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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귀는거 비슷하게 만나던 사람과 파트너쉽을 유지하기로 했다. 분리불안 증세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필요한건 몰입이 아니라 적당한 긴장감과 다른 방식의 관계모색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우릴 구원했다.

 사람은 필요에 의해서 상대를 만나기 시작한다. 필요라는 말에 반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결핍이 없는 상태에서 사랑이 생겨날 일은 없을테니까.

 그 당시 난 회사가 끝나고 뭔가를 해야하는데 할게 없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린 만나서 영화를 먹고 밥을 먹고 산책을 했다. 그렇게 계속 만났다.

 우린 서로에게 끌렸을까? 자석같은 접촉 전에 호감이 있었다. 프루스트를 읽는다는 공통점. -나중엔 둘 다 잘 보이고 싶어서 읽은 권수를 과장했단게 드러났다.- 말싸움에서 절대로 지지 않으려는 고집. 수동적인 취미의 달인들. 아마 그의 말많음이 약간 거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에는 신경의 날실들은 저렴하게 포진해있기 마련이다.

 만남을 시작한데 결정적인 이유가 없듯이 헤어짐에도 이유가 없었다. 헤어짐에서 이유를 찾으려는건 실날같긴 하지만 이게 영원한 사랑을 하려는 거였다는 증거를 대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를 만나면서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그를 속이기도 했고, 나를 억누르며 상황을 통제해보기도 했다. 그는 나를 색다른 경험의 세계로 인도했다. 사실 그가 인도했다기 보다는 내가 자진해서 빠져들었다. RPG게임을 하듯이 캐릭터를 매일 재창조하는 작업은 신기하긴 했지만 계속 바꾼다는 행위 자체의 관성 때문에 쉽게 지치기 마련이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난 일부일처제의 달콤한 안락을 사랑해왔다. 그 안에 편입되면 잡생각은 조금 덜어내고 체제 안에선 행복할지 모르겠단 생각을 해왔다. 내가 바람 안 피는 중요한 이유가 상대방도 그렇지 않기를 바란 것처럼 사는거나 연애나 약간 맹추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걸 무슨 수로 믿는단 말인가. 신뢰감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애초에 신뢰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면? 관계 안에서 정의를 새로 세우는 것부터 시작해야할 일이다.

 그에게 전부를 걸지 않아서 좋았다. 그렇다고 애착이 사라지진 않았다. 사랑 느낌이라 불리는 몽실거리는 감각이 옅어진 것도 아니다. 다만 그가 떨어져 있다고 해서 불안하고, 헤어질 생각을 하고 나면 온몸에 힘이 쭉 빠질 정도로 에너지가 사라지진 않았다. 그렇게 난 일센티미터 정도 자랐다.

 이건 통상적으로 보면 내가 그를 덜 사랑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럼 더 사랑하는건 뭘까.

 클리셰처럼 떠오르는 장면. 비오는 날, 그 혹은 그녀의 집 앞에서 처절하게 기다리는 것? 열정을 희생을 관능을 몰입을 친밀감을 서로만의 언어를 자아발견을 정략을 수단을 사랑의 형태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각자의 사랑방식이 있는거란 소리다.

 정치적인 입장이란게 있긴 하지만 애정관계의 큰 틀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할 문제다. 다만 사랑을 종교처럼 어떤 고통을 겪어내고 성취하는, 아프고 힘든 것만이 절대적인 사랑이라는 믿음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고통을 이겨내고 성취하는게 아니다. 물론 아주 진한 추억은 될 수 있겠지만 그게 사랑의 결과를 보장하진 않는다. 사랑의 결과는 누가 보장해주는게 아니다. 회피가 수는 아니겠지만 때론 전환점이 필요한 법이다. 자신이 정해놓은 틀을 고수하다간 그 밥의 그 나물처럼 지겨워진다.

 

* 싱글즈 통산 5번째 보다가 느꼈다. 정준의 애인처럼 이거. 이젠 젊지도 않은 몸뚱아리로 거래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란. 어떤 틀이 유용할때도 있지만 발목을 붙잡는 경우가 더 많다.

 * 생각을 정리하다보면 누군가 아주 오래전에 했던 얘기 같다는 느낌이 든다. 스탈당의 연애론이 그 전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었을 것이고, 사회상이나 역사가 있었을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말들은 아주 오래전에 있어왔던 것처럼 뻔한 수작으로 느껴진다. 이곳의 말과 말을 듣는 귀가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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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7-04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니에님 글 참 잘 써요~~ 말이 없는 듯한데 글발은 굉장해요! ^^
 

 

잡지에서 뒤집어지게 웃긴다는 책 중에 정말 웃긴게 드문건 잡지의 속성상 감탄과 찬사는 기본 베이스로 깔고, 소량의 개인적인 의견만 첨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마 혹시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 책을 집어들게 됐는데 이번 경우는 적절하게 맞아떨어졌다. 이 소설, 몇장 안 읽었는데 사정없이 빠져들게 한다. 시나리오로 작가로 헐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남편에게 이탈리아에서 생활하던 아내가 집을 샀단 통보를 해온다. 의견을 묻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통보. 이제부터 이탈리아 사람들과 스트레스형 미국인이 집을 고치는 문제로 투닥거리를 시작한다. 맛깔나는 문체도 문체지만, 문화적인 차이, 요소요소 녹아나는 웃긴 상황들은 이 책에 홀딱 빠져들게 한다. 타네씨, 농담하지 마세요와 같이 읽으면 더 재미있을 듯. 그나저나 집 고치는 일로도 한권의 책을 낼 수 있는 발상이 놀랍다.

 정희진 선생님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넘어서' 챕터를 읽는 중. 단순하게 사실이나 불편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논의와 사유할 수 있는 점들을 배우고 있다. 특히나 여성을 공간으로 두는 기존의 이분법적인 분류로는 성폭력 문제는 해결 안 된다는 부분,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게 피해자 중심주의 맥락에서는 주장하기 어려운 점은 나에게 시사하는바가 컸다. 그나저나 무슨 책을 읽어도 내 생각 이전에 책을 요약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책을 읽고선 다분히 감정적으로 좋다가 아니라, 의식과 행동의 확장, 삶의 연장선상에서 더 고민해야할 것 같다. 그 시작으로 내 삶에서 가장 고민이 컸던 여성주의 관련 책으로 의식 지도를 그릴 것이다.

 

 

  북새통이란 책자가 있다. 영풍문고나 한길문고에서 배포하는 책소개 책자인데 꼭지나 내용이 탄탄하고, 편집진들의 색깔이 있어서 재미있게 보고 있는 중이다. 북새통에서 소개된 이 책은 미학 오딧세이를 읽으면서 궁금했던 에셔와 괴델, 바흐를 연관한 '이상한 고리'를 설명하고 있다. 읽은건 몇쪽 안 되지만, 의외로 쉬운 문체와 흥미진진한 얘기에 야금야금 아껴가면서 읽는 재미가 있다. 물론 아껴 읽는 타령하기엔 분량이 길지만.

 

 

 

 과학은 잘 모르겠지만, 건축엔 평소에 관심이 있었는데 쉽고 재미있게 과학적인 건축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빌딩숲에 바람이 많은 이유와 전에 가본 소쇄원의 바람 구멍이 연결되면서 다양한 상상력이 생길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일상 속 건축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구해줘는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책은 몇장 읽지도 않았는데 좀 뻔한 느낌이 든다. 몇년 사이에 책 읽는 취향이 급격하게 바뀐건 아닐테고. 구해줘와 너무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인 것 같다. 옆 짝지는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던데. 한번 잡은 책을 끝까지 안 보는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든 다 읽어내려고하니.

 

 

 오즈마님의 페이퍼에서 살짝 눈짓을 준 책. 금세 읽었지만  아마도 여운은 오래갈 것 같다. 독자들 우울하지 말라고 따스한 결론까지 내려주는건 덤.

 

 

 습지생태보고서만큼이나 최고로 좋은 책. 잘할 수 있는게 이런 것 밖에 없다고 말하셨지만, 최규석만큼 사람들이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적절한 수준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앞으로 할 얘기들이 더 궁금해진다. 웬디양님처럼 몇십권을 사서 친구들에게 나눠주면 한밤중에 이 책 진짜다란 문자 받을 확률 99% 이상. 1%는 문자 보내기 싫어하거나 아껴뒀다 읽는 축들.

 

 얼마 전에 책장 찍은 사진을 친구랑 교환한적이 있는데 그 녀석이 한마디 했다.

-이거 중구난방이구만.

 그렇다. 누군가 말해주거나 제목이 좀 야시시한 것(이건 또 뭐) 혹은 서평을 읽고 정말이지 중구난방으로 책을 읽어왔다. 왜 리뷰가 안 써지나 생각해봤는데 충분히 생각하고, 생각을 정리하기 보다는 어떤 느낌이었는지가 다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든다. 앞으론 책읽기에 '체계'란 날개를 달아서 부지런히 파봐야겠다. 아마 그 친구는 중구난방 뱉은 덕에 내 꾀임에 넘어가 책지도 그리기와 지름의 조력자로 자리매김할듯 하다. 참 괜찮은 친구와 책을 읽는다. 요샌 참 행복한 자극 덕분에 기분이 늘 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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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7-04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굴 빨개지는 아이~ㅎㅎㅎ 귀여워용!
최규석 '습지생태보고서' 오늘 도착했어요.ㅎㅎㅎ

Arch 2008-07-04 22:1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께서 최규석씨를 접수했다는건 제가 익히 들어서 압니다.^^

순오기 2008-07-05 07:06   좋아요 0 | URL
저를 비롯한 우리 가족에게 '최규석' 접수당했어요.ㅋㅋㅋ

Arch 2008-07-06 01:05   좋아요 0 | URL
최규석씨 접수 당한 사실을 좋아해야할텐데.^^ 저, 농담한거라구요. 농담인데 땀이 삐질. 저도 최규석교 전파 중입니다.^^
 

 여자를 새로 만나기 시작한 C. 그 전에 헤어진 여자와의 관계를 정리한다며 그녀에게 전화를 했단다. 호기심이 발동한 난 걔가 아직도 널 귀찮게해서 새로운 여자가 생겼단 쐐기를 박으려고 한거냐고 물었다.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살레살레 저으며 그가 말했다. 전에 자신이 빌려줬던 책을 받으려고 전화했다고. 택배로 받는다고 했다며 송장번호가 문자로 왔단 그의 해맑은 얼굴을 대하자 난 아연해지고 말았다.
 

 관계 후에 남는건 정서적인 결핍감이 아니라 일테면 고작 우체국 송장번호란 말인가.
 
 할일없이 CD케이스를 뒤지다 문득 오리엔 탱고의 곡이 생각났다. 경쾌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바이올린 연주와 딱 맞아 떨어지는 피아노 소리가 귓가에 찰랑거렸다. 얼른 찾아서 들어봐야지. 헌데 없다. 한번 꽂힌 물건이 제자리에 없을 때 사람들은 집을 들었다 놓는다. 다행히 난 콩알만한 방만 뒤지면 됐다. 그런데도 없다. 눈먼 우르술라는 물건이 없어진걸 직관으로 찾아냈지만 난 택도 없었다. 젠장 대체 어디 있는거지. CD가 없을거라곤 상상도 안 한 1분 전에 비해 욕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누가 감히 담배는 의지력으로 끊을 수 있다고 했단 말인가. 맘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그 CD를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간적이 있는지 생각해봤다. 아! 전에 만나던 양반에게 들어보라고 준적이...... 그래서 케이스도 안 보였구나. 어수선한 방 한 가운데에서 난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안 만난지 오래됐지만 아무렇지도 않은척 안부를 물은 후에 CD를 받아낼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CD는 옷더미 사이에서 발견됐다. 대관절 얘가 왜 이 틈에 껴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헤어진 양반에게 전화하려던 이유가 일테면 고작 CD때문이었던 내 속을 죽었다 깨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연애를 하고 헤어짐을 겪으면서 사람에 대한 것보다는 물건이나 음악이 더 기억에 남는다. C를 의아하게 볼 이유는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대개는 난 절대로 저렇게 안 한단 장담인데 나도 그보단 음반을 더 먼저 떠올리고 말았으니까. 내 맘이 차가워지고 문화적 감수성이 뛰어나서 약게 말하면 돈이 아까워서 그랬다곤 생각지 않는다. 변덕 심하고 제멋대로인 내 맘처럼 급물살 타는 관계에 몰입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상처같은건 죽어도 받지 않겠단 장담인데 장담의 특성상 무너질 가능성은 농후하다.

 

 관계 후에 남는 것들이라......


 진득한 관계 후의 남는 것들을 떠올리자니 '미국의 송어 낚시'에 나온 애액으로 만든 베개와 포근한 정액 담요가 생각났다. 기분은 솜털인데 선뜻 동의하긴 어렵다.

 
 삭발을 실행에 옮겼을 때 난 이미 연애 중이었다. 남자에게 여자의 머리가 어떤 의미인지는 지금이나 그때나 관심 없었다. 그때 난 화풀이를 해야할데를 찾고 있었다. 뭔가를 때려부수자니 나중에 그걸 치울 생각을 하니 더 화가 뻗쳐 엄두도 못내는 중이었다. 자해를 생각했지만 엄살이 심해 실현 불가능 쪽으로 밀어두고 이리저리 헤아리자니 화는 가시는데 이렇게 넘기자니 껄쩍지근한 상황. 고심 끝에 머리 자르기를 생각했다.


 남자 친구는 처음에 내 말을 듣곤 반신반의했지만 막상 보더니 의외로 담담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체념의 웃음이었다. 그리곤 그냥 내 머릴 받아들였다. 지가 안 받아들임 또 어쩔거야. 녀석은 밤톨같이 까칠한 머릴 손으로 쓱쓱 문지르더니 이젠 예쁜 옷 못입겠네란 얘길했다. 예쁜 옷의 기준이 없던 때였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를 시작으로 옷장은 내가 입을 수 있는 옷과 입을 수 없는 옷으로 나눠졌다. 여성임을 드러내는 옷과 머리 스타일은 맞지 않았다. 그렇게 서툰 구분은 사람들의 시선을 거치면서 짜증과 귀찮음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될대로되란 더 남자같이 주워입고 다니는 오기를 발동시켰다. 
 

 오기의 꼭대기에서 마구잡이로 패악을 부려대던 어느 날, 남자친구가 날 살짝 불러냈다. 녀석은 자신의 입 밖으로 꺼낸 그야말로 예쁜 옷을 선물해줬다. 그 녀석이 그 옷을 산다고 얼마나 궁상을 떨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그 옷을 입곤 그 애 손을 잡고 오랜만에 남자와 여자처럼 데이트를 했다.


 관계 후에 남는건 이젠 촌스러워 더 이상 입고 다닐 수 없는 옷,

 나프탈렌과 함께 옷장 깊숙히 잠든 옷.

 내가 회수하고 싶은건 CD나 책이 아니라 그때의 그 맘이었음을. 제각각의 환상과 뭉글거리는 감정들의 덧칠에도 꽤 그럴듯했던 유치한 관계였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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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6-30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유명 작가가 되어버려서 가볍게 블로그에 올린 글도 바로 화제가 되어버리는 그런 스타 작가의 글을 슬쩍 와서 읽고 가는 느낌이에요. 시니에님의 글의 조각조각들이 예쁘게 박혀요.

Arch 2008-06-30 15:26   좋아요 0 | URL
윽, 마노아님 완전 꿈같은 얘기인걸요. 딱 고정도예요. 조각조각 가끔 예쁜. 다른식의 글쓰기와 내용담기를 생각하려구요. 그래도 마노아님의 칭찬이 참 감사한건 아시죠?

Mephistopheles 2008-06-3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야하다~! 라고 생각하는 저는 "야동중년"인겐가요???

Arch 2008-06-30 21:03   좋아요 0 | URL
메피님^^ 제목이 야한가? 야동중년이라 그러신거 아니에요?
 

<아침> 

 지희가 일어나자마자 내게 다가와선 날 꼭 안아줬다.

-이모 사랑해.

 옥찌가 뭔가 아쉬워서 사랑한단 말을 하는건 아니었지만 잠에서 깨자마자 이러는건 어떤 기분 때문일까 궁금했다.

-나도 지희 사랑해. 그런데 이모를 어떻게 사랑해?

-(옥찌의 눈동자가 위 45도에서 머물다가) 이모가 애기였을때도 사랑해.

 내가 애기였을땐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 녀석이 그때부터 나를 사랑한다니. 갑자기 최규석씨의 '대한민국 원주민'이 생각났다. 울고 있는 꼬마를 다 큰 내가 꼬옥 껴안아주는 장면. 물론 그 책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어렸을때 나라니.

 이번엔 어떤 정의일까?

-지희야, 사랑이 뭔데?

-이모테 사랑해라고 편지를 쓰는 것.

-아,

 지희랑 쭈욱 뭉개고 있다가 밖에서 소리가 들리길래 부스스 일어났다. 부엌에선 엄마가 라디오를 들으며 냉장고에 쓸만한게 있나 보고 있으셨다.

-엄마, 나 뭐할까. 어! 라디오 듣네.

-응, 이만수 방송인데 재미있어.

 이만수는 또 누구냐. 오늘 아침은을 진행하는 이문세. 엄마의 말실수편(나도 만만치가 않다.)은 따로 시간내서 써봐야겠다.

 지희는 밥을 먹고, 그림을 그리다 내게 신중하게 말해줬다.

-이모, 내가 이모랑 할아버지랑 그리는데 목도 그려줄게.

 아, 지희는 이제 사람들 목도 그려넣을 줄 알게됐다. 손이랑 발도 뭉퉁그려지지 않고, 손가락 발가락만 없을 뿐 그림은 꽤 구체적으로 변하고 있다. 아이들이 콩나물처럼 자라고 있다는게 가끔은 이렇게 실감되기도 한다.

 지희랑 지민이랑 좀 놀아주다가 밖에 나갔다.

<낮>

 월명산을 돌까, 버스를 타고 군산을 한바퀴 돌까하다 동네 주위만 어슬렁댔다. 비가 올 것 같았고, 먼곳으로 훌쩍 떠날만큼 기분이 상쾌하진 않았다. 갑자기 쑥차를 먹고싶단 생각에 동네 주변 마트를 둘러봤다. 자판기용에서 개별 포장까지. 가격도 성분도 제각각이었다. 아빠 말로는 쑥차는 따로 분말로 만들어 차를 타도 맛이 안 난다고 하셨다. 맛을 내기 위해서인지 뭔가 요상한게 잔뜩 들어있었다. 다음엔 세곳 중에 물건도 다양하고 가격도 저렴한 A마트에서 성분 잘 확인하고 사야겠다.(이런 얘긴 대체 왜 하는거야. 낮이 너무 빈다 싶어 그만.)

 낮엔 주로 멍때리거나 나무를 그리거나 영화를 봤다. 공산당선언을 읽으려다 눈이 침침해져(꼭 이럴때만) 서문만 황급히 훑고 말았다.

<밤>

 옥찌들은 나갔다와서 피곤했는지 일찍 잠이 들었다. 드라마 열혈팬인 엄마와 동생이 '엄마가 뿔났다'를 보면서 열무 비빔국수에 꽂혀선 급조된 열무 김치와 오이를 공수해 요리 플랜을 짜는데. 아뿔사, 국수가 떨어졌다. 결국 열무 비빔밥을 먹었는데 맛이 아주 그만이었다. 특히 고추장이 매운데다 급조된 친구치곤 열무 김치가 적당히 익어줘서 아주 짜릿할 정도였다.

 엄마랑 동생이 수순대로 주말 드라마를 섭렵하다, 어떤 장면에서 부인이 남편의 외도를 한다는걸 다시 또(징글징글하단 표현이 맞다) 확인하는 장면이 나온다.

엄마 - 야, 저거 결재 서류 보는건데 뭐라고 써있는줄 알아?

동생 - 엄마, 나랑 같이 봤잖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엄마는 드라마 몰입 맥이 끊기셨는지 점 본 얘기를 해주셨다. 굳이 방에서 뭉기적거리는 나까지 친히 불러내서.

엄마 - 신기가 있대.

나 - 응? 누가?

동생 - 가족 모두 다.

나 - 그래?

엄마 - 1500만원 있으면 너 신기 풀어줄 수 있대.

나 - 난 신기 있는줄 모르겠는데. 그런데 점보시는 분은 그걸 어떻게 알았대?

동생 - 엄마가 다 말했대. (가족 각자의 사정 나열)

나- 엄마 내가 점쟁이어도 신기 타령하게 생겼네. 그거 풀려고 1500만원 벌려고 용쓰다 보면 뭐 따로 풀어줄 필요 없이 성공하겠네. 뭐.

엄마 - 신기 풀어주면 돈도 잘 벌고, 성공한다는데.

 엄마는 못내 굿을 못해주는게 아쉽나보다. 점은 화살을 쏴놓고, 과녁을 그리는거라던데. 족집게는 달리 쭉 집어내는게 아니라 대부분 점을 보는 사람이 알아서 구구절절 설명을 해서라고 말을 해도 엄마한텐 소용이 없다는걸 잘 안다. 엄마는 그저 잠시동안의 위안. 이게 결코 아이들이나 아빠가 못나서가 아니라 단지 신기때문일지도 모른단 위안이 필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불행하기 보다는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맘이 놓일지도 모르는 일. 그리고 당분간은 1500만원 때문에 뭔가가 안 풀린다는 생각이 사소한 핑계거리가 될 수도 있으니까. 물론 굿을 벌일 비용이 당장 없다는게 가끔 한방씩 먹일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복채 3만원에 가족 모두 신기타령만 한거면 점을 못봐도 너무 못본다니까 엄마는 그래도 누구네 누구네는 귀신같이 잘됐다며 내게 방귀 한방 날려주셨다. 열무 비빔밥이 독하긴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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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8-06-30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저도 알아요 그 방송. 이 문세가 진행하는 '오늘 아침은'. 프로 제목도 모르고 들었었는데 이 참에 알게 되었네요. 어제도 얼마나 웃으면서 들었는지.
저의 일요일은, 하루 종일 먹고 치우고 먹고 치우고 하는 주부의 일상의 쌤플이었습니다.

순오기 2008-06-30 0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방귀 한방~~~~ ㅎㅎㅎ 압권입니다!

Arch 2008-06-30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치우고 먹고 치우고. 일요일은 왜 이럴까요. 순오기님 방귀뿐은 아니지만 엄마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다 까발려놓곤) 그 정도로만.
 

 오늘 나들이 간다고 한껏 안 부리던 멋을 좀 부려먹고 있는데 어린이집 가려고 준비하던 옥찌가 다가오더니 말했다.

-이모, 치마 입었네. 오~ 이쁜데. 그런데 옷이 검정색이야.

-응, 이쁘지?

-속옷도 검정색인 것 같고.

-(예리하군) 응. 이상해?

-머리도 검정색이야.

-머린 원래 검정색이잖아.

-좀 추접스러운데.

-(패션 센스는 엿바꿔먹은 나로선 난감해져) 응? 뭐가...

-아니, 색을 다 검정색으로 맞추니까 추접스럽다고.

-그래? 그런데 그런건 대체  어디서 배운거야?

-딩동댕 유치원에 다 나왔어.

-희안하네. 유치원 프로에 그런것도 나오나?

-그나저나 좀 추접해.

-가방이랑 신발은 다른색인데 괜찮을까?

-글쎄.

 옥찌는 평소에 치마에는 샌들, 캐쥬얼한 옷에는 운동화를 신을 정도로 패션 감각이 정직하다. 옷색도 얼마나 다르게 맞추려고 하는지 유재석의 3컬러 코디법을 배운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음엔 옥찌의 의견을 물어가며 옷을 입도록 해야겠다. 아니면 최신 패션 트렌드를 알려주는 딩동댕 유치원에서 팁을 얻어야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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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캣 2008-06-25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엽고 직설적인 코디가 옆에 있군요. 전 조언해줄 사람이 없으니 딩동댕 유치원을 시청해야 할까봐요~-.-;;

Arch 2008-06-25 11:17   좋아요 0 | URL
블루캣님 반갑습니다.^^ 코디가 너무 직설적이라 상처도 받고 좀 그래요. 자기 스타일도 웃기면서 칫. 그런데 정말 딩동댕 유치원에 그런 팁이 있는지 의문이라니까요.

hnine 2008-06-25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정말 '딩동댕 유치원'에서 배운 말일까요? ^^
아이들은 원래 원색에 가까운 색들을 좋아하더라구요.
예전에 제 아이 다니던 어린이집 원장님께서도 선생님들에게 유치하더라도 밝은 색 옷을 입으라고 하시던 것이 생각나요. 엄마도 집에서 무채색보다 유채색 옷을 입고 있어야 한다고 저에게 압력을 주시기도~ ^^
즐거운 나들이 하고 오시길 바랍니다~

치니 2008-06-25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처음 와보았는데, 매력에 빠져 거의 20개 정도 되는 글들을 후루룩 다 읽고 갑니다.
자주 올게요 ~

클리오 2008-06-25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본 딩동댕 유치원에서는, 검정색 옷은 더워보인다고 나왔을 뿐이었던 것 같은데.. (다만, 그 검정색 옷을 입었던 캐릭터가 약간 그러해서 비호감이었겠지만요..^^)

Arch 2008-06-27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원색이 아니라서 촌스럽게 느껴졌나봐요. 어머낫. 머릴 염색할 수도 없고 말이죠.ㅋ 치니님 반갑습니다. 읍. 쑥쓰... 클리오님 다시 또 보니까 반가운데요^^ 더워보이는거랑 촌스러운거라.. 연구 좀 해봐야겠어요. 딩동댕 유치원 모니터링을 하실줄이야.^^

클리오 2008-06-27 12:41   좋아요 0 | URL
모니터링이라니요. 아이와 함께 즐기는 수준이 되어버렸답니다. 애들 프로도 보다보니 재밌더군요. ㅎㅎ

도넛공주 2008-06-3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무서워요..흑흑...저희 조카들도 크면 그러려나..

Arch 2008-06-30 12:28   좋아요 0 | URL
도넛공주님 다시 또^^ 반가워요. 별로 안 무서웠는데. 좀 자극적이랬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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