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바이라면 우리 시대의 시민들도 모두 갖고 있다. (...) 1984년 7월 나는 몇 장의 사진을 찍어와 들여다보며 우리 시대의 이 완벽한 알리바이를 생각하고 또 그것을 슬퍼했다." 

소설가 조세희는 사북사태가 있은 지 몇 년 뒤 사북을 다녀와서 <침묵의 뿌리>에 이렇게 썼다. 그는 이 책에서 "나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이땅에 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동안 우리가 지어온 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 시대의 죄와 우리의 죄책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치의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 한나 아렌트는 '죄'와 '책임'을 구별해야 된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 모두 죄가 있다"라는 호소는 실제 죄를 지은 자를 무죄방면하는 데 일조할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죄'는 법적 개념이기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인 또는 인류에게는) 그와 다르게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누구나 짊어져야 할 '집단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경식<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지난 노무현의 죽음에서 나는 어떤 집단적 죄의식과 그에 대한 속죄의 행렬을 본 듯 하다. 나 또한도 어느정도의 미안함과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이 또 다른 희생자, 이를테면 노무현이 "죽음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갔다"고 선언했음에도 이미 죽어버린 한진중공업 김주익, 홍콩에서 자결한 농민 이경해, 이라크에서의 김선일, 대추리의 주민들, 부안과 새만금... 이런 이들에 대한 집단적 책임의식과 겹치면서 복잡한 심경이 되기도 했다.

벌써 많이 잊혀진, 9명의 목숨을 앗아간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아직 장례조차 치루지 못한 용산참사, 대한통운 택배노동자 투쟁에서 목숨을 내놓은 박종태. 그리고 기륭전자와 쌍용자동차. 이런 사건에 대한 집단적 책임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꽤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최소한 이 나라에서는.  

그 노력의 하나로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을 읽어볼 참이다. 
"우리는 80년대에 또 어떤 진행을 맞게 될까? 당신은 아는가?" 
1985년 나온 <침묵의 뿌리> 마지막 문장이다.
우리는 이미 그 후 20년을 알고 있다.
하지만 2009년, 그리고 다가올 2010년대 어떤 진행을 맞게 될지 알지 못한다.
'침묵의 뿌리'를 찾아 캐내고 싶다.  

 
<한겨레 서평>-----------------------------------

인권침해 감추는 ‘3가지 끔찍한 논리’ 
 

“용산참사 과잉진압 안해” 문자적 부인
“정당한 공무집행”
해석적 부인
“체제전복 시도 말라”
함축적 부인
피해자도 침묵하게 하는 메커니즘 고발 


가령 당신은 직장에서 당신의 인사고과 책임자가 한 직원에게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걸 언뜻 들었다. 또는 마을에서 나치 부대원들이 민간인을 총살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치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이렇다. ‘눈감아 버린다/못본 체한다/보고 싶은 것만 본다/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모르는 게 약이다/그건 나와 무관해/침묵의 음모/괜한 평지풍파 일으키지 마라/전체 사회가 현실을 부정하고 있어/차라리 몰랐다면/외면해 버렸지/심지어 자신도 인정하지 않았어.’

사회학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스탠리 코언 교수가 쓴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States of Denial)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며, 타인의 고통을 알게 됐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의 소산이다. 20세기 이후 국가권력이 저지른 인권침해의 메커니즘과 이를 방관한 대중심리의 속살을 사회학과 심리학, 인식론의 틀을 통해 파헤치고 있는 저작이다.

지은이 코언은 유대인으로서 1990년 이스라엘 인권단체의 일원으로 이스라엘 당국이 상습적으로 팔레스타인 구금자를 고문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가 이른바 ‘부인의 정치’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런 일이 없었다는 새빨간 부인에서, 그가 속한 인권단체가 애당초 편향적이며 배후세력에 속아 넘어갔다는 흠집내기, 비슷한 일이 일어났으나 그것을 고문이라 부르기 어렵다는 호칭 변경 등 정당화 논리가 동원됐다. 이른바 이스라엘 현실에서 인권침해는 일정 부분 감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고, 어쨌든 이런 문제를 계속 듣고 싶지 않다는 ‘암묵적 카르텔’ 속에서 그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졌다. 그는 자신이 속했다고 믿었던 진보 그룹마저 고문사건에 침묵하는 데 더 충격을 받았다. 


»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작은 공감과 비인간성에 대한 작은 저항이 세상을 바꾼다. 오른쪽 사진은 용산참사 현장에서 희생자 영정을 들고 묵념중인 유가족. 왼쪽은 1969년 비아프라 내전 당시 굶주려 아사 직전에 놓인 아이의 모습.  

이 경험은 이 책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코언이 인권침해와 이로 인한 인간의 고통을 분석하는 틀은 ‘부인’(Denial)이라는 개념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부인을 심리적 방어기제로 개념화했는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편한 사실에 직면했을 때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많아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코언은 인권을 침해한 가해자뿐만 아니라 이를 보거나 인지한 관찰자, 심지어는 피해자조차도 때로는 사실 정보를 어떤 식으로든 부정하거나 제쳐두거나 재해석한다고 말한다.

인권침해를 부인하는 메커니즘은 문자 그대로 사실을 부인하는 ‘문자적 부인’, 사실은 인정하지만 다른 해석을 갖다 대는 ‘해석적 부인’, 사실과 그 해석은 부정하지 않지만 그에 따른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함축적 부인’으로 나뉜다.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국가권력은 “학살은 없었다”(문자적 부인)고 사실 자체를 공식 부인한다. 다음은 완곡어법이나 초점을 흐리는 용어를 써서 “실제론 그렇지 않다”(해석적 부인)고 주장한다. 인종청소를 인구교체로, 학살을 부수적 피해로 표현하는 식이다. 영국군은 북아일랜드에서 ‘고문’을 자행한 뒤에 이를 ‘집중 심문’이라고 표현했다. 인권침해 증거가 너무 많거나 여론의 향배에 따라 “그 사건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함축적 부인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올해 초 일어난 용산참사에서는 3가지 부인논리가 다 동원됐다. “경찰의 과잉진압은 없었다.”(문자적 부인) “사망자 발생은 사실이지만 정당한 공무집행중 일어난 것으로 인권침해라 할 수 없다.”(해석적 부인) “진압 책임자 사퇴 주장은 반정부세력의 체제전복 시도다.”(함축적 부인)

코언은 이 책에서 아르메니아 대학살에서부터,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집시 대학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주민 탄압, 소련 스탈린의 인권유린,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 아르헨티나 군부의 더러운 전쟁, 동티모르·르완다 학살,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민간인 학살 등 20세기 이후 발생한 다양한 역사적 인권침해 사건들을 종횡하고 있다. 권위적 국가권력의 인명학살과 인권유린은 이를 바라만 보는 방관국가들에 의해 더욱 악화됐다. 1992년 뼈만 남은 보스니아 무슬림 주민들의 이미지와 함께 세르비아 강제수용소의 참상이 폭로되었을 때 미국 정부는 아는 바 없다고 잡아떼다 결국 처음부터 알았다고 인정했다. 참상을 알고도 모른 척 부인했던 것이다.

코언이 이스라엘에서 몸소 체험했다시피 ‘부인’이 일부 우익세력이나 권위주의 국가권력 혹은 가해자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좌파 지식인들도 자기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회가 저지른 잘못을 비판하려 들지 않았다. 스탈린이 고문과 자의적 구금을 자행하고 굴락 강제수용소를 설치하던 시점에 소련을 방문했던 그들은 문제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보긴 했지만 자기가 본 것에 담긴 의미를 부인했다. 코언은 그런 태도가 공산주의 평등사회라는 대의명분에 해를 끼칠지 모른다는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다고 꼬집는다.

코언은 인권침해와 이에 따른 인간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재생산하는 데에는 가해자와 관찰자(방관자)의 완고한 ‘부인’ 제도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가해 권력의 인권침해 부인은 이를 방관하는 일반대중의 태도와 무관할 수 없으며, 일반대중의 부인은 가해 권력의 행위를 정당화해주는 것이다.
 
» 인권침해 감추는 ‘3가지 끔찍한 논리’
 
코언은 타인의 고통에 눈감는 상태, 곧 ‘부인’과 자기기만은 인간 존재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코언은 왜 그 사건에 침묵하고 부인하는지 묻기보다 대다수가 부인하지만 왜 어떤 이들은 이를 ‘시인’하고 인권단체에 가입하며 행동에 나서는가, 왜 어떤 사람은 권위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이타적 인간들이 더욱 많아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인간을 양성하고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 책을 옮긴 성공회대 조효제 교수는 “코언의 작업은 지금까지 인권침해 연구와 인권운동이 상정해온 ‘사실→진상규명→처벌·제재→재발방지’라는 문제 해결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한다”며 “기존 관점은 인권침해 사실이 폭로되어도 왜 가해자는 끝까지 부인하기 십상이고 왜 관찰자들은 엄연한 사실 앞에서도 눈을 감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코언은 오랫동안 방치돼온 인권의 잃어버린 고리, 곧 현실의 부인 메커니즘을 해부함으로써 21세기 인권운동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것이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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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타인 고통에 대한 공감과 정치적 연대”
‘잔인한 국가…’ 저자 코언 교수
 
 


» 스탠리 코언(67) 영국 런던정경대학 명예교수

20세기 인권의 격랑을 온몸으로 헤쳐온 인물. 인권과 일탈사회학·범죄사회학 분야의 독보적인 학자. 지행합일의 행동하는 지식인.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을 쓴 스탠리 코언(67·사진) 영국 런던정경대학 명예교수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그는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권침해와 인간 고통이라는 주제를 평생 탐구해온 학자이자 인권운동에 매진해온 운동가이다. 유대인인 그는 남아공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이스라엘로 ‘귀향’해 18년을 살다가 현재 영국에 살고 있는 흔치 않은 궤적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1942년 요하네스버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학생 시절 남아공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 인종분리정책) 반대운동에 투신했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타향살이를 해온 부모와 유대인 동포사회의 영향 아래 사회주의적 청년 시온주의 운동에 빠져들었다.

그 자신이 회고하는바 유년기에 겪었던 경험은 그의 평생의 학문세계와 삶을 규정하는 원초적 밑불을 이룬다. “1950년대 요하네스버그의 한겨울밤. 남아공 여느 중산층 집처럼 우리 집도 아버지 출장 때면 야경꾼을 부르곤 했는데, 줄루족 출신의 야경꾼 노인이 외투 깃을 올리고 웅크린 채 숯불 곁에서 손을 비비는 것을 창 너머로 보았다. 오리털 이불이 선사하는 포근한 잠자리에 들다가 나는 퍼뜩 왜 저 노인은 밖에 있고 나는 안에 있는가 생각했다. … 왜 그들은 나를 주인나리라고 부르는 걸까. … 훗날 아파르트헤이트, 곧 인종차별과 특권, 불의 등을 사회학적으로 고민할 때도 왠지 마음이 편치 않던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코언의 학문은 범죄·일탈 사회학 시기와 인권의 시기로 나뉘는데, 1972년 런던에서 출간된 <대중의 적과 도덕적 공황>은 지금까지도 범죄사회학 분야의 손꼽히는 저작으로 알려졌다. 코언의 인권사상은 계몽주의적 휴머니즘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인권은 ‘인간’과 ‘권리’로 이뤄진 개념이고 권리 담론의 바탕에는 인도적 휴머니즘이 깔려 있어야 하며, 다른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를 정치적 연대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권의 깊은 의미라고 코언은 말한다.

영국 에식스대학에서 촉망받는 교수생활을 하던 1980년 그는 이스라엘 헤브루대학의 초청을 받아 가족과 함께 ‘귀향’을 결행했다. 그러나 그의 이상과 이스라엘의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헤브루대학에서 이스라엘 범죄 현황을 연구하다, 그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인권을 대변하는 운동으로 나아간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미국의 행동하는 지성 노엄 촘스키와 교분을 맺게 된다. 1987년 팔레스타인 주민의 봉기(인티파다) 직후 이스라엘 당국의 구타·고문·살상·추방 등의 실상이 인권단체 보고서를 통해 드러났지만 진보 자유주의자들조차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데 그는 절망했다. 결국 그는 98년 ‘이향’을 결행한다.

코언은 현재 파킨슨병 선고를 받고 투병중이라고 한다. 그는 촘스키가 가장 존경하는 사회학자이기도 하다. 촘스키는 코언 기념논총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우리 미래에 희망이 있다면 코언이 용기있고 헌신적이고 정직하게 걸어간 길을 다른 사람들도 따라갈 것이기 때문이리라.”  

허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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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9-06-07 0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처럼님 안녕하세요. 오래 전 조세희의 저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서경식과 코언의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맥락을 잘 짚으신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나무처럼 2009-06-07 12:16   좋아요 0 | URL
네.. 반가와요. 죄의식과 책임에 대해 조세희의 글이 깊다면 서경식은 그 깊이를 확장시키는 것 같아요. 코언은 우선 매우 두꺼울 듯 하군요^^

머큐리 2009-06-07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찜해두고 있어요...나중에 나무처럼님이 리뷰해 주시겠죠 ??

나무처럼 2009-06-07 19:52   좋아요 0 | URL
제 리뷰가 워낙 시원치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