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거운 후기> ㅇ님의 댓글에 답합니다



페크님께서 두번씩이나 인용해주신 부분(‘헌신적인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랑은 그 속을 벗겨보면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헌신적 사랑은 이기심의 또다른 가면일 뿐이다)에 대해서는 쉽게 긍정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진지하게 반박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너무 급작스럽게 범주를 넓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타적 사랑이나 숭고한 인류애 등을 생각해 보면 '진정한 사랑'이란 결국 '타인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데까지 승화시키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린 문제라고도 여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러한 중차대하고도 심각한(?) 얘기를 여기서 계속 더 밀고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아무튼 페크님의 이 글을 읽으면서 제 머리속에 떠올랐던 책 속의 여러 구절들이 있어서 두서없이 모아봤습니다. 한편으로는, 찰스 다윈과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한 숱한 과학자뿐 아니라 수많은 심리학자와 철학자들까지도 끊임없이 숙고했던 문제를 제가 여기서 이렇게 어줍잖게 마구 인용해도 좋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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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미리 장만해 놓는 계산

도덕감에도 동일한 종류의 연구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연민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우선 생각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자리에 서서 그들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연민이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들을 돕기보다는 그 비참함을 피하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고통은 당연히 우리가 혐오하는 것이니까. 그러한 연민의 원천에 혐오감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새로운 요소가 지체하지 않고 거기에 결합한다.
라 로쉬푸꼬처럼38)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런 공감이 하나의 계산, <닥쳐올 불행에 대한 약삭빠른 예견>이라 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재난이 불러 일으키는 동정(同情) 속에는, 두려움이라는 것이 아마도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저급한 형태의 연민일 뿐이다.

38) <연민은 자주 타인의 불행에서 보는 우리 스스로의 불행에 대한 감정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불행에 대한 약삭빠른 예견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비슷한 경우에 그들도 우리를 돕게 하기 위함이며, 우리가 그들에게 행하는 봉사는 고유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미리 장만해 놓는 계산이다>

 - 앙리 베르크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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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그의 모습을 빌려

남을 미워하는 것은 단지 그의 모습을 빌려 자신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고 있는 것과 같다. 자신안에 들어 있지 않는 것은 결코 당신을 흥분시키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남을 미워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 『세상을 보는 지혜』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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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이론

이기적 유전자 이론이란 "동물들은 자기 유전자를 퍼뜨리려고 노력한다"는 뜻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그 이론을 정확히 이해한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포함하여 동물들은 유전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다.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자식을 따뜻하고 배부르고 안전하게 키우려고 노력한다. 이기적인 것은 개인의 실제 동기가 아니라 그 개인을 구성한 유전자의 비유적 동기다. 유전자는 동물의 뇌를 배선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퍼뜨리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그 동물들은 자신의 친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따뜻하고 배부르고 안전하게 키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혼동은 사람들의 유전자를 그들의 진정한 자아로 간주하고, 유전자의 동기를 사람들의 가장 깊고 진실하고 무의식적인 동기로 간주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오해하게 되면 모든 사랑은 위선이라는 냉소적이고 잘못된 도덕에 이르기 쉽다. 그것은 개인의 실제적 동기와 유전자의 비유적 동기를 혼동한 결과다. 유전자는 꼭두각시를 부리는 주인이 아니다. 유전자는 뇌와 몸을 만들기 위한 조리법으로 작용한 다음 조용히 물러난다. 유전자는 평행우주에 존재하고, 몸 전체에 흩어져 있으며, 그들만의 의제를 갖고 있다.(616쪽)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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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 원인과 근인과의 혼동

우리의 모든 동기가 이기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은 엘비와 똑같은 혼란에 빠져 있다. 궁극 원인(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의 이유)과 근인('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사는가?')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두 의미는 아주 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혼동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밝힌 바에 따르면, 자연 선택의 논리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은 유전자가 이기적 동기를 가진 행위자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의 비유는 완벽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솔한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성을 품고 있다. 유전자는 비유적 동기-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것-를 가지고 있으며, 유전자에 의해 설계된 유기체는 실제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동기가 아니다. 때로는 유전자의 가장 이기적인 행위가 인간의 뇌에 이타적인 동기-진심에서 우러난, 무조건적인, 뼛속에서 우러나는 헌신성-를 배선한다.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물려줄) 자식에 대한 사랑, (유전적으로 한 배를 탄) 충실한 배우자에 대한 사랑, (신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와 동지에 대한 사랑은 우리 인간의 경우(근인의 차원)에서는 한계와 비난을 초월하지만, 유전자의 경우(궁극적 차원)에서는 이기적 행동에 비유된다.(339쪽)

 - 스티븐 핑커, 『빈서판』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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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행복 vs 전 세계의 행복

속담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그 자신에게는 전 세계일지 몰라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전 세계의 지극히 하찮은 부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비록 그 자신의 행복은 그를 제외한 전 세계의 행복보다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복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의 행복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비록 모든 개인이 각자의 마음속에서는 자기 자신을 모든 인류보다 더 선호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가 다른 사람들을 정면으로 똑바로 쳐다보면서 자신은 이 원칙에 따라서 행동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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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각

도덕감각에 대해 다윈은 J.S.밀이 말한 '도덕감정이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 얻어진 것이라 하여도 그 때문에 본디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를 주로 인용하면서 동물의 사회적 본능과 결부된 천성의 감각임을 설명하고 있다.

'다음 명제는 고도로 개연적이라고 생각된다. 즉 부모와 자식의 애정을 포함해 현저한 사회적 본능이 풍부한 동물이라면, 어떤 동물도 그 지적인 능력이 인간과 같거나 혹은 그에 가까운 정도까지 발달하면 당장 도덕 감각, 혹은 양심을 획득할 것이다.'

 - 다윈, 『종의 기원』中에서(책의 말미에 실린 '다윈의 생애와 사상'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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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Pieta)

그러므로 선의, 사랑, 의협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행하든지 간에, 그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게 한다. 이것들을 움직여 착한 일과 자선 사업을 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남의 고통에 대한 인식'이며, 이것은 자기의 고통으로 이해되고 자기의 고통과 동일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순수한 사람은 그 본성에 따르면 동정이 있는 것이다.

사랑으로 줄어드는 고통이 크든 작든 간에, 채워지지 않은 소망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것은 상관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칸트와는 정반대다. 칸트는 진실한 선과 덕을 추상적인 반성에서, 또 의무의 개념이나 정언 명령의 개념에서 나온 것인 경우에만 참된 선이나 덕이라고 인정하려 하고, 감정으로서 동정은 약점이며 덕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칸트와는 정반대로 아무런 주저함 없이 단순한 개념은 순수한 덕에서는 순수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효력이 없고,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은 동정이며, 동정이 아닌 사랑은 이기심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기심은 에로스(애욕)이고, 동정은 아가페(순수애)다. 이 둘은 빈번하게 혼합이 된다. 순수한 우정에도 언제나 이기심과 동정의 혼합이 있다. 순수한 우정이란 우리의 개성과 잘 맞는 개성을 가진 친구가 있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거의 우정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동정은 그 친구와 진심으로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거나 그 친구를 위해 이기적이 아닌 희생을 바치는 데에서 나타난다. 스피노자도 "호의란 동정에서 생긴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윤리학》제3부, 정리 27) 우리의 이 역설적인 명제를 확증하는 것으로서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 언어의 음정이나 애무의 언어는, 동정의 음정과 완전히 일치함을 알게 된다. 이탈리아어로 동정과 순수한 사랑이 피에타(Pieta)라는 같은 말로 표시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918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4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2고찰> 中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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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1-07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을 미워하는 것은 단지 그의 모습을 빌려 자신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고 있는 것과 같다. 자신안에 들어 있지 않는 것은 결코 당신을 흥분시키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남을 미워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 『세상을 보는 지혜』中에서

이 글을 읽으니 제가 읽은 다음과 같은 글이 생각났어요. 책을 읽다 보면 중복되는 내용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타인을 향한 비난은, 많은 경우 비난하고 있는 사람 자신의 콤플렉스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비난하는 사람의 불행한 심리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비난하는 사람이 오히려 애처롭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 혜민 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

“얘야, 너도 어른이 되어 보면 세상에 화가 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이해하게 될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화를 내게 되는 일이 있어도 그건 결국 자신한테 화를 내는 거란다. 자신이 밉기 때문이지. 바로 그렇게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미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 위기철 저, <아홉살 인생>에서.

꼼꼼하게 정리하신 덕분에 좋은 글을 읽고 갑니다. ^^
좋은 가을 보내세요.

oren 2012-11-07 19:45   좋아요 0 | URL
저도 혜민스님의 저 책 속 구절을 (나중에) 읽으면서 쇼펜하우어의 말과 똑같다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한편으로는, 까마득히 오래전부터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 이미 '네 안에 나 있다'는 관념이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쇼펜하우어 역시 불교와 고대 인도의 여러 경전에 두루 심취했던 철학자였기 때문에 "탓 트왐 아시(Tat twam asi)", 즉 '그것이 너다'라는 '위대한 말'에 그토록 매혹되었던 것 같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