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 사회학(김찬호, 문학과지성사)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은 곧 운명이 된다. - 칼 융




"인간은 행동을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을 약속할 수는 없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맞는 말이다. 가령 일 년 후 어느 날 누군가를 만나기로 약속할 수는 있지만, 당장 내일 아침 그 사람을 어떤 감정으로 대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우리는 감정에 대해 무지하다. 학식이 높은 사람도 자기 감정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경우가 많다. -26p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재 위치를 알아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문제에 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을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고, 스스로 위장을 잘한다. 우리가 편치 않게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잘 다룰 수 있는 감정으로 스스로를 위장한다. 즉 서로 모순되는 수많은 감정들이 한 감정의 가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대화의 심리학 135쪽에서 인용) -27p


감성은 이성보다 더욱 근본적이고 강력하다. 그것은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잉여가 아니라, 중대한 인간사를 좌우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 감정은 의식의 수면 아래서 나를 계속 움직인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나는 누구인가. 그 '타자'의 정체를 탐구함으로써 나다운 삶에 한 발자국씩 다가갈 수 있다. -29p


감정을 사회적인 지평에서 분석하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마음의 습관들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의 덩어리들을 폭넓은 시선으로 조망하면서 상대화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여러 사회의 습속이나 관행을 입체적으로 대조하는 문화인류학적인 렌즈와도 일맥상통한다. 당연시되는 감정이 일정한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마음의 습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정서의 얼개를 비판적인 눈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작업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행복을 도모하는 문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감정이 차원에서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 -36p


침팬지끼리 강간할 수는 있을지언정 성희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강아지를 두렵게 하거나 화나게 할 수는 있다. 질투심을 자극할 수도 있다.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게 할 수도, 기쁨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이 창피함을 느끼도록 만들 수 있을까? -50p


수치심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아가 독립되어 있어야 한다. ...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52p


잠깐 겸연쩍은 심정으로 자신의 태도나 행위에 대해 반성하도록 이끄는 순기능적이고 건설적인 수치심이 있는가 하면, 체면을 완전히 구기고 존재를 송두리째 부정하면서 자존감을 뭉개버리는 역기능적이고 파괴적인 수치심도 있다. 후자의 수치심이 자주 경험될수록 비인간화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55p


'유희'와 '희롱', '노는 것'과 '놀리는 것' 사이의 간격은 의외로 좁다. -57p


상대방이 진정으로 변화하기를 원한다면, 결함을 지적하고 꾸지람을 하되 그가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특히 학교 교육과 자녀 양육에서 그 지혜와 요령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와 관한 좋은 사례가 있다. 한 아이가 교실에서 벌을 받던 중 오줌을 참지 못하고 그만 그 자리에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때 교사가 아이에게 물을 끼얹으면서 "이놈, 벌 받으면서 졸면 어떻게 해!"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학생을 헤아리는 마음이 사뭇 섬세하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는 수치스러운 부분을 지니고 있다. 그 취약함을 서로 인정하면서 타인의 치부를 감싸주는 아량, 수치심을 자극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를 꾀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미덕은 어떻게 함양될 수 있을까. 그것은 개인을 넘어 사회의 과제이기도 하다. -58p


모멸은 '모욕'과 '경멸'(또는 멸시)의 의미가 함께 섞여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모욕은 적나라하게 가해지는 공격적인 언행에 가깝고, 경멸 또는 멸시는 은연중에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에 가깝다. 모욕에는 절대적인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는 반면, 경멸에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모욕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무심코 경멸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모멸은 후자의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멸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라고 할 수 있다. 

... 흥미롭게도 감정심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누군가를 경멸할 때는 심장박동이나 혈압 또는 뇌의 신경전달물질 등 생리적 반응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는 데 별로 힘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시하는 표정이나 비웃는 눈빛, 퉁명스런 말투로도 간단하게 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67p


수치심은 중독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둘 다 단절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하고 겉돌게 만든다. 그리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들며 악순환에 빠져든다. -77p


모멸은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부분을 파괴한다. 그래서 모멸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극도의 적개심으로 무장하기 쉽다. -81p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그 동력은 부러움이라고, 박민규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소설에서 말한다. -89p


('잘산다'의) 한국에서의 실제 뜻은 'rich'이다. 마찬가지로 '못산다'를 영어로 번역하면 'poor'이 된다. 

...'잘사는 것'을 경제적인 부유함으로 등치시키는 어법에서는 한국인의 생활 경험과 가치관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이 언제부터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최근 몇 십 년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의식이 매우 강하게 투영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113p


이렇듯 한 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격변은 전통적인 신분제도를 빠르게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자각적인 청산이 아니었다. 봉건적 신분제에 억눌려 있던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이루어낸 성과도 아니었고, 구체제에 대해 위기의식을 가진 지배세력이 스스로 개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시도가 몇 차례 있었지만 불발로 끝났고, 식민지배와 전쟁 그리고 산업화의 물결이라는 외부의 힘에 의해 낡은 질서가 깨져나갔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권력의 시스템이나 사회구조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거나 논쟁하지 못했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비전을 창조하면서 현실과 맞붙어 싸운 경험이 박약했다. -125p


한국 사회에서는 상해나 살인 등 물리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에는 매우 민감하지만, 무형의 폭력에 대해서는 둔감한 편이다. 오만과 모멸의 사회체제는 그런 무딘 감수성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137p


사회적 결속이 느슨해지고 사적인 영역에서도 친밀한 관계가 어려워지는 상황, 그렇다고 개인주의적 세계관이 형성된 것도 아니어서 타인의 시선에 늘 전전긍긍하는 삶은 모멸감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 얼개는 이러하다. 고립된 개인들이 자기 정체성이 박약한 가운데 남들과의 비교 속에서 행복과 불행, 오만과 콤플렉스 사이의 왕복을 거듭한다. -143p


사람다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과 감각이 어떻게 프로그래밍되어 잇는가를 종종 해부해보아야 한다. 널리 공유되는 상식의 문법과 행동의 원리를 파악해야 한다. 그 문화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지를 되묻고, 문제가 있는 부분은 수정해야 한다. 그 리모델링은 성찰에서 시작된다. 내가 무심코 반복하는 언행이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 타인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관행에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아차리는 감수성이 요구된다. -222p


손상과 기능 제약은 의학적인 과제지만, 핸디캡은 사회적 과제다. 차별하는 제도를 바꿔야 하고 편견에 맞서 싸워야 한다. -245p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관계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억지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다. 내가 못난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수치스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뒷담화를 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신뢰의 공동체가 절실하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의 결점에 너그러우면서 서로를 온전한 인격체로 승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258p


때로는 타인의 모욕을 받으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도 있다. 경멸은 자기 정체를 비춰주는 시선이 될 수 있다. <서준식의 옥중서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기만하면서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2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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