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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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경, 그들을 위한 변명
- 어느 전경 이야기

한 젊은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이는 전투경찰, 전경이다. 지난해 6월 촛불집회에서 쓰러진 여대생의 머리를 군홧발로 무참히 짓밟고 징계를 받은 김 모 상경도, 다시 1년이 뒤 6.10 범국민대회에서 방패 모서리로 달아나는 시민의 뒷머리를 내려찍고 이제 곧 징계를 받게 될 서울경찰청 1기동대 전경도 아니다. 그렇다고 작년 촛불집회 진압을 거부하고 병역거부 선언을 한 뒤 10개월 넘게 수감 중인 이길준 의경 이야기도 아니다.

그는 11대 독자라 군복무 면제 대상이지만 자진 입대하여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전경으로 차출되었고, 상경의 계급장을 달고 촛불집회 진압에 동원되었다. 6월 28일 밤과 29일 새벽.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 그는 시위대에게 폭행을 당해 어금니 2개가 부러지고 뇌진탕으로 쓰러져 빗속에 2시간가량 방치되어 있다가 전의경 부모모임 회원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겼다. 2주 정도 치료를 받은 뒤 퇴원했으나 말이 어눌해지고 악몽과 두통, 단기 기억상실증에 시달리며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부대로 복귀하여 다시 시위현장에 투입되었으나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던 그는 휴가를 나왔다 부대에 복귀하지 않았고, 한 달 가량 거리를 헤매거나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전전하다 결국 검거되어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급성 스트레스 장애는 인정되지만 판단 못할 정신장애는 아니니 처벌받아야 한다는 지엄한 판결이었다.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한국 헌법은 지구상 모든 민주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계엄령이 선포되지 않는 한 군병력을 공공질서 유지와 같은 치안업무에 동원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오로지 한국에서만 수많은 젊은이들이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위해 입대를 하였다가 전경으로 차출되어 치안유지에 동원된다.

전투경찰이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대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은 궁색하기 짝이 없다. 위헌성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전투경찰의 존립근거라 할 수 있는 전투경찰대설치법 1조에 명시하고 있는 전투경찰의 임무, "대간첩작전을 수행하고 치안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이 지금 전의경의 역할이라 우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경찰 스스로도 전의경을 없어질 경우 그 3배에 해당하는 직업경찰이 필요하다며 전투경찰제도 유지를 역설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전의경은 직업경찰의 3배의 업무를 거의 무임금으로 하고 있다는 말인데 이러한 노동을 가리켜 '강제노동'이라고 한다. 한국도 가입한 국제노동기구(ILO)에는 회원국이 비준해야 하는 주요협약 중 ‘강제노동금지에 관한 협약’이 있고 한국은 이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 다름이 아니라 이 협약이 병역의무 이외 다른 노동을 강제노동으로 금지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전투경찰설치법은 9조에서 "공격해야 할 적에 대하여 정당한 사유 없이 공격하지 아니하면 무기 또는 1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전의경이 집회시위의 자유를 행사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대해야 한다고 교육받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경찰청장이 몇 차례나 옷을 더 벗어도 경찰폭력, 과잉진압은 근절되기 힘들 것이다.


전의경제도는 국가범죄이자 직무유기

작년 6월, 여대생을 군홧발로 짓밟은 전경을 당시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밤샘근무로 피로가 누적되어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니 용서해주자"고 했다. 대한문 시민분향소 철거 때도 이번 과잉진압 사건에도 '우발적'이라는 말은 빠지지 않는다. 한편 6월 15일 취임 100일을 맞은 강희락 경찰청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의경에 소중한 아들을 보내신 분들 눈에서 눈물 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며 12억원을 투입해 신형 방석모를 지급하고 물대포, 최루액 등 장비를 적극 사용하겠단다.

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누가 누구를 위로하는가. 진정 심판 받고 징계 받아야 할 이들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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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국회 법사위 있을 때도, 성전환 하는 분들, 소수자들의 권리를 제가 옹호해온 사람인데, 국민 다수가 그렇게 성전환 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난주 MBC <100분 토론> '보수, 진보, 갈등을 넘어 상생으로'에서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의 이야기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은 중도실용이라며 해외순방길에 동행한 소설가 황석영의 행보를 어떻게 보느냐는 방청객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순간 토론장에서는 웃음이 터졌고 인터넷 게시판에는 "역시 토론의 달인" "기발한 비유"라는 찬사가 잇따랐다. 그런데 TV를 보고 있던 성전환자들, 성소수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소수자에 대한 이른바 '진보'의 인식

며칠 뒤 한 트랜스젠더 인권단체는 이 발언에 대해 노 대표의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서는 '왜 국민 다수가 성전환 하는 것은 곤란한가?' 묻고 있다. 국민 다수가 성전환을 하면 곤란하니 성전환자 성별변경 특별법은 안 된다는 것은 노 대표의 맞은편에 앉았던 보수우파들의 18번이었다. 이는 나치의 유대인혐오증, 미국의 매카시즘과 같이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을 조장하여 다수의 이름으로 편견과 차별, 나아가 폭력까지도 합리화하는 동성애혐오증(호모포비아)과 그리 멀지 않은 주장이다. 그런데 진보를 대변하러 나온, 게다가 법안을 직접 국회에 냈던 이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니 당혹스러웠다.

사형제를 폐지했다고 범죄자의 소굴이 된 나라도 없고, 대체복무제를 허용했다고 다수의 젊은이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는 사회도 없듯이 법률 하나 때문에 성전환자가 속출할리 만무하다. 그러니 성전환자의 피해와 고통을 하루빨리 덜어주자. 어쩌면 딱 여기까지였는지 모른다. 문제는 만의 하나 그래서는 곤란하다는 인식 속에 정상과 비정상, 옳고 그름을 나누는 가치판단이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어느 누구에게도 가치관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 견해가 공영방송 시사프로에 공공연히 등장하고 별 일 없이 전파될 때 그것이 마치 상식인양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소수자 문제는 더욱 예민하게 다뤄져야만 한다.

더구나 이 발언은 성전환자, 성소수자의 인권을 주제로 한 자리도 아닌, 한 유명작가의 정치적 행동이 변절인가 아닌가를 답하는 과정에서 툭 튀어나왔다. 누구는 우스갯소리라며 웃어넘겼고 누구는 제대로 된 풍자라며 통쾌해 했고, 다들 즐거웠을 것이다. 난데없이 유명작가를 희화화하는데 동원된 성전환자, 성소수자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한국사회 성소수자들의 현주소

얼마 전 라디오에서 한 토론자가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라는 속담을 꺼내자 사회자가 중간에 개입하여 "이런 비유는 장애인을 비하하는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지적하는 것을 들었다. 이것이 지난해부터 시행된 장애인차별금지법의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소수자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이 진일보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될 법하다.

반면 2007년 말에 차별금지법 논란이 있었다. 법무부가 차별금지법 안을 공개하자 일부 기독교 단체들이 동성애자는 죄인이라며 ‘동성애 확산을 조장하는 차별금지조항을 삭제하라’는 성명을 내는 등 강하게 반발했고 결국 '성적 지향'이 차별금지 사유에서 삭제되었다. 차별을 금지하자는 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것들은 계속 차별하겠다, 차별해야만 한다고 선언을 한 꼴이다. 그리고 지난주 <100분 토론>까지 소수자 인권에서 일보가 아닌 이보, 삼보, 사보 후퇴의 일화들은 너무나 많다.

인권은 좌우이념의 문제,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란 말을 종종 듣는다. 한편 고개를 끄덕이지만 한편으로는 가로젓는다. 동의되는 측면에서 <100분 토론> 사회자 손석희의 책임을 묻고 싶다. 반면 소수자에 대한 입장과 태도가 보수와 진보, 좌와 우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라는 측면에서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의 사과가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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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에 며칠 전에 보낸 글입니다. 오늘아침 기사를 보니, 노회찬 대표가 트랜스젠더 인권활동단체인 '지렁이' 활동가들을 만나 부적절한 비유를 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공개적 입장표명도 준비 중인 모양이군요.  
부적절한 비유를 했지만, 적절한 태도를 취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런데 관련기사 제목이 "노회찬, 성전환자 발언 '구설수'"(레디앙)네요. 이 사건을 그저 말실수로 보는 언론의 시각이 담긴 것 같아 또 한편 씁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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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SHOW)를 하라!"
이제는 식상한 이동통신사의 이 카피는 처음엔 꽤나 도발적이었고 그래서 신선했다. 쇼는 구경거리나 오락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일상에서는 스포츠 경기에서의 헐리우드 액션과 마찬가지로 과장된 몸짓으로 사람들을 속이거나 현혹하는 의미로 더 많이 쓰였다.

장애인을 모욕하는 대통령의 눈물 쇼

장애인의 날을 하루 앞둔 4월19일. 방송사들은 저녁 뉴스에서 이명박 대통령 내외가 홀트 요양원을 찾아 장애인합창단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과 “여러분들을 위로하러 왔는데 우리가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는 대통령의 발언을 전했다. 뿌리깊은 차별에 맞서며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워온 장애인들이 순식간에 위로 받아야 할 불우이웃이 되어버렸다.

‘눈물 쇼'는 전임 대통령이 원조라며 억울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원죄가 있다. 2002년 당시 서울시장 후보였던 그는 지하철역 리프트에서 추락사한 장애인의 빈소를 찾아 유가족에게 위로를 전했다. 하지만 그가 당선된 뒤 장애인 관련 예산은 매년 감소했고 위 사건에 대해서 서울시는 계속 책임을 회피하다가 사법부의 판결이 나고서야 제대로 된 손해배상을 했다. 또한 고속버스터미널역, 이수역, 서울역, 동대문운동장역 등 지하철역에서의 장애인 리프트 추락 사고는 끊이지 않았지만 신규 역사를 제외한 지하철역 엘리베이터 설치는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6년 4월에는 40여 일 동안 노숙농성을 한 중증장애인들이 6시간 넘게 한강대교를 휠체어도 없이 기어가며 시위를 벌인 일도 있다. 그때 서울시는 7천억 원 규모의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건립과 2천억 원이 들어가는 시청사 증개축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명박 당시 시장이 즐겨 찾는 실내테니스장 건축에 무려 42억 원을 지원했음에도 예산부족을 이유로 3억원도 채 안되는 중증장애인을 위한 활동보조서비스를 제도화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정부의 모습도 다를 바 없다. 대선 후보시절 장애인 예산을 OECD 평균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공약했지만 예산은 실질적으로는 감소했고, 400만 장애인 중에 59만 명이 절대 빈곤층임에도 기초생활보장제도 예산까지 삭감하고 있다. 또한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으로 이 업무를 담당해야 할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미 반 토막이 났고 보건복지가족부 장애인권익증진과의 축소 방안은 곧 국무회의에 상정될 예정이다.

대통령의 눈물 쇼가 있은 다음날인 4월20일, 거리에 나선 장애인들은 위로가 아니라 생존권을 요구했다. 장애인은 리프트에서만 목숨을 잃는 것은 아니다. 2007년 충북 옥천의 한 장애인 시설에서는 정신 장애인이 직원에 의해 목 졸라 죽임을 당했다. 어떤 지적장애인은 시설에 나가려다 맞아죽고 한 자폐아동은 정신병원에서 향정신성 의약품 과다복용으로 죽었다. 2006년 김포의 한 시설에서는 몇 년에 걸쳐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불거지기도 했으며 같은 해 경남 함안군에서는 한 장애인이 자기 집에서 얼어죽었다.

장애인은 위로가 아니라 권리를 요구한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집회와 시위를 한 장애인 운동단체 활동가는 검찰로부터 480만 원의 벌금폭탄을 맞았다. 전액을 기부한다는 이명박 대통령 월급의 4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액수이지만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 1급이 한 달에 받는 35만 원의 열 배가 넘는 거액이다. 벌금을 내지 못해 15일 수감생활로 75만 원을 충당하고 나머지는 정식재판을 청구한 뒤 풀려난 그는 4월20일 동대문에서 기습시위를 벌이다 또 다시 연행되었다. 대통령은 그 앞에서 눈물은커녕 눈이라도 깜박할 것인가.
쇼는 오락프로그램만으로도 족하다.  

 

- <미디어오늘> 미디어바로미터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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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9-04-21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을 흘림으로써 결국은 장애인을 타자화시킨거라고 봅니다. 나무처럼님의 의견에 동감해요.

그런데 저기 링크되어 있는건 뭔가요? 눌러봤는데 애매한게 뜨네요.

나무처럼 2009-04-22 17:50   좋아요 0 | URL
미디어오늘에 떠있는 글릉 복사해왔더니... 새로운 상업전략이 아닌가 싶네요. 타자화... 눈물 한 방울로 한 집단, 많은 사람들을 타자화 한다는 것, 그 자체가 폭력이 아닐까 싶어요. 이건 지금 글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저도 경계해야 할 지점이라는 생각도 들고.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마다가스카>라고 하는 애니메이션이 있는데 '뉴욕 동물원'에서 탈출한 동물들이 '마다가스카'라는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인 사자와 얼룩말, 기린 등이 친구로 나옵니다. 동물원에서는 사자에게 끼니때마다 먹음직한 고깃덩어리가 제공되니 별 문제가 없었지만 동물원을 탈출하고 나니 배고픈 사자에게 친구들은 자꾸 먹잇감으로 보이게 됩니다. 우정에 위기가 닥친 거죠. 영화의 해결책은 물고기입니다. 사자의 친구들은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사자의 굶주림을 해결해주고 이들의 관계는 다시 좋아집니다. 
 

그런데 물고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봉변이지요. 당연히 영화 속에서 물고기들은 한 마디의 대사도 없습니다. 말이 없는 존재, 물고기는 그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니 관객들은 슬퍼할 이유도, 불편해야할 까닭도 없습니다. 아마도 물고기가 "사자님, 우리도 당신과 친구하고 싶어요. 제발 잡아먹지 말아요." 한다면 이건 아동용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블랙코미디나 컬트무비가 되었겠지요.

물론 세상은 컬트무비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한국사회는 말하는 물고기들에게 "친구, 이게 다 너희를 위한 일이라니까" 하거나 "물고기는 원래 말을 못하는데 너는 비정상이군", 또는 "상영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만 닥쳐!" 하며 잡아먹어버리니 웬만한 컬트무비보다 더 엽기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존재를 부정당하는 사람들
 

저는 잡지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의 대부분은 이번 호에는 어떤 이야기를 실을 것인지 의논해서 마땅한 사람에게 원고를 부탁하거나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권에 대한 잡지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른바 사회적 약자, 소수자로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대게 언론사 기자들에 의해 편집되어 인용되거나 학자들에 의해 해석되거나 관료들에 의해 통계수치로 기록되어 왔습니다.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밝혀진 촛불만 해도 이러쿵저러쿵 하는 책들은 서점에 널려있지만 처음 그 촛불을 들었던, 2.0세대니 뭐니 하며 극찬을 받았던 청소년들 스스로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아무리 심각한 지경에 처해도 텔레비전에 이주노동자가 직접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본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정치권은 너나할 것 없이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고 떠들지만 정작 그들은 국회 근처에 가지도 못 합니다. 
 

지난해 국방부에서는 불온서적 리스트를 발표해 세간에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잡지사는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같은 성소수자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물론 우리 잡지사가 낸 책입니다)이 왜 명단에서 빠졌는지 모르겠다며 아쉬워했습니다. 아마도 국방부나 검열당국에게 성소수자 문제는 불온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문제일 겁니다. 
 

그러하기에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것, 자기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쩌면 존재의 문제이자 관계를 재구성하는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국방부가 찍는 영화에 출연해 "우리도 대사 한 마디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화에 국방부를 출현시키는 것이 되겠죠. 대사를 줄지 말지는 좀 생각해봐야겠지만 말이죠. 
 

내가 만난 성소수자

솔직히 말하자면 낯가림이 심한 저에게 성소수자와의 만남은 매우 긴장된 일이었습니다. 어깨너머로 주워들었지만 해독할 수 없었던 부치, 팸이며 FtoM, MtoF 등등의 용어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낯선 문화 때문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러다 얼떨결에 동행하게 된 어떤 단체의 워크샵에서는 제가 성적 소수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1박2일 동안의 짧은 경험만으로 소수자의 처지, 동성애자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면 새빨간 거짓말이겠죠. 그러나 이 경험은 성소수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맺어가는 데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AIDS/HIV 감염인 인권캠페인을 함께 하면서, 군대 내 동성애자 문제에 대한 취재를 하면서, 온몸으로 한국사회의 모순과 맞서고 있는 윤가브리엘과 만나고, 호기롭게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국회의원 출사표를 던졌던 최현숙 씨를 인터뷰하면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상상력이란 이런 게 아닐까 느끼기도 하고 되려 제가 에너지를 충전받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일곱이 아니라 열일곱 가지 색깔은 족히 될 것 같은 성소수자들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며칠 전에 직접 본 영화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일본 영화인데 사고로 머리를 다쳐 80분밖에 기억을 못하는 수학자가 나옵니다.  

이 수학자가 사랑하는 수식이라는 것이 '오일러 공식'이라고 아무런 관련성도, 어떠한 규칙도, 끝도 없는 초월수 e와 π에 실체가 없는 가상의 수인 허수 i를 만나면 -1이 된다는 공식입니다(정리를 하자면, eπi = -1). 고립된 생활을 하던 수학자는 한 미혼모와 그녀의 아이를 만나게 되면서, 이들과의 진정한 인간관계를 통해 영화가 끝날 즈음에는 이 공식을 'eπi +1=0'으로 바꾸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는 "모순투성이의 존재에 하나만 더해지면 0이 된다"는 의미라고 하는데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0은 존재하지 않음(無)을 나타내주는 존재이며 규칙에서 벗어난 수이자 무한대 개념이 바로 여기서 출발했다고 하네요. 문득 성소수자의 존재가 0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 동성애자인권연대 웹진 '랑'에 보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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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할인마트 고객만족센터 직원이 우연히 휴대전화를 습득하게 된다. 그는 휴대전화에 저장된 동영상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 주인에게 전화를 돌려받고 싶으면 "전화를 공손하게 받고 절대 반말을 해서는 안 된다"며 이제부터 자기가 시키는 일을 하라고 협박한다.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던 주인은 위험한 요구가 계속되자 마침내 마트 직원을 잡기 위한 추적을 시작한다.   

지난 2월 19일 개봉한 스릴러 영화 <핸드폰> 이야기다. 여기서 마트 직원 역을 맡은 배우 박용우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감정 노동자의 슬픔을 다룬 첫 상업영화"로 봐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성희롱에만 초점을 맞춘 언론의 선정적 보도 


공교롭게도 같은 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콜센터 텔레마케터 여성 비정규직 인권상황 실태조사' 토론회가 열렸다. 많은 언론은 아예 다루지도 않았지만 또 많은 언론은 콜센터 텔레마케터 열 명 중 서너 명이 성희롱을 경험한다는 내용과 함께 그 구체적 사례를 나열해가며 성희롱에 초점을 맞췄다. 성희롱에 대해 회사 측에서 대응 매뉴얼은 고사하고 아무런 사후조치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을 말미에 한두 줄 적어놓았으니 선정적 보도는 아니라고 반론을 펴는 언론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유일하게 토론회를 충실히 보도한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콜센터 상담원과 텔레마케터들은) 고객의 성희롱에 대해서는 의외로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반응이 많았다."고 한다. 왜 그럴까? 면접조사에 참여한 전문가는 "자기최면으로 내성이 생겼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66.1%가 비정규직으로 매우 불안정한 노동 상태에 처해있으며 감정노동으로 인한 심리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고, 관리자로부터 일상적인 감시를 받으며 90% 이상이 업무 수행과 관련한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자기최면은 어쩌면 생존방식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감정노동은 서비스산업 노동 가운데 특히 소비자와 직접 접촉이 많은 노동 형태를 일컫는다. 자신의 감정과 몸의 표현 등을 조절해 고객의 기호에 부응하려고 힘써야만 하는 감정노동의 심각성이 알려진 것은 지난 뉴코아-이랜드 노조 파업을 통해서였다. 반복해서 100원짜리 물건을 사며 고액권을 내밀거나 사용한 물건을 무턱대고 교환해달라는 고객들의 괴롭힘에도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상냥함을 잃지 말아야 하고, 자칫 고객만족센터에 이름이 접수될 경우 쉬는 날 시간외 수당도 없이 나와서 한 시간씩 90도 절을 하며 예절교육을 받아야 하는 대형할인마트 직원의 스트레스는 그 자체로 심각한 폭력이다. 
 

최소한의 성실성만이라도 보여주길
 

마찬가지로 콜센터 상담원이나 텔레마케터들도 성희롱만이 아니라 욕설과 같은 언어폭력, 노래를 불러달라거나 모닝콜을 해달라는 막무가내의 요구에도 전화를 먼저 끊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감정노동은 소비자에 대한 성실성(성실이라고 하면 대개 부지런함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 사전적 의미는 "정성스럽고 참됨"이다)이 관건인데 회사는 이를 임금도 노동조건 개선도 아닌,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노동 감시를 통해서 강제하기 때문이다. 결국 감정 노동자는 소비자에게 당하는 모욕과 회사로부터의 비인격적 대우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고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로 정신과 육체만이 아니라 인간관계까지 위협받는다. 
 

감정 노동자들이 영화 <핸드폰>을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실태조사에 참여했던 콜센터 상담원과 텔레마케터들이 알맹이 빠진 기사를 보고 그래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뤄주었다며 감지덕지하지는 않을 것 같다. 권력이 아닌 사회적 약자를 향한 감정노동까지는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다만 언론들이 최소한의 성실함만이라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 미디어오늘 '미디어바로미터'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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