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공간> 책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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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공간을 내면서
―청계천 사람들의 삶의 기록(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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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에 실렸던 김순천 씨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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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상상력, 르포문학

 

이봐! 모든 게 무너지고 있어!  


“문제는, 내가 보기에 모든 게 무너지고 있다는 거야” 도리스 레싱의 ‘황금노트북’에 나오는 주인공 안나가 몰리에게 했던 이 말이 마음에 깊게 다가와 떠나질 않는다. 신자유주의 시장주의자들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다채롭게 자신들이 세운 ‘희망’을 이야기 한다. 나는 ‘무슨 희망?’이라고 묻지 않는다. 이미 그들이 ‘계획한 희망’과 그 실행으로 세상은 무너지고 있기 때문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삶은 사람들을 ‘임시거주자’로 만들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자신의 삶을 확신하지 못하고 계속 흔들리며 힘겨워하고 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는데 기존의 어법으로는 더 이상 무언가를 말 할 수 없는 답답하고 소란스러움, 그 멈춰지고 파괴되고 끊어진 지점에서 르포문학은 새롭게 생겨나는지도 모르겠다. 무너진 나를 세워 끊임없이 세상에 물음을 던지면서 새로운 건축을 세워나가는 과정, 이것이 르포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일 듯싶다. 요르단의 르포작가이자 시인인 암야드 나세르(Amjad Nasser)의 표현대로 “르포문학은 현대인의 삶에 다가가는 새로운 장르이고 새로운 (글쓰기) 방식”인 것이다.

피상적인 인식이 가장 위험하다 

“ The global networking of the mainstream mass media has failed"

세계적인 르포작가에게 주는 ‘레트레 율리시스 르포문학상’ 심사 위원인 이사벨 힐턴은 현 시기 르포문학이 필요한 이유를 주요 대중매체의 실패에서 찾았다. 주요 대중 매체들은 충돌로 가득찬 세계화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이면을 전달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아주 지겹다. 저널리즘으로 접근하는, 주요언론에 의해서 매일 보도되는 그런 종류의 세계화에 넌더리가 난다” 르포문학을 통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가질 것을 제기하며 프랑스 저널리스트인 안느 니바(Anne Nivat)는 힐턴 심사위원의 발언에 힘을 실어준다. 언론자본의 개입으로 내용이 왜곡되거나 혹은 언론사간의 경쟁이나 시간의 제약, 취재하는 기자들의 인식상의 한계로 그들이 전달하는 정보와 이미지는 서로 동질화 되거나 현실의 본모습에 깊게 다가가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지구촌의 아주 작은 마을까지 지배력을 행사한다.

일반 대중들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정보에 의해서 요동한다. 그들은 매스미디어에 의해 가상으로 재현한 것을 또 가상으로 체험한다. 그런 정보마저 대중들은 짧은 주의력만 기울일 뿐이다. 그들이 얻은 이미지와 정보는 매우 피상적이다. 이 ‘피상적인 인식’이 가장 위험하다.  그것은 세계를 깊게 이해할 수 없게 하며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아간다. 결국 자신들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런 주요 대중매체가 실패한 자리에 ‘르포문학’ 넓게는 ‘르포예술’이 새롭게 재등장하고 있다. 르포예술은 다큐 영상, 르포문학, 르포미술, 다큐 사진들이 다 포함된다. 세계를 직접 깊게 체험해서 알리는 것에 르포가 갖는 독특한 시선이 있다. 좋은 르포문학은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생생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장’으로 가면을 쓴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사람들의 눈을 열어준다. 

“ 정확히 관찰되고 기록된 현실은 언제나 가장 대담한 작가의 상상력보다 더 상상력이 풍부하고 흥미진진하다”

독일 68혁명세대 르포작가인 귄터 발라프의 말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창조적인 상상력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잘못된 오해 중에 하나이다. 현실을 깊게 이해하지 못한 상상력은 황폐하고 빈약하다. 남미의 환상적 리얼리즘의 대표작품인 <백년동안의 고독>을 쓴 가르시아 마르께스도 르포작품을 썼다. <칠레에 잠입한 미겔리틴의 모험>은 칠레의 망명 영화감독인 미겔리틴의 입을 빌려 군사쿠데타로 피살된 아옌데 대통령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지금도 칠레 사람들은 그를 아옌데라고 부르지 않고 대통령이라 부른다. 마르께스의 또 다른 장편소설 <납치일기>는 1990년 8월~1991년 6월 콜롬비아에서 실제 일어났던 납치사건을 그대로 옮긴 르포소설이다. 등장인물의 이름까지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썼다. 

 “문학적인 장치없이 완벽하게 검증된 정보를 바탕으로 작품을 썼지만 이 작품이 나의 기존 환상소설보다 더 환상적으로 보일 것으로 믿는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현실이 환상보다 더 환상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백년동안의 고독>에 등장하는 마콘도는 콜롬비아를 본 따 만든 도시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풍부한 상상력은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의 이면이었던 것이다.

르포문학은 개인들이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만들어 가는 사회적 공간이다
-키쉬의 르포르타주 미학  


르포문학이 무엇인가, 물으면 그 답은 르포문학을 해온 작가의 수만큼 이라고 말하고 싶다. 롤랑바르트가 ‘문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러저러 하다고 가르쳐진 것이 문학’이라고 했듯이 르포문학도 르포문학 하는 행위가 있고, 그 후에 르포문학이라고 가르쳐지는 게 르포문학이다. 그러므로 르포문학은 완성된 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 쓰여지는 것이다. 

유럽에서 ‘르포문학’은 대중매체의 급격한 확장과 함께 등장했다.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쓴 존 리드도 이런 대중 매체의 발달로 세계적인 르포작가가 될 수 있었다. 라디오와 영화가 초기 발전 단계이고 텔레비전이 아직 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엄청난 양의 정보를 숨가쁜 속도로 대중사회의 구석구석으로 전달해 주는 매체는 ‘대중 신문’이었다. 1920-30년대 독일에서는 일간지, 주간지, 잡지 등을 합하여 약 4700여개의 신문과 잡지가 발행되고 있었으며 일간지들은 하루에 3번이나 발행되었다. 수 없이 발간되는 신문, 잡지는 ‘저널리즘’을 탄생시켰다.

근대 시민사회가 등장하면서 일반 시민들이 새롭게 얻은 사적인 공간을 체험하면서 스스로 자신들의 삶들을 설명할 수 있는 힘이 생겼는데 그 주요한 시민공론의 장이 ‘문학’이었다. 문학을 통해 시민들은 자신들의 ’내면을 발견’한 것이다. 대중매체의 등장으로 ‘저널리즘’도 문학과 함께 그 ‘사적 개인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반열에 올랐다. 그것은 ‘사실’이 시민들에게 뛰어 들어오면서 생겨나는 사적인 공간이었다.

문학하는 사람들 측에서는 새로 나타난 저널리즘을 ‘언어를 오염’시키고 ‘잉크노예’라고 배척했다. 벤야민은 <일방통행로> 도입부에서 저널적인 새로운 흐름의 글쓰기를 옹호한다. 그는 ‘문학의 틀을 차용하는 모든 문학 행위를’ 불모의 것으로 치부하며 그대신 ‘리플렛, 소책자, 신문기사, 플레카드를 찬양’하고 주유소, 창녀 등 도시에 존재하는 일상적인 사물에 대한 글을 쓴다. 도입제목 ‘주유소’를 쓰면서 그는 “바로 지금 삶을 구성하는 힘은 신념이 아니라 사실이다”고 했다. 그러나 크라우스는 ‘신문들이 선동한 여러 전쟁들’을 상기시키면서 ‘존재하는 모든 신문의 계획적인 파괴’를 주장하기도 했다. 대중 신문의 상업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이런 저널리즘의 등장과 언론의 상업주의에 대해 성찰하면서 탄생한 것이 ‘르포르타주 문학’이었다. 르포르타주는 할러와 미첼의 정의에 따르면 ‘시사적 사건에 대한 보고로 사실성과 객관성을 요구하며, 일상에 대한 유용한 사실 서술을 넘어서는 예술적인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르포문학은 ‘사실이 뛰어 들어 발견한 내면’이었다.

르포문학의 창시자는 에곤 에르빈 키쉬였다. 프라하가 고향인 키쉬는 21세의 나이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프라하의 골목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는 카프카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저널리즘의 중심지인 베를린으로 와서 신문의 문화비평에세이인 ‘푀이통’란에 르포 글을 쓴다. 광고와 도시의 거리를 관찰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키쉬는 ‘인과 관계가 아니라 연상을 통해 스토리와 사유를 전개하며 또 전개된 내용에 대한 종합이나 결론 없이 텍스트를  끝내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키쉬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형식인 ‘몽타주’로 자신을 표현한 브레히트와 같은 사유 공간 안에 있었다. 그의 글은 세계를 더 이상 자신의 삶과 통합해서 경험하지 못하고 ‘파편적이고 우연적으로 경험하는 현대 대중사회의 개인의 의식구조와 부합하는 것’이었다. 키쉬의 르포집 <쏘다니는 리포터>는 그의 세계가 잘 포착된 작품이다. 그는 ‘스스로 표방한 르포르타주의 미학, 낮은 것, 일상적인 것’에서 시대의 진실을 포착했다. 독일이 분단되면서 키쉬는 동독에서 괴테에 준하는 국민문학가로서 위상을 가진 반면 서독에서는 잊혀진 존재되었다. 독일이 통일된 이후 1994년 슈테른지는 키쉬 르포르타주상을 제정했다. 요즘 인터넷에서 여기저기 도시의 일상을 관찰하며 키쉬적인 글쓰기를 하는 네티즌들을 만난다. 그런 글쓰기도 르포문학의 새로운 형태라 할 수 있다.  


문화가 깊지 않으면 르포문학도 빈약하다 

‘르포를 비싸게 삽니다’

2006년 7월 일본에 갔을 때 한 인터넷 광고에서 이 문구를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르포를 비싸게 사다니 그 말은 아주 생소하고 낯설었다. 다양한 상품이 풍요롭게 넘쳐나는 자본주의 천국인 한국에서는 ‘르포’라는 상품을 주문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르포가 매우 활성화 되어있다.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르포작가만도 천여 명이 넘는다. 신문 잡지시장의 규모도 세계 1위이다. 2004년 일본 출판협회 보고에 따르면 1년간 일본에서 판매되는 잡지종류만 3394종이고 총 판매부수는 32억8천만부에 이른다. 일본 사람들은 신문기사보다 르포를 더 신뢰하며 작가별로 광범위한 매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다. <사색기행> 쓴 다치바나 다카시는 르포작업을 하기 위해 아사히신문을 그만두었으며 동경대에서는 그에게 연구실까지 마련해 주었다. 유명한 작가나 기자 중에는 그의 밑으로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면서 일을 배우는 경우도 있었다.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네코빌딩에는 그의 서재가 8개나 있다. 그 중 제3서재에서는 사상, 철학, 종교문제를 집필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그는 르포를 단순히 사회적 영역으로만 다룬 것이 아니라 사상, 과학, 철학까지 확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치바나 씨 외에도 당뇨병으로 썩어가는 손으로 죽는 순간까지 르포를 썼던 혼다씨, 조선 광부들의 문제를 다룬 하야시 에이다이씨 등 존경할만한 르포작가들이 많다. 일본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을 한분야로 인정하고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듯이 르포도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보지 못한 문제나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대신 이야기 해 주는, 현실을 기록하는 매체로서 사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실에 대한 풍부한 기록들이 어떻게 문화의 힘으로 창조되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은 일본의 르포보다 르포문학의 전통이 더 깊고 강하다. 유럽의 르포문학이 신문의 발달로 시민들이 공론의 장을 만들면서 성숙해 나갔다면 중국의 르포문학은 봉건주의와 외세의 인육의 연회장에서 힘겹게 싸울 수밖에 없었던 중국인들의 근대의식을 다뤘다. 개화기 때부터 출현한 르포문학은 5.4운동을 거쳐 루쉰, 구추백, 빙심의 지지를 받으면서 급격히 성장했다. 중국공산당도 르포문학을 지원해 주었다.

2004년 세계 르포작가에게 주는 율리시스 르포문학상을 <중국농민조사>를 쓴 중국작가 천구이디와 우춘타오 부부가 받았다. 그는 안후이성의 농촌마을 300여 개를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기록했다. 국유화된 토지를 부패한 지방정부가 강제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자살했다. 심지어 자살하는데 농약 살 돈이 없어 외상으로 사서 마시고 죽은 경우도 있었다. 이 르포집은 개혁. 개방이후 중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 걸작이었다. 홍콩, 대만에서도 출간되어 좋은 평을 얻었으며 중국에서는 금서가 되어 해적판의 왕국인 중국의 지하인쇄소에서 8백만부나 찍혀 팔렸다고 한다. 문학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천구이디는 우상이 되었고 그의 마당에는 자신들의 문제를 호소하러 온 수많은 농민들로 항상 붐볐다.

재미있는 것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으로 성장한 르포문학이 오히려 그 정부의 문제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에는 당대문학상(현대문학상)이 있다. 국가 공식기관인 중국작가협회에서 주는 상인데 르포문학에 주는 ‘루쉰문학상’에 천구이디의 <화이허의 경고>외 여러편이 선정이 되었다. <화이허의 경고>는 양자강과 황하강 사이에 있는 화이강의 오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황폐한 현실을 드러낸 작품이었다. 이런 내용 때문에 소설, 시는 책으로 묶여서 나왔는데 르포문학부문만 나오지를 못했다. 국가기관에서 공식으로 상을 준 작품조차 책으로 묶여 나오지 못한 것이다. 중국은 천구이디처럼 고발성이 강한 작품을 쓰는 작가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작가들도 많다. 르포작가인 지앙하오는 몽골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이혼하여 초원에서 방랑생활을 했다. 숲에서 약초를 캐고 말을 훔치면서 생활했다. 그 경험을 담은 <드러나는 도적의 비밀 >로 그 역시 율리시스 르포문학 상을 받았다. 요즘에는 중국 르포문학의 소재가 9.11테러와 IT산업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좋은 르포문학은 좋은 세계를 꿈꾸게 한다  


마음속에 남은 르포문학 작품이 하나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22명이 3년간에 걸쳐 참여하면서 쓴 <세계의 비참>이라는 르포집이다. 그들은 유럽, 아메리카 등 많은 나라에서 신자유적인 정책이 가져온 폭력성을 순전히 학문적인 개념적으로만 파악할 수 없어서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 기록을 했다고 했다. 신자유주의 일상 속에 존재하는 ‘사회적 불행’에 대한 조건을 탐구한 것이다. 임대주택 사람들, 임시직과 정규직 노동자, 필름편집인, 기자, 학생 등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인터뷰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사회학자들이 평온한 듯 보이는 일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다양한 ‘고통’을 섬세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중층적이고 다면적인 일상의 복잡함을 뚫고 세계를 새롭게 재해석할 수 있는 깊은 시선 덕분이었다. ‘통탄해서도 안 되고, 비웃어도 안 되며, 혐오해서도 안 된다. 오직 이해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스피노자의 이 말은 그들이 기록하는 내내 마음에 간직했던 것이다. 이러한 깊은 이해를 가진 르포집은 인간의 정신영역을 확장해 준다. 사실을 기록하는 르포문학이 풍성해야 이것을 기초로 인문학적인 정신세계는 확장되고 상상의 세계를 마음껏 창조할 수 있다. 잘못된 사실에 의해 상상된 세계는 얼마나 끔찍한가. 좋은 르포작품은 좋은 세계를 꿈꾸게 해준다.

“르포문학은 첫 번째는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그런 후에 우리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작가이자 철학자인 중국의 자오신산의 말이다. 이것이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는 세상에 그래도 르포문학에서 힘을 얻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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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주 2011-03-25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르포르타주 논의의 고전적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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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에르빈 키쉬의 르포르타주 문학
-1920년대 독일 저널리즘 논쟁을 배경으로 

탁선미 (한양대)

I. ‘하루살이 글쟁이 Tagesschreiber’ 에서 ‘진정한 작가’ 로

1924년 도브 플랜으로 촉발된 경제적 안정과 더불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일차대전 이전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고유한 문화적 지형이 급속히 부상하게 된다. 흔히 ‘신객관주의 Neue Sachlichkeit’ 로 지칭되는 이 새로운 문화적 열기는 그러나 그리 길지 못했는데, 그것은 세계대공황이 야기한 새로운 경제 위기 및 그로 인해 가속화한 정치적 극단주의 때문이었다. 바로 이러한 신객관주의 문화 열기가 잦아들 무렵인 1930년, 당대 대표적인 비평가중 한명이었던 크라카우어 Siegfried Kracauer 는 이십년 대를 풍미했던 르포르타주 신드롬에 거리를 취하면서도 이 장르를 다음과 평가한다.

독일에서는 수년 전부터 모든 서술 장르 중에서 르포르타주가 가장 많이 인정을 받고 있다. 그것은 르포르타주만이 삶을 여과 없이 포착할 수 있다고 흔히들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인들에게 보고는 최고의 목표가 되었다; 관찰의 재생산이 으뜸이다.

원래 관찰된 대상에 대한 기록이며 저널리즘의 장르인 르포르타주를 당대의 시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로 내세웠다는 것은 르포르타주가 전달하는 현실상의 한계를 지적하려는 크라카우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괄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18세기 레싱의 시대부터 ‘하루살이글쟁이’, ‘잉크노예 Tintensklaven’, ‘개 Schmock’ 등으로 불리며 하시되어 왔던 저널리스트들의 위상은 비판적 정론지 Meinungs- und Tendenzpresse 의 탄생 시기로 평가되는 1848년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신문에 대한 작가 및 지식인들의 비판은 특히 신문이 언어를 왜곡하고 오염시킨다는 주장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쇼펜하우어에서부터 부각된 이러한 언어오염 Sprachverhunzungen 주장은 독일 신문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분수령으로 평가되는 1890년대로 들어서면서 그 정점을 이루었다. 이 시기부터 1930년에 이르는 기간은 소위 대중지 Massenpresse 의 시기로 본격적인 상업주의 저널리즘이 횡행한 시기였다. 이 시기 저널리즘 비판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베를린과 더불어 대중저널리즘의 양대 도시 중 하나였던 비인의 칼 크라우스 Karl Kraus 였다. 크라우스가 “저널리스트들에게 퍼부었던 증오”는 실질적으로 그가 혼자 관장하였던 「횃불 Fackel」이 발간되었던 전 기간 (1899-1932) 에 걸쳐 절대적이고 일관적으로 나타난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단 하나의 신문이 인류의 도덕적 진보에 끼친 해악은 괴테의 전체 작품이 그에 기여한 것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크라우스는 “신문이 선동한 여러 전쟁들”을 상기시키면서, “존재하는 모든 신문의 계획적 파괴”를 주장한다. 본 논문의 대상인 ‘달리는 리포터 der rasende Reporter’ 에곤 에르빈 키쉬 Egon Erwin Kisch (1885-1948) 신드롬은 시기적으로 정확하게 방금 언급한 크라우스의 1919년 발언과 앞서 인용한 크라카우어의 1930년 발언 사이에 위치한 현상으로, 저널리즘의 급격한 위상 변화를 설명하는 데 한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1926년 레오 라니아 Leo Lania 는 키쉬를 저널리즘에 대한 “무성한 편견의 숲과, 오만스런 패거리 문화, 그리고 일반인의 무지의 정글을 향해 멋진 공격을 벌이고 그 담장을 허문” 인물로 칭송하고 있다. 라니아는 키쉬의 성공의 이유를 무엇보다 그가 “가장 중요한 한 부분에서 그 시대의 심금을 건드렸다는 eine der wichtigsten Saiten der Zeit zum Schwingen gebracht” 데서 찾으면서, 이제 독일에서도 리포터는 “문학적 영예 literarische Ehrenrettung”를 얻게 되었고, 저널리즘은 “문학에 포함될 만 literaturfähig” 한 위치에 올라섰다고 평가한다. 이 지점에서 주목할 것은, 위의 인용문들이 이미 시사하듯이 1920년대 저널리즘 논쟁의 근저에 문학과 저널리즘의 상호관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과 해석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적 개인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 (하버마스) 에서 출발하는 근대 시민사회의 비판적 공론장에 다 같이 뿌리를 두고 있는 문학과 저널리즘은 1890-1930년대에 진행된 공론장의 구조변동, 즉 대중저널리즘의 등장과 지배로 야기된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각자 서로 다르게 경험하고 또 반응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이 두 공론장의 하위체계들이 19세기를 거쳐 구축해온 ‘자율화’의 흔적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하버마스가 정의하였듯이 근대의 공론장은 교양시민계급인 “사적 개인들이 새롭게 획득한 자신들의 사적 삶에서 가능해진 독특한 경험들에 대해 스스로 설명하고 자각하는 과정”에서 시작되는데, 문학적 공론장은 이러한 시민적 공론장의 중요한 영역이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문학적 감상과 비평이 현실의 국가 권력 및 경제적 법칙을 벗어난 영역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이러한 감상과 비평을 통해 시민 개인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삶과 가치, 사회와 현실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 제삼의 사회적 공간을 만들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 문학적 공론장에 내재되었던 이러한 이중적 기능은 대중저널리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20세기초 문학과 저널리즘에 서로 다른 파장을 미치게 된다. 즉 새롭게 부상하는 대중저널리즘은 자기 정당화를 위해 문학적 권위를 빌고자 하였고, 반면 유미주의 모더니즘으로 정제되고 분화된 문학은 역으로 대중저널리즘의 언어오염을 비판함으로서 자기정당성을 재생산하고자 노력하였다. 다시 말하면 문학은 여전히 스스로를 자유로운 개인의 언어가 발휘하는 순수한 창조적 힘의 대변자로 인식하고 있었고, 상업적 텍스트 생산과정에 포획된 저널리즘의 글쓰기에 대한 최대의 비판자로 나선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1920년대 들어 저널리즘이 광범위한 사회적 인정을 얻게 되자, 구체적 대상에 밀접한 글쓰기인 저널리즘은 스스로를 ‘현실’과 ‘진실’에 보다 다가간 것으로 규정하고, 오히려 국가권력에 대항해 시민사회의 진실을 대변했던 18세기 및 19세기초의 문학적 공론장의 적법한 계승자로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앞의 라니아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물론, 창조하는 예술가는 정당들의 소란스런 투쟁과는 무관하고, 모든 정치 및 시끄러운 일상을 벗어나 있다는 견해가 독일에서는 여전히 지배적이다. 그러나 특이한 주인공의 뒤엉킨 심리적 비밀이나 영혼의 고통을 늘어놓는 것은 이제 그 매력을 상실했다. 그 누구도 바로 이 현실의 쟁쟁한 목소리에 귀를 막을 수는 없다. 이 목소리는 가장 나긋한 몽상가마저도 그의 마지막 구석 자리를 떠나 가혹한 대낮의 햇살로 나서도록 강요한다.

저널리즘이야말로 교양시민 사회가 탄생시킨 문학의 적법한 계승자라는 이 시기 저널리즘의 자기 인식을 그 누구보다 대변했던 사람은 키쉬였다. 키쉬는 일차대전 이후 활동 거점을 베를린으로 옮기기 이전, 이미 21세의 나이로 프라하에서 자유주의적 경향의 독일어 일간지 「보헤미아 Bohemia」의 리포터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달리는 리포터󰡕로 일약 스타 작가로 부상하기 일년 전인 1923년, 키쉬는 󰡔저널리즘의 고전. 신문의 걸작들 Klassischer Journalismus. Die Meisterwerke der Zeitung󰡕을 편집, 출판한다. 종교개혁 이후 신문을 통해, 그리고 신문에 기록된 “정신적 투쟁 geistige Kämpfe”의 역사를 당대 저널리즘의 전사 (前史) 로 규정한 키쉬는 바로 이 전사의 대표적 텍스트로 장 폴 마라, 미라보 같은 프랑스 혁명가들, 보나파르트 장군, 칼 마르크스나 루터와 같은 사상가들, 레싱, 하이네 같은 시인들, 그리고 바그너 등의 에세이를 선정한다. 이 중에서도 시인 및 작가의 글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선정된 전체 기사의 40퍼센트에 육박하고 있다. 근대의 위대한 사상가와 시인, 작가를 당대 저널리즘의 위대한 선조들로 규정한 키쉬의 자기 역할이해는 개인적 성공과 더불어 더욱 강화되어, 저널리즘을 근대문학의 가장 적법한 계승자로 규정하는데 까지 나아간다. 1926년의 「르포르타주의 사회적 과제 Soziale Aufgaben der Reportage」는 이러한 의식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키쉬가 구상하는 저널리즘 문학사의 핵심 인물인 에밀 졸라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 무엇도 미리 예단하지 않는, 그냥 리포터 nur Reporter, der nichts im voraus wissen will”, “골수 리포터 der besessenste Reporter”이며, “현실이라는 지형도”의 “위대한 지리학자”이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당대의 저널리즘, 특히 업튼 싱클레어 Upton Sinclair 나 존 리드 John Reed 로 이어지는 사회 고발적 혁명적 저널리즘은 바로 이러한 졸라 문학의 가장 정당한 계승자다.

서구근대사회에서 문학에 부여된 가치에 소급하여 당대의 르포르타주와 리포터의 평가절상을 시도하는 키쉬의 이러한 주장 그 자체는 - 문학학에서도 신문방송학에서도 - 오늘날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키쉬의 주장이 저널리즘의 뿌리였던 교양시민계급의 문학적 공론장에 대한 비역사적인 소급을 전제로 나온 것이며, 따라서 이미 자율적인 미학적 공론장과 당파적인 정치적 공론장으로 분화된 19세기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도덕적, 문학적으로 상승된 키쉬의 르포르타주이론은 오히려 이 시기 상업주의 대중저널리즘이 야기한 고유한 문제들에 대한 저널리즘의 자기성찰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독점적 자본에 편입된 거대 출판사가 만들어낸 집단적 글쓰기와 상업주의의 위기에 대해 저널리즘은 근대 문학의 비판적 기능과 도덕적 전통을 근거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수정하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르포르타주 장르는 구체적 사건 및 대상에 대한 보고라는 신문매체의 고유한 역할과, 리포터 개인의 주관적 사유를 동시에 가능케 하는 매체로서 저널리즘의 도덕적, 문화적 자기 역할이해에 대한 논의를 주고받는 가장 적합한 무대가 된 것이다.

다음 II, III, IV. 절에서는 세기말에서 1920년까지 지속되었던 저널리즘 논쟁에서 르포르타주 장르가 이러한 문화정치적 함의를 담지하게 만들었던 대중저널리즘의 역사적 상황, 르포르타주 장르 자체의 미학적 특징, 그리고 ‘신객관주의’로 지칭되는 당대의 문화적 도덕적 열기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키쉬의 르포르타주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설명하고, 또 그 한계를 가늠하는데 흥미로운 잣대가 될 것이다. 


Ⅱ. 1920년대 대중저널리즘과 상업주의

1920년대 독일사회는 현대사회의 대중적 공론장의 구조가 확립되고, 동시에 그 대중매체의 시대적 정당성에 대한 사회적 의식이 확실하게 자리 잡는 시기였다. 새로운 오락의 매체로 각광받았던 영화와 라디오가 아직 그 초기 단계에 있었으며, 텔레비전이 발명되지 않은 이 시기에 엄청난 양의 정보를 숨 가쁜 속도로 대중사회의 구석구석으로 전달해주는 매체는 바로 대중신문이었다. 이미 19세기 중엽에 정보를 상품으로 사고파는 세계시장의 기본 구도가 형성되었으며 (AFP 1836 파리, AP 1848 뉴욕, Reuters 1851 런던, WTB 1849 베를린), 각종 관련기술의 발달로 19세기말에 이르러 일간지 및 주간지 형태의 저렴한 대중신문이 유럽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상화되었다. 독일의 경우 1920년대 및 30년대 초반에 현대적 대중저널리즘이 폭발적으로 확산되는데, 이것은 저널리즘 휴지기였던 일차대전(1914-1918) 기간에 대한 단순한 반사작용, 또는 고속윤전기의 발명과 같은 외부적, 물질적인 조건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종전과 혁명이 가져다준 정치적 자유와 해방, 일차대전을 거치며 더욱 중요해진 국제정치, 과학과 현대기술의 전 세계적 파급, 국내 경제와 사회생활의 불안, 문화와 예술의 다양화와 대중화가 독일시민사회에 전에 없이 광범위한 정보 욕구와 수요를 창출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여론을 주도하는 일간지 중의 하나였던 「베를리너 타게스블라트 Berliner Tagesblatt」를 예로 보자면, 종전 직후인 1918년-1919년에 이미 275.000 - 300.000 의 발행부수를 기록한다. 독일의 신문이 전통적으로 각 지방의 교역, 경제거점도시를 토대로 형성된 지역신문으로 출발하였고, 당시 베를린의 인구가 약 이백만 명이었음을 상기하면 위 수치의 의미를 가늠할 수 있다. 1920년대 대부분의 독일 일간지들은 일일 3회 발행의 규칙을 따르고 있었으며, 주말에는 별도의 주제별 지면을 첨가하였고, 정기구독 뿐 아니라 적극적인 가두판매 Boulevardpresse 를 병행하였다. 1920년대 평균적으로 전체 독자의 약 4분의 3을 커버하고 있던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신문은 그 전성기인 1929년에 203개의 신문에 총 백삼십만부를 발행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독일 전체로는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계간지 등을 망라하여 약 4700여개의 신문과 잡지가 발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통계가 이미 시사하듯이, 1920년대 독일사회가 경험한 대중저널리즘의 폭발적인 확대는 신문역사상 전무후무한 현상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정치적, 사회적 통제를 벗어난 대중저널리즘이 얼마나 상업주의적 법칙에 종속될 수 있으며, 시민사회와 문화에 대해 어떤 새로운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저널리즘의 시장이 이처럼 확장되고, 신문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정론지의 전통을 지켜오던 신문들도 ‘교양시민’ 독자를 전제로 하던 기존의 편집원칙을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세기 독일의 대표적 정론지였던 「보시세 차이퉁 Vossische Zeitung」(1617-1934) 이다. 지식인 신문 Gelehrtenblatt 의 전통을 이어오던 보시세 차이퉁은 1914년 울스타인 출판사에 팔릴 때 불과 이만오천명의 구독자를 보유하였다. 이 신문은 울스타인 출판사에 “매년 엄청난 추가비용을 유발하는 간판용 고급신문 das gehobene Prestigeblatt, dem sie jedes Jahr beträchtliche Zuschüsse opferten." 이었는데, 동출판사의 다른 신문과 통폐합을 거치고, 그 외양을 현대화한 후 1927년 칠만부 가까이 확장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1920년대의 독일의 일간지는 대부분 ‘모든 사람을 위한 신문 Zeitung für alle’의 틀을 갖춘 대중지였다. 대중지가 된 신문은 다양한 계층에서 가능한 많은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을 쓰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사건을 흥밋거리로 만들고, 해설을 통해 주독자층의 정치적 상식을 대변하고, 교양을 오락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은 신문의 지면별로 기사의 선정과 배치, 수정을 담당하는 편집자의 권한이 커지고, 기사텍스트를 쓰는 리포터의 종속성이 높아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특히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기사를 작성하고 이것을 기사의 줄 수에 따라 값을 쳐 받고 팔아 넘겨야했던 리포터들, 소위 “Penny-a-liner” 로 불리던 지역 리포터들은 정해진 시간까지 새로운 기사거리를 제공해야 하는 압박으로 사소한 사실을 부풀리거나, 거짓말을 섞는 일도 적지 않았다. 대중지가 흥밋거리와 오락의 제공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상업적 목표는 사실 구독자의 확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독자의 확장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신문 광고면의 상품가치의 상승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대중저널리즘이 자리잡는 1890년에서 1920년 사이 비인 일간지의 평균 가격의 변화를 보자면, 1895년에 평균 2,4 제멜 Semmel 이었던 것이 1920년에는 1,6 제멜로 낮아진다. 즉 대중지가 중요하게 여기는 상품은 정보보다 광고지면이며, 목표로 하는 소비자는 독자보다 광고주가 되는 것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러한 형태의 신문에는 크라우스와 동시대인인 경제학자 칼 뷔허의 정의, “신문은 광고지면을 상품으로 생산해내는 기업의 성격을 가지며, 이 상품은 신문편집을 통해 비로소 판매 가능한 형태가 된다는” 정의가 딱 들어맞는다. 신문 편집의 고유한 결과물의 판매가 광고면의 판매와 처음부터 연계되는 이러한 상업화의 틀 아래서 신문의 비판적 기능은 조작의 기능으로 전복된다. 대중매체는 사회적 권력의 복합체에 흡수되고 만다. 하버마스의 이러한 주장은 대중저널리즘의 상업주의 문제가 대중소비시대의 모든 정신적 생산물 및 예술 생산품이 일반적으로 지니는 문제 이상의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즉, 신문의 고유한 지적 작업인 기사 작성과 해설, 편집이 이미 그 생산 단계에서 광고지면이라는 상품을 만들어낸다는 목표와 연계된다는 것은 신문의 지적 성격 자체가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도르노의 의미에서 신문은 문화산업 Kulturindustrie 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기사라는 상품이 무엇보다도 현재성과 순환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하루 세번 정해진 시간까지 정해진 사건을 바탕으로 보다 자극적인 기사를 제공하기 위해서 이미 언급했듯이 기사 작성과 편집 단계에서 과장이나 거짓말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신문을 오늘날의 독일의 일간지들과 비교해보면 기사제목, 서술방식, 사진의 과다한 사용 등, 그 외양에서부터 센세이셔널리즘이 뚜렷하다. 이 시기에 업튼 싱클레어, 존 리드, 에곤 키쉬와 같은 저널리스트들이 대중 스타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상업주의 저널리즘의 메카니즘 아래서 이들의 이름이 유명상표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였기 때문이었다.


Ⅲ. 푀이통과 르포르타주: 내러티브의 저널리즘

대중저널리즘을 둘러싼 1890에서 1930년대의 논쟁에서 특히 쟁점이 된 것은 소위 문화비평적 에세이, 즉 ‘푀이통 Feuilleton’이었다. 문화비평란에 실리는 기사의 장르는 매우 다양하여 정치적 에세이에서부터 역사적 에세이, 기행문, 인물평, 예술비평 등을 포함한다. 사실 일면 기사와 정치적 사건, 경제소식, 사회면의 사건, 사고 등 소위 ‘선 위 über dem Strich’ 기사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기사, 즉 ‘선 아래 unter dem Strich’ 기사가 ‘푀이통’ 으로 지칭되었다. 원래 신간서적이나 전시회, 연극, 영화 비평문들이 실리던 푀이통이 저널리즘 논쟁에서 쟁점으로 부상한 것은 바로 이 문화비평란이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더욱 많이 제공하려는 대중신문들에게 손쉬운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푀이통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으로는 미사여구와 과장이 많다는 것, 신변잡기적인 사소한 에피소드를 다룬다는 것, 주관적이라는 것, 자극적인 흥미를 추구한다는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실제로 대중저널리즘 초기에 푀이통은 광고의 직접적인 형태로도 원용되는데, 예를 들면 보시쉐 차이퉁 1894년 12월 14일자 문화비평란에 실린 「한밤중에 Um Mitternacht」라는 글에서 등장인물 플라토우 S. Flatow 는 한 초콜릿 상점에서 자신이 꾼 탐욕스런 꿈을 언급한다. 통속소설의 내러티브 형식을 빌고 있는 이 푀이통은 그런데 텍스트의 끝을 구분하는 실선 아래 바로 위에서 언급한 초콜릿 가게라고 짐작되는 실제 상점의 광고를 게재하고 있다. 푀이통과 광고의 이러한 직접적인 결합은 이미 1870년대 이래 경제신문 Generalanzeige 에 뿌리를 둔 대부분의 대중지에서 행해오던 것으로 방금 예로 들은 보시쉐 차이퉁은 일종의 고급 정론지로서 이러한 광고형식을 오히려 뒤늦게 받아들인 것이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까지 이어진 푀이통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은 단순히 이 장르의 미학적 특징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앞 절에서 하버마스가 지적한 저널리즘의 상업주의를 둘러싼 논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푀이통의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대상에 관한 객관적 보고라는 좁은 목표에 매이지 않는 그 장르적 특징으로 인해 푀이통은 “오락적일수도, 교훈적일 수도, 주관적일 수도, 또 어떤 의도에 따라” 쓰여질 수 있으며, 지면과 더불어 “하루 만에 사라질 수도 있고”, “시간을 초월한 예술의 영역” 으로 비상하기도 한다.
보다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진행된 푀이통 저널리즘을 둘러싼 논쟁은 본격적인 현대 대중사회로의 진입을 둘러싼 서로 다른 정치적, 문화적 입장들 간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을 통해 부각된 푀이통의 미학은 현대 대중사회의 일반적인 세계인식의 중요한 측면을 밝히는 계기가 된다. 키쉬의 「푀이통 Feuilleton」은 그 자체 푀이통의 한 예이자, 동시에 푀이통의 서술구조를 드러내는 흥미로운 한 경우이다. 자신을 일인칭 화자로 등장시키는 키쉬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고, 펜을 꺼내서 푀이통 기사를 작성한다는 작가의 실제 상황을 서술의 틀로 이용한다. 키쉬는 해당 푀이통을 쓰는 과정을 성찰적으로 유희적으로 재현시키면서 글을 시작한다. 우연히 발견한 신문, 그 중에서도 광고 지면에 대한 이야기는 그러나 해당 광고에 대한 다양한 언어유희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예를 들면, 고지 스위스의 황소를 종마로 찾는 광고와 요크셔, 버크셔, 랭체스터 돼지를 판다는 광고를 빗대어 “중립국인 외국은 열렬히 찾지만, 적대적 관계에 있는 외국의 것은 반납”하려고 한다는 시대 비판적 유머를 구사한다. 그리고 이 자유로운 광고 언어 분석을 다급히 중단하는 말줄임표에 이어 “미안하네요. 저기 헬레네가 오네요. 예상보다 빨리 오네요. 이제 그만해야겠네요.” 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커피숍의 우연한 손님이자 관찰자인 키쉬의 글 「푀이통」은 푀이통이 인과관계가 아니라 연상을 통해 스토리와 사유를 전개하며, 또 전개된 내용에 대한 논리적 종합이나 결론 없이 텍스트를 끝낸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푀이통의 이러한 서술구조는 세계를 더 이상 자신의 삶의 의미망과 통합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파편적이고 우연적으로 경험하는 현대 대중사회의 개인의 인식구조에 부합하는 것으로, 벤야민은 그의 대표작 󰡔아케이드󰡕에서 바로 이러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현대의 거대한 삶의 공간인 대도시를 움직이는 현대인들의 시간 감각은 유동성과 단절성, 그리고 동시성의 특징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폭발적 대중소비사회로 진입하였던 1920년대의 독일사회의 시민들이 실제로 공유하던 삶의 감수성으로, 이 시기 젊은 작가들의 소설들, 예를 들면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캐스트너 󰡔파비안󰡕 등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벤야민은 이러한 현실인식의 감수성을 ‘도시의 산보자 Flaneur’ 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는데, 푀이통은 바로 이러한 현실인식 방식에 부응하는 서사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키쉬가 자신의 르포르타주를 ‘단순한 보고 wilder Bericht’ 와 구분하여, 개별 대상과 사건을 ‘논리적 상상력 logische Phantasie’ 을 통해 보다 넓은 현실과 연계하고 그 맥락을 구성하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그는 바로 푀이통 장르가 허용하는 주관적 상상력을 자신의 방식으로 실현시키고자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키쉬는 개별 대상 및 사건들 자체의 경험주의적 보고를 넘어서는, 주관적 사유를 매개로 통합적인 현실, 진실을 건드릴 수 있는 르포르타주를 염두에 두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할 것은, 그가 상상하는 이 르포르타주의 진실은 경험사회과학적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 역사철학적 진실에 닿아있는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벤야민이나 각주 30 에서 언급한 아도르노의 경우, 개별적 대상경험이 (존재 전체를 염두에 둔) 진실을 시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바로 개별대상이 우연하고 파편적인 것으로 경험되는 것, 즉 일종의 ‘가상’의 성격을 부여받는 것이다. 동시에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경우 역사철학적 진실이 부정의 유토피아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진실 역시 가상, 내지는 흔적으로만 존재한다. 벤야민과 아도르노가 모더니즘 미학을 ‘부유하는 schwebend’, 또는 ‘명멸하는’ 미학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그러나 저널리즘의 장르인 르포르타주는 개별적인 사건, 대상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데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키쉬가 소위 ‘논리적 상상력’을 통해 포착하려는 전체의 진실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키쉬의 르포르타주를 검토하면, 그것은 때로는 인간적 휴머니즘으로, 때로는 역사적 학구적 사변으로, 때로는 자본주의 계급이론으로, 때로는 사회주의 유토피아로 나타난다. 키쉬 스스로 책의 형태로 재출판하였던 1920-30년대 초반의 르포르타주 작품집들 전체를 나란히 놓고 분석해보면, 뒤로 갈수록 특히 1925년 가을에서 1926년 봄의 소비에트 러시아 보도 여행이후로는 자본주의 계급비판과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역사유물론 정치학의 형태에 점점 다가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키쉬의 르포르타주 전체가 추구하는 존재의 진실은 미학적인 방식, 즉 부재하는 것으로서의 완전한 존재에 대한 표상이라기보다, 역사유물론의 이데올로기에 의지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키쉬의 이러한 경향성이 심화될 경우, 현실의 구체적 ‘대상’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르포르타주의 목표와, 구체적 대상을 넘어서는 ‘진실’의 빛을 가시화해야 한다는 키쉬의 ‘문학적’ 르포르타주의 목표는 서로 양립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즉, 보고의 대상인 구체적 사건이나 현실의 단면은 오히려 역사유물론에 대한 알레고리의 성격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1927년 독일공산당 KPD의 기관지 「아르바이터 일루스트리어테 차이퉁 Arbeiter-Illustrierte-Zeitung」(Berlin, Jg.6, Nr. 25. 6월 25일자 8면 이후) 에 실린 르포르타주 「노동의 베를린 Berlin bei der Arbeit」은 이러한 필자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한 예이다. 약 약 37줄 x 50자 x 3.3장 분량의 비교적 짧은 르포르타주인 이 글은 노동 및 작업의 도시로 유명한 베를린의 국제적 위상을 강조하고 도시의 교통 및 건축의 위용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곧 다음 단락부터 소비에트 러시아의 노동과 비교하여 베를린의 노동은 억압과 소외의 행위임을 주장한다. 베를린의 거대한 기계설비와 산업문명이 실업의 축소, 임금의 증가와는 상관없는 일임을 자세히 설명한 후, 잠시 노동자들의 거주 문제와 먼 출근 거리의 문제를 일종의 사회고발 르포르타주의 형식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전체 르포르타주의 마지막 삼분의 일은 도시 곳곳에서 진행되는 야간 작업조의 노동자들의 각종 노동 행위를 아무 생각 없이 다음날 쾌락과 편안함을 즐길 부르주아 계층과 반복적으로 대비시키며 나열한다. 마지막 문장을 살펴보자.

... 베를린, 이 거대한 도시는 밤낮으로 일을 한다. 이 도시에는 모순이 극명하게 공존한다. 그러나 베를린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향유는 거부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대부분 모르고 있다.

여기서 살펴본 베를린 르포르타주는 베를린의 현대적 기계문명이 유지, 재생산되는 과정을 스물네 시간의 순환구조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르포르타주는 베를린의 야간노동세계에 대한 보고이자, 동시에 풍요로운 자본주의 문명에서의 노동 소외 문제에 대한 알레고리로의 독법을 시사한다. 즉, 보고의 대상인 베를린 대도시의 야간 노동현실은 그 현실성의 가치보다, 자본주의 문명에서의 노동 소외를 시사하는 우의적 가치를 더 많이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다. 키쉬의 르포르타주가 역사유물론의 세계해석에 의지하는 정도가 심해질수록, 르포르타주의 리얼리즘은 문학적 알레고리로 전도되는 위험에 빠진다. 이 경우 저널리즘은 사라지고 문학적 상상력이 귀환한다는 것을 그의 한 영화비평은 흥미롭게 증언하고 있다. 단순한 리얼리즘의 양식으로 제작된 소작 농노 폴리쿠쉬카의 자살을 다룬 소비에트 영화 󰡔폴리쿠쉬카 Polikuschka󰡕비평인 「영혼의 영화 Die verfilmte Seele」(1924)에서 키쉬가 소개하는 영화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알코올중독자이자 도둑질을 일삼던 농노 폴리쿠쉬카가 다시 삶의 의지를 가지고 주인의 신뢰를 획득한 순간, 주인이 위탁하여 수령한 대금을 귀향길에 모두 잃어버리고 죄책감에 목을 맨다. 그리고 키쉬의 비평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그러나 폴리쿠쉬카에는 한명의 인간과 한마을 이상의, 아니 모든 러시아의 마을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있다. 폴리쿠쉬카와 이 영화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비극 이상의 문제가 있다. 거기에는 돈에 고통 받고 돈 때문에 몰락하는 인류 전체의 모든 비극이 들어있다. 돈에 강간당하고 돈에 몰락하는 우리 모두의 영혼이 여기 영화로 나타났다.

영화 속 인물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도외시한다면, 비평문의 이 마지막 멘트는 키쉬 르포르타주의 어느 곳엔가 충분히 편입될 수 있는 해설이다. 이러한 사실은 키쉬가 추구했던 르포르타주의 진실이 예술적 진실에 가까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것은 키쉬 르포르타주에 내재된 특별한 문화적, 도덕적 가치와 더불어 사실성의 상실이라는 위험부담을 동시에 가늠케 한다.


Ⅳ. ‘달리는 리포터’ 와 신객관주의 문화

독일 1920년대 르포르타주의 부상은 처음에 언급했듯이 일차대전 이후 독일의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세기말 이래 대중소비사회와 대중저널리즘의 확산, 그리고 일차대전과 전후 민주화의 물결은 서구 사회 전체에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독일의 경우만큼 극단적이지 않았다. 독일은 일차대전의 대량학살의 가장 큰 피해국이었으며, 절대국가적인 구체제의 급격한 몰락을 겪었으며, 전후 4-5년간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이션과 경제적 파국을 겪었다. 이러한 경험은 19세기 시민사회의 ‘개인교양’의 이념, 그리고 근면, 신뢰, 정직과 같은 중산층의 가치관을 무효화하였고, 그것은 전통적 시민문화와 예술 전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졌다. 이에 대한 반사작용은 한편으로는 기술과 자본, 포디즘과 영화, 미국적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전면적인 긍정, 그리고 문화와 예술의 상품화 및 대중화였고, 다른 한편은 예술의 사회적, 정치적 참여에 대한 요구였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정신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문학적 현상은 소위 ‘실용시 Gebrauchslyrik’나 르포르타주 문학 그리고 정치적 민중극 등이었다. 키쉬가 1918 비인 혁명 참가 이후 사회주의 이념에 뚜렷한 지향성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스타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새로운 문화적 기류, 소위 신객관주의의 문화적 감수성에 크게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키쉬 스스로도 이러한 감수성을 연두에 두고 있었음은 그의 일련의 르포르타주 앨범들의 제목, 예컨데 󰡔달리는 리포터󰡕(1924), 󰡔시대와의 숨가쁜 전쟁󰡕(1926), 󰡔세계의 모험 Wagnisse in aller Welt󰡕(1927) 등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십년대 중반 키쉬는, “미국식 템포를 깆춘 리포터” 라는 이미지, 바로 책 제목으로 가장 잘 표현된 바로 그러한 저널리스트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자 하였다. 1924년의 첫 번째 책을 뒤이어 1926년 ‘달리는 리포터’의 새책 󰡔시대와의 숨 가쁜 전쟁󰡕이 나오고, 중점은 다르지만 역시 이 시리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세번째 책, 󰡔세계의 모험󰡕 이 나온다. 이 제목들은 의도적으로 일종의 변주 형태로 선택된 것으로 키쉬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숨가쁘게” 달리는, 도처에서 “모험”을 이겨내는 리포터, 그의 활동 장소는 “시대”이며 “세계”이다.

키쉬가 신객관주의의 시대적 감수성을 적극 활용하기 위해 르포르타주 작품집의 제목 및 발행 순서를 기획했을 뿐 아니라, 개별 르포르타주들을 지극히 자의적으로 재배열했다는 사실은 키쉬의 르포르타주가 또 다른 차원에서 문학적 허구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키쉬는 이러한 현대적 ‘리포터’의 에 허구적 성격에 대해서 후에 다음과 같이 스스로 대변하고 있다. 독자는 “작가가 오늘은 쿡스하펜에서 첫 항해를 앞둔 세계 최대 규모의 여객선인 ‘조국’호를 타는 것을 보다가, 아무 중간과정 없이 내일은 호프 수확을 위해 보헤미아의 들판으로 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 그러던 작가가 이십 페이지에서는 런던 야간보호소에서 밤을 새우고, 사십 페이지에서는 수상보트를 타고 베네치아로 건너간다.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중간과정이나 연결내용 없이 마치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일어나는 것처럼, 마치 장애물이나 비용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냥 작가의 기분에 따라 이리 저리 이동하는 것이다.” 이제 오십삼 편의 르포르타주 모음집인 󰡔달리는 리포터󰡕를 원래의 시간과 출처에 따라 재구성한 슐렌스테트의 분석을 확인해보자.

이 책의 첫 텍스트는 1914년 런던 르포르타주 중의 한편 (화이트채플의 홈리스들)이다. 런던 르포르타주 중에서는 세편이 더 선택되는데, 이것들은 책 중에 서로 다른 자리에 배치된다; 책의 두번째 르포르타주는 1918년 극지-르포르타주 중 하나이다. (잠수항해) 극지-르포르타주 중에서는 세편이 더 책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실려있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1919년의 비인-푀이통 네편이 채택, 게재되고, 1921년의 여행에서 쓴 여섯 개의 파리-기록문이 실렸으며, 이십년대 초의 베를린 르포르타주 여덟편, 1923년 루르 여행에서 유래하는 르포르타주 세편, 그 외의 다섯편의 독일관련 기사, 1924년 삼월/사월의 덴마크 여행의 산물인 덴마크 르포르타주 세편이 책 여기저기에 흩어져 배치되었다. 그리고 다시 첫 번째와 두 번째 프라하 체류시절 작성한 기사들, 1913/14년 베를린 시절의 기사. 헝가리와 서부전선에서 기록한 군대시절의 기사들이 다양하게 흩어져 있다.

키쉬는 다양한 신문지면에 실렸던 자신의 르포르타주를 모음집의 형태로 출판하면서, 시대의 다양한 현실에 대한 기록, 전 세계에 대한 만화경으로서의 르포르타주라는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달리는 리포터󰡕 서문에서 표방한 그의 원칙, “리포터는 어떤 경향성도 갖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정당화하지 않는다. 특별한 입장도 없다. 리포터는 단지 불편부당한 증언자로서 불편부당한 증언을 하고자 한다.”는 원칙이나, 그가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객관성에 대한 의지, 진리에 대한 의지 Wille zur Sachlichkeit, zur Wahrheit”와 사실은 어긋나는 것으로, 오히려 반복적인 객관성의 선언이 ‘시대의 기록’이라는 그의 르포르타주 문학적 프로그램의 일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시대의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서 편집한 르포르타주 모음집 󰡔달리는 리포터󰡕는 사회학적 현실 연구와 고발 및 도시 스케치 열아홉편, 기술과 산업, 경제관련 르포르타주 열편, 전쟁보고문 열편, 역사적이거나 문학적인 분석기사 일곱편, 범죄르포르타주 여섯편, 현장 사건 한편을 포함하는 이질적인 텍스트들의 집합체이다. 그의 르포르타주 텍스트들 전체를 망라해보면 그것은 개별 사건과 현실의 특정 단면에 대한 우연한 기록을 넘어서는 현실과 시대에 대한 신객관주의적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동시에 이 신객관주의적 상상력이 포착한 현실의 만화경은 정치적 당파성뿐만 아니라 호기심을 자극하고 감추어진 것을 들추어내는 저널리즘의 센세이셔날리즘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27년 출판된 󰡔범죄 여행집 Kriminalistisches Reisebuch󰡕은 범죄의 사회적 현장들을 ‘여행’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을 드러낸다. 즉, 범죄에 대한 ‘호기심’의 시각을 자극하고, 범죄라는 사회적 현실을 ‘기사’거리로 포착하는 것이다. 키쉬의 호기심과 탐사는 과학적 발견이나, 기술의 발명, 또는 자연현상과 같은 실제로 새로운 볼거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존재하는 일상적 현실들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비로소 만들어내는 전략을 구사한다. 르포르타주 기사를 위해 키쉬는 독일과 유럽뿐 아니라 러시아, 미국, 호주, 중앙아시아, 일본, 중국 등 광범위한 지역을 쉴 새 없이 여행하였고, 그리고 여행지마다 그 지역의 감옥과 범죄자들의 현실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물론 키쉬 스스로 표방한 르포르타주의 미학, 즉 ‘사소한’ 것, ‘낮은’ 것, ‘일상적인’ 것에서 사회와 시대의 진실을 포착한다는 원칙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자가 평상시 접하기 어려운 사회적, 물리적 환경을 들여다보려는 호기심을 이용하는 ‘센세이셔널리즘’ 저널리즘의 경향이기도 하다. 
 


Ⅴ. 결론: ‘달리는 리포터’ - 역사적 신드롬

키쉬의 르포르타주 문학은 1920년대의 대부분의 전위적 예술 실험들처럼 1933년 민족사회주의자들의 집권과 더불어 일차적으로 단절의 위기를 맞는다. 이후 지식인들의 반파시즘 투쟁에 키쉬는 자신의 펜으로 나름대로 참여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1920년대 확신에 찼던 리포터 키쉬로서가 아니었다. 이차대전이 끝나고 키쉬의 르포르타주 문학은 매우 이질적인 방식으로 수용되고 평가되었다. 1950년대 독일연방공화국의 보수주의는 문학에서 예술의 자율성과 모더니즘, 개인의 내면으로의 회귀로 나타났고, 키쉬는 망각된 존재로 문학사에서 사라졌다가 바이마르공화국을 연구하는 소수의 독문학자들에 의해 다시 발견된다. 그러나 신문방송학은 키쉬에게 르포르타주 장르의 창시자로서 뚜렷한 자리를 인정하였고, 1994년부터 슈테른지는 키쉬 르포르타주 상을 제정, 포상하고 있다. 그에 반해 구동독의 문학사는 1970년대 이래 키쉬를 독일 사회주의 문학사의 가장 중요한 이정표 중의 하나로 규정하고, 일종의 국민문학자로서의 위상을 부여하였다. 1945년 이후 확인되는 이러한 상이한 키쉬 수용사는 수용하는 편의 정치적 입장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키쉬 르포르타주 문학이 담고 있었던 이질적인 요소들이 해체되고 선별적으로 수용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즉, 정치적 당파성으로 축소된 구동독 문학사의 프로그램은 시대의 진실과 자본주의 비판을 구분하지 않았던 키쉬의 르포르타주의 유산을 이상화하였으며, 서독의 신문방송학은 주관적 내러티브를 저널리즘의 사유의 한 방식으로 개척한 키쉬 르포르타주의 서사미학을 계승하였으며, 예술의 자율성과 개인의 의식으로 회귀한 연방공화국의 문학사는 저널리즘의 객관성을 추구하는 키쉬를 문학사의 외부로 밀어낸 것이었다. 키쉬의 르포르타주 문학의 프로그램은 한편으로는 역사철학적 진실의 빛의 흔적을 담은, 그런 포괄적 진실의 이상을 한편으로 가지고 있고, 다른 한편 파편과 몽타주, 연상 작용을 통해서만 현실에 접근할 수 있는 현대적 인식조건 사이에 서있었다. 이러한 인식론적 긴장 속에서 키쉬의 르포르타주는 방법론적으로 한편으로는 역사적 유물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단 없이 새로운 정보의 생산을 요구하는 저널리즘의 상업주의에 흡수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달리는 리포터 키쉬라는 역사적 신드롬에는 서로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 예컨데 ‘진리’와 ‘사실’에 대한 강렬한 신념, 전통적 작가와 문학에 대한 동경, 저널리즘의 글쓰기의 위상과 과제에 대한 과도한 성찰, 거의 무차별적으로 느껴지는 다양한 사회적, 물리적 공간들에 대한 호기심, 기계와 기술에 대한 순진한 우호감, 대도시 중심주의 등이 공존하고 있다. 키쉬의 르포르타주가 이처럼 이질적인 욕구와 요소들이 충돌하고 합류하는 장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일차대전 이후의 현대 대중사회의 전면적 충격 - 19세기 교양시민 개인의 완전한 해체, 시민적 공론장의 헤게모니의 문학에서 저널리즘으로의 이양, 상업주의로 인한 서구 저널리즘의 지적 기반의 와해의 위기, 그리고 우연과 파편으로 분산된 대도시의 존재방식 등 - 과 그로 인한 문화적 위기를 바로 현대대중문화의 원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려고 했던 신객관주의의 기본적인 정신적, 문화적 하비투스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서구사회의 대중저널리즘이 매체사회로 이전, 확산되고, 예술과 문학이 저널리즘과는 뚜렷이 구획되고, 대도시적 삶의 조건이 일상의 부분이 된 오늘날, 키쉬 신드롬에 내포되었던 여러 프로그램들은 이제 대부분 지나간 과거의 역사적 맥락에서만 유의미한 질문과 대답으로 되살아난다. 그러나 키쉬 신드롬이 증언하는 현대사회의 가상과 진실에 대한 질문들이 보들리아르의 의미에서 시물라르크의 순환구조가 심회된 포스트모던한 매체사회에서 다시 의미를 얻고 있음을 목도하면서, 역사적 현상은 현재의 질문을 다시 찾아내는 저장고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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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일리 2009-09-28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곤 에르빈 키쉬,를 검색하다가 이쪽으로 들어오게 되었어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마 '나무처럼' 님도 '달리는 리포터'이신 듯^^ 시간을 갖고 종종 들어오겠습니다~

멍후 2011-08-10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꼭 필요한 글들이라 염치를 무릅쓰고 서리하듯 프린트해 갑니다.
 

김학철이라는 사람. 
 
2002년인가 민주화 운동 당시 의문사한 유가족들의 국회 앞 농성에서 그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이의 메일 뒤에는 항상 '라스콜리니코프를 위하여'라는 꼬리말이 붙었는데 궁금하기는 했지만 정작 그에게 물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 이 글을 보게 되었다.

내부에서 문제제기를 한 국세청 직원의 파면 소식.
삼성 X파일을 알린 내부고발자 김용철 변호사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부인의 빵가게에서 카운터를 보고 있다고 한다.

김학철 씨를 본 지도 꽤 오래 되었다. 그는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런지...
이 글은 2006년인가 격월간 <삶이보이는 창>에 실렸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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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콜리니코프를 위하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상규명 작업이 그만큼 어렵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법적 권한 부족과 한시적 활동 기간이라는 제약성이 위원회 활동을 어렵게 하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 시대에 라스콜리니코프와 같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입니다. 그것도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하고 목격자인 노파의 여동생까지도 같은 방법으로 살해한 흉악범입니다. 그러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파렴치한입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게 된 동기는 ‘수전노와 같은 전당포 노파는 살 가치가 없는 버러지 같은 인간이므로, 죽여 버리고 돈을 빼앗아 헐벗고 굶주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자’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사람은 그런 일을 할 자격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른바 ‘초인주의’입니다.

이런 라스콜리니코프의 범행동기와 겹쳐지는 게 있습니다. 하나는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침공 동기인 ‘제국주의’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의문사 사건 발생 동기인 ‘국가 테러리즘’입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의 독재정권은 권력에 대항하는 모든 세력들을 ‘빨갱이’(악의 축)로 규정하고, 이들을 제거해야 국민들이 자기들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고 나라가 평안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권력의 하수인들은 이러한 정책에 따라 운동가들을 강제로 연행하였으며 다반사로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다가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애국’하는 길이고 ‘살 가치가 없는 자들’을 죽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 심약하다거나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눈총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런 동기에서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를 만나게 됩니다. 소냐는 집안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몸을 팔아야 하는 창녀였습니다. 그런데 수사과정에서도 철저히 범행을 부인하던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에게 설복되어 네거리로 가서는 ‘나는 살인자다’라고 크게 외치면서 땅에 입을 맞춥니다. 땅은 모든 것을 생산하는 어머니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고 떠납니다. 소냐도 라스콜리니코프의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자진해서 따라갑니다. 유형지에서 소냐의 숭고한 헌신에 감동한 다른 재소자들은 소냐를 ‘어머니’와 같이 대접합니다. 그럼에도 라스콜리니코프는 여전히 자신의 범행 동기가 옳았다고 생각하며 옥바라지를 하는 소냐를 시큰둥하게 대했습니다. 그러자 재소자들은 어머니와 같이 숭고한 소냐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살 가치가 없는 자’라고 여겨 집단적으로 살해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에게 다시 설복됩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일전에 의문사위 사무국장으로 활동하셨던 황인성 님이 ‘피카르를 기다리며’라는 글을 쓰신 적이 있었습니다. 피카르는 드레퓌스 사건 당시 프랑스군 참모본부에 중령으로 근무하면서 드레퓌스가 무고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군 당국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제3자로서 양심선언을 하였던 내부비리 고발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피카르’는 기다려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는 더더욱 기다려집니다. 어쩌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소냐’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학철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 편집자문위원.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 유가족 대책위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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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숙제...처럼
미뤄두고 언젠가는 본격적으로 다뤄봐야지 하면서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주제 중에 하나가 '양심선언'이다.  

한국사회만큼 내부고발자, 양심선언한 이에게 가혹한 사회가 또 있을까.
아마도 이 나라에서 패가망신하는 가장 손 쉬운 길은 바로 "양심선언'이 아닐까.  

이 글은 이경남 목사가 1999년 『당대비평』에 투고해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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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의 고백 -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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