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할인마트 고객만족센터 직원이 우연히 휴대전화를 습득하게 된다. 그는 휴대전화에 저장된 동영상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 주인에게 전화를 돌려받고 싶으면 "전화를 공손하게 받고 절대 반말을 해서는 안 된다"며 이제부터 자기가 시키는 일을 하라고 협박한다.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던 주인은 위험한 요구가 계속되자 마침내 마트 직원을 잡기 위한 추적을 시작한다.   

지난 2월 19일 개봉한 스릴러 영화 <핸드폰> 이야기다. 여기서 마트 직원 역을 맡은 배우 박용우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감정 노동자의 슬픔을 다룬 첫 상업영화"로 봐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성희롱에만 초점을 맞춘 언론의 선정적 보도 


공교롭게도 같은 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콜센터 텔레마케터 여성 비정규직 인권상황 실태조사' 토론회가 열렸다. 많은 언론은 아예 다루지도 않았지만 또 많은 언론은 콜센터 텔레마케터 열 명 중 서너 명이 성희롱을 경험한다는 내용과 함께 그 구체적 사례를 나열해가며 성희롱에 초점을 맞췄다. 성희롱에 대해 회사 측에서 대응 매뉴얼은 고사하고 아무런 사후조치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을 말미에 한두 줄 적어놓았으니 선정적 보도는 아니라고 반론을 펴는 언론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유일하게 토론회를 충실히 보도한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콜센터 상담원과 텔레마케터들은) 고객의 성희롱에 대해서는 의외로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반응이 많았다."고 한다. 왜 그럴까? 면접조사에 참여한 전문가는 "자기최면으로 내성이 생겼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66.1%가 비정규직으로 매우 불안정한 노동 상태에 처해있으며 감정노동으로 인한 심리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고, 관리자로부터 일상적인 감시를 받으며 90% 이상이 업무 수행과 관련한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자기최면은 어쩌면 생존방식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감정노동은 서비스산업 노동 가운데 특히 소비자와 직접 접촉이 많은 노동 형태를 일컫는다. 자신의 감정과 몸의 표현 등을 조절해 고객의 기호에 부응하려고 힘써야만 하는 감정노동의 심각성이 알려진 것은 지난 뉴코아-이랜드 노조 파업을 통해서였다. 반복해서 100원짜리 물건을 사며 고액권을 내밀거나 사용한 물건을 무턱대고 교환해달라는 고객들의 괴롭힘에도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상냥함을 잃지 말아야 하고, 자칫 고객만족센터에 이름이 접수될 경우 쉬는 날 시간외 수당도 없이 나와서 한 시간씩 90도 절을 하며 예절교육을 받아야 하는 대형할인마트 직원의 스트레스는 그 자체로 심각한 폭력이다. 
 

최소한의 성실성만이라도 보여주길
 

마찬가지로 콜센터 상담원이나 텔레마케터들도 성희롱만이 아니라 욕설과 같은 언어폭력, 노래를 불러달라거나 모닝콜을 해달라는 막무가내의 요구에도 전화를 먼저 끊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감정노동은 소비자에 대한 성실성(성실이라고 하면 대개 부지런함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 사전적 의미는 "정성스럽고 참됨"이다)이 관건인데 회사는 이를 임금도 노동조건 개선도 아닌,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노동 감시를 통해서 강제하기 때문이다. 결국 감정 노동자는 소비자에게 당하는 모욕과 회사로부터의 비인격적 대우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고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로 정신과 육체만이 아니라 인간관계까지 위협받는다. 
 

감정 노동자들이 영화 <핸드폰>을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실태조사에 참여했던 콜센터 상담원과 텔레마케터들이 알맹이 빠진 기사를 보고 그래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뤄주었다며 감지덕지하지는 않을 것 같다. 권력이 아닌 사회적 약자를 향한 감정노동까지는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다만 언론들이 최소한의 성실함만이라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 미디어오늘 '미디어바로미터'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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