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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밤에 영화 '서편제'를 보고야 말았네요. 몇 번 볼 기회가

있었는데 보다가 잠 들거나 못 보거나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기억나는 것은 '지루하다' 또는 '졸리다'였던 것 같습니다.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밤을 새서 봤는데도 졸리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든 것인지, 이 책 때문인지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네요.

 

'계몽(啓蒙)'. '꿈 몽'인 줄 알았더니 '입을 몽', '날릴 몽'

뭐 그러네요. 제 식대로라면 꿈에서 깨다 정도인데 실제로

의미가 더 세네요. '날려버리다' 쯤(?). 하여튼 우리나라에서

계몽주의는 한 때 전국을 강타했었죠. 국민계몽주의 소설인

'상록수'는 누구나 아시잖아요. 여기서 '안다'라는 것은

'읽었다'와는 좀 다른 것이죠. 물론 읽으신 분들이 많으시리라

생각되지만요. 어쨌든 계몽주의에 대해서 뭐 크게 그렇게

나쁜 인상은 없었으나, 이 책에서는 엄청 뭐라고 하시네요.

계몽주의를 이루었던 진화론(즉 자연과학으로써의 진화론이

아닌 정치사회적으로 약간 왜곡된 진화론), 민족의 탄생,

기독교의 영향, 우리의 대표적 정서로 자리매김한 '한(恨)'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개념들이죠. 이제 100년 조금 넘었다네요.

이런 개념이 생긴지 말이죠. 그것이 '전통'이 된 것이죠.

반 만 년 역사를 훑고 지나온 것보다 더 강하게 말이죠.

 

달라이 라마가 말했다는 티벳족에 관한 설명이 인상에

남습니다. 티벳족은 정말 극한 상황을 빼고는 항상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는다고 하네요. 더불어 저는 우리 나라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도 고생했다면 좀 했다고 볼 수 있는데

늘 풍자와 해학으로 대표되는 그 특유의 여유를 보여왔다고

생각되는데 말이죠. 한 일본인의 이론으로 촉발된 정서인

'한'이 대표적 이미지가 되었다니...

 

이 책을 읽고 '서편제'를 보니 좀 달리 보이는 것 같습니다.

질펀한 대사들도 좀 들어오고, 졸리지도 않고, 예전에

못 느꼈던 재미도 느끼고요. 그러나 좀 씁쓸함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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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글날이네요. 그것도 모르고 그냥 10월이려니

했는데 어쩐지 한글 관련 책이나 기사가 자주 보이더라구요.

덕분에 <B끕 언어> 관련해서도 한겨레 기사에 실렸네요.

정확히는 저자인 권희린 선생님 인터뷰가 실린 건데,

기자님은 책제목도 실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괄호 안에 네시간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과정에서 제목이

누락된 것 아닌가 하네요.^^;;;

 

어떤 매체든 꼭 한글날만이 아니라 1년 365일이든 주 1회든

기획 기사든 칼럼이든 한글에 관련해서 또는 말 습관에 관해서

지속적으로 실는 게 어떨까 합니다. 그 즈음 해서 전 언론에서

그 때만 다룰 것이 아니고 말이죠. 교육 단체에서도 평소에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잘 몰라 함부로 말 할 수는 없지만,

기사에 실린 선생님들처럼 평소에 관심을 두면 어떨까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꼭 때만 되면 몰랐다는 듯이, 정말 심각

하다는 듯이 기사가 쏟아지니까 말이죠. 어쩌면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생각하게도 됩니다.

 

어느 덧 1년이 지나 화제가 되었던 책을 선생님 소식과

더불어 다시 유력 일간지에서 보게 되니 반갑고 감사합니다.

하여튼 <B끕 언어>가 한글에 대해서도 비속어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활용되기를 바랍니다.

욕심일까요?

 

2014.10.07 한겨레 기사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6585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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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없다'라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거의 치매에 가까운

기억력으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쨌든 '현재'라는 찰나적 시간을 인식하는 순간 과거가 되버리므로

과거와 미래만이 존재할 뿐.

 

같은 이유로 톨스토이는 반대의 결과를 얘기합니다.

과거는 흘러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관계로

우리는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죠.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고

열심히 현재를 살아가자는 말이죠. 그렇게 열심히 살다보면

죽음이 다가옵니다. 여한이 없기에 두려움도 없습니다.

어쩌면 새로운 시작이기에 가슴이 뛰는 경험도...(너무 갔나요??)

 

이렇듯 책은 인생 성찰에 관한 아포리즘으로 되어 있습니다.

식상할 수도 있으나 독자의 처한 상황, 환경, 나이, 생각에 따라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진리는 생각보다 단순하다는 것을

느끼는 요즘이기 때문이죠.

사랑하라, 지금 현재를 즐겨라, 죽음은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많이 듣고 많이 읽은 구절들입니다. 어느 때는 구닥다리 격언들처럼

들리지만, 어느 순간 매우 공감되는 문구이기도 하지요.

 

깨달음이란 어쩌면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알았던 것을 새롭게 인식되어지는 것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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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출판도 다른 문화예술처럼 기부나 정부지원,

기업보조, 스폰서 등으로 연명해야 할 때가 오는 건

아닌지 합니다. 지금도 출판 펀딩이나 정부지원이

있긴 합니다만, 일부의 혜택일뿐이고 기업후원은

자비출판 아니면 전무하다고 할 수 있죠.

하긴 우리의 영웅 박태환 선수도 홀로서기 하는 판에

출판이야..뭐.. 요즘의 출판을 이끌어가는 것이 그래도

상업출판인데 외부지원 운운하는 것도 좀 기분이 좋지는

않죠. 그래도 살아야하고 유지되어야 하는 산업이기에..

그냥 그렇다는 것이죠.

 

 

19세기 러시아는 명망있거나, 전도가 유망한 예술인 즉 작가, 배우, 화가 등의

성장에 후견인의 영향력이 컸던 것 같습니다. 물론 유럽도 그랬고, 척박하지만

우리의 과거도 그랬던 것 같네요. 근데 좀 음성적이긴 하네요. 어쨌든 우리가

아는 내로라하는 러시아 작가들이 이 시대에 포진되어 있기에 부러워서 말이죠.

푸쉬킨,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체홉. 이들이 다 아닌가.

이들은 당대의 작가이며, 역사가이며, 사상가이며..뭐 시대의 구루들이죠.

 

요즘 우리의 문학은 뭘까?를 생각케 하는 책이였습니다. 저는 출판쟁이니까

요즘의 출판은 뭘까?를 생각케 하기도 하지요. 한때는 우리도 시대를 선도하고

사상을 최일선에서 알리고, 사람들에게 생각할거리를 제공하는 그런 역할을

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19세기의 저들처럼 말이죠. 현재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사명과 소명을 다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죠. 뭐라 답하기 궁색합니다.

마음 한켠에는 '그래도 뭐..'라는 생각도 있지만 딱히 탐탁치 못하기 때문이죠.

 

남의 탓입니까?

내 탓이지요. 스스로를 출판쟁이라 일컫는..

제가 못난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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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연다는 것이 뭘까요?

인간은 누구나 관계를 맺고 삽니다. 그것이 인생이고 삶이지요.

그러니까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관계 맺기 아닌가 합니다.

로빈슨크루소의 경우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관계를

맺을 수 없는 특수한 경우는 제외해야 겠죠.


그렇다면 관계가 무엇인지가 궁금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말이죠. 관계란 무엇일까요? 내가 로빈슨이라면 뭘 할수

있을까요? 먼저 살아야 하니까 먹을 것을 찾을 것 같네요.

입는 것과 자는 것은 그 다음인 것이죠. 먹을 것이 안정적으로

주어지면 의와 주가 다음 당면 과제로 떠오를 것입니다.
아이고,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네요.

편하게 살아야 하니까요. 어쨌든 지금은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 이조차도 관계의 시작

이라고 생각합니다. 맨손으로 무엇을 잡든가 취하든가 해야

되잖아요. 그것이 관계인 겁니다. 나와 먹을 것과의 관계.

그런데 산다는 것은 단지 먹고 사는 것 가지고는 만족스럽지 못한 것

같습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입어야 하고 자야 하시까요. 더 나아가서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잘 자야 합니다. 인간의 관계는 이 '더'가

항상 개입되는 것 같습니다. 욕망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관계를

'더'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진정, 진심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고 싶어집니다. 그냥요.

속이는 것은 진정성이 없습니다. 내가 올바르다면 그 진정성을

상대방이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관계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연다는 것은 나의 진정성이 '표현'되야 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성은 진심입니다. 다른 말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네요. 밑바탕에 사랑이 있어야 관계가 튼튼해 진다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연다'라는 것은 타인에 대한,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문제는 이 '사랑'이

말처럼 쉽지 않다라는 것이죠. 정말 그것이 문제네요.

식상한 결론이네요.

 

어쩌면 인생이 식상한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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