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설겆이감이 너무 많아서 하마터면 돌아가시는줄 알았다. 그래도 쌀뜬물과 밀가루 이리저리 섞어 전어 구운 렌즈 그릇을 닦고 있는데 민이가 입이 쭉 나와선 내게로 왔다. 설겆이하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지라 사소한 훼방마저 귀찮아 훠이훠이 하는데 민 표정이 예사롭지 않아 장갑을 벗고 상황을 살펴보았다.

 아빠는 포도신공이 아닐까 싶게 정신없이 포도를 드시고(민이 보라고 더 그러는 것 같지만) 옥찌는 만들기를 하고. 표면적으로 봤을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아빠께 여쭤보니 민이에게 포도 껍데기와 씨를 다른 그릇에 놓으랬는데 계속 포도 있던 곳에 놔서 먹지 말라고 해서 그런다고 하셨다.(맞다. 아이 대할때 그 사람의 아이성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아빠는 약주를 하셔서 그런지 한층 더 흥분을 해선 '그것도 두번이나 말했는데'를 연발하시고, 민은 나만 보면서 입을 삐쭉댔다. 민에게 물었더니 할아버지가 먹지 말라고 했다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민이 안에는 똑소리나고, 귀엽고, 멋진 에너지가 있지만 그 에너지 건너편엔 자기 생각대로 하려는, 자기 고집을 절대 꺾지 않으려는 측면도 있다. 아마도 그 부분에서 아빠랑 문제가 생겼던 것 같다. 옥찌라면 몇번 장난을 치다가 분위기 봐서 할아버지 말을 들었을텐데 민이는 누군가 강압적으로 자신이 하고싶은걸 못하게 하는 것 때문에 끝까지 버텼을게 분명했다. 다른 일도 아닌 포도껍질 때문에 이러는거라 어이상실이었지만, 민과 울 아빠의 성격상 못그럴 것도 없었다. 민에게 이모가 설겆이 끝나면 얘기하자고 하고선 다시 산더미 속으로 들어가 어쨌든 다 마쳤다. 기름기는 제거가 덜 됐고(어차피 다시 쓸건데?) 생선이 있던 그릇에선 약간 비린내가 났지만(생선 담았으니까 당연한거 아냐?) 끝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민과 앉아서 다시 얘기를 해보니 민은 자꾸 할아버지가 아주 갑자기 포도를 못먹게 했다며 내게 항변을 했다. 아빠는 부엌을 지나가시다가 다시금 '고집피우는 사람은 정말 패버려야해.'라면서 협박인지 장난인지 모를 말로 분위기를 험악하게 하는데 일조하셨다.  민은 내게 가냘픈 지지를 구하고 있었다. 아빠에겐 '민이가 어른이었어도 그랬겠냐'고 일갈했지만, 나도 평소에 민의 외고집이 불편했던지라 좀 냉정하게 민이가 그럴때면 이모도 다른 사람도 힘들다고, 포도껍질 문제가 아니라 블라블라 하고 있는데 민은 부엌의 사각지대로 가선 쭈그려 울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비난과 포도를 마저 못먹은 설움에다 그나마 지지해줄 것을 믿고 있던 이모에게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복받쳤던 모양이다. 가서 달래주고, 다시 포도를 으쌰으쌰 먹으면 됐겠지만 산더미같은 설겆이 뒤끝이라 힘도 없고, 지쳐서 그만 그냥 놔두고 말았다. 한창 응석받이 해줘야할 네살인데. 게다가 민의 고집은 네살 연령의 공통점인데 개인적인 특징으로 쉽게 규정해버리다니.

 민은 이모 밉다고, 제일 밉다고 하는데 우는 민이 너무 예뻐 사진을 찍었다. 옥찌는 분별없이 이러는 이모를 탓하며 민에게 다음부턴 고집 부리지 말고 포도 먹자며 달랬다. 정말 어른에게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은 일들을 아이에겐 하루에도 수천가지, 시시각각 저지르고 있다.

 아빠께 드린 말이 그대로 나한테 적용이 된다. 하루에도 몇번씩 혼내고, 그만큼 미안하다고 말할때면 과연 미안함의 진정성이 있을까, 아이들에겐 전해질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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