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기억해야 할 구절.... 특히 지금 시대에서!


"제가 만약 1935년에 선서를 거부했더라면, 그건 결국 독일 전역에서 저와 같은 사람 수천수만 명이 선서를 거부했다는 의미였을 겁니다. 이들의 거부는 결국 수백만 명의 마음을 움직였을 거예요. 그랬다면 정권은 전복되었을지도 모르고, 최소한 애초에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겁니다.1935년에 제가 차마 저항할 채비를 갖추지 못햇다는 것이야말로, 독일에서 저와 유사하게 영향력을 지녔거나 또는 영향력을 지닐 잠재력을 지닌 사람 수천 명, 또는 수십만 명도 저와 마찬가지로 저항할 채비를 갖추지 못햇다는 뜻이었어요. 그리하여 이 세상이 상실되었던 겁니다."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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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른바 독일의 적들로부터 그런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독일의 적은 곧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러시아인과 미국인이 우리에 관해 한 말들 있지 않습니까." 목수 클링켈회퍼의 말이었다. "그런 말들을 이제는 자기들끼리 주고받더군요." -79쪽


그는 거기서 벌어지는 일을 보자마자 아이들의 부모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지금 유대인을 괴롭힐 뿐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당신들은 지금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 지금 당신들은 자기 아이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는 거라구." 노인이 이 말을 남기고 가버리자 그제야 부모들은 군중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아이들이 갖고 있던 과자를 내버리게 하고, 아이들을 끌고 황급히 그곳을 떠나버렸다. -82쪽


자기가 노예였다는 것을 몰랐던 사람들은 자기가 해방되었다는 것조차 모르게 마련이다. -98쪽


1931년에 독일 국영 철도에서는 불황을 이유로 직원들을 해고했다. ... 그는 자기네 지역 조장이 사실은 나치 반대자였으며, 그 역시 '자기 일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당에 가입했던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조장의 상관, 즉 그 지역 감독관이 열혈 나치였기 때문이다. 결국 조장은 셰퍼가 자기 결단에 따라 입당했다고 간주한 나머지, 몰래 그를 해고하려 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 지역 감독관이 나치를 보호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겁니다." 크로넨베르크에서는 이런 사건이 분명히 하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딱 하나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고, 비단 크로넨베르크에서만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133쪽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게 하나 있습니다." 내 동료 가운데 한 명인 언어학자가 말했다. ... "지속적인 변화와 '위기'를 가지고 우리를 계속 바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외부와 내부에 있는 '국가의 적들'의 책동에 위낙 매료되었습니다. 맞습니다. '매료되었던' 거죠. 때문에 우리 주위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던 그 끔찍한 것들에 관해서 생각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무의식중에 감사해 하고 있었습니다. 굳이 생각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235~237쪽


"맨 먼저, '더 작은 악'의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나중에 친구들을 도울 수 없어서 생겨나는 악에 비하자면, 제가 선서를 함으로써 생겨나는 악은 오히려 정도가 덜하다고 할 수 었죠. 하지만 선서라는 악은 확실하고 즉각적이었던 반면, 제가 친구들을 돕는 일은 미래의 일이었기 때문에 불확실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나중에야 가능할 선에 대한 희망으로, 그 당시에 그곳에서 분명한 악을 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이 악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 선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었던 반면, 악은 이미 뚜렷한 사실이었습니다. ... 그 희망사항은 자칫 실현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음을 시인해야 하겠죠. ... 하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더 작은 악'의 문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였어요. 독일에 사는 우리는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보다는 덜 악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양쪽 모두를 겪게 되었죠. 하지만 미국인은 아마 이해를 못할 거라고 했을 때, 제 말뜻은 이게 아니었습니다. 아니죠. 정말 중요한 핵심은 어겁니다. 나치 때문에 죽고 말았던 무고한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253쪽


"제가 만약 1935년에 선서를 거부했더라면, 그건 결국 독일 전역에서 저와 같은 사람 수천수만 명이 선서를 거부했다는 의미였을 겁니다. 이들의 거부는 결국 수백만 명의 마음을 움직였을 거예요. 그랬다면 정권은 전복되었을지도 모르고, 최소한 애초에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겁니다.1935년에 제가 차마 저항할 채비를 갖추지 못햇다는 것이야말로, 독일에서 저와 유사하게 영향력을 지녔거나 또는 영향력을 지닐 잠재력을 지닌 사람 수천 명, 또는 수십만 명도 저와 마찬가지로 저항할 채비를 갖추지 못햇다는 뜻이었어요. 그리하여 이 세상이 상실되었던 겁니다." -255쪽


"제가 '아니오'라고 대답한 첫날까지만 해도, 저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4시간의 여유를 얻어 '다시 생각하는' 사이에, 저는 결국 믿음을 잃었습니다. 그리하여 이후 10년 동안, 저는 산이 아니라 기껏해야 개미탑 하나밖에는 움질일 수 없었던 겁니다." -256쪽


"우리는 '너희 중에 작은 자들'을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 안에서만 찾았어요. 법을 준수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요. 하지만 유대인이나, 집시나, 기타 등등은 아니었죠. 평범한 사람들, 그러니까 '아리아인들' 사이에도 '너희 중에 작은 자들'은 있었으니까요. 수백만 명이나요." -313쪽


히틀러는 자유민이 더듬거리던 노끈을 모조리 칼로 잘라버렸다. 그는 자기 민족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그는 그 문제를 박살내버렸다. 그는 대단한 낭만주의자였다. 나는 자칭 '민주주의자'인 수금원 지몬에게 이렇게 몰어본 적이 있다. 당신은 히틀러의 어떤 면이 그렇게 좋았는냐고 말이다. "아."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의 '어쨌거나' 하는 태도죠. 그러니까 그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내 식대로 하겠다'는 태도 말이예요." -352쪽


만약 미국이 독일인에게는 자유를 '제공할' 수 없다고 판정했다면, 그들은 결국 히틀러가 옳았다고 판정하는 셈이 된다. -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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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정치 - 한나 아렌트의 정치이론과 한국사회
권정우.하승우 지음 / 한티재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 헌법은 그냥 무시해버렸다. 헌법을 개정하거나 새로운 헌법을 만들려는 시도를 나치는 전혀 하지 않았다. 나치는 법적인 수단이나 규제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비공식적인 방법들, 숙청.테러.비밀경찰과 같은 수단을 통해 정국을 장악해 나갔다. 나치는 자신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여기는 순간 숙청을 시작했고 유대인에 대한 테러를 일삼았다. 그리고 상시적으로 비밀경찰은 적들을 만들어냈고, 그 적을 통해 내부의 단결을 강요했다. 그러다 보니 헌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35쪽


이들은 살아 있지만 죽었고, 죽었지만 죽지 못한 사람들이다. 즉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허용되지 않은 자들이다. 수용소에서 인간은 죽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소멸, 절멸의 상태에 처한다. 왜냐하면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42쪽


대중들이 가지는 도피의 욕망은 "살도록 강요받았지만 인간답게 살 수 없도록 만드는 세계에 대한 그들이 내리는 일종의 평결"(<인간의 조건>, 352쪽)이라고 아렌트는 말했다. 대중들이 도피하는 것은 그들이 어리석거나 현실감이 없거나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피만이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들이 정치라는 행위, 즉 결과를 무작정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 참여하고 토론하는 고유한 행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84쪽


아렌트는 "다원성은 같음과 다름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지닌다"(<인간의 조건>, 175쪽)고 말한다. 우선 인간은 지금껏 살았고, 현재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살게 될 그 어떤 누구와도 같지 않은 존재라는 점에서 다르다. 동시에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와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 또한 다원성은 인간이 공통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공통감각이 없다면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과거와 미래의 인간들에 대한 이해 역시 가능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다원성은 말과 행위를 하는 동등한 인간들 속에서 타인과 자신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93쪽


말과 행위를 기본 조건으로 하는 인간의 다원성은 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들어주고 반응해줄 수 있는 이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정치는 바로 이런 다원성에서 시작한다. 공적 영역은 "타인의 현존을 기반으로 자신의 차이성을 말과 행위로 드러내는 공간"(179쪽)이라고 말했다. 아렌트는 설득을 통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정치이며, 인간은 다른 어떤 수단이 아니라 말과 행위를 통해서만 정치적인 존재가 된다고 보았다.-93쪽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 용서로 서로를 해방시켜줌으로써 인간은 다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 내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이를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할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용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극히 인격적인 만남을 전제로 한다. -95쪽


사랑보다는 존중이 용서의 매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존중은 일정한 거리감을 가진다. 나는 그를 존중하지만 그와 일체가 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존중받을 만한 자이기에 그를 인정할 수 있고 용서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96쪽


반면 아렌트에게 약속은 자신을 지배하고 나아가 타인을 지배하는 데에만 의존하는 오래된 정치형식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약속은 지배에 의존하지 않는다. 약속을 한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자유롭다. 약속은 타인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도록 사전에 이루어지는 계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아렌트는 약속을 "인간사의 예측불가능한 측면과 인간이라는 존재를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그대로 둔 채 단순히 수단일 뿐인 약속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이정표를, 예측가능한 섬을 불확실한 바다에 만들어 두는 것"(244쪽)이라고 말한다. -97쪽


아렌트는 자유=안전의 논리에서 다시 자유를 안전에서 분리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안전의 논리는 결국 공간을 분리하는 데 있다. ... 이렇게 타자와 만남의 장소가 상실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공동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타자의 문제는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 되고, 안전은 결국 나 아닌 누군가의 자유를 빼앗는 결과로 이어진다.

문제는 안전을 위해 타인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단지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상실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안전이 가로막고 있는 인간들 사이의 공간은 타자의 자유에 대한 책임을 공유해야만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자유=안전의 논리는 인간에 대한 불신을 기반으로 하며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한 논리였다. 결국 타자의 자유를 빼앗는 것을 묵인하는 것은 나의 자유 상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110쪽


소크라테서의 적들이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했던 주장은 매우 적절했다는 것이다. 다만 "'타락시킨다'는 의미를 잘 이해한다는 조건하에서 그러하다. 여기서 '타락시킨다'는 것은 기존의 의견들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전적으로 거부할 가능성을 가르친다는 것을 의미(<투사를 위한 철학>, 43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락시킨다는 것, 그것은 청년들에게 사회적 규범에 대한 의견을 변화시키는 어떤 수단, 그리고 심지어 원칙의 문제가 중요시될 때 복종을 반란으로 대체하는 어떤 수단을 부여하는 것이다."(43-44쪽) 타락이라 비방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기성질서에 대한 거부, 반란을 내포하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일 수 있다. -191쪽


각자의 생각을 드러내고 자기 의견을 고집한다면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아렌트는 이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타자와 차이 없이 공동체가 어떻게 가능한가? 두 명 이상이 만나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공동체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사는 세상일 뿐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204쪽


사실 1960년 4월항쟁의 불씨를 당겼던 행위자들은 대학생이 아니라 중고등학생과 시민이었다. 이승원의 <4.19혁명과 피해대중>에 따르면, 대학생들의 시위를 촉발시켰던 마산의 시위에서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13명이 사망했는데 중학교 재학생 2명, 중학교 졸업생 2명, 공장 직공 2명, 행상 1명, 고교 재학생 4명, 상인 1명으로 대학생은 한 명도 없다. 대학생은 사회를 바꾸겠다는 시민들의 열정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난 뒤에야 시위에 동참했는데도, 마치 4월항쟁의 주역이 대학생인 것처럼 기록되었다. 기록에서 지워진 이들은 어떤 세상을 꿈꿨을까? 누군가가 자신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결정에 참여하고 싶었을 사람들은 다시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밀려났다.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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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이 권력에 대해 느끼는 공포와 대중들에 대해 권력이 느끼는 공포의 동시성이 좀비의 공포에도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27쪽


인권의 정치성은 국가라는 제도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들 사이의 교류와 연합의 구성적 원리라는 점, 그리고 정당과 같은 정치적 제도의 매개 없이도 직접 국가제도를 변혁하는 인민의 집단적이고 직접적인 행동의 원천적 권리이기도 하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인권의 정치란 인권의 이념들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 가는 집합적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개인들 사이의 교류와 연합을 의식적으로 인권의 이념을 통해 구성해 가는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적 활동이자, 사회의 조직과 운영에 있어서 인권을 핵심적 원리가 되도록 만드는 운동이며, 인권의 이념에 따라 현실의 제도를 변혁해 가는 실천적 행동들이다. -63쪽


나는 오늘날 인권의 정치에 요구되는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권을 탈도덕화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인권이라는 관념에 내재해 있는 전복성과 급진성, 불온성을 복원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68쪽


인간의 권리는 시간의 흐름과 상황의 변화와 무관하게 그 본질적 규정이 유지되는 이데아와 같은 권리가 아니라 정치적 실천이라는 활동에 의해 그 의미가 끊임없이 변경되고 재구성되는 '과정 중에 있는 권리'이며 하나의 원리로 환원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권리들의 다양체를 표시하는 이름이다. -106쪽


오늘날 인권에 대한 비판이 향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인권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라는 질문이 현대 인권비판의 논의를 관통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권이 말하는 그 인간이란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인권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역사에는 반복되고 있다. -122쪽


인간이 가지는 권리의 기원은 출생으로까지 소급되는데, 그 출생부터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곧 그가 국민이라는 사실, 그가 국가라는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태어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근대적 정치질서가 인권선언과 불가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인권이 바로 벌거벗은 삶을 포섭하기 위한 근대 정치의 장치 역할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141쪽


바디우에게 인권이란 "생명과 관련하여(살해와 처형의 공포), 몸과 관련하여(고문, 가혹 행위, 기아의 공포), 문화적 정체성과 관련하여(여자들과 소수자들에 대한 모욕과 공포) 공격받지 않고 학대받지 않을 권리들이다. 즉 인권이란 "악이 아닌 것에의 권리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가 악의 제어인 만큼 인권은 윤리와 그 내포가 사실상 같다. 윤리와 인권은 권력의 정치적 장에서 이렇게 동일화된다. 그리고 그러한 인권-윤리는 정확히 서구 자본주의 승리를 승인하는 하나의 철학적, 정치적 방식이다. -145쪽


무엇보다 정치는 치안에 의해 이루어진 공동체 내의 자리들과 기능의 위계적 분배를 뒤흔드는 행위로서 그것은 ㅁ모든 이의 평등을 입증하는 과정이다. 치안에 의해 자격 없는 자들로 분류된 이들, 능력이 모자란 자들로 규정된 이들도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자들과 평등한 존재임을 입증하는 행위가 바로 정치인 것이다. -160쪽

 

정치란 공동체의 질서 안에서 합의된 몫의 분배체제에 맞서 몫이 없는 자들, 자격 없는 자들이라고 여겨지던 이들이 그 체제의 경계 안으로 '부당하게' 침입하는 불화의 행위이다. -161쪽


"여성들이 단두대로 갈 자격이 있다면 의회로 갈 자격도 있다"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드 구즈의 이러한 언명이 아렌트나 아감벤이 제시하는 인권의 아포리아를 벗어나게 해주는 논리라고 말한다. ... "여성들은 권리선언 덕택에 자신들이 가진 권리가 박탈당했음을 증명해 보링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공적인 행위를 통해서 헌법이 거부했던 권리를 자신들이 가지고 있음을, 자신들의 권리를 행샇ㄹ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일 수 있었다." -167쪽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의 봉기, 또는 심지어 영속적 봉기라는 관념에 준거해야 한다. 이는 인권의 정치가 불평등과 압제에 대항하여 모든 가능한 형태로 봉기하는 사람들의 행위이며, 또한 그러한 정치는 자유 없이 평등 없고 평등 없이 자유 없음을 실천적으로 주장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누구도 그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해방될 수 없지만 또한 누구도 다른 사람들 없이는 해방될 수 없는 것이다." -발리바르, 170쪽


랑시에르가 보기에 불평등이란 사회경제적 자원의 비대칭적 배분 이전에 바로 이런 감각상의 불평등을 의미한다. 타인을 자신의 말을 알이듣는 자, 그의 말을 내가 진지하게 경청해야 하는 자로 감각하지 않는 사태, 혹은 타인의 말을 내가 알아들을 수 없고 내 말이 그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감각하는 사태가 바로 모든 불평등에 전제된 불평등이다. 그런데 아벤티누스 언덕에서는 이러한 불평등 전제가 깨져 버렸다. 귀족은 자신들의 대표를 보내 평민들에게 말을 건네야만 했다. 그리고 평민들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은 평민들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음을 전제해야 가능한 것이었다. 아그리파가 창작한 우화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말이 들려야 한다는 것을 전제"했음을 보여준다. 그 전제가 바로 평등이다. 그 평등이란 "말하고자 함과 듣고자 함보다 앞서는 평등"인 것이다.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항상-이미 내가 말을 건네는 대상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나와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전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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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 사회학(김찬호, 문학과지성사)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은 곧 운명이 된다. - 칼 융




"인간은 행동을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을 약속할 수는 없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맞는 말이다. 가령 일 년 후 어느 날 누군가를 만나기로 약속할 수는 있지만, 당장 내일 아침 그 사람을 어떤 감정으로 대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우리는 감정에 대해 무지하다. 학식이 높은 사람도 자기 감정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경우가 많다. -26p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재 위치를 알아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문제에 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을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고, 스스로 위장을 잘한다. 우리가 편치 않게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잘 다룰 수 있는 감정으로 스스로를 위장한다. 즉 서로 모순되는 수많은 감정들이 한 감정의 가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대화의 심리학 135쪽에서 인용) -27p


감성은 이성보다 더욱 근본적이고 강력하다. 그것은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잉여가 아니라, 중대한 인간사를 좌우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 감정은 의식의 수면 아래서 나를 계속 움직인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나는 누구인가. 그 '타자'의 정체를 탐구함으로써 나다운 삶에 한 발자국씩 다가갈 수 있다. -29p


감정을 사회적인 지평에서 분석하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마음의 습관들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의 덩어리들을 폭넓은 시선으로 조망하면서 상대화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여러 사회의 습속이나 관행을 입체적으로 대조하는 문화인류학적인 렌즈와도 일맥상통한다. 당연시되는 감정이 일정한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마음의 습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정서의 얼개를 비판적인 눈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작업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행복을 도모하는 문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감정이 차원에서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 -36p


침팬지끼리 강간할 수는 있을지언정 성희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강아지를 두렵게 하거나 화나게 할 수는 있다. 질투심을 자극할 수도 있다.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게 할 수도, 기쁨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이 창피함을 느끼도록 만들 수 있을까? -50p


수치심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아가 독립되어 있어야 한다. ...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52p


잠깐 겸연쩍은 심정으로 자신의 태도나 행위에 대해 반성하도록 이끄는 순기능적이고 건설적인 수치심이 있는가 하면, 체면을 완전히 구기고 존재를 송두리째 부정하면서 자존감을 뭉개버리는 역기능적이고 파괴적인 수치심도 있다. 후자의 수치심이 자주 경험될수록 비인간화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55p


'유희'와 '희롱', '노는 것'과 '놀리는 것' 사이의 간격은 의외로 좁다. -57p


상대방이 진정으로 변화하기를 원한다면, 결함을 지적하고 꾸지람을 하되 그가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특히 학교 교육과 자녀 양육에서 그 지혜와 요령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와 관한 좋은 사례가 있다. 한 아이가 교실에서 벌을 받던 중 오줌을 참지 못하고 그만 그 자리에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때 교사가 아이에게 물을 끼얹으면서 "이놈, 벌 받으면서 졸면 어떻게 해!"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학생을 헤아리는 마음이 사뭇 섬세하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는 수치스러운 부분을 지니고 있다. 그 취약함을 서로 인정하면서 타인의 치부를 감싸주는 아량, 수치심을 자극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를 꾀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미덕은 어떻게 함양될 수 있을까. 그것은 개인을 넘어 사회의 과제이기도 하다. -58p


모멸은 '모욕'과 '경멸'(또는 멸시)의 의미가 함께 섞여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모욕은 적나라하게 가해지는 공격적인 언행에 가깝고, 경멸 또는 멸시는 은연중에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에 가깝다. 모욕에는 절대적인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는 반면, 경멸에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모욕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무심코 경멸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모멸은 후자의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멸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라고 할 수 있다. 

... 흥미롭게도 감정심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누군가를 경멸할 때는 심장박동이나 혈압 또는 뇌의 신경전달물질 등 생리적 반응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는 데 별로 힘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시하는 표정이나 비웃는 눈빛, 퉁명스런 말투로도 간단하게 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67p


수치심은 중독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둘 다 단절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하고 겉돌게 만든다. 그리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들며 악순환에 빠져든다. -77p


모멸은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부분을 파괴한다. 그래서 모멸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극도의 적개심으로 무장하기 쉽다. -81p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그 동력은 부러움이라고, 박민규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소설에서 말한다. -89p


('잘산다'의) 한국에서의 실제 뜻은 'rich'이다. 마찬가지로 '못산다'를 영어로 번역하면 'poor'이 된다. 

...'잘사는 것'을 경제적인 부유함으로 등치시키는 어법에서는 한국인의 생활 경험과 가치관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이 언제부터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최근 몇 십 년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의식이 매우 강하게 투영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113p


이렇듯 한 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격변은 전통적인 신분제도를 빠르게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자각적인 청산이 아니었다. 봉건적 신분제에 억눌려 있던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이루어낸 성과도 아니었고, 구체제에 대해 위기의식을 가진 지배세력이 스스로 개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시도가 몇 차례 있었지만 불발로 끝났고, 식민지배와 전쟁 그리고 산업화의 물결이라는 외부의 힘에 의해 낡은 질서가 깨져나갔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권력의 시스템이나 사회구조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거나 논쟁하지 못했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비전을 창조하면서 현실과 맞붙어 싸운 경험이 박약했다. -125p


한국 사회에서는 상해나 살인 등 물리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에는 매우 민감하지만, 무형의 폭력에 대해서는 둔감한 편이다. 오만과 모멸의 사회체제는 그런 무딘 감수성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137p


사회적 결속이 느슨해지고 사적인 영역에서도 친밀한 관계가 어려워지는 상황, 그렇다고 개인주의적 세계관이 형성된 것도 아니어서 타인의 시선에 늘 전전긍긍하는 삶은 모멸감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 얼개는 이러하다. 고립된 개인들이 자기 정체성이 박약한 가운데 남들과의 비교 속에서 행복과 불행, 오만과 콤플렉스 사이의 왕복을 거듭한다. -143p


사람다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과 감각이 어떻게 프로그래밍되어 잇는가를 종종 해부해보아야 한다. 널리 공유되는 상식의 문법과 행동의 원리를 파악해야 한다. 그 문화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지를 되묻고, 문제가 있는 부분은 수정해야 한다. 그 리모델링은 성찰에서 시작된다. 내가 무심코 반복하는 언행이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 타인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관행에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아차리는 감수성이 요구된다. -222p


손상과 기능 제약은 의학적인 과제지만, 핸디캡은 사회적 과제다. 차별하는 제도를 바꿔야 하고 편견에 맞서 싸워야 한다. -245p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관계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억지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다. 내가 못난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수치스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뒷담화를 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신뢰의 공동체가 절실하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의 결점에 너그러우면서 서로를 온전한 인격체로 승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258p


때로는 타인의 모욕을 받으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도 있다. 경멸은 자기 정체를 비춰주는 시선이 될 수 있다. <서준식의 옥중서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기만하면서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2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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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 

- 장자크 루소 저, 박은수 역, 2013년, 올재


가족은 이를테면 정치 사회의 첫 모델이다. 우두머리는 아버지를 닮았고, 국민은 자식을 닮았으며, 다 평등하고 자유롭도록 태어났기에,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밖에는 자신의 자유를 양도하지 않는다. -24쪽

=가족 내에서 구성원은 모두 불평등하지 않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대전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자기 힘을 권리로, 복종을 의무로 바꾸지 않고서는, 가장 강한 자도 늘 주인이 될만큼 강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가장 강한 자의 권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 그러니 힘이 권리를 만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정당한 권력들에밖엔 복종할 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자. -27~28쪽


어떤 사람도 자기 동포에 대한 타고난 권위는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또 힘은 어떤 권리도 낳지 않기 때문에, 약속들만이 사람들 사이의 권위 모두의 바탕으로서 남게 된다. -29쪽

='힘이 권리를 만들지 못한다'의 의미는?


다수결의 법칙 자체가 약속의 소산이어서, 적어도 한 번은 전원 일치가 있었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34쪽


"공동의 힘을 다해 각자의 몸과 재산을 지켜 보호해주고, 저마다가 모든 사람과 결합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해, 전과 다름없이 자유롭도록 해주는 그러한 형식을 찾아낼 것." 사회 계약이 그 해답을 주는 근본 문제란 이런 것이다. -35쪽


헛된 법전이 되지 않기 위해 사회 계약은, 그것만이 다른 약속들에 효력을 줄 수 있는 그러한 약속을, 일반 의지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자는 누구나 다 단체 전체의 강요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것이다. 이는 그가 자유로워지도록 강요당할 것이라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각 '시민'을 조국에 넘겨줌으로써 그를 모든 개인적인 종속으로부터 막아 주는 조건이니까. 정치 기관의 장치와 활동을 낳는 조건이고 시민의 약속들을 합법화시키는 유일한 조건이어서, 이것 없이는 그 약속들이 터무니없는 압제적인 것이 되어 엄청나게 악용되기가 일쑤인 그러한 조건이니까 말이다. -40쪽


사회 계약으로 잃게 되는 것은 그의 타고난 자유와, 그를 유혹하고 그가 얻을 수 있는 것 모두에 대한 무리한 권리다. 사람이 얻게 되는 것은 시민의 자유와 그가 지닌 것 모두에 대한 소유권이다. ... 힘의 경과나 먼저 차지한 자의 권리에 불과한 점유를 확실한 권리증만이 근거가 될 수 있는 소유권과 구별해야만 한다. ... 사람을 정말로 자신의 주인이 되게 해주는 유일한 것, 즉 도덕적 자유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만에서 오는 충동은 종노릇이고 스스로 정한 법에의 복종은 바로 자유이니까. -41쪽

=타고난 자유/(일반의지에 제한 받는) 시민의 자유를 구별, 점유와 소유를 구별


=논의를 '사회 계약'-주권-시민권-토지소유권으로 진행. 왜?


공동체가 개인들의 재산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개인들로부터 빼앗기는커녕, 그 재산의 합법적인 점유를 개인들에게 보증해주어, 횡령을 진짜 권리로, 수익권을 소유권으로 바꾸어줄 따름이라는 사실이다.  ... 같은 토지에 대해 갖는 주권자의 권리와 소유권자의 권리를 구별함으로써 쉽사리 설명이 되는 역설이다. ... 이 기본 계약이, 타고난 평등을 깨뜨리기는커녕 오히려, 자연이 사람들 사이에 마련한 육체적 불평을 도덕적이고 합법적인 평등으로 바꾸어주며, 그래서 힘이나 천분에 있어서는 불평등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 약속에 의해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다 평등해진다는 사실이다. -44쪽


나쁜 정부들 아래서는 이 평등이 허울만의 허망한 것에 불과하다. 가난한 자를 비참 속에, 부자를 횡재 속에 붙들어두는 데 소용될 뿐이다. 실상 법률이란 언제나 가진 자들에게 유리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들에겐 해로운 것이다. 그 결과로 사회 상태는 사람들이 다 얼마씩 갖고 아무도 너무 갖지는 않은 한에서만 사람들에게 유리할 것이다. -44쪽 각주32

=결국 진정한 사회 계약의 실현은 유토피아에서만 가능한 것 아닌가? 대개의 정부는 나쁜 정부 아닌가?


일반 의지의 행사에 지나지 않은 주권이란 결코 양도될 수 없는 것이며, 하나의 집합 존재에 지나지 않은 주권자란 그것 자체에 의해서밖에는 대표될 수 없는 것이라고. 권력은 남에게 전해질 수는 있지만 의지는 그럴 수가 없다. -46쪽


가장 중요한 배려가 자기 보존에 대한 배려라면, 각 부분을 전체에 가장 알맞도록 움직이고 배치하기 위해 국가에서는 보편적이고 강제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 자연이 사람 하나하나에게 그 팔다리 모두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주듯이. 사회 계약도 정치 단체에 그 구성원 모두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주는 것이며, 내가 이미 말했듯이 일반 의지에 이끌리는 이 지배력이 바로 주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이다. ... 저마다가 사회 계약에 의해 내놓는 권력과 재산과 자유 모두가 단지 공동체에 쓰여 필요한 것 모두의 부분일 따름이라는 것은 시인되고 있는 사실이지만, '주권자'만이 그 필요성의 판단자라는 사실도 시인해야 한다. -52쪽


주권 행위란 본래 무엇인가?그것은 윗사람의 아랫사람과의 협약이 아니고 집단의 그 멤버 하하나와의 협약이다. -54쪽


사회적 권리를 해치는 악인은 다 그 죄악 때문에 조국에 대한 반역자, 배신자가 되며 조국의 법을 어김으로써 그 멤버이기를 그만두고, 조국과 싸우게까지도 되는 것이다.이렇게 되면 국가의 보전은 그의 보전과 양립될 수가 없어 어느 쪽이 없어져야 하며, 죄인을 죽일 때는 '시민'으로서보다는 적으로서 죽이는 셈이다. 소송 절차와 재판은 그가 사회 계약을 깨뜨렸다는, 따라서 이미 국가의 멤버가 아니라는 증거이고 선고인 것이다. -57쪽

=전체주의, 국가보안법적 발상이 아닌지... 자유주의 국가관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자유민주주의?


법은 '시민'의 여러 '계급'들을 만들 수 있고, 또 그러한 계급들에 들어갈 자격을 정할 수도 있지만 거기에 들어가도록 누구누구를 지명할 수는 없다. 왕정과 세습을 정할 수는 있어도 왕을 뽑지도 왕가를 지명하지도 못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개별적인 대상에 관계되는 기능 모두는 입법권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60쪽


폭동이 국민을 파괴시킬 수는 있어도 혁명이 국민을 복구시킬 수는 없어, 쇠사슬이 끊어지자마자 국민은 흩어지고 말아 이미 존재도 않게 된다. 앞으로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지배자이지 해방자가 아니다. 자유로운 국민들이여, 이 격언을 명심하라. 자유를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되찾을 수는 결코 없다. -69쪽 


입법의 힘이 늘 평등의 유지를 지향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사물들의 힘(형세)이 늘 평등을 깨뜨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77쪽


정부란 무엇인가? 백성들과 주권자의 상호 연락을 위해 그 사이에 세워진 중간 집단이고 법들의 집행과 시민적인 자유와 정치적인 자유의 유지를 맡은 중간 집단이다. -85쪽


국가는 스스로 존재하고 정부는 주권자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본질적인 차이 -88쪽


민주 정체 또는 민중 정체만큼이나 심하고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려 드는 정체도, 그 형태 유지를 위해 경계와 용기를 더 요구하는 정체도 없기 때문에, 이보다 더 내란과 내분이 일어나기 쉬운 '정체'는 없다는 말을 덧붙여 두자. 더구나 '시민'이 힘과 끈기로 무장하고, 폴란드의 어느 덕 있는 주지사가 국회에서 하던, "나는 평온한 예속보다는 불안스러운 자유를 택한다"는 말을, 평생을 두고 날마다 마음속으로 말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이 정체에 있어서인 것이다. 신들로 된 국민이 있다면 민주 정체로 다스려질 것이다. 이토록 완전한 정부는 사람들에게는 알맞지가 않다. -96쪽


한 마디로 말해서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다스리게 되리라는 점만 확실하다면,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다수를 다스리는 것이 가장 낫고 자연스러운 질서이다. -99쪽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멤버들의 보호와 번영이다. 그럼 그들이 보호되고 번영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표적은 무엇인가? 그들의 수효와 인구이다. -113쪽


정치 생명의 근원은 '주권'에 있다. 입법권은 국가의 심장이고, 행정권은 국가의 뇌수로서 모든 부분을 움직인다. 뇌수는 마비될 수 있지만, 그래도 개인은 살 수 있다. 사람은 바보가 되어도 산다. 그러나 심장이 제 기능을 멈추면 당장에 동물은 죽는다. -118쪽


공무가 '시민들'의 주된 일이기를 그만두고, 시민들이 자기 몸으로보다는 자기 지갑으로 봉사하기를 더 좋아하게 되면, 국가는 이미 망하기 직전에 있다. 전투에 나가야 한다고? 그럼 시민들은 군대에 돈을 치르고 자기 집에 남는다. 회의에 나가야 한다고? 그럼 그들은 대의원들을 임명하고 자기는 집에 남는다. 게으름과 돈 때문에 마침내 시민들은 조국을 노예로 만들려고 군인들을 갖게 되고, 조국을 팔아넘기려고 대표자들을 갖게 된다. -124쪽


영국 국민은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주 잘못된 생각이며, 국회 의원들을 선거하는 동안밖엔 그렇지가 않다. 의원들이 뽑히자마자 국민은 노예이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 자유의 짧은 기간 동안의 자유의 행사를 보면 자유를 잃어 마땅하다. -125쪽


자유는 노예의 뒷받침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양극은 상통한다. 자연 속에 있지 않은 것에는 다 불편이 있게 마련이며, 시민 사회는 더구나 그렇다. 남의 자유를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자기 자유가 간직될 수 없고, 노예가 극도로 노예가 되지 않고서는 시민이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는 그런 딱한 처지들이 시민 사회에는 있다. 스파르타의 처지가 그랬었다. 현대 국민인 여러분들로서는 노예를 갖고 있지 않지만, 여러분이 바로 노예다. -126쪽


국가에는 하나의 계약밖엔 없고, 그것은 결합의 계약이다. 이 계약만으로 다른 계약은 다 베제된다. -129쪽


저마다가 투표로 그것에 대한 자기 의견을 말하고, 표의 계산에서 일반 의지가 표시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 의견과 반대되는 의견이 이길 때는 내가 틀렸다는 사실이, 내가 일반의지라고 본 것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뿐이다.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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