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천절날, 지연이랑 옥찌들이랑 산에 다녀왔다. 전에는 산책로로 갔다왔는데 산을 오르는 맛도 있어 옥찌들에게 오르막길을 보여주며 자신있냐고 물었더니 강한 자신감을 보여줘 산을 타기 시작한지 이주째. 좀 타봤다고 막 앞서가는 옥찌들. 난 지연이와 손을 잡고 천천히 올랐다. 가면서 뭐뭐로 시작하는 글자 놀이를 했는데 응용력과 똥치 좋아하는 옥찌는

-눈눈눈자로 시작하는 말, 눈탱이

-잠잠잠자로 시작하는 말, 잠지

-코코콧자로 시작하는 말, 콧구멍

-똥똥똥자로 시작하는 말, 똥치.

하면서 혼자 신나 어쩔줄 몰라하는데 아직 단어 초보인 민은

-가가가자로 시작하는 말,

토마토.

이래놓고 혼자 자랑스러워 어깨를 으쓱거렸다.

 2.

 힘들어하는 지연이와 손을 잡고 가라니까 자기들 속도에 취해 야마카시처럼 뛰어다니던 옥찌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거다. 그래서 민에게 부탁했더니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도와줘야겠다는 표정으로(이런 표정은 어디서 배우는걸까?) 내려와선 지연이 손을 잡고 가는 민. 지연이와 민은 동갑인데도 괜히 으쓱해졌던지 민이 지연에게 의기양양하게 하는 말했다.

-지연이도 네살, 오빠도 네살

 남자 아이들은 이 오빠란 말이 왜 그리 좋을까.

 한참 산을 오르던 민은 산이 무거워서 자꾸 발이 안 떼진다고 꽤 있어보이는 말을 해줬다.

 3.

오르막길이 다하고 내리막길이 나오자, 그동안 부진했던걸 일소하려는 듯 정신없이 내려가는 지연. 뒤쳐지자 내심 안타까운 옥찌는

-어린애가 왜 저렇게 빨리가.

라며 속상해했다.

4.

 다시 산책로로 나와 걷고 있는데 강아지가 지나가자 민이가 또

-멍멍아, 멍멍아.

이러면서 메롱메롱 하자, 주인한테 미안하기도 해서

-민아, 멍멍이가 지민이 싫나봐. 이리와. 이모랑 같이 가자.

이러니까

옥찌는 냉큼

-너 코파서 싫대.

이러고.

5.

 민이가 웃으며 막 뛰어가는게 예뻐보였던지 어떤 여자분이 민이 어깨에 손을 살짝 대고선 웃자, 민 왈.

-이모, 사람이 만졌어.

그치, 사람이지.

 6.

내가 쓰던 모자를 옥찌가 가져가서 써보더니 나, 이모야 이러니까 민이가 재미있다는 듯이 이모, 이모. 이러면서 자꾸 불러대니까 한마디 안 하고 못배기는 옥찌.

-앤간히 좀 불러라.

7.

 집에 와서 마늘까며 텔레비전을 보는데 신나는 음악이 나와서 막 몸을 흔들어보았다. 옥찌도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며 웨이브 비슷한걸 흉내내는데 귀여워서 웃었더니

-아, 왜 웃어. 이모도 아까 춤출 때 추접시러웠거든.

 이러는데 점점 말조심 해야겠다는 경각심이 생기고야 말았다.

8.

 민과 포도를 먹다가 치우려고 몇개 남은걸 엄마랑 내가 얼른 먹어버렸더니 옥지민, 부아가 잔뜩 나선

-야, 너네만 먹냐!

9.

 무슨 말 끝엔가 이모랑 고모 중에 누가 이쁘냐고 물었더니 단박에 이모!라고 대답하는 옥찌. 한번 더 떠볼려고 너 이모랑 있을때만 그렇게 말하는거지, 너 그럼 고모랑 있을때는 뭐라고 말할건데 라고 물었더니

-고모랑 있을때는 이런 말 안 해.

----------------------------------- 

이 모든걸 틈틈히 적는 날 보는 옥찐

-이모는 뭘 그렇게 적어. 풍신나게.

 아, 정말 이런 말을 다 어디서 배우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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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8-10-05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옥찌들의 말말말은 오늘도 화려하군요. 풍신나게란 말은 처음 들어봐요. (근데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죠?^^) 민이의 오빠 타령(?)은 조금 충격이에요. 아직 사회화되기 전의 아이들이 저런 관습적인(?) 언행을 할 때 충격을 받곤 해요. 어쩌니저쩌니 해도 결국 성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도 들구엽...

Arch 2008-10-05 00:33   좋아요 0 | URL
꼬장배추님^^ 저도 이렇게 불러도? 꽃양배추님! 풍신이란 말 좀 무섭지 않아요?
민이는 형아 누나를 볼때는 또 오빠 언니란 말을 써요. 아무래도 오빠란 말이 주는 뉘앙스 때문이지 전 성은 만들어지는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왠지 주어진다고 하면 체념 비슷한 느낌이 묻어나기도 하고. 이 느낌이 절대로 안 돼. 이런것보다는 적어도 이 정도는.

순오기 2008-10-07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들의 언어습득은 타고나는 본성인듯... 정말 어른들이 쓰는 말을 유효적절하게 구사하는 걸 보면 놀라워요.
풍신나게~~~ㅎㅎㅎㅎ

Arch 2008-10-07 08:57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활용하세요. 추접시럽게와 세트랍니다.
 

 아빠랑 밥을 먹고 있는데

 아빠 딸이라고 나름 생선 발라먹는데 이력이 난 내가 다 먹고 생선 가시를 한쪽에 놨는데 아빠가 제일 맛있는데를 안 먹는다고 퉁을 놓으셨다.

-제일 맛있는데?

-배때기살이 제일 맛있어. 그래서 섬처녀가 육지로 시집을 안 가잖아.

-배때기살 못먹을까봐?

-그렇지.

-뭐 육지에선 생선 목먹가니?

-먹어도 어른들 다 먹으니까 자기한테 돌아올게 없는거지.

-그럼 섬엔 어른들 없가니?

-섬엔 어른들 드시고 나서도 먹을 정도로 생선이 많으니까.

 내 생각이 더딘건지 아빠의 순간 재치가 빠르신건지.

 요즘의 울 아버진 가부장의 무게를 많이 내려놓으신 것만 같다. 예전처럼 민이랑 아웅다웅 하지도 않으시고, 그렇게 화를 많이 내지도 않으신다. 오늘은 술 한잔 하시면서 기분이 좋아서 술이 참 달다는 아주 취하셨을 때 아니면 하시지 않을 말을 꺼내놓으셨다. 뭔데 뭔데. 채근하는 나를 보며 슬쩍 웃으시며 몸이 많이 안 좋아 걱정했는데 건강검진 받아 보고 내 폐가 다른 사람보다 커서 담배를 좀 더 펴도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건강 걱정 하시지 말고, 술 담배 줄이는건 어떠쇼라고 날림 대꾸를 하고 말았다.

 밥을 먹을때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옥찌를 거의 무릎에 앉히다시피해서 옥찌의 어린양을 민이보다 더하게 만드는 울 아빠, 이제 좀 아빠 대하기가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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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10-07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밀한 부녀간이시네요.^^
 
류승완 감독과의 만남 행사 후기

 먼저 조심스럽게 밝혀둘 것은 난 오래 전부터 류승완 감독을 좋아했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건 류승완 감독과의 만남에 대한 얘기에서 사견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혀두는건 '단지 그를 만나기 때문에'란 이유로 그 순간의 모든 의미가 꿈처럼 황홀해질만한건 아니란 소릴 하고 싶어서이다. 그가 우스개소리로 자기 영화를 본 사람보다 무릎팍 도사를 본 사람이 더 많단 사실이 아이러니라고 말했지만 나 역시 그의 영화보다 인간 '류승완'을 더 먼저 봤다. 그래서 다른 작품보다 '다찌마와 리'를 보면서 이 사람, 정말 영화를 만들면서 얼마나 행복할까, 이 영화를 얼마나 만들고 싶었을까란 생각에 장면이나 대사와는 상관없이 킥킥대며 웃었다. 이번 만남은 킥킥댐의 연장선에서, 직접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는 희망에서 신청한 것이었다. 물론 설마 당첨되겠어란, 경품 추천에서도 144번 들고 있으면 143번과 145번이 죄다 불려나가는 저주받은 운이라 가벼운 맘에 신청한 면도 있었다.

 상상마당 6층으로 올라가려고 계단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에는 사람이 밀려있었고, 아직 시작까지는 시간이 남아서 천천히 걸어볼 생각이었다. 계단에 전시된 작품은 오후 햇살을 받아 쨍하고 빛났다. 가픈 숨을 몰아쉬며 6층에 도착. 스텝으로 보이는 분이 관계자냐고 해서 아니라고 했더니 데스크 가서 확인을 받으라고 했다. 안내가 아니라 지시였다. 뭐, 계단 출입이 정신사나울 수도 있지. 알라딘에서 왔다고 말하고선 자리에 앉았다. 파랑색의 등받이는 커녕 엉덩이 간신히 붙일 수 있는 의자. 징조는 스물스물 다가왔다.

 모임의 얼개는 명로진씨의 EBS라디오 프로그램의 공개방송 형식으로 진행이 되었고, 마음산책이 후원하는듯 했다. 사전에 고지받은게 없었으므로 전에 최규석씨의 북콘서트와 비슷할거란 생각이었다. 사전에 질문자를 정하자며 손을 들어보라고 하면서 하는 소리가 녹차 티백이랑 많이 있단 소리였는데 아마도 대부분의 질문자들이 저자의 사인본을 탐을 내는걸 감안할때 꽤 저렴한 제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류승완 감독이 도착하고, 공개방송이 시작되었다. 류승완 감독은 시종일관 진솔한 대답을 해주었다. 그게 이미지 메이킹이라면 짝패에선 접할 수 없었던 느닷없이 발전한 연기로 밖에 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액션키드였지만, 약간 어리둥절해보였다.

질문 몇가지.

Q 어려서부터 감독이 되려면 어떻게 하나요?

A 어렸을때부터 영화를 찍으면 되죠.(우문현답이란 이런거지)

Q 레이몬드 챈들러란 사람이 그런 말을 했죠. 당신이 그런 얘길 해줄거란걸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A 다찌마와리가 아니면 못써먹을 대사죠.(무슨 맥락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Q 책을 내니 영화와는 어떻게 다른가

A 소설 속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Q 직업병이 있다면

A 보통 겪는 일이 아니라면 저장하고 확장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명로진은 자신이 한 영화감독과 야간산행을 한 이야기를 하며 그걸 자기 영화에서 써먹었단 부연설명을 하는데 난 갑자기 바람난 가족의 장면이 생각났다.)

Q 역시 류승범에 관한 질문

A 직업으로서 갖을 수 있는 선을 긋는다. 공식적인 캐스팅은 회사대 회사이므로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좀 더 싸게 한다거나 그런건 없다. 일하는 방식은 크게 차이가 없다. 현장에서의 위계질서를 존중하는 편이다.

(영화를 하는 목적에 대한 질문)

A 없어도 되는 일을 하는거라면 뭔가 더 절박하게 있어야할 이유를 찾게 된다.

Q 1년에 신간이 6만종 이상 쏟아져 나온다. 아무래도 책을 내면서 고민이 많았을 것 같은데(맞는 질문은 아닌 것 같다.)

A 우선은 살림에도 보탬이 되고, 제가 우리 애들 얘기도 쓰려다가 그건 좀 그래서(웃음)

(질문은 거의 명로진씨가 했는데 추가열씨도 축하공연 하면서 짝패를 보면서 충남 보령의 사투리를 완벽하게 재현해냈다고 좋아했다. 류승범 감독도 방청객의 질문에 답하면서 충청도만의 '좋은 말 같기도 하고, 아닌 말 같기도 한' 사투기가 좋다는 소회를 밝혔다.)

 류감독은 홍콩 느와르와 갱스터 영화를 봐오며 개인이 몸부림쳐도 이겨낼 수 없는 비극성에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설렁설렁 일하면서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 레마빈과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 현존하는 배우로는 숀펜.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난 류승완이라면 언젠가는 숀펜과 같이 영화할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도 탐색기간이 꽤 갈 듯하고 맷집을 기르는 자신만의 시간이란 얘기도 했다. 류승완 감독의 작품을 보다보면 통쾌한 신남의 여운이 오래가지 않고 류감독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의 최대치를 끌어내지 못했단 생각이 들곤한다. 아마도 그런 느낌의 한부분을 감독 역시 놓치지 않았을거란 생각이다.

 방청객과의 대화에선 어느 분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본 방청객이 외상후 스트레스처럼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다가 디즈니 영화를 보며 치유했단 소리에 모두들 박장대소했다. 류승완 감독을 볼 생각에 일주일을 설렜다는 한 남자분은 박찬욱 감독의 작품 중 이 영화의 이 상황은 나 같으면 이렇게 바꿔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에 자신이 조감독으로 일했던 삼인조의 몇몇 장면이 그렇다며 크게 모험을 도발하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로드리게즈처럼 아이들도 볼 수 있는 스파이키드같은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냐는 질문에 사실 다찌마와 리를 보는 아이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연령층을 계산할걸 그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고. 스폰지밥 시리즈를 좋아하고, 그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책과 관련된 질문에선 '책을 잘 안 보시는 분은 영화라도 보시고, 책을 잘 보시는 분은 영화도 가끔 보세요.'라고 해서 깔끔한 끝맺음을 보여줬다.

 사실 여기까지는 메모를 해서 간신히 추린 것이고, 류승완 감독과의 만남에서 처음에 언급한 징조에 대해서 얘기를 해볼까 한다.

 꾸준히 신경을 거슬리는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상상마당 상주 스텝들의 소음과 북캐스터인지 마스터인지 모를 분의 인상씀, 방청객을 개의치 않는 그토록 소중한 방송을 하고 있다는 자의식 과잉. 라디오 방송을 듣는 사람 입장에서 소음이 나면 귀에 거슬리는건 이해한다. 그렇다면 공개방송 전에 상상마당측과 사전 조율을 하던가 양해를 구했어야 한다. 얘기 도중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류승완 감독 위쪽의 에어컨을 조절한다고 무려 세번이나 왔다갔다하는데 대체 에어컨 바람을 세게 나오려고 하는건지 끄려는건지 저게 그토록 중요한건지 생각에 정작 류감독의 말은 듣지도 못했다. 그걸 보는 앞서 말한 분은 인상을 쓰며 라디오 스텝을 쳐다보고, 간간히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그럴때마다 스텝들 보라며 눈짓 손짓을 하는 진행자. 그럴거면 차라리 스튜디오 녹음을 하지 왜 굳이 통제도 안 되는 상황에서 방청객에게 불편함을 주며 진행을 할까란 의문이 들었다.

 '니네 류승완 감독 보는데 이 정도도 감수 못해?'란 뻐김이 감지되는건 내가 유독 몰입이 더딘 인간이어서일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분명 팬심을 자극하면서도 팬심은 흔들리지 않을거란 허무맹랑한 계산이 들어있을거란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면 '초대석'인데 어디서 공수해온지 모를 의자에 '거 신선하지 않은 질문 할거면 하지 말라'는 소리나 듣고 있는게 제대로된 방청객 대우인지 묻고 싶다.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거라면 농담의 공감대라도 마련해놓던가. 농담은 뜬금 없었고, 나는 좀 주눅드는 기분으로 다리는 바꿀 때마저 이건 어떤 소리를 내서 진행자들을 불편하게 할까란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세심한 배려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스튜디오 진행이 아니었던만큼 상식적인 선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녹음해야한다는 정도.

 류승완 감독과의 만남은 내용이 형식에 의해서 얼마나 뭉개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흔한 사례로 기억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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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9-30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팬심 훼손하는 민이 망가진 사진 기대하고 온 1인. 아, 나 팬심 훼손당했어요 ㅎㅎ

형식이 전부라고 믿는 것도 문제지만, 형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특히 기본적인 예의에 해당하는 형식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말 싫어요.

Arch 2008-09-30 09:06   좋아요 0 | URL
민이가 요새 어찌나 말도 잘 듣고, 어여쁜지 악의적인 팬심용 사진은 못올리겠지 뭐예요. 으흐흐...가끔 이불에 지도를 그려 울화통 터지게 하지만. 웬디양님 말 들어보니까 그렇게까지 아주, 아니었단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여러모로 아쉬운게 있었죠.
 

 어제는 설겆이감이 너무 많아서 하마터면 돌아가시는줄 알았다. 그래도 쌀뜬물과 밀가루 이리저리 섞어 전어 구운 렌즈 그릇을 닦고 있는데 민이가 입이 쭉 나와선 내게로 왔다. 설겆이하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지라 사소한 훼방마저 귀찮아 훠이훠이 하는데 민 표정이 예사롭지 않아 장갑을 벗고 상황을 살펴보았다.

 아빠는 포도신공이 아닐까 싶게 정신없이 포도를 드시고(민이 보라고 더 그러는 것 같지만) 옥찌는 만들기를 하고. 표면적으로 봤을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아빠께 여쭤보니 민이에게 포도 껍데기와 씨를 다른 그릇에 놓으랬는데 계속 포도 있던 곳에 놔서 먹지 말라고 해서 그런다고 하셨다.(맞다. 아이 대할때 그 사람의 아이성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아빠는 약주를 하셔서 그런지 한층 더 흥분을 해선 '그것도 두번이나 말했는데'를 연발하시고, 민은 나만 보면서 입을 삐쭉댔다. 민에게 물었더니 할아버지가 먹지 말라고 했다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민이 안에는 똑소리나고, 귀엽고, 멋진 에너지가 있지만 그 에너지 건너편엔 자기 생각대로 하려는, 자기 고집을 절대 꺾지 않으려는 측면도 있다. 아마도 그 부분에서 아빠랑 문제가 생겼던 것 같다. 옥찌라면 몇번 장난을 치다가 분위기 봐서 할아버지 말을 들었을텐데 민이는 누군가 강압적으로 자신이 하고싶은걸 못하게 하는 것 때문에 끝까지 버텼을게 분명했다. 다른 일도 아닌 포도껍질 때문에 이러는거라 어이상실이었지만, 민과 울 아빠의 성격상 못그럴 것도 없었다. 민에게 이모가 설겆이 끝나면 얘기하자고 하고선 다시 산더미 속으로 들어가 어쨌든 다 마쳤다. 기름기는 제거가 덜 됐고(어차피 다시 쓸건데?) 생선이 있던 그릇에선 약간 비린내가 났지만(생선 담았으니까 당연한거 아냐?) 끝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민과 앉아서 다시 얘기를 해보니 민은 자꾸 할아버지가 아주 갑자기 포도를 못먹게 했다며 내게 항변을 했다. 아빠는 부엌을 지나가시다가 다시금 '고집피우는 사람은 정말 패버려야해.'라면서 협박인지 장난인지 모를 말로 분위기를 험악하게 하는데 일조하셨다.  민은 내게 가냘픈 지지를 구하고 있었다. 아빠에겐 '민이가 어른이었어도 그랬겠냐'고 일갈했지만, 나도 평소에 민의 외고집이 불편했던지라 좀 냉정하게 민이가 그럴때면 이모도 다른 사람도 힘들다고, 포도껍질 문제가 아니라 블라블라 하고 있는데 민은 부엌의 사각지대로 가선 쭈그려 울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비난과 포도를 마저 못먹은 설움에다 그나마 지지해줄 것을 믿고 있던 이모에게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복받쳤던 모양이다. 가서 달래주고, 다시 포도를 으쌰으쌰 먹으면 됐겠지만 산더미같은 설겆이 뒤끝이라 힘도 없고, 지쳐서 그만 그냥 놔두고 말았다. 한창 응석받이 해줘야할 네살인데. 게다가 민의 고집은 네살 연령의 공통점인데 개인적인 특징으로 쉽게 규정해버리다니.

 민은 이모 밉다고, 제일 밉다고 하는데 우는 민이 너무 예뻐 사진을 찍었다. 옥찌는 분별없이 이러는 이모를 탓하며 민에게 다음부턴 고집 부리지 말고 포도 먹자며 달랬다. 정말 어른에게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은 일들을 아이에겐 하루에도 수천가지, 시시각각 저지르고 있다.

 아빠께 드린 말이 그대로 나한테 적용이 된다. 하루에도 몇번씩 혼내고, 그만큼 미안하다고 말할때면 과연 미안함의 진정성이 있을까, 아이들에겐 전해질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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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민이랑 옥찌랑 손을 잡고 오는데

요녀석 손이 보들거려 괜히 한번 물어봤다.

-민, 손이 참 부드럽네. 아기손은 왜 그럴까?

-이거 누구 손이게

-민이 손이지. 그런데 왜 이렇게 부드러워?

-응. 이서영이 만져줘서.

-응? 이서영이가 민이 좋아해?

-아니.

-그럼 민이가 좋아해?

-똥치. 이모, 이서영 똥치

 부끄러워 똥치를 외치며 저만치 달려가는 민. 며칠 전까지는 옥찌 친구 이름을 틈만 나며 부르면서 이렇게 좋아해란 표시를 내더니 이제는 서영이를? 10시가 되면 잔다던 민은 누나 베개와 함께 뒹굴뒹굴. 내일 가을 소풍을 간다고 설레기라도 하는걸까?

 애들 데리고 어린이집을 나서다가 내일 소풍이니까 오늘 집에 가서 일찍 자야 내일이 빨리 온다던 지희 선생님과 내일 보고 달려오라고 하면 되지 않냐고 하는 옥찌.

 민이가 찰흙과 수수깡으로 만든 김밥을 보여주면 이건 누구거 누구거 이러니까

 지민아. 그런데 김밥이 네개라 누구누구 먹지? 라고 물어봤다. 민은 한참 고민을 했다. 나도 내가 과연 순위 안에 들까가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민은 생각 끝에 아주 명료한 답을 내놨다.

 그럼 가위로 잘라서 먹음되지.

 어린이집 끝나고 잠깐 아이들을 보는데도 몹쓸몸이라 쉬이 피로해지지만 어제와 다르게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면 이모 노릇, 해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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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9-25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씨, 이서영 데려와요

조선인 2008-09-25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위로 잘라서 먹음되지!!!
지민이 최고!!!!

Arch 2008-09-25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데려오면 뭐! 뭐~ ^^ 이서영 못당하실텐데~ 민이가 그러는데 사과도 주고, 난리도 아닌데... 왜 좋은지 물어도 자꾸 모른체하고 말이죠.
조선인님, 그렇죠? 얄팍한 이모맘이 찌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