-05 17:33 
    왜 제목이 소금꽃나무일까가 가장 궁금했다. 친절하게 표지에 다 나와있다. 작업복에 땀이 말라 소금기가 남아 있는 모양을 꽃나무라고 부른 것이다. 땀이 말라 있는 옷을 보고 이런 걸 떠올릴 수 있다니 감탄하고 책을 펼쳤다. 책의 앞 부분에는 경찰에게 잡혀 가고, 대공분실에 잡혀 고문 당한 이야기도 나온다. 덜덜덜 무서운 느낌이 들었고 그런 것을 견뎌내고 싸워온 지은이가 대단하게 보였다. 지은이가 처음부터 노동조합 활동을 했던 것은 아니다. 남동생 학비..
 
 
광야 2009-10-07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으로 쓴 글>은 황해문화에서 청탁을 받아 쓴 글이고, 참세상에도 실린 서평이지요.

나무처럼 2010-01-28 00:4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지면을 내어달라 눈물바람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마”  
- [86호] 2009년 05월 06일 (수) 11:11:00 이오성 기자

르포 문학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주류 언론이 외면한 낮은 곳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독자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출간된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줘>는 벌써 1만 부 가까이 팔려나갔고, 용산 참사를 다룬 <여기 사람이 있다>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
 

 
서울대 교정에 모인 ‘삶이 보이는 창 르포 문학팀’. 왼쪽부터 박경내·김형석·김순천·김미정 작가.


여기 ‘이상한 기자들’이 있다. 그들은 명함을 내밀지도 않고, 취재원더러 뭔가 이야기해달라고 보채지도 않는다. ‘현장’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서 그 현장이 말을 걸어오면 묵묵히 듣고, 입을 닫으면 이내 돌아선다. 그들의 취재 노트에는 산뜻하고 자극적인 취재원의 멘트 대신 애꿎은 ‘눈깔사탕’ 자국만 가득하다. 광장시장 어느 노점상 할머니를 인터뷰하러 갔다가 말문을 열지 못하고 날마다 눈깔사탕만 여러 개 사서 모았다. 평범한 기자라면 데스크로부터 당장 불호령이 떨어질 법한 일이다. 

그들의 진짜 이름은 ‘르포 작가’다. 용산 철거민 참사 현장, 이랜드 비정규 노동자의 농성장  등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난 일, 그곳에서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자’라는 점에서 기자와 닮았다. 하지만 그들은 보통 기자와 확실히 다르다. ‘마감’ 압박이 그리 크지 않다는 점, 육하원칙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 등이 그렇다. 무엇보다 다른 건 다루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시선과 깊이다. 가령 용산 참사 현장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는 울림이 있다.

“애가 네 살, 아홉 살이거든요. 애가 투쟁하는 걸 알기 때문에 용역들하고 집 앞에서 싸울 때 밖에다가 ‘석 꺼져, 투쟁’ 이렇게 적어놨더라고요. 글자를 잘못 적으니까. 그거 가지고 용역들이 ‘아빠가 이러니까 애가 저러지,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이러기에 용역들과 주먹다짐도 했어요. 가슴이 아프죠. 단지 아빠가 잘못하고 있지 않다는 거밖에 알려줄 게 없어요. 아빠가 잘못된 걸 요구하는 게 아니라 아빠가 이 나라에서 가져야 할 권리를 찾기 위해서 이 투쟁을 한다고….”(용산 참사 때 망루에서 살아남은 김창수씨)

“(나더러) 일명 위원장 마누라라고 지나가면 대놓고 성적 농담하고, 그걸 몇 개월을 당했는데 저라고 가만히 있겠냐고요. 저도 처음부터 이런 사람 아니었어요. 착한 사람이었어요. 그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지금은 악밖에 안 남았어요. 이 나라가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거예요.”(사망한 이상림씨 며느리 정영신씨)

 
아이에게 철거민의 존재를 설명해야 하는 아버지, 그리고 ‘우리 착한 사람이에요’라고 항변하는 것 외에는 달리 자기를 드러낼 길 없는 사회적 약자의 막막함이 담긴 말이다. 주류 언론은 물론이고, 용산 참사를 상세히 보도한 언론의 기사를 통해서도 이런 막막함은 접하기 어려웠다. 순간의 감수성이나 연민으로 끌어낼 수 있는 성질의 ‘멘트’가 아닌 탓이다. 사건이 터진 날부터 언론이 등 돌린 지금까지도 이들 작가는 용산에 시선을 떼지 않았다. 철거민의 속내를 들여다보려 작가들은 부지런히 그들의 가슴을 보듬어주고, 발품을 팔았다. 피해자를 만나 인터뷰하면서 이 작가들은 내내 눈물바람이었다. 그 기록이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책이다.

‘중립’은 가해자 시선일 뿐

‘대한민국 개발 잔혹사, 철거민의 삶’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철저하게 ‘편파적’이다. 작가가 짐짓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려 들지 않고, 그들의 주장을 가감없이 1인칭 구술로 담았다. 정부와 일부 언론에 의해 ‘생떼 쓰는 철거민’으로 표현된 이들 세입자가 실상 우리네 이웃과 별다를 것 없는 사람임을, 이 책은 그들의 입을 빌려 담담히 전한다.

하지만 기자의 강박증일까, 자칫 철거민의 주장만을 전한다는 것이 르포로서 객관적 시선을 잃은 것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러나 글을 쓴 르포 작가 김미정씨는 “빼앗긴 자,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룰 때 중립의 시선을 요구하는 건, 결국 가해자의 시선을 가지겠다는 말과 마찬가지다”라고 단언한다. 김순천씨 역시 “실제 철거민을 만나보니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어서 놀랐다. 교통사고를 당하듯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모두 철거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이들과 내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냉소적 시선만 유지한다”라고 지적한다. ‘중립’을 저버리고 피해자의 시선을 견지한 결과 이런 일화도 만들어냈다. 구속 수감된 김태연 용산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 상황실장이 지난 4월9일 범대위에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제가 있는 방에 철거 용역업체 직원이 한 명 있습니다. 서른이 안 된 젊은 친구인데 <여기 사람이 있다>를 열심히 읽더군요. 읽고 나서 ‘여기 나오는 사람들 아느냐’고 묻더군요. 그렇다고 했지요. 무얼 느꼈는지 묻지는 않았습니다. … 그 친구 오늘 낮 운동 시간에 같이 걸으면서 그러더군요. ‘이제 농사나 지어야겠다’고. 참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는 세상입니다.”

김순천 작가의 ‘서울 다방’ 이야기


<여기 사람이 있다>를 엮은 이들은 르포 작가 연정·송경동 시인 등 15명에 이른다. 조혜원씨처럼 평범한 직장인도 있고, ‘88만원 세대’ 대학생도 있다. 4월27일, 서울대 교정에서 이 책 집필에 참여한 르포 작가 몇 명을 만났다. 르포 전문 작가 김순천씨(45), 건축사로 일하는 김미정씨(42), 프리랜서 사진가 김형석씨(41), 비정규 노동자 박경내씨(29)는 저마다 다양한 직업과 삶의 이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르포라는 글쓰기 형식을 통해 꾸준히 세상과 소통해온 ‘삶이 보이는 창 르포 문학팀’(삶창 르포팀) 멤버이다. 삶창 르포팀은 2006년 비정규 노동자의 삶을 기록한 <부서진 미래>를 펴낸 이래 사회 약자의 목소리를 담는 데 몰두해왔다. 김순천씨 등은 지난해 여름 이랜드 비정규 노동자의 삶을 기록한 르포집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줘>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들이 르포 문학에 가지는 애정과 자부심은 사뭇 대단하다. 하지만 르포 작가라는 말조차 생소한 우리 사회에서 이들이 기자를 뛰어넘는 취재력을 발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김형석씨는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취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그냥 계속 일 없이 찾아가 만나기만 한다. 20~30번씩 찾아간 적도 있다. 그러다보면 ‘아이고, 왜 이렇게 찾아오느냐’며 손사래를 치던 사람이 어느 순간 말문을 연다. 그때의 희열은 무엇과도 바꾸기 어렵다.”

김순천씨는 몇 해 전 서울 황학동 삼일아파트에서 만난 다방 여사장을 잊을 수 없다. 아파트 철거를 앞두고 그곳에서 22년 동안 다방을 운영한 여사장이 화제가 됐고, 여러 매체에서 그녀와 인터뷰하기 위해 줄을 섰다. 하지만 여사장은 자기 노출을 극도로 꺼렸다. 사진을 찍는 기자에게 물을 끼얹을 정도였다. 일반 기자와 달리 날마다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주는 김씨의 정성에 탄복한 여사장은 결국 어느 날 인터뷰를 허락했다. 뛸 듯이 기뻐하던 김씨에게 여사장이 보여준 것은 자기만의 ‘비밀 쪽방’이었다. 여사장은 다방 안에 한 사람 겨우 누울 만한 크기의 쪽방을 만들어놓고 입구를 거울로 가려놓았다. 지난 22
년 동안 이 여사장은 밤마다 감옥 같은 쪽방에서 잠을 청한 것이다. 김씨는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외부인에게 자기 세계를 열어 보였다. 르포 작가로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라며 감회에 젖었다.

 
지난 4월3일 용산 참사 현장에서 <여기 사람이 있다> 출판기념회(위)가 열렸다.
이들은 우리 시대에 르포 문학이 필요한 이유를 주류 언론의 실패에서 찾는다. 언론사 간 경쟁이나 시간의 제약, 취재기자의 인식상의 한계로 대중매체가 전달하는 정보와 이미지는 현실의 본모습에 깊숙이 다가가기 어렵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김순천씨는 “일반 대중은 대중매체가 가상으로 재현한 것을 또 가상으로 체험한다. 이 ‘피상적인 인식’이 가장 위험하다. 그것은 세계를 깊이 이해할 수 없게 하며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아간다”라고 지적한다. 이런 대중매체의 실패를 극복하려는 자리에 르포 문학이 새롭게 재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르포 문학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여전히 이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김순천씨는 “우리에게 지면을 달라”고 요구한다. 무슨 문학상이나, 상금 대신 글을 실을 수 있는 지면과 취재 여건을 마련해달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르포를 비싸게 삽니다’라는 잡지사의 광고 문구를 보고 크게 놀란 적이 있다. <일본은 없다>를 쓴 유재순씨를 만났더니 ‘내가 르포 작가로 성공한 것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더라. 반면 우리나라는 문예진흥원은 물론, 한국작가회의에서조차 르포 문학에 대한 배려가 없는 실정이다.”

집필 수익금 모두 ‘인터뷰이’에게 전달


여전히 한국에서 르포 문학은 찬밥이다. 지난해 경부운하 반대 성명을 발표한 ‘리얼리스트 100’ 소속 작가들,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를 쓴 박영희, <발바닥, 내 발바닥>의 김곰치, <아부 알리, 죽지 마>의 오수연씨 등이 르포 문학의 맥을 잇고 있지만, 르포 작가가 10만명에 이르는 일본이나 르포 문학이 시와 소설 이상으로 대접받는 중국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주류 언론이 외면한 낮은 곳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독자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난해 출간된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줘>는 벌써 1만 부 가까이 팔려나갔다. 책을 펴낸 박상훈 후마니타스 출판사 대표는 “노동 관련 책이 이렇게 팔린 건 이례적이다.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실제 삶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낸 작가들의 공이 컸다”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독자 또한 문체나 스타일 대신 현실의 이야기를 그대로 드러낸 작품을 원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몇몇 소수 작가만 고군분투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줘>를 집필한 르포 작가들은 수익금을 모두 이랜드 노동자들에게 내놓았다. <여기 사람이 있다>의 수익금도 온전히 ‘인터뷰이’인 용산 참사 희생자들을 위해 쓸 예정이다. 

삶창 르포팀은 요즘 재개발 광풍에 휩싸인 서울 성북구 삼선동 4구역 사람들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른바 ‘마을 생애사’라 불리는 작업이다. 용산 철거민을 취재하다 감정이입이 되는 바람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는 20대 작가 박경내씨는, 어느덧 마을 어귀 슈퍼마켓 아줌마와 경로당 할머니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삼선동 언덕길을 쏘다닌다. 이들의 손과 발이 또 어떤 세상의 이면을 기록할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